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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눈 비비는 소

by 한종호 2020. 12. 31.

한희철의 얘기마을(189)


눈 비비는 소



소/윤여환 작



소가 눈 비비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지요? 소가 눈을 비비다니, 전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싶으면서도 소도 눈이 가려울 때가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하는 거지, 막상 그런 생각을 하면 딱히 떠오르는 모습이 없습니다. 사람이야 눈이 가려우면 쓱쓱 손으로 비비면 그만이겠지만 말이지요. 


소가 눈을 비비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는데 정말 의외였습니다. 가만히 서서 뒷발 하나를 들더니(뒷발 두 개를 한꺼번에 들 수는 없겠지만) 아, 그 발을 앞으로 내밀어 발끝으로 눈을 비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덩치가 큰 소가 한 발을 들고도 쓰러지지 않는 균형감각도 신기했지만, 억척스럽게 논과 밭을 갈던 그 투박하고 뭉뚝한 발끝으로 눈을 비벼대다니, 뒷발로 눈을 비비고 있는 소의 모습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신기하게 쳐다보니까 눈을 비비던 소는 남 눈 비비는 걸 뭘 그리 신기하게 쳐다보냐는 듯 오히려 커다란 눈으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뒷발로 눈을 비비는 소를 보고 돌아서는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직함과 섬세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섬세함과 우직함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섬세함은 우직함에 의해, 우직함은 섬세함에 의해 지켜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서로는 서로 다른 서로를 담을 수 있는 좋은 그릇이 되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직한 자가 갖는 섬세함, 혹은 섬세한 자가 갖는 우직함, 아니 우직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함과 섬세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우직함. 우리 삶 곳곳엔 그런 모습이 담겨 있지 싶었습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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