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어머니 되기 위해 어머니 되기를 포기하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7)

 

한나, 어머니 되기 위해 어머니 되기를 포기하다(2)

 

 

1. 모정만리(母情萬里) 모로역정(母路歷程). 한나가 매년 실로 성소에 가서 소리 없는 통곡을 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한나는 확신을 얻고 돌아왔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버텼다. 마침내 한나는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했다. 드디어 어머니가 된 것이다. 한나는 아이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다. 한나가 아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까닭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의미를 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꼭 그런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울”이 그 의미에 더 가깝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들으셨다” 또는 표기에 따라 “그의 이름은 엘(하나님)이다”는 의미를 갖는다.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하면, 한나는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

 

2. 한나는 어머니가 되는 순간부터 어머니이기를 포기하는 준비를 한다. 그래서 매년 올라가서 매년제사와 서원제사를 드리던 실로 순례를 그해에는 하지 않는다. 한나는 실로로 가는 남편 엘가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22절). 엘가나는 한나에게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23절)고 말한다. 성경기자는 한나와 엘가나가 나누는 대화를 꽤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존중하며 주님께 신실한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려 한다.

 

 

 

 

3. 본문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한나가 매우 치밀하고 단호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아서 젖떼기까지 양육하고, 제사 예물(수소 세 마리, 밀가루 한 에바, 포도주 한 가죽부대)을 준비해서 실로로 올라간다. 이것을 보면, 한나는 제사 예법에 밝았던 듯하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아이가 어리더라.”는 말을 일부러 한다. 이 간결하고 무미해 보이는 구절이 실상 많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독자들은 금방 눈치 챌 것이다. 아직 어린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어머니 심정을 이렇게 은근하게 보여준다.

 

4. 한나가 제사를 드리면서 엘리에게 하는 말에서도 그가 매우 치밀한 사람임이 드러난다. 한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자초지종을 엘리에게 이야기한다. 먼저 한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힌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26절). 그런 다음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27절). 마지막으로 한나는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성소에 온 까닭을 간명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28절). 한나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앙적이다.

 

5. 성경기자는 이렇게 사무엘상 1장을 마무리하고 2장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한나의 노래’ 또는 ‘한나의 기도’가 나온다. 본문은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장면 다음에 나오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에 연속해서 읽도록 요구한다. 본문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한나가 드디어 한을 풀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독자들은 “브닌나에게 맺혔던 한을 드디어 풀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본문에 여럿 나온다. 물론 어울리지 않는 어색스러운 구절들도 보이지만, 본문은 전체적으로 원수와 싸워서 이긴 것을 말하고, 하나님이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신다고 말하는데, 특히 자녀를 많이 낳은 여자와 무자한 여인이 정반대 결과를 맞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브닌나와 한나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것이다.

 

6. 이렇듯 본문이 별 무리 없이 앞 뒤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학자들은 이 본문이 원래 한나가 출산 후에 드린 기도나 노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을 읽어보면, 출산 후에 산모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기도나 찬양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거창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7. 특히 10절(“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은 이 시가 파생한 맥락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데, 왕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은 나중에 사무엘이 보여주는 왕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과 다르다. 그리고 1장 28절과 2장 11절을 이어서 읽으면,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8. 이런 점에서 본문은 본디부터 한나가 부른 노래로 보기에 어려움이 많은데, 그렇다면 본문은 과연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졌을까? 어쩌면 본문은 왕의 군대가 승전 후에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찬양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왕위계승자탄생에 대한 감사 찬양 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원래 한나의 기도와 무관하던 이 시가 나중에 ‘한나의 기도’로 본문에 삽입된 것은 사실이다. 이 노래가 한나의 기도로 삽입되면서 어떤 효과를 주는가? 사무엘서 기자는 왜 이 시를 여기에 삽입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 시를 한나의 기도와 찬양으로 읽게 하는가?

 

9.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국가건설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매우 사소하게 보이는 엘가나 집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사소한 가족 이야기가 이 본문을 통해서 가족 이야기라는 차원을 벗어나 국가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의 노래는 사무엘서가 가족 이야기에서 국가 이야기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문이 보여주는 이러한 기능적인 이미지는 구약성경이 말하는 가족 이미지와 일치한다. 구약에서 가족은 가족 차원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가족은 여전히 가족으로 존재하면서도 또 언제나 가족을 넘어서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사무엘서 2장 1-10절에 나오는 한나는 한 아이의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모든 어머니를 대표하고 대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0. 10절까지 이어지던 거창 모드는 11절부터는 일상적인 분위기로 전환한다. 한나와 엘가나는 사무엘을 실로에 남겨 놓고 집으로 돌아간다.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사무엘상 2:11). 그 후로도 매년 엘가나와 한나는 실로에 올라가서 매년제사와 서원제사를 드렸다. 그때마다 한나는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사무엘에게 입혔다. 그리고 엘리는 그때마다 엘가나와 한나를 축복했다.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다른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 바친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0절). 하나님이 돌보셔서 한나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낳았다. 그리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21절). 이렇게 한나는 다시 어머니가 되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posted by

한나, 어머니 되기 위해 어머니 되기를 포기하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6)

 

 

한나, 어머니 되기 위해 어머니 되기를 포기하다(1)

 

 

1. 때로, 아니 생각보다 자주, 모정천리(母情天理)는 모정천리(母情千里) 모정만리(母情萬里)이다. 그만큼 어머니가 되는 게 어렵다는 의미이다.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한나의 삶도 그렇다. 한나의 삶은 천로역정(天路歷程)이 아니라 모로역정(母路歷程)이다. 그는 어머니가 될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고, 어머니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기 때문에, 어머니 됨을 포기할 서원을 주님께 했다.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장차 어머니 되기를 포기해야 하는 한나의 상황이 바로 모로역정이다.

 

2. 사무엘상은 “엘가나”라는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하는 사무엘서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흥미롭다. 성경기자는 그가 어느 지역에 사는지, 그리고 그의 직계 조상들이 누구인지를 자상하게 알려준다. 그런 다음 그의 두 아내를 소개한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었으니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요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사무엘상 1:2). 이것은 당시 사람, 특히 여자를 평가하는 데 출산여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3. 성경기자는 엘가나가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21절을 보면, 매년제사와 서원제사를 드렸다)하는 이야기를 들려준 다음, 제물 드리고 남은 것을 두 아내와 자식들에게 나누어주는데, 브닌나와 그의 모든 자녀에게 주는 것의 갑절을 한나에게 준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엘가나가 그렇게 하는 까닭을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런 양상은 야곱과 그의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을 떠올리게 한다. 야곱은 레아보다 라헬을 훨씬 더 사랑하는데, 라헬은 자식을 출산하지 못해서 힘겨워 했다.

