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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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초대해야 할 손님

김기석의 새로봄(87)

 

우리가 초대해야 할 손님

 

예수께서는 자기를 초대한 사람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누가복음 14:12-14)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창세기 5:24) 에녹이라고 하여 우리와 달랐을까? 그 역시 우리처럼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감사와 원망,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오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삶을 요약하는 한 마디가 ‘하나님과 동행’이라는 사실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분명한 중심을 갖고 살았다는 뜻이 아닐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내면에 바닥짐을 마련한 사람이다. 바닥짐은 배의 무게 중심이 위로 올라가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배 밑바닥에 싣고 다니는 짐을 일컫는 말이다. 마음에 바닥짐이 있는 사람은 웬만큼 바람이 불어도 쉽게 휘뚝거리지 않는다.  

 

마음의 바닥짐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생을 즐기지 못하고, 남들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하다. 그들은 자기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남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비난을 받으면 살맛을 잃고 칭찬을 받으면 우쭐한다. 그런 이들은 언제 파선할지 모르는 배처럼 위태롭다. 그들은 또한 자리와 서열에 민감하다. 어떤 모임에 가면 제일 어려운 게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상석이 어디인지를 먼저 알아차려야 하고, 참석자들 가운데 자기 지위에 맞는 자리가 어딘지를 가늠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바리새파 사람 중에서도 지도자급에 속한 이의 집에 초대를 받아가셨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거든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맨 끝자리에 앉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이나 관행을 뒤집는 요청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산다. 그래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인연을 이어가려고 애쓴다. 때로는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스펙을 쌓고, 좋은 차를 타고, 큰 집에 살려는 것도 그것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무시당하기 싫다는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계를 향해 마음을 열라고 하신다.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의 신분이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하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누가복음 14:12). 우리가 청해야 할 사람은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이들은 대개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리는 이들이다. 가난한 사람,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 다리 저는 사람, 눈먼 사람…. 이들의 명단은 더 늘어날 수 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사회적 약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을 청하라는 말은 시혜를 베풀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 인생길의 동행으로 여겨 존중하라는 말이다. 그들이야말로 자칫하면 잊어버리기 쉬운 인간됨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사람들이다.

 

*기도*

 

하나님, 누군가의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들은 내가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유력한 이들의 초대를 받으면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그런 초대 자체가 내 존재의 무게를 입증해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 참 많습니다. 어딜 가나 눈치를 봐야 하고, 때로는 멸시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이들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초대하여 함께 생을 경축하라고 이르십니다. 쉽지 않은 요구이지만 그렇게 살아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하늘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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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몸의 등불

김기석의 새로봄(86)

 

눈은 몸의 등불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태복음 6:22-23)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다. 두려움이나 거짓, 사심이나 거리낌이 없을 때 우리는 편안하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본다. 하지만 관계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우리 눈은 살짝 흔들린다. 핏발 선 눈, 섬뜩한 눈, 이글거리는 눈, 흐릿한 눈, 초점을 잃은 눈과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반면 넉넉하지만 깊고, 깊지만 따뜻하고, 따뜻하지만 진실한 눈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맑아진다.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유한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한다.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외적 정보를 조합해 세상과 만나고 소통한다. 오감 가운데서 어떤 감각에 유난히 예민한 이들도 있지만, 보통사람들에게는 시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시대는 특히 시각이 독주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옛 사람들은 밖으로 향한 눈보다는 안으로 열린 눈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는 성찰(省察)이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성찰은 물론 고독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늘 누군가와 접속 중인 이들은 성찰적 존재가 되기 어렵다. 어쩌면 성찰의 시간을 견딜 수 없어 누군가와 접속을 갈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기 속에 있는 약함, 상처, 그림자, 부끄러움 등을 살필 용기가 없는 사람일수록 남들에게 가혹하다. 그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찾아내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작은 티끌이라도 찾아내면 그것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허물을 가리려는 가련한 시도일 뿐이다. 

