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농부의 비장한 다짐 작실 반장 일을 보고 있는 병철 씨가 얼마 전 딸을 낳았습니다. 첫아들 규성이에 이어 둘째로는 딸을 낳았습니다. 아기 낳기 전날까지 하루 종일 고추모를 같이 심었던 부인이 다음날 새벽녘 배가 아프다 하여 차를 불러 원주 시내로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별 어려움 없이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엄마 따라 새로 난 아기도 건강했습니다. 병원을 다녀오는 병철 씨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둘째 아기를 건강하게 잘 낳은 것도 그렇고 첫째가 아들이라 은근히 둘째로는 딸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낭랑한 아기울음 오랜만에 동네에 퍼지게 되었고 모처럼 흰 기저귀 널리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끝정자로 내려가다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보니 개울둑 저만치 누가 누워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병철 씨였습니다. 못자리를 한 논을 .. 2021. 12. 17.
하늘의 배려 “오늘이 엄마 아빠가 결혼한 날이다.” 결혼한 지 4년째를 맞는 날, 저녁을 먹으며 아내가 소리에게 말했습니다. 4년의 세월을 두고 식구가 둘 는 게 신기합니다. “엄마 아빠 결혼할 때 소리는 어디 있었니?” 다시 묻자 소리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응, 규민이랑 집에서 놀구 있었어.” 생겨나지도 않았을 녀석이 집에서 동생이랑 놀고 있었다니, 그러나 그 얘기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뜻 깊은 얘기였습니다. 소리의 대답이 전혀 엉뚱한 얘기만이 아님을 두고두고 그윽하게 깨닫습니다. 하늘의 배려는 우리들의 만남 먼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 1991년 2021. 12. 16.
이야기에 대한 목마름 옆집인 상호형네서 라디오를 만들었단 얘길 듣곤 구경하러 갔었다. 별난 모양의 진공관들이 늘어서 있는, 집에서 꾸민 라디오였다. 거기서 소리가 나는 게 신기했다. 진공관 속 어디엔가 난장이만한 이들이 숨어 노래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린 내게 늘어선 진공관들은 그만한 사람들을 숨기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다. 동네에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놓인 집은 가게집이었다. 물건을 살 때마다 표를 나누어 주어 그 표 몇 장을 가져오는 아이들이게만 텔레비전을 보여줬다. 표를 구한 아이들은 신이나 으스대며 가게로 들어갔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괜스레 가게를 맴돌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재미난 소리에 화가 오르면 안테나가 매달린 쇠기둥을 획 돌려놓곤 내빼곤 했다. 그럴수록 이야기가 있는 할머니 무릎이, 선생님의 자상함이 더욱 그.. 2021. 12. 15.
고마운 만남 모든 진료활동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군의관은 찬찬히 하루 동안의 안타까움을 말했다. 진료를 받은 마을 분들의 대부분이 몇 알의 약만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병이었다는 것이다. 보다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진찰과 치료가 필요한 분들인데 공연히 허세나 부린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미안해했다. 그러나 안다. 그런 하루의 시간이 고마운 것은 단지 병명을 짚어주고 몇 개 약을 전해준데 있지는 않다. 쉽지 않은 훈련을 마쳐 피곤할 텐데도 귀대를 앞두고 하루의 시간을 주민을 위해 할애한 그 마음이 무엇보다 고마웠다. 그저 논밭이나 망가뜨리고 당연한 듯 돌아서곤 했던 해마다의 훈련인데, 그렇지 않은 모습 대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고마웠던 것이다. 훈련 나온 군복 입은 의사들께 받은 진료, 충분히 고마운 만남이었다. - 1.. 2021. 12. 8.
거 참 보기 좋구나 아침부터 어둠이 내린 저녁까지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차례가 돌아왔다. 한사람 끝나면 또 다음 사람, 잠시 쉴 틈이 없었다. 파마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머리를 다듬는 사람도 있었다. 노인으로부터 아이에 이르기까지 차례를 기다릴 때, 이런 저런 얘기로 웃음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난로 위에서 끓는 산수유차가 하얀 김으로 신이 났다. 원주 의 서명원 청년, 한 달에 이틀을 쉰다고 했다. 그 쉬는 날 중의 하루를 택해 아침 일찍 단강을 찾아 함께 예배를 드리고, 마을 분들을 위해 머리 손질 봉사를 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일, 결코 깨끗하다 할 수 없는 다른 이의 머리를 만져야 하는 일, 늘 하던 일을 모처럼 쉬는 날 또 다시 반복하야 하는 일, 그러나 어둠이 내리고 마지막 .. 2021. 12. 6.
