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의 어머니들, 그들도 어머니였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7)

 

애굽의 어머니들, 그들도 어머니였다(2)

 

 

1. “아무도 우리가 당한 아픔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 그 울부짖음의 주체는? 자식 잃은 애굽의 어머니들. 하지만 그들을 떠올리는 성경독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그런 일을 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바로의 완악함이 결국 그들을 울부짖게 한다. 성경기자는 출애굽기 11장 9절과 10절에서 바로가 얼마나 완악한지를 다시 언급하면서 11장을 마무리한다. 그만큼 바로의 완악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의 완악함으로 인해 열째 재앙을 피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2. “그날 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 비극의 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일러주는 대로 행한다. 그들은 사람 수에 따라 유월절 양이나 염소를 정하고, 14일 저녁에 그것을 잡고, 피를 바르고, 출애굽 할 복장을 갖추고, 고기를 구워서 급하게 먹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일러주신 대로 만반의 준비를 다한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열째 재앙과 출애굽이다. 이제부터 성경기자는 열째 재앙에서 출애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예상과 달리, 12장 1-28절, 43-51절, 13장 1-10절은 유월절에 관한 규례이다.

 

3. “어떤 신도 열째 재앙 같은 그런 끔찍한 재앙 일으키는 것을 꺼려했을 겁니다.” 그래선지 하나님도 성경기자도 열째 재앙보다 유월절 규례에 집중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월절 식사할 때 복장과 자세를 일러주시는데, 당장이라도 애굽을 떠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식사를 하라고 말씀하신다. 무교절 기간 동안에는 절대로 누룩을 먹지 말 것을 강조한다(15, 18-20절).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햇곡식을 먹는 무교절에는 칠일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누룩을 빵에 넣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아예 집에 누룩을 두지 말라고 하신다. 만약 이 기간 동안에 누룩을 먹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고 경고하신다.

 

4. 출애굽기 12장 20절까지는 하나님이 일러주시는 유월절 규례이고, 21절부터는 그 규례를 실행하는 과정을 기술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바르는 것에 대한 상세한 지침(21-23절)과 이 날을 자자손손 지키면서 그 의미를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것에 대한 상세한 지침(24-28절)을 일러준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일러준 그대로 행한다.

 

5. “하지만 결국 열째 재앙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피를 문지방에 뿌리고, 그것을 넘어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신다. “멸하는 자”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지만, 구약성경 여기저기에 나오는 파괴하는 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사무엘하 24:16, 이사야 37:36).

 

 

6. “인간이 사는 이 땅에 재난은 언제나 일어나지만, 그것을 항상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초태생을 치고, 애굽의 모든 신들을 심판하겠다고 하신다. 성경기자는 출애굽기 12장 12절을 “나는 여호와라”로 맺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일들을 통해서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장자”라고 한다(출애굽기 4:22). 바로가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신다는 것이다(4:23).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 뜻이라고 해도, 그 방식을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인지, 일어난 재난을 그렇게 해석한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7. “정말 몰랐습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성경기자는 열째 재앙을 정말 간결하게 보고한다(12:29-30). 이 결정적인 순간, 그 승리의 순간을 그저 일별하고 지나간다. 열째 재앙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모양이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도 없다. 어쨌든 모든 초태생들이 동시에 죽었단다. 14일 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피를 집에 바르고, 비상 복장을 갖추고 고기를 구워서 급하게 먹은 그날 밤, 애굽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면서 잠자리에 들은 그 밤, 바로의 장자부터 가축의 초태생까지 모든 처음 난 것들이 다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그날 밤 애굽에는 "큰 부르짖음"이 있었다. 당연하지 않는가? 그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성경기자는 한 집도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기록한다(30절).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하는 곳에서는 아무런 소리, 심지어는 개 짖는 소리도 나지 않았단다(11:7). 참 잔혹한 현실, 냉혹한 서술이다.

 

8. “하루 내 이글거리던 태양이 서쪽을 붉게 물들이면서 사라지자 애굽 땅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애굽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초태생은 모두 죽은 것입니다. 들은 적도 본 적도 못한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일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 우리는 그런 아픔을 왜 겪어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그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초태생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 신의 뜻은 무엇인지, 애굽 왕 바로 한 사람 거꾸러뜨리기 위해 무고히 당하는 일인지, 그들이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9. “애굽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울음은 화려한 궁전에서부터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어머니들, 그들은 동시에 큰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동시에 절규했습니다. 그렇게 온 애굽의 어머니들은 울부짖었습니다. 그들을 위로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슬픔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10.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애굽 왕 바로는 졸지에 죽은 장남의 시신을 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을 불러, 한시라도 빨리 이 땅을 떠나라고 말한다. “너희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울음바다가 된 애굽은 이제 출발준비에 부산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서 다시 소란스러워진다. 그 소란스러움 속에, 죽은 자들, 그리고 애굽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은 깨끗하게 잊힌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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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의 어머니들, 그들도 어머니였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6)

 

애굽의 어머니들, 그들도 어머니였다(1)

 

 

1.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다”(출애굽기 12:30). “부르짖음은 울부짖음이다. 울부짖음은 절규(絶叫)이다. 그리고 그냥 부르짖음이 아니라 큰 부르짖음이란다.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울부짖는가? 울부짖음의 주체가 누구인가? 원래 애굽에 부르짖음이 있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출애굽기 2:23-24). 성경기자는 갓 낳은 아들을 나일 강에 던져야 했던 어머니들의 부르짖음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 울부짖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것과 견줄 만한 울부짖음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울부짖는가?

 

2. 하나님은 애굽에 일곱째 재앙을 일으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출애굽기 9:14).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린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바로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15,16).

