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 60: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걸어오는 동안 젖은 바짓단이 온 종일 축축합니다.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습니다. 이런 날에 듣는 첼로 소리는 더없이 깊은 울음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어지럽지만 가끔은 그런 분잡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소란스러움이 우리 영혼을 어지럽힙니다. 홍수 통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말이 넘치는 이 시대에 참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거짓이 진실의 옷을 입고 등장하고, 파렴치함이 정의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그 소란 속에서 우리 영혼은 점점 파리해집니다. 넓고 큰 세계에 대한 비전을 잃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지식의 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이지만, 영혼의 국량은 점점 협소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 겁니다.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고, 숲을 거쳐온 바람처럼 청량한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 1:8)는 말이 실감납니다. 뭔지 모를 결핍감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노자의 말 가운데 제가 늘 명심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도덕경 44장 중).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도 같은 교훈을 줍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 6:6) 누가 이 말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우상으로 숭배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마모나스mamonas’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아람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물’ 혹은 ‘돈’이라는 단어를 두고 굳이 이 단어를 택하신 것은 ‘맘몬’은 신격화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돈은 우리의 가치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입니다. 거라사의 광인 속에 머물고 있던 군대 귀신들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비탈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습니다. 멈출 수 없음, 그것이 광기의 본질입니다.

족한 줄 모르고 ‘조금 더’ 차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은 망신을 자초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탄 이들은 멈출 줄을 몰라 앞만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위태로움에 빠지곤 합니다. 만족함과 멈출 줄 앎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를 획득한 이들은 거기에 더해 명예까지 얻으려 하고, 더 나아가 권력까지 쥐고 싶어합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의무는 지키지 않은 채, 명예라는 폼 나는 지위까지 다 얻고 싶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영리 추구와 양립할 수 없는 지위를 모두 차지하는 순간, 영리 추구와는 양자택일 관계였던 명예는 자본주의 승자의 전리품으로 변화한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명예는 승자가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되고, 승리하지 못한 자에겐 명예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조건도 제공되지 않는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p.133-134)

이것은 오늘의 현실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자기 시대의 전도된 현실을 함축적인 말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사 5:8) 권력자들은 탐나는 밭이나 집이 있으면 주인을 속여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흉년으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연대의 뜻으로 곡식을 빌려주는 대신 그들은 집이나 밭을 담보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지 못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만들어서 결국은 그 땅과 집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인간의 삶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땅과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변질된 오늘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경고는 참으로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서민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경험하며 가까스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데, 소위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이들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예언자의 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말도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욕망의 길을 따르다가는 영혼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니까, 어떤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줄일 수 있어요?” 이 질문 속에는 욕망을 줄이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태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일단 “그냥 해보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싱거운 대답에 싱거운 웃음을 지었습니다. 소비자본주의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뭔가를 소비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길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욕망이나 취미 더 나아가 생각까지 대중문화와 매체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습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의 허영심을 조장합니다. 소비하지 않음이 죄인 것처럼 우리를 몰아댑니다. 욕망은 발생하는 즉시 실현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가끔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 포도는 셔서 못 먹어.” 정신 승리법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자유로워집니다. 먼저 질문에 대해 제가 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하겠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 속에 결핍감이 큰 것 같습니다. 마음의 스산함을 가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선망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오롯이 누리려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농어촌에 사시는 분들 가운데 이 시대의 지혜자처럼 여겨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제게 배송된 잡지 ‘전라도닷컴‘에서 읽은 이야기가 좋아서 제 수첩에 적어 놓았습니다.

