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의《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2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5. 4. 23. 15:40

말씀에 빛을 뿌리는 묵상과 메시지

-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

 

 

1.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의 경험이다. 내 독서 경험의 반경에서 좀 과감하게 판단하자면 그는 이 땅의 목사들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목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목사에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은, 특히 이 땅에서 말씀이 유통되는 지형을 감안할 때, 단순한 칭찬 이상의 함의를 띤다. 그가 매우 섬세하게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하나님 말씀을 공들여 조탁하는 세공술로 전이되어 글과 함께 독자가 한없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감화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고, 겉 폼을 잔뜩 잡고 온갖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는다고 만들어지는 세계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글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간명하고 투명해지고 있다. 뒤틀리기보다 안정된 글의 리듬은 삶을 대하는 그의 정제된 태도를 반영하거니와, 동시에 그의 영성이 하나님의 품에 깊이 안긴 채 유영하고 있는 신호 같기도 하다.

 

동서양의 고전과 영성가의 명언, 시인의 정제된 시구들이 풍성하게 인용되고 접속되지만 그 모든 인용과 참조의 글들조차 그의 글 속에 용해되면서 온전히 그의 말 가운데 성육되는 진경이 그의 글 가운데 펼쳐진다. 따라서 그처럼 특출하게 글을 조탁하는 솜씨는 타고난 잔재주가 아니라, 그가 성실하게 개척해나간 숱한 책읽기 경험과 삶의 공부, 신앙의 내성을 거쳐 일구어낸 통찰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글쓰기의 진경이 이번에 나온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그가 이전에 펴낸 일반 에세이집과 다르게 이 책은 성경 본문을 화두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그 성경은 이 책에서 요한복음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요한복음 주해나 강해의 성격으로 국한시켜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그는 한국교회 강단에 전혀 색다른 성서 강해나 주해의 실험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색깔은 김기석 목사 고유의 체취로 풍성하면서도 독창적인 요한복음 해석의 보화들로 넘실거린다.

 

이 책의 구성부터가 흥미롭다. 저자는 요한복음 본문을 중심으로 모두 9장의 설교 메시지를 깔면서 그 전후로 또 다른 9편의 성서 에세이를 배치하는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전자가 경어체로 발견과 각성, 권면과 기원의 형식을 쫓아 요한복음의 행간을 헤집고 있다면, 후자는 평어체로 분석과 해석, 묵상과 성찰의 방식에 따라 본문을 촘촘히 조명하고 있다.

 

 

 

 

2.

 

당연한 지적이지만 그가 보기에도 성경은 그 전문가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지극하게 살아내는 방식으로 성경을 공들여 묵상할 권리가 있다. 흔히 느끼듯, 성경의 묵상은 본문에 압도되어 그 문자적 논리를 따라가는 식물성의 궤적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그렇게 식물적이지 않다. 묵상은 마치 사자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그르렁거리면서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로 맛보기도 하고, 씹기도 하는 것처럼 텍스트와 오감으로 만나는 것이다.”(4-5쪽)

 

그러나 그렇게 전투적이고 도전적인 성경 묵상의 자세가 오감의 독법을 지나 그의 가지런한 글속에 정돈될 때 그의 말들은 조야한 묵상의 찌끼가 사라지고, 놀라워라, 한 송이 꽃처럼 부드러운 초청과 권유의 메시지로 거듭난다.

 

이처럼 그의 글쓰기는 묵상의 발톱과 이빨을 생짜배기로 드러내는 만용과 정반대편에서 치열한 도전과 투쟁의 몸짓을 겸손한 말의 품에 쟁여두는 부드러움의 해석학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자기방어적인 변명을 위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설득과 권면을 위한 목회적인 부드러움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의 성경 해석에서 그는 그 말씀에 안주하기보다 모험하며 불편함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신을 내던지는 활공의 길을 택한다. 도저히 기존의 권위자들이 쳐놓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 안주적인 성경 묵상에 도취한 세태를 비판하면서 그는 따끔하게 일갈한다.

 

“달콤한 말에는 밑줄을 긋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불편하지도 위험하지도 않게 되었다. 빚을 탕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은 현실적합성이 없다며 도외시하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예언자들의 음성은 모른 척 외면해 버린다.”(84쪽)

 

3.

 

그렇게 요한복음을 용감하게 읽고 부드럽게 드러낼 때 요한복음의 성육하신 예수는 이처럼 시적인 아우라를 걸치고 재조명된다.

 

“소란한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는 마치 숲속의 빈 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와 잠시만 함께 앉아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절로 잠잠해지는 사람…”(16-17쪽)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외아들로 오셔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설파하며 ‘함’에 앞서 ‘있음’의 가치를 깨쳐 보여준 게 바로 요한복음의 핵심적 ‘복음’이자 메시지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바람과 같다고 했을 때 그 해당 구절은 바람의 이미지에 대한 풍요로운 상상과 함께 어우러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점입가경을 이처럼 아름답게 제시한다.