 

3.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애굽을 잔혹하게 대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애굽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만약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을 강하게 쳤다면, 그들 가운데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바로 역시 왕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단다. 바로와 그 백성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고, 그들이 보이는 완악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애굽 사람들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는 재앙의 강도가 일정하지 않고 들쭉날쭉하고 애굽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도 않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4. 이것이 하나님 뜻인데, 바로는 그것을 모르고, 제 스스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재앙의 강도를 한층 높이겠다고 경고하신다. 내일 이맘때쯤 내가 무거운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나라가 세워진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일이 없었더라(18).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실 일곱째 재앙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5. 그런데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려면 즉각 재앙을 내리실 일이지, 왜 만 하루("내일 이맘때쯤")의 시간적 여유를 두는 것일까?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마음 약한 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게 그렇게 경고하시고, 일정한 시간, 즉 회개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6. 하나님은 왜 단 번에 바로를 꺾지 않고, 열 번째 겨루기까지 하셨을까?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 번에 모든 것을 다 뒤엎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씨앗을 심고 그 다음날 열매를 따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듯이, 하나님 역사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겨자씨가 나무가 되는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겨자씨가 갑자기 나무가 된 기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겨자씨는 일반적인 과정을 나무로 자란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서서히 이뤄진다는 것이다.

 

7. 그래서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출애굽 시키시는 것이다. 너무 더뎌서 속이 터질 듯 답답해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것이다. 대책 없이 일을 벌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치밀하게 일을 계획하시고, 하나하나 섬세하게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신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뜻을 이루시고야 만다.

 

8.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바로가 뜻을 꺾을 것인지를 이미 잘 알고 계셨다. 하지만 그 방법을 단번에 사용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을 괴롭히셨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려 하셨다. 그래서 아홉 가지 재앙은 하나님이 애굽에 내린 벌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아홉 번의 기회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을 수 있는 아홉 번의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바로는 그 기회들을 모두 놓쳐버렸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단계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9.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은 그날 밤에 자신이 직접 애굽으로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친히 마지막 재앙을 실행하시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신다. 그런 다음 마지막 재앙이 무엇인지 바로에게 알려주신다. 마지막 재앙은 애굽 사람들의 모든 장자들, 그리고 가축들의 첫 새끼를 모두 죽이는 것이다.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일순간에 다 죽임을 당하면, 애굽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애굽은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출애굽기 11:6)으로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10. 하나님은 이렇게 마지막 재앙을 예고하시면서, 그 재앙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결코 임하지 않을 것임을 강력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출애굽기 11:7).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과 애굽 사람을 구분하시고, 즉 이스라엘 사람들을 특별하게 대하시고,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재앙이 미치지 못하게 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이제 애굽의 부르짖음으로 바뀐다. 그것은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들의 부르짖음이다. 어머니들이 대성통곡한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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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보라, 기지(機智)로 남편을 살리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5)

 

십보라, 기지(機智)로 남편을 살리다(2)

 

 

1. 도망자 모세. 그는 미디안으로 와서, 어느 날 한 마을에 들어가, 우물곁에 앉아있었다(출애굽기 2:15). “우물가의 여인"이 아니라 "우물가의 모세"이다. 모세가 우물가에 앉았다는 것은, 한낮에 우물로 물 길러온 사마리아 여인이 실제로는 영적으로 목말라했던 것처럼, 우물가에 앉아 있는 모세도 무엇인가에 목말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모세의 목마름.

 

2. 그런데 성경기자는 갑작스럽게 미디안의 제사장에게 딸이 일곱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출애굽기 2:16). 미디안의 한 딸 부잣집 이야기이다. 미디안 제사장에게 딸이 일곱이 있다는 이 엉뚱한 말돌림이 "최진사댁에 딸이 셋 있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노래처럼, 그리고 그 노래의 결말처럼, 결혼 이야기로 이어질 것을 눈치 빠른 독자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모세가 우물가에 앉아있는데,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물을 긷기 위해, 그리고 양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그곳에 온다. 하지만 그곳 목자들이 그들을 방해한다. 그런데 18(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을 보면, 그런 일이 매일 일어났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자들이 여자를 얼마나 무시하고 못살게 구는가. 물론 그 이면에는 여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여자를 무시하는 성향이 강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3. 이것을 지켜보던 모세가 목자들을 내치고 일곱 여인들이 물을 긷고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모세가 목자들을 내치고 일곱 여인들로 하여금 물을 긷고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 있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 자신이 직접 양들에게 물을 먹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멋진 로맨틱 가이 인가. 그리고 이 이야기야 말로 결혼 이야기의 전형적이고 고전적인 장면이다. 불량배들이 나타나서 여자를 괴롭히면, 백마 탄 왕자가 사람이 나타나서 그들을 물리치고 여자를 구해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고, 자식들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산다. 모세도 이 전형적인 이야기 순서를 따른다. 물론 성경기자는 모세와 십보라가 사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는다.

 

 

 

 

4. 일곱 여인들은 물을 긷고 양들에게 물을 먹인 다음,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일어난 일을 자초지종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를 "애굽 사람"이라고 한다.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떼에 먹였나이다(19). 이것은 모세가 앞으로 할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하고, 그리고 물이 없어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마시게 해준다.

 

5. 이야기를 들은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은 모세를 그냥 두고 온 딸들을 야단친다. 그리고 모세를 데려와서 음식을 대접하라고 말한다. 초청을 받은 모세는 르우엘의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그들과 함께 거한다.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르우엘이 딸부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없거나 아니면 어렸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세를 아들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르우엘은 그런 제안을 모세에게 했을 것이고, 정처 없이 떠돌아야 할 모세는 그 청을 받아들여서 르우엘의 집에 거하기로 했을 것이다. 르우엘은 모세와 딸 십보라를 결혼케 해서, 모세가 미디안에 정착하게 한다. 첫딸이어서 모세에게 준 것인지 아니면 모세가 십보라를 사랑해서 요청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모세는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낫는다. 모세는 첫째 아들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짓는데, 그 뜻은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이다. 이것은 정처 없는 떠돌이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잘 표현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어머니인 십보라가 하는 일은 그냥 아들을 출산하는 것뿐이었다. 둘째 아들인 엘리에셀을 낳았을 때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의미로 모세가 아들 이름을 지었다(출애굽기 18:4). 모든 게 모세에게 종속되어 있는 느낌이다.