“묵고 사는 것은 힘들어도 콩 하나라도 서로 나놔묵고 살고, 옛날에가 재밌었어. 백원 벌문 천 원 모탤라는 욕심있듯이 인자는 세상이 좀 각박해졌어. 돈에 눈이 떠진께 재미난 시상이 가불었어.“(안마도 어부 서용진씨)

“나는 바다가 젤로 재밌어. 그런께 이것 하제. 날마다 하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젤로 행복한 사람이여.“(안마도 어부 김영식씨)

‘돈에 눈이 떠진께 재미난 시상이 가불었어‘라는 말은 우리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마치 시 구절처럼 여겨집니다. ‘재미난 세상‘은 어쩌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무와 욕망 사이를 오가는 동안 재미는 사라지고 삶은 잿빛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오전에 ‘웨슬리 설교 강의‘를 녹화했습니다. 44편의 설교 가운데 이제 42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전달하는 저의 부족함을 감안하더라도 웨슬리의 설교는 참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나 칼뱅처럼 많은 신학적 저술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설교 속에는 감리교 신학과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저의 선생님은 설교가 모든 신학을 종합하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말에 가장 부합하는 분이 존 웨슬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론신학과 성서신학, 실천신학과 윤리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설교 ‘자기 부인否認‘에서 웨슬리는 ‘십자가를 견디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을 구별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십자가를 견디는’ 일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온순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참을 때, 그때는 적절하게 ‘십자가를 견딘다.‘고 말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을 자진하여 감수할 때, 자신의 뜻에 상반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게 될 때, 또한 현명하고 은혜로우신 창조주의 뜻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을 선택할 때, 우리가 적절하게 말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됩니다.“(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 설교전집 3>, 조종남·김홍기·임승안 외 공역, 대한기독교서회, p.255-6)

믿음으로 살려는 이들은 십자가를 견디기도 해야 하지만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은 마치 껍질이 깨지는 순간과 마찬가지입니다. 아픔과 충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길 위의 적당한 지점에 멈추어 선 채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것이지요. 잊지 않으셨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향해 길 떠난 순례자들입니다. 어렵더라도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늡늡한 마음으로 우리 인생의 경주를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021년 9월 3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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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화 씨의 가방


치화 씨가 교회 올 때 가지고 다니는 손가방 안에는 성경과 찬송, 그리고 주보뭉치가 있습니다. 빨간 노끈으로 열십자로 묶은 주보뭉치, 한 주 한 주 묶은 것이 제법 굵어졌습니다. 주보를 받으면 어디 버리지 않고 묶었던 노끈을 풀러 다시 뭉치에 챙깁니다.

아직 치화 씨는 한글을 모릅니다. 스물다섯, ‘이제껏’이라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집안에 닥친 어려움으로 어릴 적부터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찬송가 정도는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서툴지만 곡조도 따라합니다. 반의 반 박자 정도 늦은, 그렇게 가사를 찾는 그의 안쓰러운 동참을 하나님은 기쁘게 들으실 겁니다.


주기도문도 서툴지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글을 모르지만 차곡차곡 주보를 모으는 치와 씨, 치화 씨는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눈떠가는 자신의 삶을 챙기고 있는 겁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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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강아지

 


‘한국전기통신’이라는 사보(89년 3월호)를 보다보니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에 대한 글이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하룻’이라는 말은 ‘하릅’이 맞다는 것이다. ‘하릅’이라는 말은 소나 말, 개 등의 한 살 된 것을 뜻하는 말이다.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되는, 그래서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라면 범이 아니라 세상 아무리 무서운 게 있어도 무서워할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하루보다는 한 살 된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함이, 타당성이 있지 싶다.


점점 외래어로 대치되어가는 순 우리말, 말에도 생명이 있다던데 같이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열 살까지의 동물의 나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살(하릅), 두 살(이릅), 세 살(사릅), 네 살(나룹), 다섯 살(다릅), 여섯 살(여습), 일곱 살(이롭), 여덟 살(여듭), 아홉 살(아습), 열 살(열릅)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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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명태찜



한가위 명절 마지막 날
늦잠 자던 고1 딸아이를 살살 깨워서

수운 최제우님의 유허비가 있다 하는
울산 원유곡 여시바윗골로 오르기로 한 날

번개처럼 서로의 점심 때를 맞추어 짬을 내주시고
밥도 사주신다는 고래 박사님과 정김영숙 언니 내외

끓는 뜨거운 돌솥밥과 붉은 명태찜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간직했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언니와의 첫만남에서 서로가 짠 것도 아닌데 둘 다
윤동주와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똑같이 챙겨온 이야기