 

4. 그런데 문제는 자식이 여럿인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사무엘상 1:6). 자식을 화살 통 속 화살에 비유한 시편기자가 문득 떠오른다. 그런데 개역개정 본분을 찬찬히 보면, “브닌나”라는 이름을 작은 글씨로 표기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는 실제로 “브닌나”가 없는데, 개역개정 번역자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브닌나를 표기하는 것이 문맥을 파악하는 데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까 히브리어 원문은 “그의 적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이다. 적수. 이것은 브닌나가 한나를 어떻게 대했으며, 한나가 브닌나를 어떻게 여겼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5. 그런데 7절을 보면, 엘가나가 실로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린 다음, 한나와 브닌나에게 제물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한나와 브닌나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매년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키므로.” 그렇다면 엘가나 혼자서 실로에 올라간 것이 아니고, 온 가족이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9절, 즉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라는 구절이 입증해 준다.

 

6. 그렇다면 브닌나와 한나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든 것은 엘가나일 가능성이 크다. 브닌나는 자녀들도 있는데, 엘가나가 자신에게 주는 것보다 한나에게 갑절을 주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엘가나도 야곱만큼 철딱서니가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두 아내 사이에 발생한 불화가 전적으로 엘가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도, 불화를 조장하고 방치한 상당한 책임을 엘가나가 져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7. 엘가나는 억울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는 한나를 달랜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흥미롭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사무엘상 1:8). 여기까지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장면이다. 그 다음 구절이 독특하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엘가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열 아들보다 낫다”는 구절은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룻기 4:15)를 떠올리게 한다. 엘가나는 한나가 아이를 출산하지 못하는 게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텐데, 자신을 열 아들과 대비함으로써, 그를 한나에게 남편이 아니라 아들 위치에 놓는다.

 

8. 그들이 실로에서 식사를 한 다음, 다른 사람들은 숙소로 갔는지 모르겠는데, 한나는 성소에 남아서 비통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사무엘상 1:10-11). 한나가 통곡했다는데, 13절은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그래서 성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던 제사장 엘리가 한나의 입을 한참 동안 주목했다(12절). 그러니까 소리 없는 통곡이었던 것이다. 하도 괴로워서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9.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절)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한나는 “주의 여종”을 세 차례 반복한다. 한나는 어머니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면 아이를 온전히 주님께 바치겠단다. 주님이 한나를 어머니가 되게 하시면, 한나는 주님을 위해서 어머니를 포기하겠다는 말이다. 한나가 원하는 것은 한번이라도 아이를 낳아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나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10. 한나는 엘리와 대화를 나눈다. 엘리는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그는 한나가 포도주를 마시고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하고 한나를 야단친다. 한나는 자신이 포도주를 마신 것이 아니고, “마음이 슬픈 여자”여서 주님께 자신의 심정을 쏟아 놓았을 뿐이라고 하면서,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16절)라고 사연을 엘리에게 들려준다. 엘리는 한나가 하는 말을 듣고, 한나를 이해하고, 한나가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준다. 엘 리가 하는 말을 듣고,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한나는 정말 평안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서 브닌나가 자신을 격동케 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생활했다. 한나는 자신이 어머니가 될 것임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posted by

룻, 신실과 인내로 불가능을 이겨내다(2)

  • 이스라엘의 시숙결혼에 대해 잘 아실텐데 그걸 적용해보면 쉽게 해석되지 않을까요?
    그 지역 사람들은 룻의 죽은 남편과 같은 지파이며 인척이었을 겁니다.
    원하는 친족남자가 끊긴 형제의 대를 이어줄수 있는데 보통은 상속지를 나눠줘야하니 싫었을겁니다.
    발치에서 결혼제도를 상기시키는것 만으로도 충분히 상대에게 의중을 전달할것 같네요.

    Tran 2019.11.20 15:25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5)

 

룻, 신실과 인내로 불가능을 이겨내다(2)

 

 

1. “너는 반드시 어머니가 되어라!” 이것은 모정천리의 관점에서 룻기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다. 그런데 룻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발치 이불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몇 가지 경우를 살펴보자. 엘리에셀이 아브람의 환도뼈에 손을 얹고 맹세했는데(창 24:9), 이 환도뼈는 실제로는 남성의 성기이다. 그러니까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의 성기를 붙들고 맹세한 것이다. 그리고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쳤는데(창 32:31-32), 그것도 실제로는 성기이다. 그렇다면 “발치 이불”도 보아스의 성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나오미는 룻에게 잠든 보아스와 성관계를 맺으라고 일러준 것은 아닐까? 분명한 것은 알 수 없고, 또 방금 이야기한 것을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나오미가 룻에게 지시하는 것은 전형적인 신부단장이다.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은밀하게 시집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룻이 보아스와 함께 초야를 보내게 지시했다는 말이다. 신혼초야에 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2. 룻은 나오미가 일러준 그대로 했다. 그렇게 일을 마쳤는데, 술에 취해 잠들었던 보아스가 정신을 차렸다. 룻을 보고 놀란 보아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 룻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 룻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입니다.”(룻 3:8-9) 룻은 자신을 “나오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이라고 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녀”라고 한다. 2장 13절에서도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을 “당신의 시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같은데, 히브리어로는 다르다. 2장 13절은 “당신의 하녀”라는 뜻이고, 3장 19절은 “당신의 시첩”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룻이 자신을 보아스의 첩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서도 우리는 보아스와 룻 사이에 그날 밤 어떤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아스도 이 말을 들으면서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을 것이다.

 

3. 룻은 계속해서 말한다.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라고 말한다. 여기서 “옷자락”은 직역하면 “날개”이다. “당신의 날개를 당신의 시첩 위에 펴소서.” 우리는 이 “날개”라는 말도 앞에서 한번 나왔음을 기억한다. 2장 12절을 보면, 보아스는 룻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 위해서 왔다고 말한다. 보아스는 이 말을 관용적으로 했는지 모르지만, 룻은 그 단어를 사용해서, 자신이 보아스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날개를 펴서 자신을 덮어달라고 한다. 즉 그를 보호해달라는 것이다. 책임져달라는 것이다.

 

 

 

4. 어떤 사람들은 이때 룻이 보아스에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호해달라고 했을 뿐이지 자신을 부인으로 삼아달라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룻이 경제적인 측면만 이야기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신부단장을 하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보아스를 찾아가서 묘한 장면을 연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룻이 보아스에게 자신을 그의 날개로 덮어달라고 한 것은 분명 자기 남편이 되어달라는 말이다. 룻은 대담하게 청혼을 한 것이다.

 

5. 자초지종을 파악한 보아스는 모든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서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재판을 통해서 친족을 책임지는 고엘의 권리를 합법적으로 취득한 보아스는 재판이 끝난 다음에 바로 룻과 결혼식을 했다. 온 베들레헴 사람들이 보아스 집에 모여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축하했다.