 

6. 불붙은 떨기나무를 통해 소명을 받은 모세는 집으로 돌아와서 장인인 이드로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아내와 아들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간다(출애굽기 4:20).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이 하나님의 지팡이는 모세에게 큰 힘과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겪을 수많은 어려움들을 이기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세가 하는 일이 모세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항상 일깨워 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모세가 아내인 십보라와 상의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모세는 아내와 아이들을 장인에게 보내고,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이후,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시내산에 머무는 모세에게 아내와 아이들을 데려다 준다(18:2-7). 이 모든 일에서 십보라는 침묵한다. 그러나 모세는 아이들 이름만 지어주었을 뿐, 그 아이들을 키운 것은 십보라였음이 분명하다. 십보라는 남편과 떨어져 아내의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그만큼 어머니로서 두 아들을 키우는 데 전념했다는 것이다. 십보라의 침묵은 결코 무기력한 침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7. 그러한 모습은 출애굽기 424-26절에서 드러난다. 글 전개 측면에서 보면, 24-26절은 약간 뜬금없는 느낌을 갖게 한다. 23절은 27절로 이어지는 것이 더 나은 글 흐름이다. 모세가 애굽으로 가서 아론을 만나는 것이 글 전개상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24절에서 26절이 이 흐름을 끊어 놓는다. 그래서 글 읽기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8. 그리고 24-26절에서 언급한 사건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다. 모세 일가족이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어느 곳에서 장막을 치고 머무는데, 여호와께서 거기서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다. 그러자 아내인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모세 발 앞에 가져다 놓고,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다고 말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를 놓아준다. 그리고 서술자는 십보라가 모세를 피남편이라고 한 까닭이 할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9.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모세가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고, 십보라가 아들 양피를 베어서 모세 발 앞에 놓자 모세가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십보라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우리는 십보라가 어떻게 그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비방(秘方)을 알았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십보라가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지혜롭게 핵심을 파악해서 대처함으로써,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넘기고 남편의 생명을 구했다. 남편 모세뿐만 아니라, 앞으로 출애굽의 지도자로 설 모세를 살렸다는 점에서 십보라는 애굽 공주가 나일 강에서 모세를 구한 것과 동일한 역할, 어머니 역할을 한 것이다.

 

10. 모세는 애굽에 가기 전부터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정작 애굽에는 그동안 모세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데, 모세는 애굽에 들어가기 전에 죽을 지경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아내 십보라의 기지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력을 되찾은 모세는 다시 애굽으로 향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모세는 마음을 더 다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게 십보라 덕분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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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보라, 기지(機智)로 남편을 살리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4)

 

십보라, 기지(機智)로 남편을 살리다(1)

 

 

1. “그를 만난 건 우물가였다. 그는 그곳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내 삶이 되었다. 그는 도망자이다. 애굽 사람에게 구타당하는 히브리인을 구하려다가 애굽인을 죽였단다. 그리고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이곳으로 도망 왔단다.” 도망자 모세가 도착한 곳은 미디안이었다. 애굽으로 돌아갈 희망을 버리고, 모세는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미디안 제사장 딸과 혼인해서 자식들을 낳는다.

 

2. “우리는 그가 왜 도망자가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우리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그가 자기 형제들에게 갔단다. 히브리인들이 일하는 공사현장에 가서 그는 그들이 중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공사현장에서 한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인, 즉 모세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을 치는 것을 보았단다. 그래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그 애굽 사람을 쳐서 구덩이에 묻었단다.”

 

3. 애굽 사람이 히브리인을 구타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모세가 그 애굽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와 동일하다. 사람을 때려서 죽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서, 당시 히브리인들이 강제노역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구타당해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4. 살인자가 변해서 지도자가 되었다! 극적인 인간 변화를 선동적으로 선호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모세의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을 예시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11절). 그래서 모세는 애굽인을 “쳤다”(이 단어는 12:12, 13, 29, 9:15, 3:20, 7:17, 25에 나온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과 그로 인한 미디안 망명을 그의 무모함의 결과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있지만, 앞으로 일어날 하나님의 행동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5. “그는 언제나 아웃사이더였다. 여기서도 그랬고, 일생 동안 그렇게 살아야 했다.” 모세는 다른 날 공사현장에 나갔다가, 동족이 동족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한 히브리인을 치는 다른 히브리인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고 질책한다. 여기서 동포는 히브리어로 “친구”이다. 모세가 이 용어를 쓰는 까닭은 그가 히브리인들을 형제로 여기고 또 친구처럼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히브리인들과 형제로 친구로 지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히브리인이 모세에게 하는 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사람은 두 가지를 묻는데, 하나는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이다. 이것은 물론 모세로부터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고, 모세가 그들을 다스리는 자나 재판관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 질문에 대답하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고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히브리인은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고 묻는데, 이것 역시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은 아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모세에게 원망하면서 하는 말이 애굽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그들을 광야로 데리고 나와서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모세가 그들의 지도자와 재판관임을 부정하려고 했다. “그들은 평생 모세를 형제로 그리고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6. “그는 이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처했다.”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애굽 왕실은 그의 정체를 알고 그를 잡아서 처형하려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재빠르게 미디안으로 도망함으로써 그 위기를 벗어난다.

 

7. “그렇게 그는 우리에게 도망자로 왔다. 하지만 그는 내게 구원자로 왔다.” 미디안에 도착한 모세는 우물가에서 이드로의 딸들을 “구원”했고, 그들에게 물을 마시게 했다. 모세가 행한 구원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14:13, 30, 15:2, 3:8, 6:6, 12:27)과 이어진다. 모세는 항상 악에 대항한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시고, 아신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울부짖는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보시고 아셨다. 그래서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신다.

