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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by 한종호 2020. 10. 12.

한희철의 얘기마을(112)



힘없이 병원을 빠져나왔습니다. 배웅 차 현관에 나와 있는 속장님을 뒤돌아보지 못합니다. 심한 무기력함이 온통 나를 감쌉니다. 가슴은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고 지나가는 이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한낮의 뜨거운 볕이 편했습니다.


그래, 농촌에서 목회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는 갖추고 있어야 해. 돈이 많든지 능력이 많든지, 조소하듯 자책이 일었습니다.


이따금씩 병원을 찾게 되는 교우들, 마을 분들, 병원까지 찾을 때면 대부분 병이 깊은 때고, 긴 날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데 당장 눈앞의 어려움은 병원비입니다. 마음 편히 치료해야 효과도 있다는데 아픈 이나 돌보는 이나 우선 돈이 걸립니다. 아픈 이들은 돈 걱정 없이 치료를 받도록 돕던지, 아니면 아픈 곳 어디라도 손 얹어 기도하면 아픈 이 누구라도 벌떡 일어나게 하던지 그래야 하지 않는가, 그깟 수속 밟는 일이나 돕고 손 마주잡아 기도하는 것이 무슨 대순가. 스스로를 몰아세워 책망합니다.




3년 전에 했던 수술이 도져 이식근 성도님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그분은 예의 소를 닮아 크고 선한 두 눈만 끔뻑였습니다. 간호하는 속장님도 겉으로야 웃지만 속엔 걱정이 태산입니다.


잔뜩 벌여 놓은 농사일이며 당장 여물을 줘야 하는 집안 짐승들하며, 수술을 해야 할지 안 해도 되는 건지, 병원비는 얼마나 나올는지 어떻게 치를 건지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3년 전 이야기를 하던 속장님은 끝내 눈이 젖고 말았습니다. 퇴원한 후 한동안 일하면 안 된다는 의사의 거듭된 당부에도 지나가는 봄, 잔뜩 밀린 일들을 두곤 쉴 수만 없어 들로 나갔는데, 널따란 밭 몇 고랑 갈더니만 이식근 성도님은 식은 땀 줄줄 흘리더니 그만 주저앉았답니다. 그것도 못하냐며 속상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지르곤 쟁기를 이어 잡았는데, 여자가 쟁기 잡았다고 비웃는지 소가 꿈쩍을 않더랍니다. 몇 번 다그쳐도 소는 꿈쩍을 않았고, 순간 와락 설움이 복받쳐 올라 쟁기 놓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3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또 3년 만에 병원 응급실에 와 있으니 그 마음의 막막함을 어찌 말로다 할 수 있겠습니까.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 나오며 자책 속 드리는 기도가 줄 끊어진 연처럼 어지러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며칠이 지난 후 성도님은 퇴원을 했습니다. 급한 때는 넘겼으니 약으로 치료해 보자는 의사의 말을 복음처럼 들으며 집으로 왔습니다. 당분간은 일 말라고, 3년 전과 같은 당부를 들었습니다.


집으로 온 다음날 저녁, 김 한 톳을 마련해 성도님 집을 찾았을 때 집은 텅 비어 있었고, 동구 밖 한참을 기다려서야 어둠 밟고 돌아오는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소 꼴 가득한 지게를 지고, 소 몰고 돌아오는 이식근 성도님을.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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