 

6. 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하는 이 장면에 이르면, 사람들은 한 가지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때 보아스 나이가 상당히 많았을 텐데, 아내가 없었을까? 룻기는 보아스의 아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보아스가 그때까지 독신으로 지냈을 리 없다. 당연히 결혼해서 말론과 기룐 만한 자녀들을 이미 여럿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룻을 다시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던지, 어떤 사람들은 보아스의 첫 부인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서 보아스가 룻과 결혼할 무렵에는 보아스가 홀아비로 지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7. 하지만 굳이 이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적 결벽증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보아스가 아내를 여럿 맞아들였다고 해도 흠될 게 없다. 그리고 룻기는 보아스의 아내가 몇인지 관심이 없다.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결혼 후 룻은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성경기자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룻 4:13)고 말한다. 임신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보아스와 룻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결혼하고, 임신하고, 또 출산했다는 것이다.

 

8.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은 것을 보면, 룻이 임신 못하는 여인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룻이 말론과 결혼해서 자녀를 낳지 못한 것은 룻이 임신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론이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에 와서 모압 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주를 내려서 임신치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저주가 보아스로 인해서 풀어져서 룻이 결혼하자마자 임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임신케 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라고 주장한다.

 

9. 하지만 이렇게만 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결혼해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이 꼭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룻기를 이런 식으로 읽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릇된 것을 풀어 가시는 분이지 일을 그릇되게 만드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론과 기룐이 각기 룻과 오르바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지 못한 것은 그들이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임신할 겨를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압에서 험한 일을 하다가 사고로 동시에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10. 어쨌든 보아스가 룻과 결혼해서 룻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엘리멜렉 가족이 겪은 모든 비극을 다 씻어내는 것이다. 보아스는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엘리멜렉 집안의 대를 잇게 해주었고, 그리고 엘리멜렉의 가족들이 겪은 모든 아픔을 일순간에 다 씻어주었다. 무엇보다 보아스는 룻이 어머니가 되게 해주었다. 물론 일이 그렇게 끝난 것은 무엇보다 나오미가 세운 계책과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룻과 나오미는 진정한 어머니가 되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posted by

룻, 신실과 인내로 불가능을 이겨내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4)

 

룻, 신실과 인내로 불가능을 이겨내다(1)

 

 

1. “너는 반드시 어머니가 되어라.” 모압 여인 룻. 룻기는 이방 여인이며 무자식 과부였던 룻,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전무 했던 이 여인이 어떻게 어머니가 되었는지, 그리고 덩달아 나오미가 어떻게 다시 어머니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모정의 책이다.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난 다음, 나오미는 남편 잃은 슬픔을 이겨내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그렇게 키운 그 아이들을 장가보낸다. 모압에 살았기 때문에, 나오미는 자연스럽게 모압 여자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인다. 성경기자는 두 며느리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 며느리 이름은 오르바, 둘째 며느리는 룻이다.

 

2. 그렇게 결혼해서 살다가, 아마도 깨가 쏟아지는 신혼 생활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론과 기룐이 세상을 떠난다. 오르바와 룻은 남편을 잃었다. 그들이 겪었을 아픔에 대해 본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겪었을 아픔과 슬픔, 그리고 막막함을. 엘리멜렉이 죽었을 때 나오미가 느꼈을 그 철저한 고립감, 한 사람 세상을 떠났을 뿐인데,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싸늘함을 오르바와 룻도 겪었을 것이다. 청상과부로 살아야 할 두 여인. 세상은 참 냉정하다.

 

3.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땅을 떠나서 귀국하려 한다. 그런데 나오미는 귀향하지만, 오르바와 룻은 고국을 떠나는 것이다. 두 며느리는 남편들이 죽은 다음에도 변함없이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오미가 소문을 듣고 귀향하려고 하자, 그들도 같이 가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맘을 모아서 그들은 길을 나섰다. 모압에서의 삶을 완전히 정리하고 필요한 짐을 꾸려서 길을 떠난 것이다. 지금으로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지만, 당시로는 쉽게 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나라가 다르니 오죽했겠는가.

 

 

 

 

4. 오르바와 룻의 친정식구들은 두 번의 떠나보냄을 경험한다. 첫 번째는 이방인들에게 딸을 주었을 때이다. 그리고 딸을 두 번째는 이제는 다시 보기 어려운 이국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온가족들이 모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안고 눈물로 이별을 했을 것이다. 친정 식구들, 특히 친정어머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이방인에게 시집을 보낸 것으로도 마음 아팠을 텐데, 사위가 죽고 자식도 없이 과부된 딸들을 보았을 때,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런데 이제 고국을 떠나서 시어머니와 함께 생면부지의 곳으로 간다니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을까?

 

5. 그렇게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선대(헤세드)하시기를 빈다. 두 며느리가 죽은 사람들, 즉 남편들과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보여주었던 그대로 하나님이 두 며느리에게 헤세드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이 짧은 말에서 오르바와 룻이 어떤 여자들인지 알 수 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헤세드, 즉 의리 있는 사람들이다. 헤세드는 변함없는 사랑, 신실하고 진실한 사랑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한마디로 “된 사람”들이다. 인간 도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진정 요즘에 보기 드문 신실한 사람들이다.

 

6. 아마도 모압 국경선 근처에서,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벌인 긴 논쟁이 끝나고, 오르바는 나오미의 간곡한 뜻을 따라서 친정으로 돌아가고, 룻은 끝까지 고집을 피워서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간다. 그러다 어느 날 이삭을 주우러 나갔다가 보아스를 만나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오미는 룻을 어머니로 만들 계책을 세우고, 그것을 룻에게 일러준다. 나오미는 룻에게 목욕을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름을 바르라고 한다. 몸을 매끈매끈하게 예쁘게 보이게 하라는 것이다.

 

7. 그렇게 몸을 아름답게 한 다음에, 옷을 입으라고 말하는데, 이 옷은 보통 옷이 아니고 길게 느려뜨려 입는 옷으로, 특별한 때 입는 옷임을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오미는 룻에게 그런 옷을 입으라고 말한다. 룻이 그런 옷을 하나 간직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몸을 씻고 기름을 발라서 예쁘게 꾸미고, 특별한 옷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결혼식 할 때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룻을 재혼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동안 결혼식을 미리 준비해왔다면 몰라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렸다면 몰라도 우리가 아는 대로, 전혀 그렇지 않았고, 결혼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룻이 신부라면 신랑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알 수 없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나오미가 룻에게 하는 말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나오미는 룻에게 그렇게 단장을 한 다음에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라고 지시한다.

 

8. 나오미는 룻이 그렇게 하는 것을 어떤 사람에게도 들키지 않게 하라고 룻에게 신신당부한다. 절대로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신부단장을 하고 타작마당으로 갔으면,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게 당연하지 왜 모습을 감추라고 하는 걸까? 그 마을에서 누가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고, 감추려 해도 어려웠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나오미는 사람들이 다 먹고 마실 때까지 철저하게 숨어있으라고 룻에게 일러준다. 나오미는 그날이 곡식걷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당시에는 곡식걷이를 끝내면서 잔치를 열었던 모양이다. 나오미는 이것을 다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일을 꾸민다. “최대한 몸을 단장하고 잔치가 끝날 때까지 타작마당 어느 곳에 꼭꼭 숨어있어라.” 이게 바로 나오미가 룻에게 내린 지령이다.