 

8. “그는 불의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불의했다. 그러니 그는 평생을 세상과 불화해야 할 운명이었다.” 압제는 어느 곳에서나 다양한 형태로 발생한다. 평화로울 것만 같은 미디안에도 작은 폭력이 발생한다. 이드로의 딸들은 그날 하루만 괴롭힘을 당한 것이 아니다. 이드로가 하는 말(18절)을 보면, 날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9. “그는 혼자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르우엘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의미를 갖는다. 제사장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르우엘을 이드로라고도 하는데, 그는 매우 지혜롭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모세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모세를 우물가에 그대로 두고 온 딸들을 책망한다. 그리고 어서 모세를 데려와서 음식을 대접하게 한다(20절). 본문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상황만 제시하는 간결한 영화편집 효과를 보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추측하게 하는데, 20절과 21절 사이에서 이드로와 모세는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이고, 결국 모세는 십보라와 결혼해서 그곳에 정착한다.

 

10.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해서 그곳에서 십보라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은 매우 전형적인 이야기인데, 모세는 이드로의 일곱 딸들을 괴롭히는 남자 목동들을 물리치고 그들이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 것으로 미디안에서의 첫날을 시작한다.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17절)는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그들을 구원했다”이다. 그리고 집에 일찍 돌아간 이드로의 딸들은 아버지에게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19절)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을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구출했다”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폭력적인 상황에서 구출하고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앞으로 모세가 할 일이라는 점에서, 모세가 구원자로 나설 것임을 예시한다. “이렇게 그가 우리에게 왔다. 그리고 우리 삶이 되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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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벳, 어머니면서 어머니 아닌 삶을 살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3)

 

요게벳, 어머니면서 어머니 아닌 삶을 살다(2)

 

 

1. 모세를 낳은 그 부부는 그 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석 달 동안 숨겨 키웠다. 성경은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고 말한다(2절). 모세 부모가 모세를 차마 죽이지 못한 까닭은 그가 잘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 구절을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잘 생기지 않았다면, 모세를 나일 강에 버렸을 텐데, 인물이 좋아서 석 달 동안 집에서 몰래 키웠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잘 생겼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보기에 좋았다”는 것이다. 물론 잘 생긴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어느 자식인들 예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지나치게 외모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 부모만 그랬겠는가? 당시에 많은 부모들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들을 낳아서 몰래 키우다가 붙들려가는 사람들이 한 둘이었겠는가.

 

2. 석 달을 어찌어찌 버텼지만, 더 이상 아들을 키울 수 없게 되자, 모세 부모는 그를 나일 강에 버리기로 한다. 그런데 나일 강에 버리는 방식이 특별하다. 갈대상자를 특별 방수 처리한 다음, 모세를 거기에 넣고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둔 것이다. 그리고 누나 미리암으로 하여금 지켜보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모세 부모뿐만 아니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태어난 아들을 나일 강에 버릴 때, 갈대 상자에 넣어서 버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결국 죽을 테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산 채로 물에 던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3. 그런데 그곳으로 바로의 딸이 시녀들을 데리고 목욕하러 나왔다.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그 아이를 버리라고 명령했으니까, 나일 강에는 아이들 시체가 떠다녔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곳에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나왔다는 게 의문이다. 목욕을 하려면 궁중에서 하는 것이 더 나을 텐데, 굳이 나일 강까지 나오는 까닭이 무엇일까? 아마 제의적인 예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는 동안 시녀들은 나일 강가를 거닐었다.

 

4. 애굽 공주가 나일 강에 목욕하러 나왔다는 것은 바로가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게 한 것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바로가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고 해서 나일 강은 죽음의 강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애굽 사람들은 그 강을 신성하게 여기고, 그곳에 와서 제의적인 목욕을 한 것으로 보인다. 7장 15절을 보면, 바로도 매일 아침 나일 강으로 나간다.

 

5. 공주가 그 상자를 보고 그것을 가져오게 해서 열게 하고, 한 아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이는 울고 있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상자 안에 있는 내내 울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울음소리를 공주가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6. 공주는 상자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그가 히브리 아이인줄 금방 알아채지만, 그 아이를 보면서 연민을 느꼈다. 공주는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라고 하는데,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이는 히브리사람들의 (남자) 아이들 가운데 (하나)이다”이다. 공주는 바로가 내린 명령을 잘 알았고, 나일 강에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담은 상자들을 여럿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어쩌면 모세 외에도 다른 아이들을 모세와 같은 방식으로 살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모세 가족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공주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아이를 살려줄 뿐만 아니라, 자기 아이로 삼으려고 한다. 지극한 모성애다.

 

7.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하는데, 바로가 내린 명령은 다른 사람이 아닌 공주에 의해서 어겨진다. 애굽 공주는 아이를 보고, 불쌍히 여긴다. 바로와 달리 애굽 공주는 생명을 보존한다. 그는 모세가 히브리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구원하고, 결국 그의 어머니가 된다. 그런데 공주가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기 때문에, 히브리 여인을 유모로 삼아 그 집에서 아이를 키우게 하는데, 그 아이의 누이가 공주에게 아이의 어머니, 즉 제 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해서 아이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 어머니 품에서 자란다. 그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제 집에서 키우면서 애굽 공주로부터 수고비까지 받는다. 정말 우여곡절(迂餘曲折)이다. 그리고 여인들의 용기와 순발력이 인상적이다.

 

9. 특히 미리암이 큰 역할을 했다. 아이를 갈대상자에 넣어서 나일 강에 띄운 다음, 누이는 그것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공주가 상자에서 아이를 확인하는 순간, 누이는 바로의 딸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바로의 딸에게 히브리인 유모를 데려오겠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바로의 딸이 모세를 죽게 버려두지 않고 자신이 키우겠다고 결심한 것을 모세의 누이가 눈치챘기 때문임을 알려준다. 바로의 딸은 미리암에게 히브리인 유모를 데려오게 하고, 미리암은 집으로 달려가서 모세의 어머니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온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바로의 딸이 모세를 집으로 데려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세의 어머니에게 삯을 주고 모세를 제 집으로 데려가서 모세에게 젖을 먹이게 한다.

