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고독

신동숙의 글밭(181)


당신의 고독




세상을 바라보는

당신의 눈길이 얼마나 그윽한지


당신이 심연에서 길어 올린 눈물로 

적시우는 세상은 윤기가 돕니다


홀로 있는 시간 동안

당신의 고독은 얼만큼 깊어지기에


당신이 뿌리 내릴 그 평화의 땅에선 

촛불 하나가 타오르는지, 세상은 빛이 납니다


이제는 문득

당신의 하늘도 나처럼 아무도 없는지


당신의 詩가 울리는 하늘은 

높고도 맑고 고요히 깊어서


나의 고독이 아니고선

당신의 고독에 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당신을 만나려 호젓이

관상의 기도 속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만 갑니다


그리고 이제는 

고독의 방이 쓸쓸하지만은 않아서


내 영혼이 고독 안에서만 

비로소 평온한 쉼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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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요금

한희철의 얘기마을(17)


전기 요금


1070원, 지난 달 유치화 씨가 낸 전기 요금이다. 단칸방에 늙으신 홀어머니 모시고 살아가는 치화 씨, 1070원이라는 금액 속엔 가난하고 적막한 삶이 담겨있다.


지난주엔 한여름 내내 열심히 일한 치화 씨가 그동안 번 돈을 아껴 텔레비전을 샀다. 흑백 중고로 안테나 설치까지 4만원이 들었다 한다. 잘 나온다고, 이젠 다른 집으로 TV보러 안 가도 된다며 흐뭇해한다. 




이번 달부터는 전기요금이 올라가겠지만, 그깟 전기요금이 문제일까. 저녁 밥상 물리고 나란히 앉아 함께 웃는 시간이며, 일하러 갔다 늦게 돌아오는 아들 기다리며 막막하기 그지없었던 어머니 시간 보내기도 좋고, 내일은 비 올 거라며 남의 말 듣기 전에 말할 수 있어 좋고, 난생 처음 예금한 돈 30만원이 통장에 있는데 까짓 몇 푼 전기요금 더 나와야 그게 문제일까. 치화 씨 웃음이 모처럼 넉넉하다. 


 <얘기마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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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5)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5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태수난곡 247~48

음악듣기 : https://youtu.be/fhyQq8R1lr0

47(38)

기도

알토 아리아

나의 하나님이여,

나 이렇게 눈물 흘리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를 보시옵소서!

당신 앞에서 슬피 우는

나의 마음과 나의 눈동자를 보시옵소서!

Erbarme dich Mein Gott,

um meiner Zähren willen;

Schaue hier,

Herz und Auge weint

vor dir Bitterlich.

48(39)

코멘트

코랄

나도 그와 같이 당신으로부터 떠났다가

이렇게 당신 앞에 돌아왔습니다

두려움과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당신의 아들이 우리를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나의 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은혜와 자비는

지금 고백하는 나의 죄보다 큽니다.

Bin ich gleich von dir gewichen,

StelI' ich mich doch wieder ein,

Hat uns doch dein Sohn verglichen

Durch sein' Angst und Todespein.

Ich verleugne nicht die Schuld,

Aber deine Gnad' und Huld

Ist viel größer als die Sünde,

die ich hier bei mir empfinde.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야바의 집 밖으로 뛰쳐나와 통곡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을 때 그 장면에 오버랩 되듯 구슬픈 바이올린 소리가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Erbarme dich Mein Gott/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선 관람객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 넓은 곳을 다니기 위해 안내도를 받고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해설이 실려 있는 이어폰 기기를 빌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작품 앞에 도착하면 자동으로 해설이 들려오는 매우 편리하고 유용한 기기입니다. 그 두 가지 도구를 길벗삼아 수많은 작품들을 만나고 해설을 듣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인 모나리자와 마주하게 됩니다. 모나리자 앞에선 관람객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무엇일까요? 손에 들고 있던 안내도를 가지런히 내리고 작품 해설을 듣기 위해 그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을 빼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모나리자에 비견될 만한 이 아름다운 노래를 앞에 두고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이 노래를 만나시기까지의 여정은 잠시 잊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사족이 되어 버릴 설명일랑은 잠시 접어두고자 합니다. 우선은, 듣고 또 듣고, 울고 또 울라는 말 밖에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세 가지 노래