파스 며칠 동안 머리가 아파 앓아누웠던 우영기 속장님이 주일을 맞아 어려운 걸음을 했다. 윗작실 꼭대기,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겨울만 되면 연례행사 치루 듯 병치레를 하는 속장님. 두 눈이 쑥 들어간 채였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보니 머리에 하얀 것이 붙여 있었다. 파스였다. 다리가 아파 꼼짝을 못하는 김을순 집사님을 찾았을 때, 집사님은 기도해 달라시며 주섬주섬, 아픈 다리의 옷을 걷었다. 가늘고 야윈 다리, 걷어 올린 집사님의 다리에도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언제 붙였는지 한쪽이 너덜너덜 떼진 채 겨우 매달려 있는 파스였다. 만병통치인양 아무데고 붙는 파스, 아픔을 다스릴 방법이라곤 그것이기에. - 1991년 2021. 12. 4.
고무신 어릴 적 많이 신었던 신은 고무신이었다. 고무신도 두 종류였는데, 그중 많이 신었던 건 검정고무신이었다. 시커멓게 생긴 건 영 볼품이 없었지만 질기긴 엄청 질겼다. 쉽게 닳거나 찢어지지 않아 한번 사면 싫도록 신어야 했다. 땀이 나면 잘 벗겨져 뜀박질을 할 땐 벗어 손에 들고 뛰기야 했고, 잘못 차면 공보다도 더 높이 솟아오르기도 했던 고무신, 고무신은 수륙양용이었다. 사실 고무신은 땅보다도 물에서 더 편했다. 젖는 걸 걱정할 필요 없이 언제라도 물에 들어갈 수 있었고, 때론 잡은 고기를 담아두는 그릇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싫도록 신었던 고무신. 검정 고무신을 신을 때에는 흰 고무신이 부러웠다. 하얀 빛깔은 얼마나 깨끗했으며 그에 비해 검정 고무신은 얼마나 누추해 보였는지. 때가 지나 흰 고무신을 신.. 2021. 12. 3.
끌개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른다. 소를 끌고, 아스팔트 위를 왔다 갔다 한다. 소등엔 멍에가 얹혔고, 멍에엔 커다란 돌멩이가 얹힌 나무토막이 연결되어 있다. ‘끌개’를 끌며 소가 일을 배우는 중이다. 등 뒤 벅찬 무게를 견디며 소는 묵묵히 걸어간다. 일소가 되기 위해선 배워야 할 게 많다. 곧 돌아올 일철을 앞두고 열심히 일을 배운다. 일소가 되기 위해 등 뒤의 무게를 견디며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는 소, 등짝이 까지도록 끌개를 끄는 소를 보는 마음이 숙연하다. 주어진 밭을 갈기 위해 끌어야 할 끌개가 내게도 있다. 쉽지 않은 무게를 견디며 많은 시간 끌개를 끌어야 한다. 이 밭에서 저 밭으로 제 멋대로 소가 뛰는 건 제대로 일을 배우지 않은 탓이다. 쉽게 마치려 하고 쉽게 벗으려 하는 내 끌개를 몇 날 며칠 .. 2021. 12. 1.
“됐니?” 초등학교 시절, 난 줄곧 반장 일을 보았다. 반장 일이란 게 특별나지 않아서 조회, 종례시간 선생님께 인사하고, 선생님이 자리를 잠깐 비울 일 있으면 자습을 시킨다든지, 책을 읽힌다든지 그런 일이었다. 반장 일을 하며 가장 어려웠던 건 환경정리를 할 때였다. 방과 후에 몇 명이 남아 교실의 환경정리를 했던 것인데, 대부분은 선생님을 도와 드리는 일이었다. 액자를 새로 달 때나 글씨를 써서 붙일 때는 으레 키가 크신 선생님이 그 일을 맡았는데, 그때마다 선생님은 “됐니?” 하며 액자나 글씨가 똑바로 됐는지를 물었다. 난 그게 어려웠다. “됐어요.” 소리가 선뜻 나오질 않았다. 확연히 삐뚤어진 거야 “좀 더 위로요, 좀 더 아래로요.” 할 수 있었지만 얼추 비슷하게 맞았을 때는 뭐라 대답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2021.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