 

10. 그리고 모세가 젖을 뗄 때, 모세를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자, 그때에 모세를 그의 아들로 삼고, 이름을 “모세”라고 짓는다(10절). 그러니까 모세는 어린 시절을 자신의 집에서 친부모와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활한 것이다. 어린 시절을 생가에서 지내면서, 모세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의 딸이 왜 모세를 즉시 궁전으로 데려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자란 아이를 나중에 궁전으로 데려가서 자신의 아이로 삼는 것이 가능했을까? 여러 가지 궁금한 점들이 많지만,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모세가 어린 시절을 어머니 요게벳과 함께 보냈고, 요게벳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라는 점이다. 요게벳이 진정한 어머니였다는 사실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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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게벳, 어머니면서 어머니 아닌 삶을 살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2)

 

요게벳, 어머니면서 어머니 아닌 삶을 살다(1)

 

 

1.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 모세의 생물학적 어머니이면서 유모로 처신해야 했던 여인. 제 자식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어머니. 제 자식을 지키지 못한 어머니. 그러나 그는 진정한 어머니였다. 모세를 모세답게 만든 사람이 바로 요게벳일 것이기 때문이다.

 

2. 출애굽기 21-10절에는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본문 기자는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냥 레위 가족 중 한 사람, 레위 여자, 그의 누이, 바로의 딸이라고 부른다. 그러다가 10절에서 모세라는 이름이 나온다. 모세라는 이름은 바로의 딸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녀가 아이 이름을 모세라고 지은 까닭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지은 연유를 밝히는 것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3.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아브라함에서 솔로몬에 이르는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법정변론을 하는데, 모세도 언급한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스데반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모세가 애굽 궁전에서 왕자 교육을 받아서, 여러 가지 면, 특히 웅변을 위한 수사학과 행정 능력, 조직 운영 능력, 정보 수집 능력, 전투능력, 이런 것들이 탁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모세에 관한 기록들이 보여주는 것은 모세가 그런 점에서 그다지 탁월하지 못했고, 상당히 무능력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세가 과연 애굽 궁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4. 애굽 공주가 모세를 나일 강에서 구했지만, 그 아이를 궁으로 데려가서 젖먹이 때부터 왕자로 키운 게 아니다. 어린 시절 모세를 키운 건 생모였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출애굽기 2:9-10).

 

5. 모세의 어머니는 요게벳. 요게벳은 주님은 영광이시다는 의미이다. 주님이 최고라는 것이다. 주님을 최고로 삼는 삶이 요게벳의 삶이다. 이것은 중요한 가치관이다. 요게벳은 모세에게 그런 가치관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한 어린 시절이 모세에게는 궁궐에서 지낸 세월보다 소중하다.

 

6. 이제 요게벳에 관한 서론적인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요게벳이 모세를 출산하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출애굽기 1장은 산파들을 통해서 남자 아이를 살해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다음, 바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남자 아이를 낳으면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22).

 

7. 상황은 더욱 악해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일이 참으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자식을 낳아야 하는데, 남자 아이이면 바로 나일 강에 던져서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설마 그랬을까 생각하겠지만, 출애굽기 2장을 읽어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태어난 남자 아이를 나일 강에 던져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산모를 비롯해서 온 가족이 얼마나 애간장을 졸였겠는가? 피투성이 아이를 강물에 던져야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어쨌든 제 손으로 제 아이를 죽음의 길로 보내야 하는 부모들, 특히 어머니들. 그들에게 그 시절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8. 그런데 바로는 왜 남자 아이를 바로 죽이라고 하지 않고, 나일 강에 던지라고 했을까? 해마다 범람해서 애굽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명의 강을 왜 애꿎은 아이들 수장지로 삼으려 한 것일까? 혹시 그 아이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바로는 생명을 파괴하는 왕이다. 그리고 애굽을 비옥하게 만드는 나일 강에 아이들을 던지라는 것은 그 스스로 나일 강을 죽음의 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애굽을 죽음의 땅, 킬링필드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대립한다.

 

9. 이러한 대립은 십브라와 부아라는 두 여인에 의해서 드러난다. 히브리인들의 산파들인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의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리고 바로에게 저항한다. 이것은 시민불복종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은 산파들이었고, 산파들은 아이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는 일을 한다. 십브라와 부아에게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을 자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는 생명의 왕이신 하나님과는 달리 죽음의 왕이다. 출애굽기 1장은 바로가 모든 백성들에게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바로는 나일 강마저도 죽음의 강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일 강을 생명의 강구원의 강으로 만드신다.

 

10. 당시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전반적으로 묘사하던 본문기자는 2장에 들어서면서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한다. 한 가족에게 초점을 맞춘다. 레위 지파에 속한 청춘 남녀가 결혼을 한다. 성경기자는 그들 이름을 나중에 밝힌다.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 아므람의 나이는 백삼십칠 세였으며”(출애굽기 6:20). 그들은 자식을 낳는다. 아들을 낳으면 바로 나일 강에 던져야 하는 그 묵시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아들을 낳았다. 물론 이 아들이 첫째 아이는 아니다. 2장을 읽어보면, 누나 미리암도 있고 형 아론도 있기 때문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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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브라와 부아, 목숨 걸고 아이들을 지키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1)

 

십브라와 부아, 목숨 걸고 아이들을 지키다(2)

 

 

1.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바로 산파들이었을 것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일을 도우며 세상 밖으로 나온 그 귀중한 생명을 두 손에 안아든 산파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경건하고 거룩한가.