 

이 곡을 감상하실 때 세 가지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매 시간 감상하고 있는 칼 리히터의 1958년 녹음에 들어 있는 헤르타 퇴퍼의 노래입니다. 이 음반은 뮌헨의 중심에 있는 헤라클레스 홀(Herkules-Saal)에서 녹음되었는데 헤르타 퇴퍼(Hertha Töpper, 1924~2020)는 당시 뮌헨을 대표하는 알토파트 오페라 가수였습니다. 그녀는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뮌헨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올해 3, 아흔 여섯 번째 생일을 앞두고 뮌헨에서 사망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 드렸듯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마태수난곡의 흐름 가운데에서 듣는 것이 가장 감동적입니다. 마태수난곡에서 베드로의 눈물 장면에 이어지는 기도로서 들을 때 이 노래를 가장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음반의 에반겔리스트인 에른스트 헤플리거의 절창과 연결시켜서 들을 때 그 감동은 배가됩니다. 이 글 처음에 있는 표의 음악듣기링크를 누르시면 헤르타 퇴퍼의 노래와 연결이 되는데 이번 시간에는 특별히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부터 들으실 수 있도록 편집하였습니다.

 

두 번째 연주는 원전연주 음반에서 골라봤습니다.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한 1988년 음반에서 이 노래를 부른 안네 소피 폰 오터(Anne Sofie von Otter)는 탄탄한 발성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절제된 눈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지휘자 가디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지휘자 중의 한 명입니다. 제가 가장 먼저 구입한 바흐 음반도 그의 연주였습니다. 그는 음악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지휘자입니다. 그가 지휘하는 음악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번뜩이는 그만의 감각과 선율적인 아름다움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음악이나 르네상스 음악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다만 바흐 연주에 있어서는 신앙적인 표현과 독일음악 특유의 소박한 자연스러움이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비교의 대상으로서만 종종 듣곤 합니다. 하지만 독일 출신의 이 시대 최고의 메조소프라노 오터가 지휘자의 멋진 파트너가 되어 독일적 감각과 깊이의 빈자리를 채워줍니다.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English Baroque Soloists)와 이 두 사람의 콜라보레이션은 원전연주 특유의 멜랑콜리를 살리고 너무 무겁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현대적 연주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원전 연주는 바흐 당시의 튜닝을 사용하므로 현대 오케스트라 연주 보다 반음 정도 낮게 조율되어 있습니다. 듣는 입장에서는 조금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들으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치카토로 지속되어 연주하는 베이스 파트 바소콘티누오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템포를 얼마나 감각적이고 섬세하게 끌고 가는지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https://youtu.be/41IAJsKcr5o


세 번째 들으실 연주는 영국의 성악가 캐슬린 페리어의 노래입니다. 이 연주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따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무신론자의 고백

 

조너선 밀러(Jonathan Miller, 19342019)는 영국의 극작가요 연출가로서 현대 영국의 문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무신론자로서 2004BBC의 다큐멘터리 무신론에 대한 기록(The Atheism Tapes)’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언젠가 이 노래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지금 까지 나를 놀라게 하고 가슴 뛰게 하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그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나 그런 일이 일어났었지요. 그러나 매번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습니다. 심지어 다시 만나기 전 마음을 준비하고,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다시 흐느끼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 나의 마음을 숨겨 보려 해도 나를 무너뜨리는 작품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Erbarme dich'입니다. 이 노래가 왜 항상 나를 사로잡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이 이야기를 하는 지금도 내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무신론자의 고백이 사뭇 진실 되게 와 닿습니다. 혹자는 마태수난곡을 일컬어 없던 신앙도 생기게 하는 음악이라고 말했는데 그런 일이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무신론자인 그에게 생긴 것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절대자의 거룩하심과 완전한 사랑에 압도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비추어진 자신, 인간에 대한 절망을 느낄 때 비로소 시작합니다. 조너선 밀러는 이 노래를 통해서 그 상황을 마주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믿음만을 강조하거나 이성의 필드에서 그들과 논쟁하는 동안 우리 신앙은 우리 신앙만의 고귀한 사랑과 거룩한 초월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 아래에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울고 있는 베드로처럼 예수의 십자가 사랑과 그에 비춰진 자신의 절망스런 연약함을 깨달을 때 한 인간은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합니다.