 

“바람의 ‘있음’은 언제나 사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난다. 바람과 만난 나뭇잎은 살랑거리며 설렘을 드러내고, 호수의 물은 바람의 부름에 물결로 응답하고, 바람을 탄 매는 높은 하늘을 유영하듯 난다. 성령으로 난 사람에게는 억지가 없다. 시끄럽지 않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사람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거기 있어 생명을 일깨우는 사람, 그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란다.”(44쪽)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이미지를 상투적인 성령 충만의 경험으로 연계시켜 얼마든지 투박하게 평균치 교인 대중의 인식에 호응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그 상투적인 투박함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공교롭게 그 이미지의 실재를 조탁하여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함을 감추고 사는 그저 그런 사람마저도 신령한 작품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기발한 상상에 의지할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귀찮은 선악과 이야기도 새로운 해석의 돌파구를 연다. 요한복음의 존재론적인 숭고함의 신학적인 기틀 위에서 그가 재조명하는 바, “성경의 이야기꾼들이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려는 것은 도덕적 분별력의 확장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을 척도로 삼는 일의 위험성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본다. 그런 바라봄 혹은 판단이야말로 모든 폭력의 뿌리이다. 예수의 시선은 전복적이다. 가장 거룩한 척 하는 이들에게서 위선을 보고,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서 거룩함을 본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눈에서 ‘티끌’을 볼 때 예수는 그들의 가슴에 있는 ‘눈물’을 본다.”(47쪽)

 

사소한 듯 여겨지는 지극히 작은 생명 속에서 거룩함과 눈물을 보는 예수의 시선은 곧 이 땅에 일그러진 종교, 특히 기독교의 얼굴에서 위선을 못 견뎌 그것을 뒤집고자 열망하는 저자 김기석 목사의 시선과 잇닿아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종횡무진 요한복음 독법은 이른바 ‘영해’와 ‘알레고리’의 늪에 빠지기 쉬운 본문들에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 메시지의 신선함은 또 신산한 세상살이를 온 몸으로 감내하며 뚫고 가는 이 땅의 대다수 생활인들에게 말씀이 육체로 현전하는 사건을 일상 가운데 온전히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요한복음의 진리는 따라서 형이상학적 초월의 저편에서나 맛볼 수 있는 영적인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적’이라는 관형어 역시 이 땅에서 땀 냄새 나는 하루하루 삶과 동떨어진 내세의 낙원에나 어울릴 법한 그런 묘연한 영혼의 장식품이 아니다. 가령, 예배를 영과 진리 가운데 드려야 한다는 말씀과 관련하여 저자의 해석은 또 다른 파격적 전복의 명징한 실례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함께 느끼고,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기뻐한다. 오늘 우리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이 근심하고 있는데도 우리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이들은 악마적 세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바치는 것이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57쪽)

 

이와 같은 도저한 헌신의 제자도를 강조하며 이 세상의 악마적 세력과 부대껴 싸우는 투쟁의 의욕을 고취시킨다고 해서 그가 공동체 집단의 제반 운동에 개인의 자율성과 단독성을 저당 잡히는 운동권 이념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고독을 사랑하는 목사이다. 겉멋으로 고독의 폼을 잡는 게 아니라, 그 고독의 영성적 가치에 절절이 눈뜨고 그것을 그의 목회 현장, 일상의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래서 군중을 떠나 홀로 독처하고자 움직인 예수의 동선을 서술한 짧은 한 구절에서도 그는 ‘예수 정신’을 본다.

 

“예수 정신은 이 ‘혼자서’라는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신앙은 독립, 곧 홀로 섬이다. 홀로 섬이 허락되지 않는 ‘더불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더불어 삶’을 제대로 이루기 위한 밑절미이다.”(102쪽)

 

이렇게 ‘홀로 섬’과 ‘더불어 삶’을 오가며 그는 요한복음의 내밀한 빗장을 열고 독자들을 초청하며 권한다. 이제 이 땅에서 뱅뱅이질만 하지 말고 제발 도약하여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억압을 초월해보라고. 동시에 그는 이렇게 권하는 듯도 하다.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한 가운데가 바로 구원이 샘솟는 자리이니 먼 데로 한눈팔지 말고 그 일상의 세속에서 예수의 영을 살아내며 눈물 그렁그렁한 이웃들과 더불어 극진해지라고.

 

4.