 

2. 십브라와 부아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를 알았고, 그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옳은 일을 했다. 산파들이 하는 일이란 게 생명탄생을 돕는 것이지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바로가 내린 지엄한 명령이라고 해도,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일이었기에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로를 거역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역사, 이스라엘 여인들로 하여금 자녀 출산을 통해 어머니가 되게 하는 모정천리의 여정에 참여했다.

 

 

           <Shiphrah and Puah, 출처: Sammy Williams>

 

 

3. 그러면 십브라와 부아라는 산파들이 등장하는 당시 상황을 다시 꼼꼼하게 살펴보자. 산파들이 등장한다는 것은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이 출산, 즉 어머니와 아이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애굽에 내려온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출애굽기 1:7).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기르는 일, 번성하는 일에 열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산파들은 이스라엘의 번성, 즉 자녀출산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4. 하지만 바로와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다.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의 번성을 억제할 방침을 시행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중노동에 동원해서 괴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갔다(출애굽기 1:12). 이스라엘 여인들이 자녀를 열심히 낳아서 어머니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고난도 모성애를 누를 수는 없었다.

 

5. 강인한 모성애로 인해, 그들이 세운 인구 억제책이 무용지물임이 드러나자, 애굽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적 증가를 억제하면서 그들을 애굽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절묘한 방법을 찾기 위해 계속 고민한다. 그러다 드디어 그들이 생각하기에 최상의 대책을 발표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산파들로 하여금 바로 죽이게 하는 것이었다.

 

6. 이것은 인류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헤롯이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예수가 태어난 지역 인근의 2살 미만 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는 이야기도 듣지만, 이스라엘 모든 가족을 대상으로 남아출산 시 그 아이들을 산파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게 하는 것은 도를 넘는 잔인무도한 일임에 분명하다.

 

7. 하지만 이 방법도 실패로 끝난다. 당시에 바로는 사람목숨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지닌 절대지존 이었다. 그러나 성경기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로는 매우 우둔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이것은 15절에 들어가면서 바로 드러난다. 15절을 보면, 애굽 왕이 산파들을 직접 불러서 엄하게 명령을 한다. 그런데 바로가 내린 이 지엄한 명령은 ‘그러나’라고 하는 접속사에 의해 뒤집어져서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한다. 17절을 다시 읽어보자.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린지라.” 그러자 바로는 산파들을 불러들여서 추궁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출애굽기 1:18). 그 살벌한 취조에도 불구하고, 산파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출애굽기 1:19). 이런 이유로 산파들은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죽일 수 없었다는 것인데,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들, 애굽 사람들이 얕잡아 봤을 그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건장할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모성애가 비교할 수 없는 없을 정도로 강해서, 자기 자식의 생명을 결코 남의 손에 맡기려 하지 않았음을 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8. 히브리 산파들은 바로를 두려워했겠지만,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애굽 왕이 내린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들을 살렸다. 정말 대단한 여인들이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했을 것이다. 물론 바로가 추궁할 때 할 핑계를 준비했겠지만, 그것이 통할 리 없을 것이고, 그들은 아마 모진 고초를 당했을 것이다. 그것을 다 알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임을 명하는 바로보다는 살림을 명하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 명령을 더 귀하게 여겼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가.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성경에 그 이름들이 기록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다.

 

9. 바로가 내린 명령을 교묘하게 어긴 산파들에게 바로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본문은 하나님이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본문기자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그들 집안이 흥왕했다고 증언한다(21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역시 "번성"이다. 이스라엘은 산파들로 인해 번성하고 더욱 강해졌다(20절). 산파들이야말로 이스라엘 번성의 주역이라는 것이다.

 

10. 여기서 보는 대로, 바로가 특별히 세운 대책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무리 괴롭히고 아무리 잔인하게 대해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굴하지 않았고, 수도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번성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독자들은 본문을 읽으면서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백은 십브라와 부아가 보여준 목숨 건 헌신, 모정천리(母情天理)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머니의 어머니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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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브라와 부아, 목숨 걸고 아이들을 지키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0)

 

십브라와 부아, 목숨 걸고 아이들을 지키다(1)

 

 

1. 어머니들의 어머니. 오늘은 아이를 낳은 어머니들보다 더 어머니다운 그런 여인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2. 출애굽기는 <이름의 책>이다. 한글 개역성경은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출애굽기 1:1)로 번역하는데, 히브리어 문장은 “이것들이 이름들이다”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열두 아들 이름을 열거하는데, 이 이름의 책 출애굽기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은 무엇인가?

 

3. “바로”(11절)는 이름이 아니고 왕을 가리키는 직함이다. 그리고 “모세”라는 이름은 2장 10절에 가서야 나온다. 성경기자는 모세가 출생하는 장면에서 모세의 부모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리고 모세를 구해준 애굽 공주 이름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름의 책인 출애굽기가 의외로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에 신중하다.

 

4. 출애굽기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이름은 십브라와 부아이다. 십브라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이고, 부아는 “화려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히브리 산파들이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출애굽기 1:15). 히브리어 문장을 직역하면, “애굽 왕이 히브리인 산파들에게 말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십브라이고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부아였다.” 1절에 나온 “이름”이 여기에 나온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왜 이들 이름을 맨 먼저 언급하는가? 출애굽기라는 이름의 책에서 이 두 사람을 제일 먼저 언급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존경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애굽기 1장을 읽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들을 얼마나 존경했을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Shiphrah and Puah, 출처: Sammy Williams>

 

 

5. 이스라엘 사람들이 산파들을 존중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이 바로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애굽기 1:17). 이 구절을 보면, 십브라와 부아는 가치관이 분명하고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들이 바로의 지엄한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 처형당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떠받드는 바로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바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6.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바로는 두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바로가 명령을 내린 후에 태어나는 히브리 남자 아이들은 모두 사형선고를 받은 죽은 목숨들이라는 점에서 “호모 사케르”이다. 그들이 태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사형수 입장”(“Dead Man Walking”)이다.

 

7. 그러나 그들은 바로가 내리는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았다. 그리고 바로에게 저항했다. 물론 지혜로운 대답(“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으로 위기를 넘기고 목숨을 건진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살렸다.

