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께(12)


아픔에 부딪히는 능력이 희망을 만드는 길임을


목사님, 인사도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은 참 이기적이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책을 읽으며 절망 속에서도 아픔을 공감하는 목사님의 능력을 보며 무심한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화들짝 놀라기도 했습니다만 한 문장, 한권의 책을 인용하시는 그 박학다식함에 시샘하며 지루한 읽기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발견하고 밀려오는 뿌듯함에 책을 다시 보고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간사함에 놀라고, 그 간사한 사람이 저와 같은 목사라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그냥 제 추측입니다만 제가 언젠가 SNS에 쓴 내용이 목사님의 책에 담긴 내용과 비슷해서 기뻤습니다.


‘사사화된 신앙의 문제’를 넘어


“어느 목사님이 SNS에 쓴 글을 보았습니다. 자기 개인의 아픔에 대해 말하면 은혜스럽다고 하고 세월호 참사나 비정구직 문제 등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아픔에 대하여 말하면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누구나 느끼는 현실입니다. 사사화된 신앙의 문제는 어제와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둥이 기울고 서까래가 삭은 오늘의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공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는 문장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쓰신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거의 뒷부분(367쪽)에 나오는 내용이지요.




사람이 간사하다는 것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문장을 발견하고 그 기쁨에 목사님의 책 전체를 다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제가 그 책을 쓴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며 목사님이 쓰신 그 부분만 반복해서 읽는 겁니다. 이 문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책을 이해하려고 읽었습니다만 이 문장을 발견하곤 기뻐서 읽었습니다. 참 이기적이지요.


‘사사화된 신앙의 문제’를 탓하면서도 정작 저는 목사님의 책을 읽으며 ‘사사화된 신앙’적인 태도로 삶을 일관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공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를 보면서 한탄하다가도 정작 제 자신의 ‘사사로움’에 감동하고 마는 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목사님, 제 안에도 있고 우리 모두에게 있는 이 치졸하고 악한 인간성에 대해 목사님은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발견하셨습니다. 사람이 갖는 관계에 대한 욕구 자체가 우리에겐 희망의 불씨이지요. 이 욕구를 막아서 개인적인 삶에 머물고 자기만을 바라보는 관점을 제도적으로 틔우려고 해도 사람들이 가진 사회적인 관계의 욕구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관계망’ 형성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제자도의 의미를 현실화시키고, 우리가 사는 공간을 치유적인 생태계로 복원시키기에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저는 아픔을 통하여 관계망이 사람을 살리는 생태계임을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전 무엇보다도 교회는 관계망으로 촘촘히 엮인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오히려 성도들이 삶에서 겪는 아픔을 나누고 의식을 공유하면 관제언론처럼 사단마귀가 들었다고 몰아내칩니다. 또 필요를 나누라고 강조하면 게으름을 일상화 시키는 것이라며 ‘인간성’을 탓합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억압하고 억제하는 일에 앞장서서 마치 정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처럼 관계망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개인적인 질병보다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겪는 고통이 더 지속적이고 파괴적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악으로부터 오는 아픔에는 외면하도록 눈감게 합니다.