 

제대로 보는 사람이라야 삶이 비루해지지 않는다. 마음의 빛이 흐려져 제대로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에 휘둘리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게 된다.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어 산다. 눈이 밝아져 제대로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 다니지 않는다. 눈이 성하지 않으면 온 몸이 어두워지게 마련이다. 온 몸이 어둡다는 말은 자기 인생의 때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요한계시록 3:18)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안약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눈빛 맑은 사람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밝아집니다. 똑같은 사물이나 대상을 보아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표현하는 이들과 만나면 우리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그러나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려는 자세로 일관하는 이들과 만나고 나면 말할 수 없는 피곤함을 느낍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셨는데, 눈이 어두운 우리는 그때를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 눈을 밝혀주십시오.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게 하시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는 의지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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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같은 이들이 발견한 아름다운 슬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8)

 

짐승 같은 이들이 발견한 아름다운 슬픔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을 조사하던 과학자들이 뜻밖의 성분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꽃가루였다. 네안데르탈인의 유골 곁에 있는 흙에서도 다량의 꽃가루가 발견되었다. 대체 꽃가루의 의미는 무엇일까,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정을 한다.

 

네안데르탈인들은 같이 살던 누군가가 죽으면 죽은 이를 야생의 꽃이불 위에 눕히고 그 위를 다시 꽃으로 덮었던 것 같다. 죽은 이를 아무렇게나 버리거나 처리한 것이 아니었다. 사방에 피어난 온갖 꽃을 따서 바닥을 장식한 후에 죽은 이를 눕히고, 다시 그 위에 꽃을 수놓았을 것이다.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를 아무렇게나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한다.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라는 책을 쓴 허만하 시인은 그 일을 가리켜 “짐승 같은 그들이 발견한 아름다운 슬픔”이라 했다. 짐승 같은 그들이 발견한 아름다운 슬픔, 어울리기 힘든 단어들이 어울림으로써 아름다움은 거칠지만 섬세하고 눈물겨운 의미를 얻게 된다.

 

어디 네안데르탈인뿐일까? 세상 어떤 존재든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있다. 세상이 눈부시지 않은 존재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이 어찌 시인이나 가객의 몫일뿐이겠는가?

 

살아가는 방식이 나와 다르다고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짐승 같은 이들도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아니 짐승 같은 이들일수록 아름답게 표현한다. 어색할 것이 없는 원시의 아름다움이 그들 안에서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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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모성

김기석의 새로봄(85)

 

사회적 모성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명기 15:12-15)

 

신명기 법전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해, 그리고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명심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규정이 상당히 상세하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생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명기 15장은 빚을 면제해 주는 면제년 규정을 다룬다. 매 칠 년 끝에는 빚을 면제하여 주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단락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필요한 이들에게 넉넉히 꾸어주되,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되고, 면제년이 되면 그 빚을 삭쳐주어야 한다. 성경은 그 땅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신명기 법전이 다루는 히브리 종들에 대한 규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빚에 몰려 종으로 팔려온 히브리인들은 여섯 해 동안 주인을 섬기면 이듬해에는 그에게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야 했다. 자유를 주어 내보낼 때에 '빈 손'으로 내보내지 말고, 토지와 가축으로부터 얻은 소득 가운데서 넉넉하게 주어서 내보내야 했다. 그들의 수고와 땀 흘림 덕분에 주인집도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나그네들일 뿐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떠나도 땅은 여전히 남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살다 보면 사람들의 운명은 갈리게 마련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약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린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특권 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사람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림으로 죄의 길에 접어들게 되고, 사회적 약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이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내면에 냉소와 불신과 적의를 키우게 된다. 평화로운 삶의 꿈은 가물가물 스러지고, 세상은 전장으로 변하고 만다.

 

특히 오늘의 현실이 그러하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빚’을 매개로 하여 작동되는 체제이다. 소비사회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욕망의 시장으로 내몬다. 인간이 소비자로 전락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 사는 동안 난파 당한 이들이 많다.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삶의 방편을 찾을 길 없어 낙심하는 젊은이들이 거리와 광장을 채운다. 일하지 않고도 호사스럽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상실감 혹은 원한감정에 시달린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는 위험 사회이다. 사회학자 짐멜은 “돈은 자유를 선사하지만 연대를 앗아간다”고 말했다.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이 점점 사라진다는 말일 것이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앞장서서 그 일에 동참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값없는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기도*

 

하나님, 무정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서로 도우며 살라고 보내주신 이웃들을 우리는 경계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이 우리의 안일한 행복을 뒤흔들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서로 거들고 부축하며 사는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우리 삶은 점점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아픔을 겪는 이들을 보면서도 모른 체 합니다. 외로움과 쓸쓸함이 진주군처럼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인색한 마음, 무정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이웃들과 더불어 삶을 경축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넓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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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렵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7)

 

그래서 어렵다

 

처음으로 그 말을 듣던 때의 떨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직한 목소리, 그러나 울림은 묵중했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누가 능히 흐린 것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자신을 흐리게 만들어 고요함으로써 더러움을 천천히 맑게 해줄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문득 아뜩하면서도 환했다.

