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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교수님께

by 한종호 2021. 1. 1.

한희철의 얘기마을(190)


교수님께


끓여주신 결명자 차 맛은 아무래도 밋밋했습니다. 딱딱할 것 같은 권위의 모습 어디에도 없어 특별히 몸가짐을 조심할 것도 없는 편한 교수실 분위기와 예의 잔잔한 교수님 웃음이 그 밋밋한 결명자 차 맛까지를 또 하나의 편함으로 만들어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작은 난로 앞, 마치 큰 추위에 쫓겨 온 사람들처럼 난로를 바짝 끼고 앉아 나눈 이야기들, 혹 나눈 이야기는 잊는다 해도 그런 분위기는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듯싶습니다.


큰 배려였습니다. 농촌에서 구경꾼처럼 살아가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그저 서툰 글로 썼을 뿐인데, 농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농촌의 바른 이해를 위해 책을 읽게 하였다는 이야기야 의미 있는 일이라 여기면서도, 그것이 다름 아닌 제 책이었다는데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큰 배려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쓴 독후감을 한 다발 전해 받으며, 내가 쓴 글에 대한 젊은이들의 뒷이야기를 이렇게 싫도록 듣게 되었구나 싶어 무엇보다 고마웠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삶에 대한 학생들의 따뜻한(과제물이라는 의무감을 떨쳐버린) 관심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새삼스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외로움이 흔쾌히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몇 가지 지적들은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마음에 두어도 될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그것이 자기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냐는 지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펜을 잡을 때마다 잊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쉬 놓치곤 하는 마음의 허술함을 그는 바르게 지적한 셈입니다. 조용함이 무섭다는 걸 배웠다는, 한 학생이 글을 마치며 쓴 이야기는 쉽지 않은 무게로 마음에 남았습니다.


잘 보관해 두었다가 심지가 약해질 때면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참, 들려주신 육종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도 귀한 것이었습니다. 풀 한 포기에도 자기다움을 지키려는 본능이 있다니요. 건강과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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