 

이 책을 통해 김기석 목사는 말씀의 빛 속에 넉넉한 포즈로 행복하게 거닐어온 묵상과 성찰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신학과 종교의 지도에 길이 없는 갈릴리의 대지를 걸어 다니며 개척한 하나님 나라의 꿈이 그의 부활과 함께 ‘그 길’이 되고 ‘생명’과 ‘진리’로 꽃피어났듯, 영지주의자, 초월적 신비주의자, 심지어 얼치기 성령주의자 등에 의해 혼돈의 늪 속에 허우적대던 요한복음이 이제 이 책의 생산과 함께 희한하면서도 심오한 진경의 오솔길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보수적인 독자는 새것에 반응이 굼뜨고, 진보적인 독자는 그 새것에 퉁을 놓고 트집을 잡으며 아무것도 아닌 듯 능청을 떨기 쉽다. 김 목사의 글이 너무 순정하고 명징하여 때로 흙탕물 한 바가지를 붓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그 리듬이 너무 안정되어 좀 비틀고 헝클어트리고 싶은 심술이 더러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혼탁한 정신의 망령을 벗고 겸손하게, 천천히 그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로서 나는 제 고깃덩어리 육신의 삶을 넘어서는 숭고한 존재의 의미가 내 안과 밖에 풍요롭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순식간 깨치게 된다.

 

지금도 이 책을 앞에 두고 괜스레 공손한 자세를 가다듬게 되고 사뭇 경건해진다. 그의 공들인 글 속에서 풍겨오는 삶의 무게가 뻐근하게 전달된다. 내가 걸어온 지난 30년 설교의 이력 속에 한 번도 우려내지 못한 메시지가 이 책을 매개로 상상의 진공을 울리며 파고드는 기미만은 뚜렷하게 감각된다. 정녕,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한복음의 메시지가 이 책의 행간에서 마구마구 피어나며 말씀의 향연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차정식/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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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1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5. 4. 23. 15:30

깊은 영성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맑은 물

- 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

 

 

1.

 

대학을 마치고 감신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동갑내기 동향인 김기석 목사를 만났다. 그의 큰 눈은 지금처럼 깊이 파였고 형형한 빛을 발산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목의 소임을 위해 입대했기에 깊은 교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인상은 강력하여 소식이 끊긴 다음에도 그의 행적이 종종 궁금했다.

 

당시에 그는 남미로 유학을 가서 해방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강골의 기질이 느껴졌기에 “그답다”는 생각을 했는데, 십 수 년이 지난 후에 그는 문학비평가가 되어 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남미대신 자신의 서재를 택했고, 민중신학 대신 문학을 택했으며, 유학대신 독학을 택했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던 시기에 그는 홀로 서재에서 서향을 벗 삼아 자신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그렇고 그런’ 목회 현장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평범한 목회자로 살면서 수도자의 영성을 길렀고, 매 주일 설교자로 강단에 서서 시인의 음성을 들려주었으며, 이런 저런 지면에 기고하는 글을 통해 자신이 체득한 진리를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에 누구도 가지 않았던 그만의 길을 개척하여 올곧게 걷고 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길이 되어가고 있다.

 

그의 최신간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꽃자리)는 설교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저자의 영성과 삶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편집자는 요한복음 본문에 대한 저자의 묵상과 요한복음 본문으로 선포한 설교를 번갈아 편집해 놓았다. 한 책에서 “했다” 체와 “했습니다” 체가 번갈아 나오는 것은 아주 드문 편집이다. 아마도 설교문이 가지는 다이나믹을 살리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분주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급하게 읽어내려 해서는 안 된다. 충분한 시간을 내어 몸을 바로 세우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천천히 읽어야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에릭 프롬이 말한 ‘소유형 독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독서를 통해 설교 예화나 자료를 얻으려는 습성에 젖어 있는 사람은 이 책의 향기를 음미할 수 없다. ‘존재형 독서’ 즉 독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키우려는 사람만이 이 책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저자 자신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우려 쓴 글이기에 그와 같은 정성으로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중에 떠오른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복음 13:52).

 

저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폭넓은 독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자료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쓴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시인들의 싯구다. 그 싯구들은 잡힐 듯 말듯 한 예수님의 말씀에 빛을 던져 준다. 이것은 늘 시의 숲에서 산책하기를 즐기는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동양고전과 사상가들의 통찰도 동원이 된다.

 

 

 

 

2.

구약학계의 권위 있는 목소리인 월터 브르그만은 설교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시인의 마음이라고 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묵시가들의 핵심에는 그들의 시적 상상력이 있다고 했다. 학문으로서 성서학을 연구했던 나는 칼릴 지브란의 《예수의 생애》를 읽고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브란의 문학적 상상력은 그 이전에 내가 읽은 수많은 학문 서적들보다 더 깊은 통찰을 던져 주었다. 그 때부터 나는 신학자보다 문학가의 성서 해석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를 많이 인용했다는 것은 대단한 미덕이 아닐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시인의 심성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시인의 언어로 그것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저자의 설교는 전체로서 한 편의 시와 같다. 저자의 묵상도 마찬가지다. 그는 묵상 중간 중간에 자주 멈춘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묵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이상도 하지. 낯선 이 사나이의 음성에서 고향이 느껴지다니! 그가 건넨 말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의 음성에 실려 오는 따뜻함과 순수함, 그것은 마치 긴 겨울 추위에 지친 이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인 듯싶었다”(49쪽).