어려울 것이 없다.
그래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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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와 심려

김기석의 새로봄(84)

 

배려와 심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로마서 15:1-3)

 

헨리 데이빗 소로는 그의 책 『월든』에서 자기가 가꾸었던 콩밭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랑의 한쪽 끝은 내가 그늘에서 쉴 수 있는 관목 떡갈나무 숲에서 끝나고, 다른 한쪽 끝은 한바탕 김매기를 하고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푸른 딸기의 색깔이 더 짙어지는 블랙베리 밭에서 끝났다. 잡초를 뽑고, 콩의 줄기 주변에 신선한 흙을 덮어주면서, 내가 뿌린 씨에서 나온 줄기와 잎들이 잘 자라도록 격려하고, 황색 흙이 자신의 여름 생각을 다북쑥, 후추나무 또는 기장 같은 잡초가 아니라 콩의 잎과 꽃으로 표현하도록 설득하여, 땅이 풀이오!가 아니고 콩이오!라고 외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일과였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208쪽)

 

소로는 풀을 뽑고 콩대 주위에 흙을 북돋워주는 것을 콩대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황색의 흙을 설득해 잡초가 아니라 콩잎을 내도록 한다. 그래서 자라나는 '콩'은 흙의 자기표현이요 긍정이 된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단순하게 요약한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로마서 15:1-2).

 

여기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키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여전히 규율에 매인 채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하여 비웃지 말고, 오히려 그들의 약함을 보듬어 안으면서 그들이 성숙한 믿음에 이를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약한 이의 힘이 되어주는 것, 그들 속에 잠들어 있는 선의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호명하여 불러내는 것이야말로 믿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우리 또한 그러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편 116:12)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하나 밖에 없다. 누군가의 동료가 되는 것, 남들을 보살피는 것, 이웃의 짐을 함께 지는 것 말이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셸). 이웃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위’이다. 우리가 정녕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 배려와 심려야말로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묘약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까닭을 바울 사도는 더욱 간명하게 밝힌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15:3) 즉 그리스도는 사사로운 욕망에 굴복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항상 당당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욕을 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좋을 대로 하지 않는 삶을 연습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제자로 지어져 갈 것이다.

 

*기도*

 

하나님, 과거에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을 때에는 마을 전체가 연약한 지체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들에게 설 자리를 제공함으로 인간적 존엄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무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연약한 이들은 난폭하고 야비한 강자들의 사냥감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연약한 이들을 보살피라 이르십니다. 그것은 악한 시대정신을 거스르며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길입니다. 어렵지만 그렇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속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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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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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시비비 묻겠음.

    이성옇 2019.05.28 11:46
  • 시시티비 촬영중.
    시시비비 묻겠음.

    이성옇 2019.05.28 11:47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6)

 

 대답

 

벽에다 대고 방뇨를 하는 이들을 위해 벽에다 작은 거울을 달았던 것은 일종의 대답이었다. 자기 얼굴을 보며 방뇨하는 일은 공존할 수가 없지 않을까 싶었다.

 

목양실에 앉아 있다 보면 갑자기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유리창에 부딪치는 새다. 날아가던 새가 유리창을 분간하지 못한 채 되게 부딪치고 마는 것이다. 깜짝 놀라 다시 날아가는 새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다. 엊그제는 바닥에 떨어져 죽어 있는 새를 보았다.

 

 


 

생각을 하다가 교회 조경위원회를 맡고 있는 홍 권사님께 부탁을 했다. 창문 쪽 마당에 느티나무를 심으면 좋겠다고. 느티나무가 자라면 창가에 푸른 그늘을 드리워 줄 뿐만이 아니라 새들이 부딪치는 일도 사라질 터. 나무를 심는 것이 대답이겠다 싶었다.