 

8. 바로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사람들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독자들은 바로가 진정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진정 강한 것은 산파들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고(20절), 산파들은 흥왕했다(21절).

 

9. 바로가 두려워하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지 않았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번성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좋은 일이지만, 바로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다. 이삭이 농사를 지어서 백배 결실을 얻었을 때, 이것은 이삭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이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내친다. 출블레셋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는 동일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기 위해서 애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번성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내보내는 것, 둘 다 바로에게는 감당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10. 성경기자는 산파들을 통해서 왕에 대한 두려움과 신에 대한 두려움을 대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데, 산파들은 신에 대한 두려움을 왕에 대한 두려움보다 앞세우는 선택을 한다. 그들은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 중에서 그들에게 본연의 임무인 살리는 일을 선택한다. 그들이 아이들을 죽인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산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기자는 산파들 이름은 밝히면서 애굽 왕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데, 이런 점에서 바로는 산파들보다 못하다. 십브라와 부아, 진정 위대한 여인들이다. 이름 그대로 아름답고 화려하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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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 모권(母權) 싸움에서 이기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9)

 

다말, 모권(母權) 싸움에서 이기다(2)

 

 

1. 어머니 다말. 다말이 원했던 것은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말은 어머니가 되기를 가장 원했다. 다말처럼 어머니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다말의 소원만은 아니었다. 남편인 엘도 원했을 것이고, 엘 사망 후에는 시아버지 유다와 주위 사람들도 다말이 아이를 출산해서 엘의 대를 잇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았다. 유다가 다말을 친정으로 되돌려 보냈기 때문에, 다말이 어머니가 되는 길은 더욱 멀어 보인다.

 

2. 하지만 다말은 어머니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성경기자도 다말을 포기하지 않는다. 성경기자는 다말이 어머니가 되는 과정을 상당히 상세하게 꼼꼼하게 서술한다. 독자들이 읽기에 꽤 부담스럽고 불편한 장면들도 서슴없이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그 일은 한 여인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 사람은 유다의 아내였다. 엘과 오난, 두 아들이 죽었을 때, 어머니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유다와 그의 아내가 슬퍼했다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다. 성경기자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그 아픔을 상상하게 한다. 묵묵히 참척의 아픔을 견뎌온 여인. 유다의 아내, 엘과 오난, 그리고 셀라의 어머니는 그저 수아의 딸로 알려져 있다. 유다의 아내, 세 아들의 어머니, 수아의 딸, 그가 죽었단다(창세기 38:12).

 

 

 

 

3. 장례 기간을 마치고 유다는 친구인 히라와 함께 양털을 깎으려 딤나에 갔다. 이 소식을 다말이 전해 들었다. 다말은 친정으로 돌아간 다음, 시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데도 연락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말은 아직 유다의 며느리인데 말이다.

 

4. 다말은 사태를 파악하고 나름대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신이 어머니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이고 세밀한 계획을 세워놓았다. 다말은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유다가 딤나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다말은 유다가 그곳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그 동선까지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 다말은 과부의 의복을 벗었다. 당시에 자신이 과부임을 알려주는 그런 의복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다음 얼굴을 가리고 몸도 감싸서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게 했다. 그런 차림으로 유다가 지나갈 에나임 문으로 가서 앉아 있었다. 그런 차림으로 그곳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창기로 여겼던 모양이다. 성경기자는 다말이 이렇게 행동하는 까닭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창세기 38:14). 다말이 하는 행동이 전혀 비난받을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말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다말은 셀라가 장성해서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유다에게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셀라와 동침해서 아이를 낳아 엘의 대를 잇게 해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다는 들은 척 만 척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유다는 다말을 잊고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히려 다말이 연락을 취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을 것이다. 다말은 유다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셀라와 동침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다말은 이렇게 어머니 되기 위한 치열함을 보인다.

 

6. 다말이 예상했던 대로 유다는 그곳을 지나가다가 다말을 보는데, 창기라고 생각했을 뿐, 그가 며느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이런 점에서 유다는 근친상간을 한 것은 아니다. 유다가 동침을 요구하자 다말은 그에게 대가를 요구하는데, 유다는 나중에 염소 새끼를 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다말은 그것을 믿을 수 있게 담보물을 달라고 한다. 그러자 유다는 담보물로 무엇을 받기를 원하는지 묻는다. 다말이 요구하는 담보물은 유다의 도장, 허리끈, 그리고 지팡이였다. 누가 보아도 유다의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증표를 다말은 요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말은 매우 치밀하고 적극적이다.

 

7. 유다로부터 보증증표를 받고 그와 동침한 다말은 임신을 한다. 성경기자는 다말이 집으로 돌아가서 과부의 옷으로 다시 갈아입은 것도 언급한다. 참 꼼꼼하다. 집으로 돌아간 유다는 친구인 아둘람 사람 히라를 통해서 다말에게 염소 새끼를 전하고 맡겨놓은 보증물들을 되찾아가려고 한다. 그런데 당연한 일이지만, 히라는 유다가 말한 창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성경기자는 히라가 창기를 찾아다니는 장면도 꽤 상세하게 기술한다. 히라가 그곳 사람들에게 수소문해서 확인한 결과 그곳에는 창기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유다에게 전한다. 유다로서는 황당할 노릇이었다. 유다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자기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말일 것이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했던 듯하다. 여전히 다말은 유다의 안중에 없었다. 그래서 일이 잘못되면 망신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쉬쉬 한다.

 

8. 그로부터 석 달이 지났다. 유다는 다말이 임신했다는 황당한 소식을 듣는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다말이 행음했다고 한다.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창세기 38:24). 그 소식을 들은 유다는 다말을 끌어내서 불사르라고 한다. 당시 그런 ‘명예 살인’의 관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시아버지, 그 권위가 대단하다. 어쨌든 사태는 아주 급박하게 돌아간다.

