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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9

하얀 감기약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아이들의 감기약은 가장 쓴 인생의 쓴맛이었다 봄날에도 기침이 잦았던 나는 약을 먹지 않으려고 목련 꽃봉우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달아나지도 못하고 나뭇가지 끝에 앉은 듯 아빠 다리를 하고서 요지부동 앉아 있으면 아빠는 밥숟가락에 하얀 가루약과 물을 타서 큼지막한 새끼손가락으로 푹 무슨 약속이라도 하시려는 듯 휘휘 가루약이랑 물이 풀풀 날리니까 나중엔 젖가락 끝으로 휘휘 살살 약을 개어서 먼저 맛을 보셨다 아빠는 그 쓴 약을 설탕처럼 쪽쪽 드시며 쩝쩝 소리까지 내시면서 "아, 맛있다! 감탄사까지 타신다 세상이 다 아는 하얀 거짓말까지 하시는데 아빠 얼굴을 아무리 살펴 보아도 구름 한 점 없이 웃기만 하신다 나는 속으로 걱정이 되어서 감기도 안 걸린 아빠가 내 감기약을 드셔도 되는지 사실.. 2022. 4. 5.
천인공노(천공) 내 인생의 스승을 찾기 위해서 한 권의 책도 함부러 선택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신학기에 국어 담당이신 담임 선생님이 학급문고를 만들려고 하니, 집에 있는 책들 중에서 각자 두 권씩만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당시 우리집에 있는 책이라곤 한 질의 백과사전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나보고 쓸데없는 책 읽지 말고 학교 공부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교과서만 보았고, 백지 같은 머릿속에 입력된 건 교과서와 매 수업 시간마다 과목 선생님들의 재미난 수업 내용이 대부분인 중학생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중3 때는 시험지를 풀면서, 선생님이 여기서 장난을 치셨네, 하면서 함정은 피해갈 수 있었고,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또래들이 돌려보던 '인어공주를 위하여'라는 그 흔한 만화책도 내 .. 2022. 4. 2.
그렇다면, 용산역 노숙인들의 새 보금자리는, 대검찰청으로 강원도 산불 피해로 한창 동해안 이재민 돕기 성금 모금 중이라는데 망연자실해 있을 주민들의 눈가에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까맣게 타다가 타다가 잿더미가 된 빈 가슴들 먼저 보듬어줄 줄 알았는데 타다 남은 불씨까지 꺼뜨려준 빗물이 빈 땅에서 채 마르기도 전에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화재복구지원 정부 보조금 한 푼이라도 바라며 그런 손끝으로 한 점 찍었을 하얀 투표 용지 붉은 도장 하나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선거 직전까지 후보자로서 국민들을 향해 외친 공약을 향한 믿음과 약속의 땅 국민들 가슴으로 채 뿌리 내리기도 전에 아직 대통령도 아닌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인 당선인이 대통령 직무실을 국방부 건물로 이전하겠다고, 대책도 내세우지 않고서 헛소리를 합니다. 꺼져가던 강원도 동해안의 산불.. 2022. 3. 20.
봄(32) 무엇을 품을까 꿈꾸는 빈 황토밭 봄비가 적셔주고 봄바람이 슬어주고 감자, 고구마 고추, 상추, 깻잎 무엇을 심든지 이 붉은 땅에선 모두 모두 제 발로 설 테지요 2022. 3. 19.
이 봄을 몸이 안다 봄비가 오시리란 걸 몸이 먼저 안다 "얘들아, 내일 학교 갈 때 우산 준비하자" 그런 마음을 알아 듣고, 꾸욱 1번을 찍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고 누가 물으면 그냥 몸이 알아요 저절로 몸이 앓아요 손가락 마디마디 뼛속 골골이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시간이 몸에 새겨놓은 자연이 몸에 물들인 이 모든 흔적이 나의 몸인 걸요 지금 내가 선 이 땅은 탐욕의 고속도로와 분노의 고속국도와 무지의 갈림길 저 멀찍이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나는 한 그루 매화나무 또다시 탐진치의 구둣발에 짓밟힌 이 치욕스런 봄날에도 이 세상에 매화꽃 한 잎의 평화를 눈물처럼 떨구는 나는 그러나 2022번째 찾아오시는 이 봄비는 그날에 더러워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눈물이란 걸 또다시 비구름을 헤치며 나타나실 봄햇살은 그날.. 2022. 3. 14.
몸이 저울축 열 살 아들과 엄마가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에 비닐 봉투 하나 종이 가방 하나 엄마 손에 든 짐을 아들이 모두 다 달라며 둘 다 한 손으로 다 들겠다며 다 들 수 있다며 두 짐을 든 주먹손 뒤로 빼며 빈 손으로 엄마 손을 잡습니다 몇 발짝 걷다가 좀 무거운지 잠시 주춤 짐을 바로 잡길래 "엄마가 하나만 들어줄까?" 아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한 손엔 비닐 봉투 다른 손엔 종이 가방 두 손에 나누어 들고서 열 살 몸이 저울축이 되어 곰곰이 묵묵히 저울질을 합니다 그러고는 종이 가방을 내밉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웠는지 궁금해진 엄마도 멈추어 서서 양 손에 하나씩 들어보자며 엄마 몸도 똑같이 저울축이 됩니다 무게가 엇비슷해서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이번에는 검정 비닐 봉투 말고 하얀 종이 가방을 엄마에.. 2022. 3. 13.
지푸라기 한 올 가슴에 품고 살던 마음이 무거워 어디든 내려놓고 싶을 때 순간을 더듬어 살던 삶이 무거워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 마음이 붙잡는 지푸라기 한 올은 물 한 잔 글 한 줄 쪼그리고 앉으면 늘 곁을 내어주는 아무 말 없어도 좋은 풀과 나무는 오랜 벗님 풀잎과 풀잎 끝에 맺힌 물방울 한 알 하늘에 달 하나 작은 별 하나 하나여서 나처럼 외롭게 빛나는 하얗게 꺼져가던 가슴에 마른 장작 한 개비 같은 한 줄기 입바람 같은 지푸라기 한 올 2022. 2. 23.
참 빈 하나 그런데 하늘은 저 위에만 있지 않고 내 손끝에도 있고 내 발밑에도 있고 내 뼛속에도 있고 내 가슴속에도 있어서 내가 처음 시를 쓰려고 두 눈을 감았을 때 맨 처음 본 하늘은 온통 어둠과 혼돈이었는데 그리운 얼굴 하나 문득 한 점 별빛이 되었고 그런 밤하늘과 나란히 나도 한 점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늘 있는 그대로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온통 크고 밝은 참 빈 하나의 방 뿐이다 침묵이 침묵으로 말하는 방 고독이 고독으로 숨쉬는 방 참 찾아 예는 길에 너무나 바라본 하늘 사무치도록 참을 찾아서 참든 내 맘에 참 빈 하나를 모신다 *참 빈 하나(다석 류영모의 詩에서 인용) 2022. 2. 21.
바람아 바람아 내가 걸어오느라 패인 발자국을 네가 슬어다오 바람아 내가 쌓아올리느라 가린 모래성을 네가 슬어다오 그리하여 내가 지나온 자리에 하늘만이 푸르도록 하늘 닮은 새순이 돋아나도록 2022.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