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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1

바람아 바람아 내가 걸어오느라 패인 발자국을 네가 슬어다오 바람아 내가 쌓아올리느라 가린 모래성을 네가 슬어다오 그리하여 내가 지나온 자리에 하늘만이 푸르도록 하늘 닮은 새순이 돋아나도록 2022. 2. 20.
"손 좀 잡아줘" 했을 때 길을 걷는데 멈추어 서 있는 한 사람이 인사도 없이 설명도 없이 모르는 나에게 "손 좀 잡아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나도 모른 새 손을 내밀고 있다 내 손바닥을 꼭 잡으며 끙 누르길래 나도 손에 힘을 주어 하늘처럼 떠받쳤다 우리의 손과 손을 이어준 것은 한 턱의 계단이었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입을 여신다 "여어를 못 올라가가, 고마워!" 하시며 할머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시고 나도 순간 미소를 보인 후 걷던 길을 다시 걷다가 한낮의 거리에서 오고가는 사람들 그 중에서 다리가 아픈 할머니에게 선택받은 어딘가 모르게 편안한 한 사람이 되기까지 한순간 비춰졌을 나의 얼굴과 차림새와 나의 속마음과 나만 아는 신념과 혼자서 묵묵히 걸어온 나의 인생길을 되돌아보았다 방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란 레드카펫을 .. 2022. 2. 18.
내 마음의 대지에는 아파트가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사람의 집이 재산이 된다는 그런 아파트가 내 마음의 대지에는 없다 머리 위에는 곧장 하늘이 있어서 지붕 위 별을 그리며 순하게 잠이 드는 집 발 밑에는 바로 땅이 있어서 제 발로 서서 땅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집 한 그루 나무처럼 사람의 집이 그대로 삶이 되는 저 혼자서도 묵묵히 시가 되는 사람의 집이 그리워 허름하고 볼품 없는 집이라도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는 그런 사람의 집이 좋아서 2022. 2. 16.
풀씨의 소망 언제쯤 놓여날 수 있을까 이 풍요의 굴레로부터 누가 처음 뿌려 놓은 헛된 씨앗일까 이제는 까마득해진 한 점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의 씨앗이 흩뿌려진 이 탐진치의 세상 가슴팍을 파헤치며 쉼없이 굴러가는 이 풍요와 기복의 두 바퀴로부터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이 기복의 족쇄로부터 풍요는 가난이 주는 간소함의 만족을 모른다 기복은 침묵이 주는 안식의 기도를 모른다 나의 소원은 크고 먼 내일에 있지 않아 나의 소원은 작고 소박한 오늘에 있지 내려앉는 곳이 고층 아파트가 아니기를 떨어진 바닥이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기를 다만 내려앉아 발 닿은 땅이 사이 좋은 흙과 돌밭이기를 오늘 내가 앉은 이 땅에서 한 톨의 씨앗으로 돌아가 평화의 숨으로 마음밭에 뿌리를 내리며 제 발로 서서 바람 없는 날에도 저절로 흔.. 2022. 2. 15.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 사람은 다섯인데 의자가 하나면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 의자가 아닌 의자 토함산 겨울바람에 추울까봐 서까래 흙벽으로 드나들던 바람의 숨구멍까지 한 땀 한 땀 막아주신 따뜻한 손길들 지진으로 깨진 기왓장 틈새로 오랜 세월 빗물이 떨어져 뚫린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던 낡고 기울어진 집 50년 된 나무보 한가운데 옹이에 실금이 가고 아래로 쏠린 나무보가 이제는 세월에 주저앉지 않도록 다섯 사람이 힘을 모아서 새 나무보와 기둥을 덧세워 주저앉으려던 천장을 푸른 하늘까지 떠받쳐준 사람들 천장이 무너질까봐 잠이 안 온다는 나에게 들릴 듯 말 듯 "걱정하지 마세요" 구멍 난 마음 틈새까지 무심히 지나치지 않던 마음 한 점 떠오르는 해와 함께 눈 부비며 시작하는 하루를 하루의 산언덕을 해처럼 넘어가다가 잠시 멈추어 커피 .. 2022. 2. 14.
먼 별 학기 중에도 학교를 가다가 말다가 우리 아이들 두 눈이 일찍 나온 초승달처럼 환한 낮에는 가물가물 감기더니 어둔 밤이 되니까 초롱초롱 반짝이네 점심 때도 잊고 잠잘 때도 잊은 우리 아이들 두 눈이 점점 먼 별을 닮아가네 2022. 2. 11.
냇물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냇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내 귓가를 울리는 냇물의 올바른 소리 한 줄기가 별빛이다 정의로운 정치는 흘러 흘러서 그늘진 생의 골짜기와 메마른 삶의 들판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라고 이 세상 끝까지 내려가서 온 땅을 품에 안은 바다의 수평선이 되는 일이라고 그리하여 푸른 하늘과 나란히 푸르게 서로를 바라보는 기쁜 일이라고 2022. 2. 7.
가슴으로 가슴으로 가는 숨으로 가고 오는 숨으로 오고 가는 숨으로 들숨과 날숨으로 빈 가슴을 지핀다 재만 남은 땅에서 새순이 돋아나면 가슴으로 뿌리를 내리며 이 둥근 땅을 끌어안으려는 불씨 같은 한 점 숨이 있어서 한겨울밤에도 저 별처럼 혼자서도 따뜻하다 2022. 2. 3.
투명하게 지으신 몸 밥은 자식이 먹었는데 엄마 배가 부르다고 하셨지요 밥을 먹다가 뉴스에서 누군가가 높은데서 떨어지거나 다쳤다고 하면 내 정강이뼈가 저릿해지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 떨며 아파하고 밤새 마음이 아파서 잠을 설치게 된다 그래서 평화의 숨으로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 나의 몸은 나를 스쳐 지나는 이 모든 걸 그대로 느끼며 투명하게 반응한다 저녁밥을 먹다가 이런 나를 지으신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안녕하신지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2022.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