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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단강에서 귀래로 나가다 보면 지둔이라는 마을이 있다. 용암을 지나 세포 가기 전.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띄게 뾰족하게 서 있는 마을이다. 전에 못 보던 돌탑 하나가 지둔리 신작로 초입에 세워졌다. 마을마다 동네 이름을 돌에 새겨 세워놓는 것이 얼마 전부터 시작됐는데, 다른 마을과는 달리 지둔에는 지둔리라 새긴 돌 위에 커다란 돌을 하나 더 얹어 커다란 글씨를 새겨 놓았다.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까맣게 새겨진 글씨는 오가며 볼 때마다 함성처럼 전해져 온다. 글씨가 돌에서 떨어져 나와 환청처럼 함성으로 들려져 온다. 그러나 그건 희망의 함성이 아니라 절망스런 절규, 눈물과 절망이 모여 검은 글씨로 새겨졌을 뿐이다. 작은 돌 위에 새겨놓은 절박한 절규,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 (1992년) 2021. 2. 24.
어느 날 밤 늦은밤,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본다. 별들의 잔치, 정말 별들은 ‘고함치며 뛰어내리는 싸락눈’ 같이 하늘 가득했다. 맑고 밝게 빛나는 별들의 아우성. 별자리들은 저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옆자리 별들은 그 이야기 귀담아 듣느라 모두들 눈빛이 총총했다. 그들 사이로 은하가 굽이쳐 흘렀다. 넓고 깊은 은빛 강물, 파르스름한 물결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온 은하는 뒷동산 떡갈나무 숲 사이로 사라졌다. 이따금씩 하늘을 긋는 별똥별들의 눈부신 질주, 당신의 기쁨을 위해선 난 스러져도 좋아요.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남은 이들의 기쁨을 바라 찬란한 몸으로 단숨에 불꽃이 되는, 망설임 없는 별똥별들의 순연한 아름다움! 자리에 누워 밤하늘별을 보다 한없이 작아지는, 그러다 어느덧 나 또한 .. 2021. 2. 23.
창(窓) 단강에서 사는 내게 단강은 하나의 창(窓) 단강을 통해 나는 하늘과 세상을 본다. 맑기를 따뜻하기를 이따금씩 먼지 낀 창을 닦으며 그렇게 빈다. 창을 닦는 것은 하늘을 닦는 것, 세상을 닦는 것 맑고 따뜻해 깊은 하늘 맑게 보기를 넓은 세상 따뜻하게 보기를, 오늘도 나는 나의 창을 닦으며 조용히 빈다. - (1994년) 2021. 2. 22.
고맙습니다 작고 후미진 마을 작은 예배당을 섬기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다들 떠난 곳에 외롭게 남아 씨 뿌리는 사람들 가난하고 지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과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 땅의 아픔 감싸기엔 내 사랑과 믿음 턱없이 모자랍니다. 힘들다가 외롭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를 이곳에서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그중 당신과 가까운 곳, 여기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 (1992년) 2021. 2. 21.
퍼런 날 이웃집 변관수 할아버지는 두고 두고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허리는 다 꼬부라진 노인이 당신의 농사일을 꾸려나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어느 샌지 난 숨이 막혀옵니다. 노인 혼자 힘으로는 엄두가 안 나 보이는 일을 할아버지는 묵묵히 합니다. 논일, 밭일, 할아버지의 작고 야윈 몸으로는 감히 상대가 안 될 일감입니다. 씨 뿌리고, 김매고, 돌 치워내고, 비료 주고, 논둑 밭둑 풀을 깎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하고, 세월이 내게 숨을 허락하는 한 내 일 내가 해야지, 지칠 것도 질릴 것도 없이 할아버진 언제나 자기걸음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뙤약볕 쏟아지면 그 볕 다 맞고, 어느 것도 논과 밭에서 할아버지를 떼 놓을 것이 없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켜켜 가슴에 쌓였을 답답함과.. 2021. 2. 20.
쓰러지는 법 '요즘 나는 눕기보단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고 한 이는 시인 황동규였을 게다. 그는 어떤 경험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짧은 말 한마디로 표현되는 어려운 경험. - (1992년) 2021. 2. 19.
단호한 물러섬 제 새끼들을 돌볼 때 정말 헌신적으로 인상 깊게 돌보던 어미닭의 태도가 어느 날부터인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다급한 목소리로 병아리들을 제 날개 아래 모으고, 먹을 게 있으면 새끼부터 먹게 하던 어미닭이었는데, 웬일인지 병아리들이 가까이 올라치면 매정하게 쪼아 물리치곤 한다. 어쩌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이야길 들은 집사님이 “뗄 때가 돼서 그래요.” 한다. 병아리가 깨어나 얼마큼 크게 되면 어미닭이 새끼들을 떼려 그리한다는 것이다. 어미닭의 단호한 물러섬.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명한 한 표정이었다. - (1992년) 2021. 2. 18.
어떤 선생님 -1989년 9월 7일. 목요일. 실내화를 안 가지고 학교에 갔다. 빈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간 것이다. 맨발로 교실에 있었다. 규덕이 보고 실내화를 가지고 오라고 전화를 했는데도 규덕이는 실내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학교에서 계속 맨발로 지냈다. 집에 와서 물어보니 학교에 가지고 왔는데 잊어버리고 나한테 안 준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챙겨야지. -그렇게도 정신이 없었니? 6.25땐 아기를 업고 간다는 게 베개를 업고 피난을 간 사람도 있었다더라.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 규애가 연필로 쓴 일기 밑에는 빨간색 글씨의 짧은 글들이 있었다. 물으니 담임선생님께서 써 주시는 것이란다. 반 아이들 일기도 마찬가지란다. 흔희 ‘검’자 도장을 찍어 주는 게 예사인줄 알았는데 그 선생님은 달랐다. 규애의 허.. 2021. 2. 17.
때 지난 빛 ‘별빛을 우러러 보았을 때 그 별은 이미 죽어있을 지도 모른답니다!’ 한겨레신문 한 귀퉁이, 늘 그만한 크기로 같은 책을 고집스레 소개하는 , 짧게 짧게 실리는 글들이 늘 시선을 끌었는데 며칠 전에 만난 글은 위와 같았다. 기쁨이나 슬픔, 그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다른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때론 그것이 때 지난 것일 수도 있다는, 어쩜 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아픈 지적. - (1992년) 2021. 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