그것으로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우리는 단번에
첫만남에서부터 바로 자매가 된 이야기

동경대전에 나오는 최수운님의 한시를 풀이해서 해설서를 적으신 고래 박사님의 노트 이야기

청수 한 그릇 가운데 떠놓고 
모두가 둘러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천도교의 예배와

우주의 맑은 기운을 담은 차 한 잔 올리는 다례법과 이어지는 한국의 고대 차례법 이야기

예수님과 제자들의 두레밥상 이야기
석가모니와 제자들의 대화가 경전이 된 이야기

김치와 물김치와 멸치와 김과 부추전 영양 반찬처럼  
둥근 이야기들을 푸짐하게 풀며 나누다 보니

숟가락과 젖가락은 쉬질 않았건만
밥그릇에 밥은 천천히 줄고

돌솥에 끓던 누룽지 숭늉은 한 김 식어 푹 퍼져 
먹기 좋은 순한 물밥이 되어 날 어린 시절로 데려온다

문득 명태찜 둥근 접시를 보니까
명태살들이 우리 모녀 앞으로 다 밀려와 있다

분명히 나는 바닷가 저쪽으로 간간히 밀어보내었는데
파도에 밀려 도로 해변가로 떠밀려온 물고기들처럼 

둥글고 커다란 명태찜 접시가 
울산의 푸른 앞바다처럼 출렁이고 있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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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삼

 

 



방문이 활짝 열리며
아들이 바람처럼 들어와

누웠는 엄마 먹으라며 
바람처럼 주고 간 종재기

푸른 포도 세 알
누가 시키지도 않았을 텐데

누가 한국 사람 아니랄까봐
피 속에 흐르는 석 삼의 수

더도 덜도 말고
석 삼의 숨

하나 둘 셋
하늘 땅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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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좀체 마음 내비치지 않던 산이 
찾아온 가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골짝마다 능선마다 붉게 타올라 
지켜온 그리움 풀어헤친다

사람의 마음도 한때쯤은 산을 닮아 
이런 것 저런 것 다 접어놓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붉은 빛 그리움으로 번져갈 수 있었으면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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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하는 날, 이날 당신은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이에 항상 더 많이 행하고,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며, 항상 길 위에 있으십시오. 결코 되돌아가지 말고, 결코,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안셀름 그린,<길 위에서>, 김영룡 옮김, 분도출판사, p.41에 인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명절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고속도로를 가득 채운 차량의 행렬도 보이지 않고, 기차도 창가쪽 좌석에만 승객을 앉혔다 합니다. 가족들조차 8명 이상 모일 수 없으니, 옛날처럼 시끌벅적한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희도 아들과 딸네 식구들을 따로 따로 맞아야 했습니다. 모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온 아이들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벽에 붙여놓은 키를 재는 판에 서서 자란 키를 자랑했습니다. 거의 넉달만에 만났는데 각각 약 4cm쯤 자라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그 놀라운 성장력이 희망이겠지요?

저희는 추석에 음식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간단한 먹을거리를 장만한 아내가 ‘그래도 전(煎)은 좀 준비해야 하지 않나?’ 하고 말했습니다. 웬일로 집에서 전을 부치려나보다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공덕역 근처에 있는 유명한 전 가게에 가서 구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짐꾼으로 발탁되어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전을 구입하려는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각자 커다란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얇은 비닐장갑을 낀 채 그들은 무드럭지게 쌓여있는 전 가운데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담았습니다. 가게 바깥 대로변에는 차들이 즐비하게 서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 줄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저는 바깥 도로변에 서서 아주 무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가족들이 수다를 떨며 전을 부치고 음식을 장만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구나’, ‘아니, 그런데 명절에는 왜 꼭 전을 먹어야 하는 거야?’,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각종 재료를 튀겨내는 것이 번거롭긴 하지만 잔치 기분은 나겠구나’,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야?’.