 

저자는 본문을 마주 보기보다는 본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사마리아 여인의 심정이 되어 보지 않고는 저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그는 본문 안으로 들어가 그의 영성으로 맑은 물을 길어 올린다. 실로, 그의 글은 맑은 물과 같다. 자극적인 청량음료와 같은 글들이 홍수로 쏟아지는 현실에 그의 글은 차별성을 가진다. 청량음료는 잠시 만족을 주지만 금새 더 깊은 갈증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 하지 않던가!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사용하여 일상적이지 않은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무뎌지기 쉬운 독자의 정신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가 이렇게 언어에 천착하여 스스로를 연마하는 이유는 말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말을 통해 ‘말씀’ 즉 ‘다바르’에 이르기 위한 그의 치열한 궁구 덕분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다바르, 곧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 말이다. 물 흐드듯 유장하고 나직하지만, 마치 폭포처럼 힘찬 말씀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개념과 논리로 오염되지 않은 말, 본질을 향해 곧장 돌진하는 그 말씀은 낯설지만 거역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127쪽).

 

3.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 쓰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상과 신학과 삶의 자세를 드러낸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영성가다. 하지만 그의 영성은 토마스 머튼의 그것처럼 사회적 관심으로 체화되는 영성이다. 앞에서 내가 해방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해방신학을 통하여 추구하려 했던 것을 지금은 영성을 통해 그리고 문학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길을 바뀌었을지언정 방향은 그대로다.

 

영성과 정의가 그의 내면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글 전체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요한복음 8장과 9장에 대한 묵상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그는 당시 권력자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권력의 속성과 인간의 탐욕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는 말한다.

 

“정의에 민감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지고 있다면, 배움을 향한 개방성이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158쪽).

 

정의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영성은 미신이나 광신과 다르지 않다. 반면, 영성에 뿌리를 두지 않은 정의는 자칫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 ‘홀로 있음’과 ‘같이 있음’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영성과 정의는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묵상과 설교를 읽는 중에 그 아름다운 동행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저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국교회를 향해 아픈 충고를 내어 놓는다.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저자는 이렇게 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묵상하는 동안 가슴 한 켠이 무지근해졌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찾아온 무리들을 가르치고, 해저물면 차마 그들을 그저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 나눠 먹으려는 그 소박한 마음을 이미 부유해진 교회는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어마어마한 교회당을 짓고,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온갖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오늘의 기적에서 이 풀밭 위의 기적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99쪽)

 

저자가 서문에서 쓴대로 그의 묵상은 “삶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 교회의 삶에서 그리고 이 세상의 삶에서 우직하게 실천하는 것이 묵상의 목적이다. 렉시오 디비나에서 말하는 ‘콘템플라치오’가 결국 이것이다. 읽고(‘렉시오’), 묵상하고(‘메디타치오’), 기도한(‘오라치오’) 말씀이 삶을 통해 그 진실을 드러내도록 맡기는 것이 마지막 단계인 ‘콘템플라치오’다.

 

온전한 서평이라면 부족한 점도 지적해야 하지만, 내가 훈련받은 분야와 저자가 스스로 개척한 분야가 너무 달라서 딱히 부족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묵상을 위해 믿을만한 성서 주석을 꼼꼼히 챙겼음에 분명하다. 그의 묵상은 본문에 대한 성실한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때로 문학적 상상력으로 성서 묵상을 하는 사람들이 본문에 대한 연구 없는 ‘게으른 묵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본문 앞에서 무릎을 꿇기 전에 책상에서 해야 할 숙제의 책임을 다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요한복음 본문을 다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으로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해 보려는 사람에게는 아쉬움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학습을 위한 참고서가 아니다. 설교를 위한 주석서도 아니다. 저자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여 얻는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 마치 깨달음의 이삭들을 모아 놓은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정진에 감사를 드린다. 그는 품격을 잃고 값싼 상품처럼 되어 버린 설교와 묵상에 품격을 입혀 주었다. 기독교 사상을 이 정도로 품위 있고 깊이 있게 풀어낼 사람이 우리 중에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부디, 기독교의 경계선을 넘어 일반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소개할 수 있는 사상가로 그리고 저자로 계속 깊어져가기를 기원한다. 법정 스님이 불교적인 사상으로 다른 종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 소통한 것처럼, 저자도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를 바란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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