목사님, ‘목사는 늘 위로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시달립니다. 이 위로라는 말속에 개인적인 아픔을 고쳐달라는 강한 압박이 담겨있습니다. 목사가 의사도 아니고, 목사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요구하는 이 위로의 압박은 상당하여 때로는 목회를 더욱 무기력하게 합니다. 정말 치유해야 할 것은 질병이 아니라 어쩌면 생각일 것입니다. 혼자, 고립된 신앙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이런 신앙 말고 아픔을 삶의 과정으로 수용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질병의 치료보다 더 근원적으로 삶의 의미를 회복하고 위로하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을 대면한 첫 만남은 <복음과 상황> 지령 300호 발간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늘 글로만 읽던 목사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하였지만 정작 목사님과 가장 가깝게 닿은 것은 눈도 아니고 손이었습니다. 혜안이 가득한 눈 속에 지혜로움이 느껴졌고, 악수하며 잡은 손을 통해 마음의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그 악수를 잊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아준다는 것, 그의 속도에 맞춰 함께 걷는다는 것이 참 아름다운 일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155쪽). 함께 걷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머물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연대하는 그 정신이 손에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걸어가는 삶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는 일은 손을 잡는 것뿐입니다. 맞잡으면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늦어지지요. 누구의 손을 잡든지 간에 손을 잡는 순간 늦고 더디게 걸어가는 사람의 속도에 맞추게 됩니다. 순간적으로 빠른 사람의 힘에 이끌려 딸려갈 수는 있지만 그렇게 무리하면 얼마가지 못해서 넘어지고 맙니다. 손을 잡는 행위는 더딤을 수용하고 함께 걷겠다는 느림을 수용하는 엄청난 행위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만나는 첫 장면이 바로 손가락의 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그 손가락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주잡을 손 하나가 바로 희망입니다”


저는 목사님이 인용하신 고종석 선생님의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라는 문장을 아주 좋아합니다. 아픈 아내를 간병한지 12년째인 저는 깜깜한 어둔 밤에 조용히 침대위에 누워 있는 아내의 팔뚝을 쓰다듬습니다. 아이들이 다 잠들어 있고 호흡만 들리는 그 밤에 조용히 아내의 팔뚝을 만지는 제 행위는 아내와 함께하는 성생활과 같습니다. 그건 “당신은 내 아내입니다”하고 속삭이는 언어랍니다. 그러면 아내도 아는지 부부행위를 하는 듯 호흡이 가빠지고 거칠어집니다. 인생이 칠흑같이 어둡고 답답해도 서로를 보살피는 연대의 의미로 이러한 손닿음은 언제나 부부만의 내밀한 언어를 만들어냅니다.


야심한 밤에 아내의 손목을 잡는 행위는 부부로서의 존재만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글속에 “마주잡을 손 하나가 바로 희망입니다”는 문장을 읽으며 전 맞는 말이라고 감탄했습니다. 제 아내처럼 말도 못하고 눈도 뜨지 못하는 중환자를 일상에서 만나는 것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옵니다. 물론 제 아내도 엄청 두려워합니다. 사고의 두려움도 있지만 사람들을 보지 못하는 두려움 때문이지요. 제가 휠체어에 아내를 태우고 이동할 때 긴 세월동안 저의 모습을 보아온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주민들조차도 쭈뼛거립니다.


그렇지만 늘 같이 지내온 우리 성도들은 제 아내가 교회에 가면 자신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아내의 얼굴을 보듬고, 팔뚝을 쓰다듬으며 재잘거립니다. 그렇게 아내가 머무는 곳에선 웃음꽃이 핍니다. 그렇지만 제 아내는 아무런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그것은 참 희한한 만남입니다. 말 못하는 제 아내를 만나는 사람들이 누리는 기쁨, 평안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탈북 청년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도록 식장을 빌리고, 음식을 차려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온 제 아내를 그 두 사람에게 소개하며 “제 아내입니다”라고 하자마자 그 두 청년이 저를 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사모님이 이런 모습으로 누워계신데 저희를 도왔습니까?”라며 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생사를 걸고 자신들이 살아온 체제와 다른 곳으로 넘어온 청년들은 좀처럼 울지 않습니다. 그 각오의 단단함이 감정마저 얼어붙게 하나 봅니다. 그렇지만 그 탈북 청년들은 그날 그토록 울었습니다.


