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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59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신동숙의 글밭(281)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엔 매듭 짓지 못하고, 풀리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작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제게 주어진 이 하루도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게 할 뿐입니다. 유약(柔弱)한 가슴에 어떠한 원망이나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내 살과 뼈를 녹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려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품고서도, 몸을 움직이며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갈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멈추어 바라본 순간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분노를 제 가슴에 품고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고요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엄습하던 온.. 2020. 11. 21.
따뜻한 만남 한희철 얘기마을(149) 따뜻한 만남 모든 진료 활동을 마치고 돌아가기 전 군의관은 찬찬히 하루 동안의 안타까움을 말했습니다. 진료를 받은 마을 분들의 대부분이 전해 드린 몇 알의 약만으론 해결되기 어려운 병이었다는 것입니다. 보다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진찰과 치료가 필요한 분들인데, 공연히 허세나 부린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압니다. 그런 하루의 시간이 고마운 게 단지 병명을 짚어주고 몇 알 약을 전해준 데 있지는 않습니다. 쉽지 않은 훈련을 마쳐 피곤할 텐데도 귀대를 앞두고 하루의 시간을 마을 주민을 위해 할애한 그 마음이 무엇보다 고마운 것입니다. 그저 논밭이나 망가뜨리고 당연한 듯 돌아서곤 했던 해마다의 훈련인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대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고마웠던 것입니.. 2020. 11. 20.
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신동숙의 글밭(280) 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저는 바라고 원하는 기도 앞에 언제나 떨며, 두렵고 머뭇머뭇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장소, 어느 종교, 어느 누가 드리는, 어떠한 형태의 기도라고 해도 기도에는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제가 드린 기도대로 이루어질까 싶어서 기도 앞에 언제나 머뭇거리며 주저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특정 종교 생활에 꾸준히 성실히 몸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되는 뒷심은, 기도의 힘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주위에 여러 종교인들의 얘기를 통해 종종 듣게 되면서 그러리라 짐작해봅니다. 하지만 그 기도란 우리네 어머니들이 장독 위에 정안수를 떠 놓으시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홀로 두 손으로 빌던 소박한 기도가 예배당에서 드.. 2020. 11. 20.
승학이 엄마 한희철 얘기마을(148) 승학이 엄마 교회 바로 앞에 방앗간이 있습니다. 단강이 얼마나 조용한 동네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방앗간입니다. 평소엔 몰랐던 단강의 고요함을 방아 찧다 멈춘 방앗간이 가르쳐줍니다. 방아를 멈추는 순간 동굴 속 어둠 같은 고요가 시작됩니다. 익숙해진 덕에 많이는 무감해졌지만 그래도 방아 찧는 소리가 요란한 건 사실입니다. 얼마 전 승학이 엄마를 만났더니 미안하다고 합니다. 미안한 일이 없을 텐데 뭐가 미안할까 싶어 물으니, 이틀 전인 주일날 예배시간에 방아를 찧었다는 것입니다. 가능한 피하려고 했는데 손님의 다급한 청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전혀 몰랐던 일입니다. 이야기한 지난 주일만 해도 별 불편함 없이, 아니 아무런 불편함 없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 2020. 11. 19.
하늘 그릇 신동숙의 글밭(279) 하늘 그릇 그릇에 담긴 물을 비우자마자얼른 들어차는 하늘처럼 나를 채우려는 이 공허감과 무력감은얼른 들어차려는 하늘의 숨인가요? 나를 비우고 덜어낸 모자람과 패인 상처와 어둔 골짜기마다 하늘로 채우기를 원합니다.나의 몸은 하늘 그릇입니다. 더 가지려는 한 마음이 나의 모자람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시고 남을 헐뜯으려는 한 마음이 나의 패인 상처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시고 높이 오르려는 한 마음이 나의 어둔 골짜기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를 채우려는 이 없음이없는 듯 계시는 하느님인 줄 스스로 알게 하소서. 나의 몸은 하늘을 담는 하늘 그릇입니다. 2020. 11. 19.
한 줌 진실 한희철 얘기마을(147) 한 줌 진실 장에 다녀오는 길, 단강으로 들어오는 버스 안에서 듣게 된 이웃마을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이필로 속장님이 전했습니다. 기름 한 종지 더 얻자고 개치(부론)까지 갔다가 결국은 한 종지만 얻게 됐다는 이야기에 우리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 옆자리에서 이야길 듣던 중년신사가 “아, 그것 참 재미난 얘기네요. 아주머니, 그 얘기 차근차근 다시 한 번 해 보세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얘길 글로 쓰면 좋은 글감이 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웃음이 다시 터졌던 건 속장님이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이 또 있드라구요, 글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헛간에 걸어놓은 못쓰게 된 살림 도구들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싶은 당신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그 이야기를 시시.. 2020. 11. 18.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샘물 신동숙의 글밭(278)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샘물 글을 다 쓴 후자꾸만 손이 갑니다열 번도 가고 백 번도 가는 일 바르게 고치고 또 고치고부드럽게 다듬고 또 다듬으며 글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쉼 없는 일 문득 이 세상에서 일필휘지가 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사색으로 흐릅니다 한 순간 떨군 눈물 한 방울한 순간 터트린 웃음 한 다발풍류 장단에 춤추는 민살풀이 우리들 모든 가슴마다이미 공평하게 있는 샘물이 샘솟아 올라 순간이 영원이 되는 일 본래 마음이 휘 불면일필휘지(一筆揮之)아니할 도리가 없답니다 2020. 11. 18.
굽은 허리 한희철 얘기마을(146) 굽은 허리 변관수 할아버지의 허리가 더 굽었습니다. 곧은 ‘ㄱ’에서 굽은 ‘ㅈ’ 모양이 되었습니다.저렇게 저렇게 허리가 굽어 굽은 허리가 땅에 닿을 때쯤이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말 할아버지.땅에 닿을 듯한 허리로 할아버지가 길을 갑니다. - (1992년) 2020. 11. 17.
구멍 난 양말 묵상 신동숙의 글밭(277) 구멍 난 양말 묵상 -라오스의 꽃 파는 소녀, 강병규 화가- 몸에 작은 구멍 하나 뚫렸다 하여멀쩡한 벗님을 어떻게 버리나요 내 거친 두 발 감싸 안아주느라맥없이 늘어진 온몸이 미안해서 어디까지나 나의 게으름 탓에 제때 자르지 못한 내 발톱에 찔려 아픈 님을 작은 틈으로 비집고서 세계 구경 나온 발가락은 웃음도 되고 서러움도 되었지요 실과 바늘로 한 땀 한 땀꿰어주시던 어진 손길은 묵주알처럼 공굴리는묵상의 기도손입니다 2020.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