뜬금 없이 서홍관 시인의 ‘어머니 알통’도 떠올랐습니다. 시인은 아홉 살 적 기억을 떠올립니다. 뒤주에서 쌀 한 됫박을 꺼내시던 어머니가 문득 아이를 보고 웃음 띤 얼굴로 말합니다. “내 알통 봐라.” 시인에게 그 때의 일이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때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모처럼 어머니 집에 들른 시인의 밥상을 차리느라 어머니가 냉장고를 열고 게장을 꺼내시다가 그만 왈칵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주방은 온통 간장으로 넘쳐 흘렀고, 그 상황이 민망했던 팔십 세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말씀하십니다. ‘손목에 힘이 없다’, ‘이제는 병신 다 됐다’. 짤막한 시 속에 어머니의 한 평생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이 두 사건 사이의 갈피에 묻혀 있었지만요. 시인의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느껴집니다.

그늘이 있어 서 있던 자리에 해가 들어올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후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나타날 거라 예상했지만, 득의의 표정을 짓고 있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전을 장만했으니 추석 준비는 거의 끝난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아이들이 오고 가는 짬짬이 청소와 설거지를 반복하다가도, 조금 한가해지면 서재에 앉아 가벼운 읽을거리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언론인인 임재경 선생님의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님의 대담집 <문학과의 동행>, 국문학자 겸 민속학자인 김열규 선생님의 <이젠 없는 것들>을 두서없이 설렁설렁 읽었습니다. 어쩌다보니 다 옛 기억들을 더듬는 책들이었네요. 이건 순전히 명절 탓입니다. 김열규 선생님의 책은 제목만 봐도 갖가지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사라진 소리와 냄새들, 삼삼한 정경들을 돌아본 셋째 마당의 제목은 ‘귀에 사무치고 코에 서린 것들’입니다. 제목 속에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낙숫물 소리, 타작 소리, 다듬이 소리, 아낙네들 떨이하는 소리, 방아 소리, 풀피리, 버들피리 소리, 닭 울음, 황소 울음, 할아버지 담뱃대 터는 소리, 할머니 군소리, 깨, 콩 볶는 냄새, 술 익는 냄새, 누룽지, 숭늉, 처마 끝 고드름, 처마 밑 제비집. 이런 소리와 냄새, 그리고 그런 정경에서 멀어진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그리운 시절입니다. ‘얼굴’이라는 노래 기억하시는지요? 우리가 젊은 시절부터 불렀던 이 노래가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다 하여 놀랐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 때 얼굴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이 가사의 핵심은 ‘무심코’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각인된 어떤 기억이 예기치 않은 순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는 정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소월도 같은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이상하지요? 그리움이라는 말 그 자체 속에 어떤 마술이라도 걸려 있는 것일까요? 코로나19 시대여서인지 ‘그립다’는 단어가 더 자주 떠오릅니다. 심심풀이로 성경에서 ‘그리워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꽤 많지만 몇 구절만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시 63:1)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시 84:2)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내 두 손을 펴 들고 기도합니다. 메마른 땅처럼 목마른 내 영혼이 주님을 그리워합니다.”(시 143:6)


“나는 임의 것, 임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아 7:10)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 그가 전해 줄 때에, 나는 더욱더 기뻐하였습니다.”(고후 7:7)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빌 1:8)


“갓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벧전 2:2)