 

9. 계속해서 나오미는 자신이 세운 계책을 룻에게 알려준다. 타작마당 어느 곳에 몸을 숨기고 잔치를 지켜보다가, 잔치가 끝난 다음에 보아스가 어느 곳에 누워자는지 잘 알아두라고 한다. 그런 다음 보아스가 누워 잠자는 곳으로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우라고 한다. 나오미가 룻에게 이렇게 지시하는데,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보아스가 잠자는 곳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가라는 것까지는 이해를 하겠다. 그런데 발치 이불을 들추고 거기 누우라는 것은 무엇을 하라는 말일까? 발치 이불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의 발치 이불”이라는 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발을 뜻하는 말에서 온 것이지, 이불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발과 관련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벗겨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양말을 벗겨라”로 번역하지만, 나오미가 말하는 것은 매우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양말을 벗기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posted by

나오미, 노년에 진정한 어머니가 되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3)

 

나오미, 노년에 진정한 어머니가 되다(2)

 

 

1. 룻은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보아스 밭에서 곡식걷이를 돕고 이삭을 주우면서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야기를 한다. 나오미가 특별히 할 말이 있는 듯하다. 여기서도 본문기자는 나오미가 룻의 시어머니라는 사실을 일부러 밝힌다. 이제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도 불필요해 보이는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런 집요함은 룻과 나오미가 어떤 관계인지, 즉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룻은 나오미가 자기에게 특별히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이 며칠 동안 시어머니가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묻지는 않았지만, 무슨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심각한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룻은 시어머니가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렸다. 시어머니가 지금 말씀하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야기할 때가 되면 자기에게 이야기해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3. 그런데 나오미가 이제 생각을 다 정리한 모양이다. 그래서 룻을 부른다. 나오미는 룻의 두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위해서 쉴 곳을 찾아보려고 한다. 이제는 내가 너를 위해서 안식할 곳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니?”(룻기 3:1) 나오미는 룻이 안식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때가 되면 결혼해서 남편과 한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 이것을 ‘안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룻은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나서 이국땅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니 안식을 완전히 잃은 것이다. 이것은 정상적이지 않다. 불행한 일이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성경기자가 나오미를 굳이 룻의 시어머니라고 밝히는 까닭은 이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4. 그리고 룻에게 시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룻이 결혼했다는 것인데, 남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결혼이 무효화된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기 때문에 룻의 신분이 어정쩡한 상태이다. 나오미는 이것을 정리해주려는 것이다. 결혼했으면서도 안식할 곳을 잃고 사는 룻에게 다시 안식을 주어야겠다는 것이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일을 반드시 성사시키기 위해 나오미는 계책을 세우고, 룻에게 그대로 실행하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5. 룻이 아이를 낳은 날, 나오미를 찾아온 동네 여인들은 축하의 말을 한다. 그들은 나오미를 찾아와서 그저 “축하 한다”고 인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축하 인사가 의례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한지 모른다. 그들은 룻이 낳은 그 아이로 인해서 나오미가 앞으로 어떤 힘을 얻을지를 상세하게 나열한다. 무엇보다 그들은 그 아이가 나오미의 생명을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6. 이것은 나오미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로 인해서 기력을 소진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모압 땅에 묻고 희망 없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던 때를 기억한다. 그가 룻과 오르바를 친정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하는 말에서 우리는 나오미가 얼마나 처절한 심정이었는지를 느꼈다. 그는 삶의 기쁨과 희망을 다 잃어버린 여인이었다. 그런데 룻이 낳은 그 아이가 나오미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어서 희망을 갖고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오미의 노년을 책임져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아이로 인해서 나오미는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 아이는 “이름의 회복자”이기도 하다.

 

7.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며느리가 그 아이를 낳았는데, 그는, 당신에게는 일곱 아들들보다 더 낫습니다”(룻기 4:15). 그들은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겉에서 보기에도 룻이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알 정도면 룻이 시어머니를 얼마나 잘 모셨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룻이 나오미에게 일곱 아들들보다 더 나은 며느리라고 말한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이것을 패러디하면 “좋은 며느리 하나 일곱 아들 부럽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들레헴 사람들이 룻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사랑한다고 말했고, 룻이 일곱 아들 부럽지 않게 능력을 갖춘 며느리라고 인정했다.

 

8. 베들레헴 여인들의 축하인사(4:14-15)가 끝났다. 긴 축하인사를 받은 나오미는 룻이 낳은 그 아기를 데려와 자기 품에 안았다. 나오미 품에 안긴 그 아이는 참으로 복 받은 아이이다. 동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축하인사를 하고 복을 빌어주었지만, 그 아이와 룻에게도 복을 빌어주었을 것이다. 그 아이는 복의 근원과도 같은 아이이다. 그 아이는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아이이다. 할머니에게 새로운 힘을 주고 그녀가 겪은 모든 아픔들을 다 잊히게 해줄 아이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오미의 노년을 책임져줄 “새로운 고엘”이다. 그 아이의 태어남은 모두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었다. 그 아이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상징이었다.

 

9. 나오미가 손주를 품에 안았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녀의 메마른 가슴에 안은 그 아이. 새 생명. 보기만 해도 예쁜 그 모습. “아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옐레드”이다. 이 단어는 1장 5절에 나왔다.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여기서 “아들”은 히브리어로 “벤”이 아니고, “옐레드,” 즉 아이이다. 이것은 말론과 기룐이 아무리 장성해서 장가를 갔다고 해도, 그리고 비록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나오미에게 그들은 여전히 “아이”들일 뿐이었던 것이고, 나오미는 영원히 그들의 어머니였음을 보여준다.

 

10. 죽은 두 아이들을 가슴에 안고 통곡했던 어머니 나오미는 이제 룻이 낳은 아이를 가슴, 즉 죽은 두 아들을 안았던 그 가슴에 안고 기뻐한다. 어떤 사람들은 룻기가 “옐레드”로 시작해서 “옐레드”로 끝나는 대칭구조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대칭이 아니다. “옐레드(들)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옐레드의 탄생”으로 끝나는 더 극적인 대칭이다. 죽음을 넘어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대칭인 것이다. 나오미는 그 아이의 양육자가 된다. 그래서 나오미는 다시 진정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posted by

나오미, 노년에 진정한 어머니가 되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2)

 

나오미, 노년에 진정한 어머니가 되다(1)

 

 

1. 사사들이 다스리던 시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기근을 피해서 모압으로 갔다. 그는 모압에서 죽으려고 간 게 아니다. 살려고 갔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이국땅 모압으로 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죽었다. 먼 이국에서 눈을 감는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온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사랑하는 아내를 이국땅에 두고, 또 장가도 못 보낸 두 아들을 남겨놓고 떠나는 가장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쩌면 그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온 것을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고, 나오미와 두 아들이 그를 모압 땅에 묻었다.

