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499 "손 좀 잡아줘" 했을 때 길을 걷는데 멈추어 서 있는 한 사람이 인사도 없이 설명도 없이 모르는 나에게 "손 좀 잡아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나도 모른 새 손을 내밀고 있다 내 손바닥을 꼭 잡으며 끙 누르길래 나도 손에 힘을 주어 하늘처럼 떠받쳤다 우리의 손과 손을 이어준 것은 한 턱의 계단이었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입을 여신다 "여어를 못 올라가가, 고마워!" 하시며 할머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가시고 나도 순간 미소를 보인 후 걷던 길을 다시 걷다가 한낮의 거리에서 오고가는 사람들 그 중에서 다리가 아픈 할머니에게 선택받은 어딘가 모르게 편안한 한 사람이 되기까지 한순간 비춰졌을 나의 얼굴과 차림새와 나의 속마음과 나만 아는 신념과 혼자서 묵묵히 걸어온 나의 인생길을 되돌아보았다 방금 나에게 일어난 일이란 레드카펫을 .. 2022. 2. 18. 내 마음의 대지에는 아파트가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 사람의 집이 재산이 된다는 그런 아파트가 내 마음의 대지에는 없다 머리 위에는 곧장 하늘이 있어서 지붕 위 별을 그리며 순하게 잠이 드는 집 발 밑에는 바로 땅이 있어서 제 발로 서서 땅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집 한 그루 나무처럼 사람의 집이 그대로 삶이 되는 저 혼자서도 묵묵히 시가 되는 사람의 집이 그리워 허름하고 볼품 없는 집이라도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 서 있는 그런 사람의 집이 좋아서 2022. 2. 16. 풀씨의 소망 언제쯤 놓여날 수 있을까 이 풍요의 굴레로부터 누가 처음 뿌려 놓은 헛된 씨앗일까 이제는 까마득해진 한 점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의 씨앗이 흩뿌려진 이 탐진치의 세상 가슴팍을 파헤치며 쉼없이 굴러가는 이 풍요와 기복의 두 바퀴로부터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이 기복의 족쇄로부터 풍요는 가난이 주는 간소함의 만족을 모른다 기복은 침묵이 주는 안식의 기도를 모른다 나의 소원은 크고 먼 내일에 있지 않아 나의 소원은 작고 소박한 오늘에 있지 내려앉는 곳이 고층 아파트가 아니기를 떨어진 바닥이 아스팔트 도로가 아니기를 다만 내려앉아 발 닿은 땅이 사이 좋은 흙과 돌밭이기를 오늘 내가 앉은 이 땅에서 한 톨의 씨앗으로 돌아가 평화의 숨으로 마음밭에 뿌리를 내리며 제 발로 서서 바람 없는 날에도 저절로 흔.. 2022. 2. 15.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 사람은 다섯인데 의자가 하나면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 의자가 아닌 의자 토함산 겨울바람에 추울까봐 서까래 흙벽으로 드나들던 바람의 숨구멍까지 한 땀 한 땀 막아주신 따뜻한 손길들 지진으로 깨진 기왓장 틈새로 오랜 세월 빗물이 떨어져 뚫린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던 낡고 기울어진 집 50년 된 나무보 한가운데 옹이에 실금이 가고 아래로 쏠린 나무보가 이제는 세월에 주저앉지 않도록 다섯 사람이 힘을 모아서 새 나무보와 기둥을 덧세워 주저앉으려던 천장을 푸른 하늘까지 떠받쳐준 사람들 천장이 무너질까봐 잠이 안 온다는 나에게 들릴 듯 말 듯 "걱정하지 마세요" 구멍 난 마음 틈새까지 무심히 지나치지 않던 마음 한 점 떠오르는 해와 함께 눈 부비며 시작하는 하루를 하루의 산언덕을 해처럼 넘어가다가 잠시 멈추어 커피 .. 2022. 2. 14. 먼 별 학기 중에도 학교를 가다가 말다가 우리 아이들 두 눈이 일찍 나온 초승달처럼 환한 낮에는 가물가물 감기더니 어둔 밤이 되니까 초롱초롱 반짝이네 점심 때도 잊고 잠잘 때도 잊은 우리 아이들 두 눈이 점점 먼 별을 닮아가네 2022. 2. 11. 냇물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냇물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내 귓가를 울리는 냇물의 올바른 소리 한 줄기가 별빛이다 정의로운 정치는 흘러 흘러서 그늘진 생의 골짜기와 메마른 삶의 들판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라고 이 세상 끝까지 내려가서 온 땅을 품에 안은 바다의 수평선이 되는 일이라고 그리하여 푸른 하늘과 나란히 푸르게 서로를 바라보는 기쁜 일이라고 2022. 2. 7. 가슴으로 가슴으로 가는 숨으로 가고 오는 숨으로 오고 가는 숨으로 들숨과 날숨으로 빈 가슴을 지핀다 재만 남은 땅에서 새순이 돋아나면 가슴으로 뿌리를 내리며 이 둥근 땅을 끌어안으려는 불씨 같은 한 점 숨이 있어서 한겨울밤에도 저 별처럼 혼자서도 따뜻하다 2022. 2. 3. 투명하게 지으신 몸 밥은 자식이 먹었는데 엄마 배가 부르다고 하셨지요 밥을 먹다가 뉴스에서 누군가가 높은데서 떨어지거나 다쳤다고 하면 내 정강이뼈가 저릿해지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 떨며 아파하고 밤새 마음이 아파서 잠을 설치게 된다 그래서 평화의 숨으로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 나의 몸은 나를 스쳐 지나는 이 모든 걸 그대로 느끼며 투명하게 반응한다 저녁밥을 먹다가 이런 나를 지으신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안녕하신지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2022. 1. 24. 미장이 싸늘한 벽돌과 껑껑 언 모래와 먼지 같은 시멘트 이 셋을 접붙이는 일 이 셋으로 집을 짓는 일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날 이 차가운 셋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 제 살처럼 붙으리라는 강물 같은 믿음으로 나무 토막 줏어 모아 쬐는 손끝을 녹이는 모닥불의 온기와 아침 공복을 채워주는 컵라면과 믹스 커피 새벽답 한 김 끓여온 생강차 한 모금 2022. 1. 22. 이전 1 ··· 6 7 8 9 10 11 12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