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111)
미더운 친구
부인 자랑이야 팔불출이라지만 친구자랑은 어떨까, 팔불출이라면 또 어떠랴만. 이번 물난리를 겪으면서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건 태어난 지 8개월 된 규민이의 분유가 떨어진 일이었다. 된장국과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반찬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당장 어린 것 먹거리가 떨어진 게 적지 않은 걱정거리였다.
얼마 전 모유를 떼고 이제 막 이유식에 익숙해진 터였다. 분유를 구하려면 시내를 나가야 하는데 쏟아진 비에 사방 길이 끊겨버렸다.
안부전화를 건 친구가 그 이야길 듣고는 어떻게든 전할 방법을 찾아보겠노라 한다. 오후가 되어 전화가 왔다. 손곡까지 왔으니 정산까지만 나오면 전할 수 있겠다는 전화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작실로 올라가 산 하나를 넘었다. 길이 끊기니 평소 생각도 않던 길로라도 어떻게든 연결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시간 반 넘게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손곡에서 정산까지 또 길이 끊긴 게 분명했다. 돌아오는 길, 질러온다고 바위벽을 오르다 더는 붙잡을 게 없어 30분 절벽 끝에 위태하게 매달렸다가 겨우 구조되는 등 난리를 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 사이 친구의 전화가 왔었다 한다. 부론 쪽으로는 물이 차서 못 오고 다시 귀래 쪽으로 돌아와 사기막에서 산을 타고 넘어온다는 것이었다.
상자골, 한 번도 오른 적 없는 마을 뒤편 높다란 산, 그 산을 넘을 생각을 했다니. 동네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어 상자골로 올랐다. 좁다란 산길이 여기저기 형편없이 패이고, 인적 없는 길 곳곳에 억새풀이 자라 있었다. 한참을 올라 산 중턱쯤 이르렀을 때 저만치 산을 내려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친구였다.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한 채 등엔 비닐 끈으로 엮어 맨 종이상자를 메고 있었다. 친구는 어딘지도 모르는 산길을,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낯선 길을 그저 아기 분유를 전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넘어온 것이었다.
쉽지 않은 만남, 얼싸안고 싶었지만 고작 건넨 건 고맙다는 말 한 마디뿐이었다. 두 사람 다 털퍼덕 주저앉았다. 상자 안에는 아기 분유는 물론 우유, 과자, 고등어, 꽁치 통조림, 찌부러지고 깨진 두부와 계란까지, 온갖 먹을 게 가득했다.
끊긴 길 어렵게 이으며 끝내는 험한 산을 타고 넘어와 물난리로 고립된 친구에게 먹거리를 전하는 친구의 정이 무겁게 전해져왔다. ‘그래 어려울 땐 언제라도 이렇게 만나자.’ 마음속으로 다짐이 지났다.
마침 그날이 수요일, 친구는 저녁예배를 위해 이내 일어나 산길을 되올라갔다. 친구의 뒷모습이 참 든든해 보였다. 미더운 친구, 헌영.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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