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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40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 60: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걸어오는 동안 젖은 바짓단이 온 종일 축축합니다.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습니다. 이런 날에 듣는 첼로 소리는 더없이 깊은 울음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어지럽지만 가끔은 그런 분잡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소란스러움이 우리 영혼을 어지럽힙니다. 홍수 통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말이 넘치는 .. 2021. 9. 30.
치화 씨의 가방 치화 씨가 교회 올 때 가지고 다니는 손가방 안에는 성경과 찬송, 그리고 주보뭉치가 있습니다. 빨간 노끈으로 열십자로 묶은 주보뭉치, 한 주 한 주 묶은 것이 제법 굵어졌습니다. 주보를 받으면 어디 버리지 않고 묶었던 노끈을 풀러 다시 뭉치에 챙깁니다. 아직 치화 씨는 한글을 모릅니다. 스물다섯, ‘이제껏’이라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집안에 닥친 어려움으로 어릴 적부터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찬송가 정도는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서툴지만 곡조도 따라합니다. 반의 반 박자 정도 늦은, 그렇게 가사를 찾는 그의 안쓰러운 동참을 하나님은 기쁘게 들으실 겁니다. 주기도문도 서툴지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글을 모르지만 차곡차곡 주보를 모으는 치와 씨, 치화 씨는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모으고 있.. 2021. 9. 30.
하룻강아지 ‘한국전기통신’이라는 사보(89년 3월호)를 보다보니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에 대한 글이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하룻’이라는 말은 ‘하릅’이 맞다는 것이다. ‘하릅’이라는 말은 소나 말, 개 등의 한 살 된 것을 뜻하는 말이다.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되는, 그래서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라면 범이 아니라 세상 아무리 무서운 게 있어도 무서워할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하루보다는 한 살 된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함이, 타당성이 있지 싶다. 점점 외래어로 대치되어가는 순 우리말, 말에도 생명이 있다던데 같이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열 살까지의 동물의 나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살(하릅), 두 살(이릅), 세 살.. 2021. 9. 28.
푸른 명태찜 한가위 명절 마지막 날 늦잠 자던 고1 딸아이를 살살 깨워서 수운 최제우님의 유허비가 있다 하는 울산 원유곡 여시바윗골로 오르기로 한 날 번개처럼 서로의 점심 때를 맞추어 짬을 내주시고 밥도 사주신다는 고래 박사님과 정김영숙 언니 내외 끓는 뜨거운 돌솥밥과 붉은 명태찜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간직했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언니와의 첫만남에서 서로가 짠 것도 아닌데 둘 다 윤동주와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똑같이 챙겨온 이야기 그것으로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우리는 단번에 첫만남에서부터 바로 자매가 된 이야기 동경대전에 나오는 최수운님의 한시를 풀이해서 해설서를 적으신 고래 박사님의 노트 이야기 청수 한 그릇 가운데 떠놓고 모두가 둘러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천도교의 예배와 우주의 맑은 기운을 담은 차 한.. 2021. 9. 28.
석 삼 방문이 활짝 열리며 아들이 바람처럼 들어와 누웠는 엄마 먹으라며 바람처럼 주고 간 종재기 푸른 포도 세 알 누가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누가 한국 사람 아니랄까봐 피 속에 흐르는 석 삼의 수 더도 덜도 말고 석 삼의 숨 하나 둘 셋 하늘 땅 사람 2021. 9. 27.
그리움 좀체 마음 내비치지 않던 산이 찾아온 가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골짝마다 능선마다 붉게 타올라 지켜온 그리움 풀어헤친다 사람의 마음도 한때쯤은 산을 닮아 이런 것 저런 것 다 접어놓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붉은 빛 그리움으로 번져갈 수 있었으면 - 1989년 2021. 9. 27.
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하는 날, 이날 당신은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이에 항상 더 많이 행하고,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며, 항상 길 위에 있으십시오. 결코 되돌아가지 말고, 결코,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안셀름 그린,, 김영룡 옮김, 분도출판사, p.41에 인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명절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고속도로를 가득 채운 차량의 행렬도 보이지 않고, 기차도 창가쪽 좌석에만 승객을 앉혔다 합니다. 가족들조차 8명 이상 모일 수 없으니, 옛날처럼 시끌벅적한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희도 아들과 딸네 식구들을 따로 따로 맞아야 했습니다. 모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온 아이들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벽에 붙.. 2021. 9. 26.
반가운 편지 숙제장을 한 장 뜯었을까. 칸이 넓은 누런빛 종이에 연필로 쓴 글씨였다. 서너 줄, 맞춤법이 틀린 글이었지만 그 짧은 편지가 우리에게 전해준 기쁨과 위로는 너무나 컸다. 잘 있노라는, 주민등록증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마 초등학교에 다니는 주인 아들이 썼음직한 편지였다. 서울로 갔다가 소식 끊긴지 꼭 한 달, 박남철 청년이 잘 있다는 편지가 온 것이다. 그가 있는 곳은 경기도 파주였다. 그동안 낙심치 말고 기도하자 했지만 모두의 마음속엔 어두운 예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입을 모으는 것을 보면 어두운 예감이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알 수 있다. 서둘러 답장을 썼다. 이번 주엔 아버지 박종구 씨가 파주를 다녀오기로 했다. 아버지를 따라 남철 씨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2021. 9. 26.
용담정 툇마루 경주 구미산 용담정 툇마루에 앉으며 먼지처럼 떠돌던 한 점 숨을 모신다 청청 구월의 짙은 산빛으로 초가을 저녁으로 넘어가는 구름으로 숲이 우거진 좁다란 골짝 샘물 소리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수운 최제우님의 숨결로 용담정에 깃든 이 푸른 마음들을 헤아리다가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달을 보며 빌던 정성과 만난다 시천주(侍天主) 가슴에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이란 몸종이던 두 명의 여인을 한 사람은 큰며느리 삼으시고 또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으신 하늘처럼 공평한 마음을 헤아리다가 용담정 산골짜기도 운수 같은 손님이 싫지 않은지 무료한 마음이 적적히 스며들어 자리를 뜨기 싫은데 흙마당에 홀로 선 백일홍 한 그루 아직 저 혼자서 붉은 빛을 띄어도 마땅히 채울 것 없는 마음 그릇에 모실 만한 것이란 초가을.. 2021.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