 

현대의 지성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교회는 남은 교인들이라도 붙들고 싶어서인지 반지성적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지켜야 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성인들의 구미를 맞춰 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미처 몰랐던 것, 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영혼이 진정 원하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는 현대의 지성인들을 향하여 우리가 던져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예수의 사랑, 그리고 그 앞에서 인간의 한계와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 이야기에는 그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마태수난곡은 음악이라는 만민 공용의 언어를 가지고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깊이 있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예수의 십자가 수난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마태수난곡을 들어야 할 이유이며 세상에 알려야 할 이유입니다.

 

 캐슬린 페리어

 

이 노래를 거론할 때는 캐슬린 페리어(Kathleen Ferrier)의 노래로 들어야합니다. 세 번째로 소개해 드리는 연주입니다.

 

1912년 영국에서 태어난 페리어는 원래 전화교환원이었습니다. 오늘날 안드레아 보첼리가 정통 성악가의 계보 밖에서 그 순수하고 깨끗한 음성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시절에는 캐슬린 페리어가 있었고 그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캐슬린 페리어가 보첼리 보다 더 위대한 성악가라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영국 민요로부터 가곡이며 오페라까지 짧은 인생가운데 그녀의 음역에 있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최고의 감동적인 노래도 들려주었다는 것입니다.

 

파트가 완전히 달랐지만 캐슬린 페리어를 마리아 칼라스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캐슬린 페리어는 여러 모로 마리아 칼라스의 대척점에 있는 성악가입니다. 그녀는 강한 카리스마 보다는 부드럽고 편안하지만 누구 보다 깊이 있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칼라스 하면 떠오르는 역할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의 카르멘 역할입니다. 칼라스는 연기력과 관능미 그리고 화려함이 가득한 소프라노였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동경의 대상으로서 역사상 최고의 디바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노래와 무대를 보여 주었습니다. 반면 페리어는 종교 오라토리오나 가곡, 영국 민요 등을 통해서 전쟁을 겪은 그 시대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칼라스는 일찍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그녀의 마지막 10년을 파리에서 칩거하면서 약물에 의지하며 살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캐슬린 페리어는 비록 암으로 인해 마흔 한 살이라는 절정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끝까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음 직전까지 노래를 계속 했고 그래서 더 아름다운 노래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녹음으로 남긴 노래는 에드먼드 루브라(Edmund Rubbra)가 작곡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 my shepherd’였습니다.





페리어는 기교나 화려함보다는 진실한 감동을 주는 성악가였습니다. 그래서 독일어보다 모국어인 영어로 부를 때 훨씬 더 간절하고 감동적으로 들립니다. 페리어는 이 노래를 여러 번 녹음했는데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라고 불리는 카라얀의 지휘 아래 독일어로 부른 버전이 가장 좋은 연주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카라얀이 얼마나 위대한 지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태수난곡만큼은 그와 같이 제왕적이고 음악을 통해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함부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닙니다.

 

제가 추천하는 연주는 말콤 써전트가 지휘하는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1946년에 녹음한 연주입니다. 2차 대전의 비극과 아픔에 맞물린 역사적인 연주로 종교를 뛰어 넘어 범인류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 이 노래를 ‘Have mercy, Lord, on me'라는 영어가사로 녹음한 것입니다. 마태수난곡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부를 수 없습니다. 바흐가 독일어 가사 하나 하나에 음악의 그림을 입히듯 작곡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 곡 만큼은, 게다가 부르는 사람이 캐슬린 페리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꾸밈없이 순수하고 편안한 그녀의 목소리는 이 노래와 가장 잘 어울리며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https://youtu.be/mUeDvVPv8PE

 

더불어 이 녹음에서는 바이올린 솔로를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 노래는 알토 솔로만의 노래가 아니라 바이올린 솔로와의 이중창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녹음에서 바이올린 오블리가토는 데이비드 맥컬럼이 연주하고 있는데 그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영국을 대표하는 연주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연주 보다 적극적으로 음악에 참여하고 있는데 마치 베드로 곁에서 함께 울어 주며, 알토 곁에서 이 기도를 함께 읊어 내듯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듯한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NCIS’라는 드라마를 아실 것입니다. 그 드라마에 더키라는 법의학자가 나오는데 그 역할을 맡은 배우 이름이 데이비드 맥컬럼이며 바로 이 음반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아들입니다.