 

2. 성경기자는 그런 상황을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았다”(룻기 1:3)라는 말로 표현한다. 남겨진 사람들.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면서 그를 모압 땅에 묻고 그래도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 나오미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남편을 그리워하고 또 원망했을까? 그리고 말론과 기룐도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그리움과 악의 없는 원망 속에서 그렇게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을 것이다.

 

 

 

 

3. 성경기자는 엘리멜렉이 죽은 다음, 나오미가 두 아들을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과부가 외국에서 두 아들을 키우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고통스러운 그 삶이 우리 눈에 선하다. 나오미는 남편 잃은 슬픔을 이겨내면서 아이들을 키웠을 것이다. 그렇게 키운 그 아이들을 드디어 장가보낸다. 나오미는 모압 여자들을 며느리로 받아들인다. 성경기자는 두 며느리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첫째 며느리 이름은 오르바, 둘째 며느리는 룻이다.

 

4. 두 며느리를 얻은 나오미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두 아들을 장가보내는 날이 나오미에게는 가장 기쁜 날이면서도 또 가슴 아픈 날이었을 것이다. 다른 어느 날보다 남편 생각이 더 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오미는 이제 호강할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고통 끝 행복 시작!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5. 하지만 사람일이라는 것은 정말 모를 일이다. 행복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다시 부고장을 받는다. 그것도 두 장을 동시에 받는다. “말론과 기룐 사망.” 성경기자는 나오미의 두 아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아들”이라는 말 다음에 말론과 기룐이라는 이름을 이어 붙인다. 엘리멜렉이 죽었을 때는 “엘리메렉, 즉 나오미의 남편이 죽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그의 두 아들, 즉 말론과 기룐이 죽었다”고 한다.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사소한 차이에서 나오미가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더 슬퍼했음을 짐작한다. “말론과 기룐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 않고, 그의 두 아들, 즉 그토록 사랑했던 두 아들, 남편 죽은 다음 고생고생 다하면서 키워 장가보낸 두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나오미가 자식 잃은 어머니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6. 말론과 기룐. 이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홀로 남은 어머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고생고생하면서 자기들을 키워서 장가보내고 늙어 가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그 젊은 아내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이 비통한 죽음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죽었다.

 

7. 이 죽음 앞에서 넋을 잃은 나오미 모습이 떠오른다. 이제는 흘릴 눈물도 없을 나오미.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몸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두 아들을 땅에 묻을 때, 나오미는 자신의 삶도 그곳에 묻었을 것이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압 땅에 묻으면서, 실은 자기 가슴에 묻었을 것이다. 살아보려고 그곳에 온 그 사람들. 하지만 모압은 삶의 땅이 아니고 죽음의 땅이었다. 나오미는 얼마나 원통했을까? 성경기자는 이런 나오미 모습을 ‘두 아들과 남편은 떠나고 그녀 홀로 남았다’는 말로 표현한다. 홀로 남겨졌다는 이 말에서 우리는 가슴 저리는 슬픔과 고독을 느낀다. 그런데 여기서 ‘두 아들’은 ‘두 아이’이다. 말론과 기룐은 아무리 장성해서 장가를 갔다고 해도, 나오미에게는 여전히 ‘아이’라는 것이다.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아이’라고 하는 데서 우리는 어머니 나오미가 겪는 그 참척의 아픔을 더 크게 느낀다.

 

8. 그런 아픔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다. 그런데 길을 가던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을 불러 세운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 심각하게 이야기를 한다. 각자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룻기 1:8). 대체로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는데, 나오미는 왜 “어머니의 집”이라고 했을까? 그들이 모압을 떠나올 때,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친정어머니들이 두 딸들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 모습, 딸들과 영영 헤어지는 그 어머니들의 아픈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두 아들을 먼저 잃은 나오미는 그 아픔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 어머니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 것인지를 짐작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가슴아파하며 평생 동안 딸을 그리워하면서 지낼 그 어머니들 모습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시어머니를 따라서 이국땅으로 가지 말고, 친정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9. 하지만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며느리들이 완강하게 버티자, 나오미는 다시 말을 한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들이 돌아갈 곳은 유다 베들레헴이 아니고 바로 너희들의 어머니 집이다.” 두 며느리들이 돌아갈 곳이 어디냐는 것이 논점이다. 나오미는 “너희들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두 며느리는 “우리는 어머니와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가는 것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어머니”라는 말에 주목한다.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나오미는 여전히 어머니이다. 그는 말론과 기룐의 어머니였을 뿐만 아니라, 오르바와 룻의 어머니이기도 했던 것이다.

 

10. 그렇게 말을 하는데도 두 며느리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자기가 했던 말을 풀어서 다시 설명해준다. “내가 무슨 소망이 있어서 오늘 밤에 한 남자를 만난다고 하자. 그래서 아들들을 낳았다고 하자.” 이런 이야기까지 하면서 나오미는 어떻게 하든지 두 며느리들을 그들의 어머니에게로 보내려 한다. 눈물범벅의 우여곡절 끝에 오르바는 친정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간다.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posted by

시스라의 어머니, 모든 어머니는 존중받아야한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1)

 

시스라의 어머니, 모든 어머니는 존중받아야한다(2)

 

 

1. “시스라의 어머니는 도대체 언제 등장하는가?” 조금만 기다려보라.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와 그 군대를 전멸시키고 야빈을 눌러서 결국 야빈과 그 세력을 진멸한다(사사기 4:24). 사사기 4장은 이렇게 끝난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얼마나 극적이었던지 옛 시인은 31절에 이르는 꽤 긴 서사시로 만들었다. 그것이 사사기 5장이다. 성경기자는 드보라가 노래하는 것으로 설정하는데, 드보라는 자신이 사사로 부름받기 이전, 즉 삼갈과 야엘 시대를 매우 곤궁한 시절로 정의한다.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사사시 5:7). 하지만 성경기자가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사사기 3:21)고 말하기 때문에, 드보라가 하는 말은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기 위한 극적인 대비로 보는 게 좋겠다.

 

2. 그런데 모정천리 때문인지, 드보라가 자신을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칭하는 것이 눈에 확 들어온다. 드보라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는 게 어색해 보이지만, 어쨌든 이것은 위대한 칭호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외적이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에서, 사만 명의 군인들 가운데 방패와 창을 든 사람이 하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한 것이 바로 드보라 자신이라고 스스로를 높인다. 그러면서 드보라는 자신이 이룬 업적(물론 드보라는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라고 노래한다.)을 세세하게 이야기한다. 드보라와 바락을 따르는 사람들을 열거한 다음,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것을 칭송한다.