 

대화를 나누던 권사님이 한숨을 쉬며 뜻밖의 곤혹스러움을 토로한다. 조경 일을 하는 권사님은 바쁜 중에도 틈틈이 교회에 들러 예배당 곳곳에 꽃을 심고 가꾼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예배당 마당에 심은 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캐 간다는 것인데, 꽃을 아는 사람이라 했다. 귀한 꽃만 골라 캐간다니 말이다. 아무리 꽃을 사랑해도 그렇지 어찌 예배당 마당에 심어놓은 꽃을 캐 갈 수가 있을까,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누가 캐 갔든 그 사람 정원에서 꽃이 잘 자라면 좋겠다고 권사님은 꽃 같은 말을 했지만, 그런 볼썽사나운 심사를 두고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지, 대답이 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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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알파벳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45)

 

농부의 알파벳

 

사막 교부들의 금언 중 아르세니우스와 관련된 것이 있다. 어느 날 압바 아르세니우스가 어떤 연로한 이집트 수도승에게 자기 생각들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 누군가 그것을 알고 그에게 물었다.

 

“압바 아르세니우스, 그렇게 훌륭한 라틴어 교육과 그리스어 교육을 받은 압바가 어째서 이 농부에게 당신 생각들에 관해서 묻는 것입니까?”

 

 

아르세니우스가 대답했다.

 

“나는 참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웠지만 이 농부의 알파벳조차 모릅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그에게서 새로운 알파벳을 배울 것, 아르세니우스의 말을 그렇게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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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거룩하다

김기석의 새로봄(81)

 

인간은 거룩하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우뚝 설 것이다.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 민족마다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다른 모든 민족은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 우리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할 것이다.(미가 4:1-5)

 

주전 8세기 예언자인 미가는 모레셋이라는 시골 마을 출신으로 사회의 밑바닥 계층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그 지경으로 만든 지도자들의 무능과 사악함을 거침없이 공격했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였고, 하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무리들이었다. 부자들은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점을 뜯어냈고,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은 입에 먹을 것을 물려 주면 평화를 외치고,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전쟁이 다가온다고 협박했다. 재판에 뇌물이 오갔고, 종교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돈벌이였다. 지도자들이 그 지경이니 백성들은 자책감조차 없이 거짓말을 해댔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고 토라의 이상은 잊혀졌다. 암흑시대였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미가에게 주님의 영과 능력을 채우시어 그들을 꾸짖게 하셨다. “그러므로 바로 너희 때문에 시온이 밭 갈 듯 뒤엎어질 것이며, 예루살렘이 폐허더미가 되고, 성전이 서 있는 이 산은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것이다.”(3:12) 하기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해야 할 말이다. 하나님의 분노 속에는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백성에 대한 사랑에서 터져나온다. 미가는 폐허더미가 될 예루살렘, 수풀만이 무성한 언덕이 되고 말 성전 산이 새로운 희망의 뿌리가 될 것을 내다본다. 인간의 헛된 꿈이 무너질 때 하나님의 꿈이 시작된다. 미가는 때가 되면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설 것이라고 말한다. 민족들이 주님의 산으로 몰려오면서 주님께 길을 여쭙고, 말씀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일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짓과 위선은 사정없이 깨뜨리지만, 상한 것은 싸매고 약한 것은 강하게 만드신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미가는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다시는 군사 훈련을 하지 않을 세상을 그려보인다. 앗시리아라는 제국주의의 망령이 세상을 뒤덮는 때, 침략전쟁에 나선 군인들의 발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려올 때, 지도자들의 폭거로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올 때 미가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은 그 꿈을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우리들 속에 있는 거칠고 야비한 것들을 녹여 부드럽고 따뜻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벌이는 전쟁의 참혹함을 보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김준태 시인은 <인간은 거룩하다>라는 시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힌 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한 그릇의 물도 함부로 엎지르지 않고, 한 삽의 흙이라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이를테면 풀여치, 지렁이, 장구벌레, 물새, 뜸북새, 물망울 등은 다 거룩한 생명이다. 그렇기에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것들을 어루만진다. 우리 마음에 숨겨둔 칼과 창이 먼저 녹아내려야 한다. 그래야 보듬어 안을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암울한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 우리 속에 주님의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의 등불로 우리 앞을 밝혀주십시오. 게으름과 냉담함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꿈을 우리 꿈으로 삼고 살게 해주십시오. 거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가슴에 창과 칼을 품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칼과 창은 우리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주님, 그 거친 것들을 녹여주십시오. 생명을 품어 기르는 흙을 닮은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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