 

이어지는 코랄은 1642년 요한 리스트가 작사한 유명한 코랄의 5절로서 이 멜로디는 바흐가 그의 교회 칸타타 147번에서 사용했고 그 곡이 독립적으로 인류의 소망이신 예수/Jesus Joy of Man's Desiring’라는 제목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배신했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다시 돌아와 회개하고 용서받은 우리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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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잡을 손

한희철의 얘기마을(16)


마주 잡을 손


얼마 전 원주지방 남녀선교회 지회장들이 모여 교육받는 모임이 있었다. 공문을 받고 여선교회장인 이음천 속장님에게 알렸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속장님은 한사코 안 가겠다고 한다. 손이 이래갖고 어딜 가겠냐며 손을 내민다. 형편없이 갈라지고 터진 틈새를 따라 풀물 흙물이 밸대로 배었다. 어떠냐고, 그 손이 가장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손 아니냐며 얼마를 더 권했지만, 속장님은 막무가내였다.




일찍 남편과 사별한 이음천 속장님, 혼자되어 자식 키우며 농사 지어온 지난 세월을 어찌 말로 다 할까. 속장님은 지금도 무섭게 일을 한다. ‘소 갈 데 말 갈 데 없이’ 일한다고 스스로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위기감에, 어쩌면 쉬 찾아들곤 하는 남편 없는 허전함을 일에 몰두함으로 잊기 위한 자구책으로 일에 자신을 내던져 온 삶이 흰머리 늘어난 오늘까지 계속 되어온 것이다.


흙물 풀물 밴 손, 갈라지고 터진 손을 떳떳하게 잡아 줄, 그렇게 건강하고 따뜻한 손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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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핀 자리

신동숙의 글밭(180)


꽃이 핀 자리




올해도 

꽃이 핍니다


지난해 

꽃 진 자리마다


할아버지 

꽃 진 자리


할머니 

꽃 진 자리


한 세상 살으시고

눈물 같은 씨앗 떨군 자리마다


고운 얼굴

꽃이 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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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신에게 바치는 꽃

신동숙의 글밭(179)


상처, 신에게 바치는 꽃


먼 나라에 저녁답이면 하루도 빠짐없이 강물에 꽃을 띄우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꽃을 바치는 이들에게 신이 말하기를,


"아이야~ 이 꽃은 내가 너에게 보내준 꽃이잖니?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너에게 받고 싶은 꽃은 이 꽃이 아니란다. 해와 비와 바람으로 내가 피워낸 꽃이 아니란다. 아이야~ 네가 피운 꽃을 나에게 다오."


아이가 대답하기를,


"내가 피운 꽃이요? 아무리 고운 꽃잎도 가까이 가서 들여다 보면 상처가 있고, 속에는 잔벌레들이 잔뜩 기어다녀요. 가까이 다가가서 꽃나무를 한바퀴 빙 둘러 낱낱이 살펴 보아도 상처 없는 꽃잎은 하나도 찾을 수가 없는 걸요. 사람의 손이 조화를 만들면야 모를까. 조화를 생화처럼 보이도록 상처와 얼룩을 일부러 점 찍는다지요. 이처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는 다 자기만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하니까요. 신에게 바칠 만한 완벽한 꽃이 나에게는 없는 걸요."


신이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꽃은 너의 아픈 상처란다. 세월이 가도 어둔 가슴에 박혀 쉬 빠지지 않는 별 같은 상처. 그때와 비슷한 순간을 만나면 가시처럼 돋아나는 말 못할 너만의 아픔이 네가 피워낸 가장 아름다운 꽃이란다."




상처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무엇에 의지할 것인가 하는 선택은 언제나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의 영역입니다.


