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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봄(14) 아침 햇살 담쟁이넝쿨처럼 예배당 벽을 거반 오른 시간 계단을 올라 목양실 문을 여니 와락 햇살이 먼저 안으로 든다 내내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는 듯 한 순간에 든다 맘껏 들어오렴 맘껏 숨을 쉬렴 말굽을 세워 문을 열어 둔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며 책상에 앉아 짧은 기도 바칠 때 문득 마음 문 덩달아 열고 싶은 가난한 마음 2021. 3. 31.
봄(13) 눈길 한 번에 화인(火印) 되고 손길 한 번에 화인(花印) 되고 2021. 3. 30.
봄(12) 난분분 난분분 때늦은 눈발 날릴 때 꽃잎에 닿는 눈은 눈물로 닿고 눈을 맞는 꽃잎은 향기로 떨고 - (1996년) 2021. 3. 29.
봄(11) 아랫작실 양짓말 세월을 잊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이씨 문중 낡은 사당이 있고 사당으로 들어서는 왼쪽 편 살던 사람 떠나 쉽게 허물어진 마당 공터에 비닐하우스가 섰다. 하우스 안에선 고추 모들이 자란다. 막대 끝에 매단 둥근 바구니를 터뜨리려 오자미 던져대는 운동회날 아이들처럼 고만 고만한 고추 모들이 아우성을 친다. 저녁녘 병철 씨가 비닐을 덮는다. 아직은 쌀쌀한 밤기운 행여 밤새 고추 모가 얼까 한 켜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보온 덮개를 덮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다시 한 번 널따란 보온 덮개를 덮는다. 이불 차 던지고 자는 어린자식 꼭 꼭 덮어주는 아비 손길처럼 고추모를 덮고 덮는 병철 씨 나무 등걸처럼 거친 병철 씨 손이 문득 따뜻하다. 고추 모들은 또 한 밤을 잘 잘 것이다. 봄이다. - (.. 2021. 3. 28.
봄(10) 낡은 종탑 종소리 울려 퍼지는 주일 아침 목양실 창문을 통해 예배당을 찾는 교우들을 봅니다 지팡이를 짚기도 했고 유모차에 의지해 걸음을 떼기도 합니다 수술을 받은 이도 있고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다만큼은 아니라 해도 분명 운동장보다는 클 아픔과 갈망 채울 길이 무엇일지 아뜩해지는데 어깨마다 내리는 환한 햇살 그러면 된다고 한 줌의 은총이면 족하다고 어느새 내 안으로도 드는 한 줄기 햇살 - (1996년) 2021. 3. 27.
봄(9) 돌아서는 이를 향해 모두가 등을 돌릴 때 너는 가만 가슴을 연다 눅눅한 이를 향해 무심한 눈을 흘길 때 너는 눈물을 흘린다 응달 자리 더욱 붉은 진달래 그럴수록 아픈 사랑 2021. 3. 26.
봄(8) 아무도 몰래 하나님이 연둣빛 빛깔을 풀고 계시다 모두가 잠든 밤 혹은 햇살에 섞어 조금씩 조금씩 풀고 계시다 땅이 그걸 안다 하늘만 바라고 사는 땅 제일 먼저 안다 제일 먼저 대답을 한다 2021. 3. 25.
봄(7) 아무도 모르게 견딘 추위 속 아픔 모르셔도 됩니다 누구도 모르게 견딘 어둠 속 외로움 모르셔도 되고요 다만 당신께는 웃고 싶을 뿐 웃음이고 싶을 뿐 나머지는 제 마음 아니니까요 2021. 3. 24.
봄(6) 숙제를 하다말고 책상에 엎으려 잠든 아이의 손에 파란 물이 들었습니다. 그리다 만 그림일기 속 푸른 잎 돋아나는 나무가 씩씩하게 서 있습니다. 나무도 푸르고 나무를 그리는 아이의 손도 푸르고 푸른 나무를 푸르게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도 푸르고 아이는 오늘 밤 푸른 꿈을 꾸겠지요. 봄입니다. - (1996년) 2021.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