 

 

 

3. 사사기 4장은 드보라와 바락이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인 시스라와 싸웠다고 하는데, 사사기 5장은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19절)고 한다. 사사기 5장이 전투장면을 더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4. 드보라는 비록 이스라엘 군사들이 용맹하게 싸워서 대적들을 물리치긴 했지만, 신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승리했음을 말한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20-21절).

 

5. 드보라는 메로스 사람들과 야엘을 대비하는데,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메로스 사람들을 저주하고(23절), 야엘을 칭송한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24절). 이렇게 메로스 사람과 야엘을 대비하면서, 야엘을 높인다.

 

6. 드보라가 야엘을 칭송하는 까닭은 그가 적장 시스라를 죽였기 때문이다. 드보라는 시스라의 최후를 꽤 상세하게 서술한다(25-27절). 야엘이 한 손에 방망이를 든다. 그리고 끝이 뾰쪽한 장막 말뚝을 다른 손에 든다. 그리고 시스라에게 다가가서 그 관자놀이에다 방망이로 말뚝을 박는다. 야엘이 얼마나 힘이 좋던지 말뚝이 시스라의 머리를 꿰뚫는다. 4장은 누워 잠자는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야엘이 말뚝을 박아서 그 말뚝이 땅에 박힐 정도였다고 한다(21절). 참 대단한 용기와 힘이다. 시스라가 발 앞에 고꾸라진다. 그렇게 쓰러져서 죽는다. 성경기자는 시스라가 고꾸라지고 쓰러져 죽는 것을 세 번 반복한다(27절). 이렇게 야엘이 시스라를 용맹하게 살해하는 장면을 성경기자는 하드고어 영화처럼 생생하게 묘사한다. 성경기자는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암살하는 장면도 아주 살벌하게 서술했다(사사기 3:21-22).

 

7. 시스라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야기한 다음, 드보라는 시스라의 어머니를 언급한다. 드보라는 시스라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리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드보라가 설정하는 장면을 맘속으로 그려보라. 장소는 시스라 어머니가 거주하는 저택이다. 나이든 시스라 어머니가 창문, 더 자세하게는, 창살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다림에 지쳤는지, 아니면 무슨 낌새를 챘는지, 시스라 어머니가 울부짖는다.

 

8.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28절). 시스라의 어머니가 말하려는 것은 아마도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천하무적인 우리 아들이 이렇게 늦을 리가 없는데… 그 군사들을 얼마나 용맹스러운데… 다른 때 같으면 벌써 돌아왔을 시간인데… 이거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럴 리가 없어!”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안절부절 못하는 시스라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9. 그렇게 울먹이면서 부르짖는 시스라의 어머니를 수종하는 “지혜로운 시녀들”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을 것이다. “주인어른은 분명히 다른 때 보다 더 많은 전리품을 갖고 승전가를 부르면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치도 걱정 마시고 맘을 편안하게 하십시오. 잠시 후면 저쪽에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시스라의 어머니는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애써 달랜다. “그래.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지? 내 아들이 누군데, 전투에서 질 리가 없지. 전리품을 갖고 반드시 돌아올 거야. 용사들이 아리따운 처녀들을 한 둘은 데리고 올 게 분명해. 그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내 아들 시스라가 특별한 전리품으로 채색 옷을 가져 올 거야.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그들이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사들이 그곳에 들이닥쳐서 시스라의 어머니를 비롯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재물을 약탈했을 것이다.

 

10. 전쟁터에 나간 아들을 하루 내 서성이며 기다리는 어머니.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아들. 그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심히 불안하고 두려운 어머니의 처절한 울부짖음. 그리고 서로 위로하며 맘을 달래려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을 시인은 정말 실감나게 묘사한다. 그런데 이것은 “조롱”이다. 이미 아들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그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를 비웃는 것이다. 드보라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31절). 우리도 그러기를 원한다. 폭력적인 이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렇다고 꼭 이렇게 적장의 어머니를 조롱해야 했을까?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가나안의 어머니”를 말이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더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문학적인 장치인 것은 알겠는데, 이스라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모정을 난도질하는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행위가 아닐까?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posted by

시스라의 어머니, 모든 어머니는 존중받아야한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30)

 

시스라의 어머니, 모든 어머니는 존중받아야한다(1)

 

 

1. 시스라의 어머니? 아마 생소할 것이다. 오늘은 대다수 사람들이 처음 들을 “시스라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그 이야기는 전쟁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전쟁 이야기다. 전쟁담만큼 신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영웅들도 전쟁영웅들이지 않는가. 참 아이러니하다. 세상이 그만큼 폭력적이라는 것인데, 성경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폭력에 대한 폭력. 사사기도 우리를 그 잔인한 폭력의 현장으로 인도한다. 사사기 4장과 5장은 한 묶음이다. 독자들은 4장과 5장을 읽으면서, 드보라를 주역으로 생각할 텐데, 그렇긴 하지만, 성경을 꼼꼼하게 읽다보면, 의외로 시스라가 주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4장에서 5장으로 읽어가다 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2.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우선 사건을 차근하게 살펴보자. 사사기는 새로운 단락을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로 시작하면서, 문학적으로 <범죄→심판|탄원→구원>의 형태를 반복한다. 옷니엘, 에훗, 삼갈에 이어서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다. 그때 지파별로 흩어져 살면서 인근 지파들끼리 느슨한 연맹관계를 맺고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빈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었는데, 그는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하솔을 다스리고 있었다. 야빈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단다(사사기 4:3).

 

3. 성경기자는 야빈을 “가나안 왕”이라고 칭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수준의 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호수아 12장 7-24절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이 “쳐서 멸한 그 땅의 왕들” 명단을 나열하는데, 모두 31명이나 된다. 그들은 왕이라기보다는 촌장이나 부족장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야빈도 그런 정도였을 텐데, 다른 촌장이나 부족장들보다 좀 더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야빈이 하솔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들을 아울러서 통치하고, 또 이스라엘 지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군사력을 갖고 있어야 할 텐데,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를 갖고 있었다(사사기 4:3). 하솔이 제대로 된 국가도 아닌데 병거를 구백 대나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리 신빙성 있어 보이진 않는다. 어쨌든 군사력이 다른 곳보다 강했다는 의미일 텐데, 성경기자는 야빈보다 그의 군대 장관에게 더 주목한다. 그는 시스라였다. 그리고 그 철 병거를 비롯해서 군사들을 통솔했다. 그래서 야빈이 아닌 시스라가 전면에 등장한다.

 

 

 

4. <드보라+바락> 조합은 <야빈+시스라> 조합에 대응한다. 드보라는 납달리에서 바락을 불러와 그에게 전투를 맡긴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제시한 것은 구체적이다. “너는 납달리 자손과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사사기 4:5-6). 바락은 드보라가 함께 올라가기를 요청한다. 그러자 드보라는 바락이 시스라를 죽이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삿 4:9)고 말하신다. 이 구절은 전투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미리 보여준다. 그리고 여인들이 주도하는 전투라는 것을 강조한다.