누군가는 가슴 속 상처로 인해 밤이면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나의 상처를 알아줄 만한 이를 찾아 세상을 검색하기도 합니다. 좀 더 승화시켜서 말과 글, 그림으로, 음악으로, 춤으로, 섬김으로 좀 달리 때론 타인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표현하기도 하고요.


저녁답이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혼자 쓸쓸해 하기도 하고, 문득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렁이다가도, 대부분은 일상에 뭍혀 그것이 아픔인 줄도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냥 가슴 속에 차곡차곡 뭍어 두기만 하는, 때로는 그립기까지한 당신의 아픔.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꽃이란? 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인간의 아픔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가 방실거리며 잘 놀다가도 넘어져, 무릎이 까여서 피가 나는 무릎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가던 길 되돌려 엄마에게 달려가는 순간처럼, 그 순간이 함께 아프지만 돌이켜 왔기에 다행이다 싶은 순간.


우리는 매일 넘어지고 늘 아픕니다. 어려서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해 넘어지고, 나이가 들어서는 제 마음을 가누지 못해 매 순간 넘어지고, 또 일어남에 무디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속을 들추어 보면 여전히 아픈.


우리의 마음도 하루를 살아가며, 그 넘어짐과 부딪힘의 모든 미세한 순간마다, 우리의 감각과 삶 사이에는 미세한 염증반응이 일어나고, 그 때 일어나는 모든 희노애락과 아픔들, 한치 앞도 알 수 없음에서 오는 무지로 인한 괴로움.


희노애락과 아픔과 무지와 그 모든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들, 살아 있기에 깨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단지 바람을 바람으로 느낄 수 있는 그 평범하고도 보편적인,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모든 살아 있는 감각들이 피워내는 삶의 꽃. 바로 인간이 피워내는 인생의 꽃. 


내가 피운 꽃은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 그것이 신이 우리 인간에게 바라는 꽃, 재물이 아닐까 하고, 이 저녁 박꽃을 보며 고요히 생각에 잠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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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믿음

한희철의 얘기마을(15)


할머니의 믿음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물녘 올라가 뵌 허석분 할머니는 자리에 누워 있다가 괴로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양 손으로 허리를 짚으신다. 허리가 아파서 잠시 저녁을 끓여먹곤 설거지를 미루신 채 일찍 누운 것이었다. 


할머니는 혼자 살고 계시다. 전에도 허리가 아파 병원을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는데, 병명을 기억하고 계시진 못했지만, 디스크 증세라는 판정을 받은 것 같았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다시 도진 것 같다고 했다. 일을 안 하시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리지만, 할머니는 당장 쌓인 일거리를 걱정했다.


주일 저녁예배. 재종을 치기 위해 조금 일찍 나갔는데, 허석분 할머니가 천천한 걸음으로 교회 마당에 들어서신다. 


“할머니, 허리 아프시면서요.”


그런 할머니 걸음으로라면 할머니 사시는 작실로부터 한 시간은 족히 걸리셨으리라. 


“그래도 하나님께 나와야 하나님이 고쳐 주시지요.”


그날 이후 할머니는 전보다도 더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신다. 뵐 때 마다 “좀 어떠세요?” 여쭈면, “하나님 믿고 겅중겅중 뛰어 다니지요.” 하신다.


그러다가 더 도지면 어떡하나 걱정되는데, 할머니는 아예 모든 걸 하나님께 맡겼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가 젊은 전도사보다도 믿음이 더 좋으시다. 


 <얘기마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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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표충사 계곡,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신동숙의 글밭(178)


밀양 표충사 계곡,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소리가 맑은 벗님이랑 찾아간 곳은 맑은 물이 흐르는 밀양 표충사 계곡입니다. 높은 듯 낮은 산능선이 감싸 도는 재약산 자락은 골짜기마다, 어디서 시작한 산물인지 모르지만, 계곡물이 매 순간 맑게 씻기어 흐르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주말이라 그런지, 표충사에 가까워질수록 휴일을 즐기러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이런 날, 어디 한 곳 우리가 앉을 만한 한적한 물가가 남아 있을까 싶어 내심 걱정도 되었습니다. 