 

9. 화형을 당하기 위해 끌려나온 다말은 사람을 보내서 도장, 허리끈, 그리고 지팡이를 유다에게 보여주게 한다. 유다는 그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파악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창세기 38:26). 이렇게 위기로 치닫던 다말 임신 사건은 일단락된다.

 

10. 드디어 출산. 성경기자는 다말이 출산하는 장면도 상세하게 매우 코믹하게 서술한다. 다말은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손이 먼저 나와서 거기에 홍색 실을 묶어준다. 나중에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손이 다시 들어가고 다른 녀석이 먼저 나왔다. 그 모습을 산파는 터트리고 나온다고 해서 “베레스”라고 불렀다. 아이 이름을 산파가 지은 것이다. 그리고 홍색 실을 묶은 아이는 세라라고 불렀다. 어머니 되는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여인 다말. 다말은 이렇게 어머니가 되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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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 모권(母權) 싸움에서 이기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8)

 

다말, 모권(母權) 싸움에서 이기다(1)

 

 

1. 다말이라는 한 여인. 성경기자는 다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한다. 다말 이야기를 하는 창세기 38장은 37장에서 시작한 요셉 이야기를 느닷없이 끊고 들어오는데, 이렇게 끊긴 요셉 이야기는 39장부터 다시 시작해서 50장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창세기 37-50장이 요셉 이야기인데, 38장은 그 흐름을 깨뜨리는 침입자라는 것이다. 37장에 다말 이야기를 하고 38-50장을 요셉 이야기로 하는 것이 깔끔해 보이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배치했다면, 요셉 이야기를 끊고 다말 이야기가 들어오는 그 돌발성이 약화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까지 하면서 성경기자가 다말 이야기를 하려했을까?

 

2.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경텍스트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문학적인 관점에서는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 37장은 요셉이 애굽에 팔린 이야기를 끝난다(36절). 그런데 마지막 문단인 29-35절은 르우벤이 요셉 때문에 슬퍼하고, 야곱이 애통해 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34-35절).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긴 야곱, 그 모습이 성경기자로 하여금 두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겼을 유다를 떠올리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3. 창세기 38장을 다말 이야기라고 했는데, 얼핏 보면 유다 이야기로 보인다. 유다는 형제들과 떨어져서 살았단다. 아둘람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수아의 딸은 세 아들을 낳았다. 엘, 오난, 셀라. 아이들 이름은 유다가 지었다. 성경기자는 이렇게 유다가 아이들을 낳으면서 유다 가문을 형성해 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4. 그렇게 유다가 아이들을 낳고, 꽤 시간이 흘러서 장남 엘이 장가가야할 때가 되었다. 유다가 며느리를 골라서 데려왔다. 유다 계보가 이어지는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직 젊은 엘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 다말이 아직 출산은커녕 임신도 못한 상태에서 엘이 죽은 것이다. 이것은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기자는 엘이 급작스럽게 죽은 까닭을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라고 한다.

 

5. 엘이 어떤 행위를 했기에 성경기자가 그렇게 평가했는지 모르겠지만, 성경기자가 그렇게 평가하는 것을 보면, 엘이 상당히 비참하게 죽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법궤를 운반하던 과정에서 웃사가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베레스 웃사 사건처럼, 엘도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엘이 그렇게 죽은 것을 보면,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피부암으로 고통당하는 욥을 찾아와서, 욥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험악한 병을 앓는다는 것은 욥이 그런 벌을 받을 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했다는 증거라고 몰아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Tamar og Juda, maleri av Jacopo Bassano, ca 1550. Wikimedia Commons.>

 

6. 엘은 죽었지만 아직 오난과 셀라가 남아 있다. 셀라는 아직 결혼할 나이가 안 되었고, 오난은 결혼할 나이가 된 것은 분명한데,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유다는 그 당시 관습에 따라서 오난으로 하여금 형수 다말과 동침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엘의 대를 잇게 하라고 말한다.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문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창세기 38:8). 이것은 죽은 이의 대를 잇게 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여인을 어머니로 만들어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7. 오난은 그 관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난은 그 관습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오난이 다말과 동침해서 다말이 낳는 아이는 생물학적으로는 오난의 아이이지만 족보상으로는 오난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말이 낳는 아니는 엘의 아들로 입적해야 했다. 오난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관습에 반기를 든 셈이다. 그런데 그것을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오난은 그 관습을 따라서 다말과 동침을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 본능에 반하는 매우 어려운 행동을 한다. 성교를 하다가 사정하는 순간 오난은 정액을 다말에게 주지 않았다.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한다. “형수와 동침할 때마다, 형의 이름을 이을 아들을 낳지 않으려고, 정액을 땅바닥에 쏟아 버리곤 하였다”(창세기 38:9). 쉽지 않은 일인데, 오난이 얼마나 독하게 마음먹었는지 알 수 있다.

 

8. 사람들이 이런 내밀한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유다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은 다말이 임신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다말이 임신할 조짐을 보이지 않자, 자초지종을 캐물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런 일이 드러났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유다는 매우 진노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오난이 갑자기 죽임을 당한다. 이 죽음도 엘의 죽음만큼 처참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성경기자는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라고 평가한다(창세기 38:10).

 

9. 다말과 동침한 두 아들이 연이어 죽는 것을 보고 유다는 불안하고 두려워졌을 것이다. 다말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창세기 38:11).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셀라로 하여금 다말과 동침하게 했을 때, 엘이나 오난처럼 셀라도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가 끊기는 끔찍한 일이다. 대를 잇기 위해서 한 일이 오히려 대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0. 엘과 오난이 비극적으로 죽으면서, 다말은 남편을 잡아먹는 여자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참 기구한 삶이다. 자신과 동침한 남자들, 그것도 형제가 연이어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다말에게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엘과 오난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다말은 어머니가 되지 못했다. 유다는 과연 가문의 대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다말은 과연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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