손길이 닿으면 그 손길이 닿는 제 아내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고 손을 내미는 그 사람도 치유의 과정을 겪습니다. 마주 잡는 손 하나가 세상과 접촉하고 생명의 존귀함을 그대로 수용하는 “보살핌이고 연대”입니다. 맞습니다. 손을 맞잡는 것은 제 아내에게는 세상과 접촉이지만 손을 잡는 그 사람은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수용하는 보살핌이 된 것이지요. 손을 잡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만 , 걷는 사람이 상대방의 속도를 인정하고 자신의 삶 속도를 늦출 때만 그렇습니다. 자신의 속도를 부인하는 느림을 선택하고, 휙휙 지나가는 빠름 대신에 ‘천천히’를 선택하여 걸을 때만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자기부인 없이는 결코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포기하고 다름을 선택하고 함께 살 결심을 하지 않으면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연대는 자기부인에서 나옵니다. 자기부인이 없는 연대는 거짓이고, 자기 의일 뿐입니다. 노동조합이든지, 정부와 노사협상이든지 손잡고 빨리 가자고 말하는 시대인 것 같아서 느림을 선택하고 손을 잡는 자기부인의 시대가 너무도 그립습니다.


목사님,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같이 있을 때는 서로의 어루만짐을 잘 모르다가 함께 있지 않는 ‘부재’의 순간이 오면 그동안의 삶속에 가득했던 ‘일상의 거룩한 순간’들이 생각나서 그리움에 마구 젖습니다. 지금 제가 그렇습니다. 몇 달 전에 독일로 청빙을 받아서 떠난 후배가 그립습니다. 후배 목사와 함께 한 시간 속에는 나이를 초월하는 우정이 숨어 있습니다. 또한 그동안 동토처럼 얼어붙었던 서로의 허물도 있었지만 그가 부재한 뒤에 겪는 그리움은 그걸 모두 녹여버렸습니다. 누군가의 삶이 “겨울을 맞아도 눈물로 받아주는 이”가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다는 목사님의 말씀처럼 제게는 그 후배가 그런 존재였습니다.


사역자로서 저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사역에 대한 무지보다도 겨울 같은 인생의 혹독함 속에서도 계절을 모르고 찾아오는 성적인 충동입니다. 제 속에 있던 불만족으로 가득한 제 욕망은 제 감정을 할퀴고 제 언어에 가시를 심습니다. 저의 건강하고 정당한 욕망이 어둠속을 헤매며 저를 괴롭힐 때 저는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눈길 줄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 능글능글 오욕이 불타는 눈길을 받아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사람이 허망하게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의 본능에 전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절망을 나누던 이가 제게서 떠나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목사님의 편지를 엮은 이 책이 바로 그 후배와 같은 ‘물건’입니다. “저는 어둠을 모르는 빛, 절망의 심연을 거치지 않은 희망, 대가를 치르지 않고 주어지는 은혜, 추함을 외면하는 아름다움, 불화의 쓰라림을 알지 못하는 조화, 흔들림조차 없는 확신, 일상을 떠난 영성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흔들림 속에서 든든함을 지향하고, 추한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가장 속된 것에서 거룩한 것을 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의 길은 흔들리며 걷는 길입니다”(303쪽). 이 문장에 제 눈에 확 꽂혔습니다. 저절로 아멘이라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목사님, 고맙습니다. 이기적인 저를 보게 하시고 절망 속에서 신음하는 저에게 “하나님은 더럽고 추하고 사소한 것들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진정으로 거룩한 분입니다. 속된 것 따로, 거룩한 것 따로인 세상은 가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304쪽)는 말로 저를 바른 길로 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에게 절망하지만 절망하는 그 속에 오시고 거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밤마다 나의 추함에 통곡하지만 십자가를 볼 때마다 다시 소망으로 충만합니다.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의 분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는 저를 보며 그분의 성품에서 소망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후배를 떠나보낸 여정은 참 외롭습니다. 그러나 이 삶에 이 책마저 없었다면 더욱 절망의 길을 걸었을 것입니다. 사람이야 이별이 가능하지만 책은 언제나 손안에 넣고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나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거룩한 하나님 같아 보입니다. 그분의 임재를 목사님의 책을 통해 경험합니다. 하여 “아픔에 부딪히는 능력이 희망을 만드는 길”임을 알고 아픔의 고통을 다시 품고 살아갈 결심을 합니다. 아픔에 부딪히는 능력이 희망의 길을 만들기에….  


김병년/다드림교회 목사, 《난 당신이 좋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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