해가 어디쯤 있나, 서쪽으로 보이는 바로 저 앞산 산능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기 전에, 하늘이 어둑해지기 전에는 산을 내려와야 하는 여정입니다. 널찍하게 누워서 흐르는 계곡물 옆에는, 줄지어 선 펜션과 식당과 편의점과 널찍한 놀이터가 있어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북적이고 있는 산놀이 물놀이 풍경을 보니, 몇 해 전 교회 수련회 때 교인들과 함께 한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이 되살아납니다.




우리는 계곡물을 더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누웠던 계곡물이 비스듬히 몸을 조금 일으킨, 산 속 오솔길을 따라서 오르는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집니다. 맑은 산새 소리에 귀가 밝은 벗님은 금새 얼굴빛이 어린 아이가 되었습니다. 벗님은 커다란 짐을 말없이 제 빈 손에 들려주고는,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묵묵히 앞서 걷습니다. 


제가 건네 받은 커다란 짐은 분홍색 돗자리입니다. 새의 날개처럼 가벼운 돗자리를 손에 들고서 가볍게 천천히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그 옛날 돗자리를 손에 들고, 김밥과 과자로 꽉꽉 채운 배낭 가방을, 산등선처럼 불룩해진 모양으로 어깨에 짊어지고서, 학교 뒷산 구덕산으로 참새처럼 신나게 소풍을 가던 초등학생 시절.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마냥 괜히 웃음이 납니다.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해서, 벗의 가방 안을 넌지시 보니까, 무언가를 딛고 올라선 작은 생수병 파란 뚜껑이, 작은 얼굴을 내밀고서 저를 보고 있습니다. 산에선 소용 없을 지갑과 자잘한 소품들을 비운 제 천가방 자리가 헐렁해, 생수병 뚜껑 머리를 쥐고, 제 천가방 넓은 방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벗은 보고도 못 본 척 해줍니다. 그러는 제 입에선 실없는 한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나한테는 커다란 짐을 주고, 자기는 작은 가방을 들고 간다며...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벗의 작고도 무거운 가방을 읊조리며, 괜스레 무거운 마음을 계곡물로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가까이 보이던 높고 낮은 산능선은, 눈 앞에 우뚝우뚝 하늘 높이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다가 안보이다가, 어느새 숲 속입니다. 계곡물은 잠시 누웠는가 싶으면 이내 커다란 바윗돌을 만나 다시금 일어나서 흐르기를 쉼이 없습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한 번 담근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이치를 오늘도 계곡물은 말없이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 순간을 새롭게, 그렇게 물은 쉼없이 흐르기에 맑은 것인지, 제 안에 쉼없이 떠오르는 생각도 계곡물처럼 쉼이 없어서, 머무르는가 싶으면 또 맑게 맑게 그렇게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흐릅니다. 잠시 머무르는가 싶다가도 세차게 달리기 하는 물살을 보며, 땟국물 낀 어릴 적 얼굴을 뽀독뽀독 씻겨 주시던 엄마의 손길 같아서 잠시 아찔해져 정신을 잃기도 합니다.


분홍 돗자리를 넓게 펼만한 곳을 찾아서, 우리의 발걸음은 자꾸만 계곡물을 따라서 오솔길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 갈수록 물길은 좁아지고 사람의 모습도 보기 드문 풍경이 됩니다. 그곳엔 장사를 하는 식당도 펜션도 없습니다. 물가에서 어른들이 고기를 구워 먹으며 한낮의 휴식을 즐기고, 물 속에선 튜브를 탄 아이들이 첨방거리는 모습도 점점 멀어져 어느새 그리운 풍경이 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계곡물가엔 나무 그늘이 있어서 한낮의 더운 해를 가려주고, 분홍 돗자리를 뭉게 구름처럼 펼쳐도 툭 튀어나온 돌멩이에 엉덩이가 베기지 않을 자리를 찾아서, 나무 그늘 울창한 산 속 오솔길을 오르는 고즈넉한 산책길입니다. 오르는 날숨이 가쁘지 않고, 들숨이 차지도 않아 고요한 산책길, 홀가분한 걸음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러다가 문득 먼저 본, 저 먼 산 능선을 좀 보라며 멈추어 서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난 청솔모 기척에 놀라기도 하며, 청빛이 도는 자그맣게 핀 산수국에 똑같이 눈길이 머물기도 합니다.