어느 구절 할 것 없이 그리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동료들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 속에 있는 거칠고 날선 것들을 부드럽게 만들어 줍니다. 아무 것도 그리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위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리움은 ‘나’는 ‘너’를 통해서만 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인간일 수 없음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삶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이런 말로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 3:14)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을 가리켜 세상 곳곳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벧전 1:1)이라 칭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길손과 나그네로 살던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은 더 나은 곳 곧 “하늘의 고향”(히 11:16)을 찾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움이 우리를 밀고 갈 때도 있고, 우리를 앞으로 잡아당기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방탄소년단(BTS)이 유엔 총회 특별 행사 가운데 하나인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DG) 개회 세션에서 청년세대와 미래세대를 대표해서 한 연설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멈춘 줄 알았는데, 분명히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런 데 있습니다. 느닷없는 운명의 타격을 받으면 잠시 동안 당황스러워하지만 다음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합니다. 미래 세대에 대한 음울한 전망이 도처에서 터져나옵니다. 그렇지만 BTS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너무 어둡게만 생각하진 않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세상을 위해 직접 고민하고, 노력하고, 길을 찾고 있는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페이지가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엔딩이 정해진 것처럼 말하진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변화에 겁먹기보다는 ‘웰컴’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가자는 것입니다. 존재의 용기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사하라 사막 인근에서 은수자로 살다가 순교한 샤를 드 푸꼬의 ‘의탁의 기도’를 저는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겨 드리오니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궁극적 신뢰입니다. 그 신뢰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계절은 추분에 접어들었습니다. 진정한 가을의 시작입니다. 허장성세를 거두고 내적으로 깊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 속을 걸어가십시오. 평화를 빕니다.

2021년 9월 2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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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편지



숙제장을 한 장 뜯었을까. 칸이 넓은 누런빛 종이에 연필로 쓴 글씨였다. 서너 줄, 맞춤법이 틀린 글이었지만 그 짧은 편지가 우리에게 전해준 기쁨과 위로는 너무나 컸다.


잘 있노라는, 주민등록증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마 초등학교에 다니는 주인 아들이 썼음직한 편지였다.


서울로 갔다가 소식 끊긴지 꼭 한 달, 박남철 청년이 잘 있다는 편지가 온 것이다. 그가 있는 곳은 경기도 파주였다.


그동안 낙심치 말고 기도하자 했지만 모두의 마음속엔 어두운 예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입을 모으는 것을 보면 어두운 예감이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알 수 있다.


서둘러 답장을 썼다. 이번 주엔 아버지 박종구 씨가 파주를 다녀오기로 했다. 아버지를 따라 남철 씨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불행한 삶이라면 그나마 고향에서 아는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싶다.


엄마만 살았어도 그렇게 아들을 내보내진 않았을 거라며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허석분 할머니는 편지가 왔다는 말을 들으시고 역시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고맙네유. 새벽마다 할 줄두 모르는 기도를 하면서, 그래두 하나님이 지켜 달라구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셨나 봐유.”


사회가, 사람이 아주 악하지만은 않다는 신뢰감이, 팔자걸음, 히죽 웃음 남철 씨 모습과 함께 마음에 담긴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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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정 툇마루



경주 구미산 용담정 툇마루에 앉으며
먼지처럼 떠돌던 한 점 숨을 모신다

청청 구월의 짙은 산빛으로 
초가을 저녁으로 넘어가는 구름으로

숲이 우거진 좁다란 골짝 샘물 소리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수운 최제우님의 숨결로

용담정에 깃든 
이 푸른 마음들을 헤아리다가

장독대 위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달을 보며 빌던 정성과 만난다

시천주(侍天主) 
가슴에 하느님을 모시는 마음이란

몸종이던 두 명의 여인을
한 사람은 큰며느리 삼으시고

또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으신 
하늘처럼 공평한 마음을 헤아리다가

용담정 산골짜기도 운수 같은 손님이 싫지 않은지
무료한 마음이 적적히 스며들어 자리를 뜨기 싫은데

흙마당에 홀로 선 백일홍 한 그루
아직 저 혼자서 붉은 빛을 띄어도

마땅히 채울 것 없는 
마음 그릇에 모실 만한 것이란

초가을 저녁 
없는 하늘 한 줌 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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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남철 씨



불쌍한 남철 씨.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추석 지나 친척 네를 따라 서울로 일하러 간 박남철 청년이, 서울로 간지 하루도 못 되어 집을 나가 이제껏 소식이 없다.


농사일 그것도 지게일 밖에 모르는 남철 씨, 그의 순박한 모자람을 감쌀 건 주위의 이해와 사랑뿐인데, 서울 그 복잡하고 검은 손길 많은 거리에서 길을 잃었다면 그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지.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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