 

5.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보는 대로, 드보라나 바락이 주목하는 대상은 야빈이 아니라 군대장관인 시스라이다. 바락이 군사를 모아서 다볼 산 요새에 오른 것을 보고 받는 것도 야빈이 아니라 시스라이다(사사기 4:12). 그리고 드보라는 바락에게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 주신 날이라”고 말한다(사사기 4:14). 사사기 4장과 5장에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사람이 바로 시스라이다.

 

6. 드보라가 전투 결과를 예고했지만, 성경기자가 서술한 바에 의하면, 독자들이 예상하는 것과 달리 전투는 아주 싱겁게 끝났다. 가나안 왕들이 와서 도왔다는데도(사사기 5:19), 전투는 시스라의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다는 것이다. 성경기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사들 앞서 가셔서 시스라와 그의 병거, 그리고 군사들을 칼로 쳐서 혼란에 빠뜨리셨단다(사사기 4:15). 물론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겠지만(사사기 5:18), 그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승전 요인이 분명 있었을 것이고, 성경기자는 이것을 신적인 개입으로 해석한 것이다.

 

7. 결국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 도주하고, 바락은 시스라의 병거들과 군사들을 추격해서 시스라가 주둔하던 본거지인 하로셋학고임까지 가서 시스라 군대를 쳤다(사사기 4:15-16). 파죽지세로 적의 중심부까지 치고 들어가서 완전히 궤멸시켜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스라의 막강 정예부대가 어이없게 전멸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8. 그러나 전쟁은 시스라를 죽이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 왜 하솔 왕 야빈이 최종 제거 목표가 아니고 시스라가 최종 제거 목표였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시스라의 군대를 전멸시킨 바락은 시스라를 추격한다.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서 말도 타지 않고 시종도 없이 홀로 걸어서 어디론가 도망했단다. 그가 찾아간 곳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었다. 성경기자는 이야기 흐름을 끊으면서 11절에 헤벨 이야기를 삽입하는데, 바로 이 장면을 위한 복선이었던 것이다. 성경기자는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고 말한다. 헤벨은 318명의 군대를 데렸던 아브람 같았는지도 모르겠다(창세기 14:13-16). 야빈과 헤벨의 화친은 그랄 왕 아비멜렉이 친구인 아훗삿, 그리고 군대장관 비골을 데리고 이삭에게로 와서 맺은 화친 계약(창세기 26:26-31)을 떠올리게 한다.

 

9. 야엘은 시스라를 맞아들이고 안심시킨다. 그를 이불로 덮어준다. 시스라가 물을 달라고 하자 야엘은 우유를 마시게 하는데, 이것은 사람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준다. 시스라는 야엘을 철썩 같이 믿고 평안하게 잠든다. 야엘은 시스라를 잠재우기 위해서 일부러 엉긴 우유를 마시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시스라를 잠들게 한 다음, 야엘은 그를 죽이는데, 성경기자는 야엘이 시스라를 죽이는 장면을 꽤 상세하게 서술한다(사사기 4:21.) 5장은 시스라가 죽는 장면을 훨씬 극적으로 묘사하는데, 시스라가 서 있는 상태에서 야엘이 그를 죽이는 것으로 서술한다(26-27절). 어쨌든 방망이로 (아마 끝이 뾰쪽했을) 장막 말뚝을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박았다는 것은 동일하다. 시스라를 수색하던 바락이 그곳에 왔을 때, 야엘은 자신이 살해한 시스라의 처참한 시신을 바락에게 보여주는데, 성경기자는 “말뚝이 그의 관자놀이에 박”힌 것에 주목한다.

 

10. 이렇게 해서 바락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시스라가 지휘하던 막강 정예부대를 지휘관과 함께 잃은 야빈은 점점 약해져서 이스라엘은 결국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사사기 4:23-24).

 

이종록/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posted by

산모(産母)의 권리, 그 시대가 우리보다 나았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9)

 

산모(産母)의 권리, 그 시대가 우리보다 나았다(2)

 

 

1. 레위기 12장은 산모에 대한 규정이다. 산모는 아이를 출산하면서 부정해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정하다고 규정되는 것이다.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레위기 12:2).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자가 생리를 하면 그것은 부정하다고 하는데(레위기 15:19-24),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한 것을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으니라”(에스겔 36:17).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기 때문이다(에스겔 36:18). 그것이 마치 여인이 생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2. 부정(不淨)하다는 것을 정말 부정적(否定的)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익숙한 공간과 사물들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별하고, 익숙한 것들과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기준을 정해놓았다. 그것을 타부라고 하는데, 타부를 범하는 것을 “부정 탄다”고 한다. 대체로 어떤 행위나 상태를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일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3.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정결 예식을 해야 한다. 거룩한 곳에서 더 거룩한 곳으로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다. 아론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정결 예식을 행해야 했다(레위기 16:1-4). 그런데 그 반대 경우도 정결 예식을 해야 한다.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 거룩한 곳에서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25 속죄제물의 기름을 제단에서 불사를 것이요”(레위기 16장). 제의적으로 정결예식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면 부정 탄다. 그런데 정결한 상태에서 정결을 벗는 예식을 하지 않고 거룩한 곳에서 나오는 것도 부정 탄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실인 규정에도 나온다. 나실인이 몸을 구별하는 기한을 채우면, 거룩함에서 벗어나는 정결 예식을 행해야 한다. 그래야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민수기 6:13-20).

 

 

 

4.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 어느 미국 교회 교인수가 계속 줄어드는 바람에 더 이상 교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어서 교회 문 닫는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다. 교회 문 닫는 예배가 생소하기도 했고, 또 분위기가 오죽 침통할까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서 놀랐다. 교회 문 닫는 예배 분위기가 마치 교회를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유쾌했다. 그 지역 여러 교회들이 와서 함께 찬양하고 교제하면서 예배를 마쳤다. 물론 그 교회 건물은 노회에서 관리하지만, 만약 교회 건물을 교회 용도가 아닌 세속적인 용도로 파는 경우에는 교회를 봉헌할 때와 반대로 그 건물을 세속화하는 예식이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런 점에서 정과부정을 고려하는 게 좋겠다.

 

5. 레위기 11장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규정하는데, 여기서도 어떤 특징을 가진 동물들을 정형적인 것으로 설정하고, 그것들을 정하다고 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들을 부정하다고 한다. 정한 것으로 규정된 짐승들은 대체로 가축들이고,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짐승들은 야생 동물들이 대다수다. 그리고 정한 짐승들은 사람들이 잡아먹을 수 있지만, 부정한 짐승들은 그럴 수 없어서, 어떤 면에서는 보호를 받는 것이다. 정결 규정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것들, 가증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생명존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 그리고 레위기 12장은 출산하는 여인이 피를 흘리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보는데, 그것은 출산 자체가 부정해서가 아니라, 출산하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생명을 감소하는 상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부질환을 언급하는 13장 역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부정하다고 보는 것이다. 14-15장은 몸에서 피나 정액, 또는 고름이 나오는 유출증상에 대한 것인데, 이것 역시 몸에서 무엇이 나오면, 생명을 감소시킨다고 생각해서, 즉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부병과는 달리, 유출증상은 제사장이 아닌, 당사자가 판단해서 적합한 행동을 하게 한다.

