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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60

멀리서 온 소포 Australia Yoo KYONG HAHM (오스트레일리아 함유경). 전혀 낯선 곳, 낯선 이로부터 온 소포를 혹 잘못 배달된 것 아닌가 거듭 수신자 이름을 확인하며 받았다. 커다란 상자였다. 분명 수신자란엔 '단강교회 한희철'이라 쓰여 있었다.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을 때 상자 안에는 커피와 크림, 초콜릿 등 다과가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연은 없었다. 궁금증은 다음날 풀렸다. 역시 항공우편으로 온 편지에는 전날 받아 든 소포에 대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머나 먼 이국땅에서 한 외진 마을로 부쳐온 쉽지 않은 정. 예배를 드리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다과회를 갖는 자리엔 낯설고 의아한, 그러나 무엇보다 따뜻한 감동이 흐르고 있었다. 이.. 2021. 3. 1.
봄 들판 들판에 가 보았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 질러 아지랑이처럼 달렸네 들판에 가 보았네 조용한 푸름 번지고 있었네 하늘이 땅에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있었네 들판에 가 보았네 언덕 위 한 그루 나무처럼 섰을 때 불어가는 바람 바람 혹은 나무 어느 샌지 나는 아무 것이어도 좋았네. - (1995년) 2021. 2. 26.
사랑하며 사람 사랑하며 이야기 사랑하며 바람과 들꽃과 비 사랑하며 눈물과 웃음 사랑하며 주어진 길 가게 하소서 두려움 없이 두리번거림 없이 - (1992년) 2021. 2. 25.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단강에서 귀래로 나가다 보면 지둔이라는 마을이 있다. 용암을 지나 세포 가기 전.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띄게 뾰족하게 서 있는 마을이다. 전에 못 보던 돌탑 하나가 지둔리 신작로 초입에 세워졌다. 마을마다 동네 이름을 돌에 새겨 세워놓는 것이 얼마 전부터 시작됐는데, 다른 마을과는 달리 지둔에는 지둔리라 새긴 돌 위에 커다란 돌을 하나 더 얹어 커다란 글씨를 새겨 놓았다.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까맣게 새겨진 글씨는 오가며 볼 때마다 함성처럼 전해져 온다. 글씨가 돌에서 떨어져 나와 환청처럼 함성으로 들려져 온다. 그러나 그건 희망의 함성이 아니라 절망스런 절규, 눈물과 절망이 모여 검은 글씨로 새겨졌을 뿐이다. 작은 돌 위에 새겨놓은 절박한 절규,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 (1992년) 2021. 2. 24.
어느 날 밤 늦은밤,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본다. 별들의 잔치, 정말 별들은 ‘고함치며 뛰어내리는 싸락눈’ 같이 하늘 가득했다. 맑고 밝게 빛나는 별들의 아우성. 별자리들은 저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옆자리 별들은 그 이야기 귀담아 듣느라 모두들 눈빛이 총총했다. 그들 사이로 은하가 굽이쳐 흘렀다. 넓고 깊은 은빛 강물, 파르스름한 물결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온 은하는 뒷동산 떡갈나무 숲 사이로 사라졌다. 이따금씩 하늘을 긋는 별똥별들의 눈부신 질주, 당신의 기쁨을 위해선 난 스러져도 좋아요.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남은 이들의 기쁨을 바라 찬란한 몸으로 단숨에 불꽃이 되는, 망설임 없는 별똥별들의 순연한 아름다움! 자리에 누워 밤하늘별을 보다 한없이 작아지는, 그러다 어느덧 나 또한 .. 2021. 2. 23.
창(窓) 단강에서 사는 내게 단강은 하나의 창(窓) 단강을 통해 나는 하늘과 세상을 본다. 맑기를 따뜻하기를 이따금씩 먼지 낀 창을 닦으며 그렇게 빈다. 창을 닦는 것은 하늘을 닦는 것, 세상을 닦는 것 맑고 따뜻해 깊은 하늘 맑게 보기를 넓은 세상 따뜻하게 보기를, 오늘도 나는 나의 창을 닦으며 조용히 빈다. - (1994년) 2021. 2. 22.
고맙습니다 작고 후미진 마을 작은 예배당을 섬기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다들 떠난 곳에 외롭게 남아 씨 뿌리는 사람들 가난하고 지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과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 땅의 아픔 감싸기엔 내 사랑과 믿음 턱없이 모자랍니다. 힘들다가 외롭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를 이곳에서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그중 당신과 가까운 곳, 여기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 (1992년) 2021. 2. 21.
퍼런 날 이웃집 변관수 할아버지는 두고 두고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허리는 다 꼬부라진 노인이 당신의 농사일을 꾸려나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어느 샌지 난 숨이 막혀옵니다. 노인 혼자 힘으로는 엄두가 안 나 보이는 일을 할아버지는 묵묵히 합니다. 논일, 밭일, 할아버지의 작고 야윈 몸으로는 감히 상대가 안 될 일감입니다. 씨 뿌리고, 김매고, 돌 치워내고, 비료 주고, 논둑 밭둑 풀을 깎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하고, 세월이 내게 숨을 허락하는 한 내 일 내가 해야지, 지칠 것도 질릴 것도 없이 할아버진 언제나 자기걸음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뙤약볕 쏟아지면 그 볕 다 맞고, 어느 것도 논과 밭에서 할아버지를 떼 놓을 것이 없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켜켜 가슴에 쌓였을 답답함과.. 2021. 2. 20.
쓰러지는 법 '요즘 나는 눕기보단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고 한 이는 시인 황동규였을 게다. 그는 어떤 경험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짧은 말 한마디로 표현되는 어려운 경험. - (1992년) 2021. 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