그리고 표충사 우측으로 완만하게 일어선 계곡을 따라서 거슬러 오르며 한 생각을 이어갑니다. 우리가 지나온 사람들로 북적이던 풍경이 마치 한국의 대형 사찰과 대형 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계곡을 오를 수록 한적해지는 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어느 산 속 암자나 외진 천주교 은둔자들의 성지가 자리 잡고 있을만한 곳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 속에서 첨방거리며 신나는 아이들과 걱정스러운 듯 지척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하늘에 울리던, 널찍하게 누운 계곡물가의 풍경이, 마치 강물처럼 넓게 흐르는 대형·중형 교회에서 보았던 풍경처럼 그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눈 밝은 목회자와 성도가  있어 뿌연 흙탕물 같은 강물 속에도, 쉼없이 먼 길을 흘러온 맑은 계곡물이 끊임없이 섞이어 함께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미칩니다.


계곡물을 거슬러 오르듯, '무리를 떠나 산으로 가시더라.'의 예수처럼, 홀로 고독과 침묵의 산으로 오르는 이 땅의 모든 신앙인들. 홀로 관상 기도의 안식처로 들어가시는 목회자와 성도와 모든 종교인과 신앙인들과 구도인들이 향하는 그 좁은 오름길. 그  뒷모습은 어디를 보나 예수를 닮아 있습니다. 


저는 그 홀로 걷는 좁고 맑은 길, 진리의 원천을 찾아서 걷는 관상 기도의 길, 그 호젓한 산책길을 걷고 있을 어느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석간수를 그려봅니다. 이 땅에 흐르는 모든 물에는 원천인 샘이 있듯, 늘 머리속을 흐르는 생각에도 원천인 샘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생각이 땅으로 뿌리를 내리듯 하늘로 가지를 뻗습니다.


인적이 드문 좁게 일어선 계곡물의 그 홀가분한 오름길을 걸으며, 결혼도 하지 않고 구도의 길을 걸으시는 스님, 신부님, 수녀님의 그 쓸쓸한 듯 호젓한 걸음을 생각합니다. 반면에 같은 구도의 길을 걷지만 결혼과 가정이라는 축복 선물까지 어깨에 짊어지고서, 더러는 안고 가셔야 하는 개신교 목회자의 녹록치 않은 그 삶이 저는 늘 애잔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요?


맑은 벗과 나란히 앉아서 쉴만한 곳, 돗자리를 펼칠만한 호젓하고 맑은 계곡물가를 찾아서 오르는 걸음이, 마치 오늘 저에게 주어진 하루치 구도의 길 같습니다. 밀양 재약산 표충사 계곡물은 어디메서 샘솟기에 자꾸만 흘러 내려오는지, 비가 그쳐도 계곡물은 마르지도 않는지, 그 산물이 이어져 오늘도 강물은 세상 한 복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흐르고 있는 것인지, 


이 궁금증은 산을 다 내려오면서도 씻기지가 않아, 제 방 안에까지 길게 흘러 제 안으로 물길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머물러 제 자신이 그 물길 어디메쯤 걷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지만, 이제는 이 생각의 원천을 저 먼 산 너머가 아닌, 제 가슴 한 복판에 가만히 품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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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

한희철의 얘기마을(14)


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

말은 멍석 펴지듯 노을도 없는 어둠

산 그림자 앞서며 익숙하게 밀려왔다.


밤은 커다란 솜이불

모두를 덮고 모두를 집으로 돌린다.


몇 번 개들이 짖고 나면 그냥 어둠 뿐,

빛도 소리도 잠이 든다.


하나 둘 별들이 돋고

대답하듯 번져가는 고만고만한 불빛들

저마다의 창 저마다의 불빛 속엔

저마다의 슬픔이 잠깐씩 빛나고

그것도 잠깐 검은 바다 흐른다.


그렇다.

밤은 모두를 같은 품에 재워

날마다

살아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일으킨다.


검은 바다를 홀로 지난 것들을.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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