 

7. 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남자를 낳으면”(2절)이라는 구절이다. 이것은 여자 아이를 낳을 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5절). 레위기 12장에 의하면, 산모가 남자 아이를 낳으면, 7일 + 33일, 모두 40일 동안 부정하고, 그 이후에 정하게 된다. 그리고 산모가 여자 아이를 낳으면, 14일 + 66일, 모두 80일 동안 부정하고, 그 이후에 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남자 아이를 낳을 때보다 여자 아이를 낳을 때 부정한 기간이 두 배나 길다.

 

8. 산모가 남자 아이를 출산했을 때와 여자 아이를 출산했을 때, 정결해지는 기간이 이렇게 다른 것에 대해 대체로 성차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한다. 즉 남자 아이보다 여자 아이가 더 열등하기 때문에 산모가 정결해지는 기간도 두 배나 길다는 것이다.

 

9. 과연 그럴까?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더 부정하다는 게 사실인가? 실제적인 면에서 생각해보자. 레위기 기자는 이 기간 동안, 즉 산혈이 깨끗해지기까지는, 다시 말해서, 몸이 정상상태로 회복되기까지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아야 한다(4절)고 규정해 놓았다. 유출증상 규정에 따르면, 유출증상이 있을 때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산모는 그 기간 동안 명절에 준하는 휴식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요즘 식으로 말하면, 출산 휴가를 얻은 셈이다. 남자 아이를 낳을 때는 40일인데, 여자 아이를 낳을 때는 80일 동안 쉴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남자 아이를 낳을 때보다 여자 아이를 낳을 때 더 쉬게 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성차별적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혁신적인 제도이다. 이런 점에서 레위기가 모정천리를 설파한다고 믿는다.

 

10. 레위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희년에 관한 규정(25장)이 대표적이다. 파산과 회생에 대해 한국사회보다 최소 2500여년 앞선 것이다. 그만큼 레위기는 인간의 권리보호에 민감하다. 무엇보다 산모의 권리에 대해서.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posted by

산모(産母)의 권리, 그 시대가 우리보다 나았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28)

 

산모(産母)의 권리, 그 시대가 우리보다 나았다(1)

 

 

1. 이번 이야기는 “레위기에 나타나는 모정천리”이다. 이 주제를 보고, 대다수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제사 매뉴얼 같은 레위기에서 모정, 즉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레위기가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그것을 확인할 것이다. 그런데 레위기가 어머니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레위기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레위기의 핵심은 “거룩한 하나님․거룩한 백성”이다. 그런데 도대체 “거룩”이라는 게 무엇일까?

 

2. 레위기의 내용을 살펴보자. 레위기는 크게 세 부분(1-7장(+8-10장), 11-15장(+16장), 17-26장(+27장)으로 나뉜다. 먼저 레위기 1-7장은 이스라엘의 다섯 가지 제사인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대해 말하는데, 1장 1절-6장 7절과 6장 8절-7장 38절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온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는 1장 1절-6장 7절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순서로 기록하고, 제사장들(“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대상으로 하는 6장 8절-7장 38절은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순서로 기록한다.

 

3. 그런데 다섯 가지 제사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소제이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 주로 소나 양, 염소로 드렸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비둘기로 드렸다. 그런데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도 있었다. 이 제사가 바로 소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소제를 어떻게 드렸을까?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가루로 예물을 삼아”(레위기 2:1). 속죄제를 드릴 때, 어린 양을 바칠 수 없는 사람들은 산비둘기 두 마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로 드린다(레위기 5:7). 그런데 비둘기도 바치기 어려운 사람들은 곡식 가루를 드리게 했다(레위기 5:11). 이런 점에서 소제는 매우 소중한 제사였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목과 정착을 겸한 반(半)유목민이었다고 해도, 소와 양, 그리고 염소를 마음대로 잡아먹거나 제물로 바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가축이 많지는 않았다. 소, 양, 염소 한 마리 없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제사 제물을 소, 양, 염소로 규정하면,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의 부자들뿐이었을 것이다. 소제는 부유하지 못한 자들, 소, 양, 염소, 심지어는 비둘기조차 바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제물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도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제사의 민주화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린 이유는 무엇일까? 가축들을 죽여서 피를 다 쏟게 하고 각을 떠서 불에 태워 제물로 드리는 이 복잡한 과정을 굳이 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다섯 가지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정체성)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날마다 새롭게 다짐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식(意識)이 없다면,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다른 나라사람들이 드리는 제사와 다를 바가 없는 우상숭배의식(儀式)에 불과하다.

 

5. 레위기 둘째 부분은 정결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도 깨끗한 삶을 살아야 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정과 부정은 제의적인 차원에서의 정과 부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끗하다”는 것이 우리의 삶과 유리된 어떤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것만도 아니다. “깨끗함”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청결, 위생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아무 음식이라도 함부로 먹어서는 안 되었고, 특히 쉽게 부패하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정해진 것은 결코 먹어서는 안되었다(11장). 그리고 출산예법도 엄격했다(12장). 피부질환과 유출증상에 대해서도 엄격한 관리를 하도록 했다(13-15장). 또 일 년에 한차례 대속죄일을 정해서 대제사장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게 했다(16장).

 

6.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깨끗하게 살려고 애썼는지 알 수 있다. 이렇듯 제의적 정결을 중시함으로써, 그들은 제의적으로 건강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들은 제의적인 차원에서 정함을 유지하려 했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러한 제의적인 정결은, 당시에는 알지 못한 위생적인 정결도 함께 이루어지게 했다.

 

7. 하나님이 레위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여호와가 거룩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백성인 이스라엘도 당연히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하다”(히브리어로 “카도쉬”)는 것은 “구별되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주위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구별되게, 무엇인가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법을 주시는 것이다. 그 법을 성결법이라고 한다.

 

8. 17-26장을 성결법이라고 하는데, ‘거룩하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붙여준 이름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것은 바로 “거룩한 삶”이었다.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살기 위해, 다른 나라 백성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성결법전은 그러한 세부적인 항목들을 담고 있다.

 

9. 그들은 성(sex)적으로 온전해야 했고, 대인관계에서도 온전해야 했다. ‘거룩’은 모두가 공평하고 평화로운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고, 어떠한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런 ‘온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룩’은 이처럼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10. “거룩한 하나님 거룩한 백성.”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고,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온전한 사회를 만들기를 원하신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교수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