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바와 빌하, 조용히 어머니로만 살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7)

 

실바와 빌하, 조용히 어머니로만 살다(2)

 

 

1. 들어갈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른 게 사람이란다. 레아도 그렇고, 라헬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라헬은 요셉을 낳기 전까지는 빌하가 낳은 두 아이들을 통해서 한풀이를 하는데, 요셉을 낳고서는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말한다. 라헬은 빌하가 단을 낳았을 때, 자신이 단을 출산한 것처럼,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고 제 심경을 토로했다. 그리고 빌하가 납달리를 낳았을 때도 자신이 출산한 것처럼,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자랑스러워한다.

 

2. 이처럼 레아와 라헬은 그들이 자녀를 출산하지 못할 때에는 자신들의 시녀들을 통해서 출산 경쟁을 지속하면서 시녀들이 낳은 아이들을 제 자식인 것처럼 행동하는데, 막상 자신들이 아이를 출산하면서, 시녀들의 자식들을 제 자식이 아닌 시녀들의 자식으로 되돌려주는 비열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그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어머니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3. 실바와 빌하. 그들은 과연 야곱에게, 그리고 레아와 라헬에게 무엇이었을까?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야반도주를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야곱은 그것을 라헬과 레아와 의논한다.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때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창세기 31:4). 자신들도 포함된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단순히 여주인들의 시녀이던 때와 달리 야곱의 아이들을 출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바와 빌하는 전혀 대우를 받지 못한다. 야곱, 레아, 그리고 라헬이 보기에 그들은 여전히 시녀일 따름이었던 것이다.

 

 

 

 

 

4. 야곱은 라반과 논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창세기 31:41). 야곱이 라헬에게 빠져 있을 때 그는 레아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실바와 빌하를 통해서 아이들을 넷이나 낳으면서도 그들을 예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5. 원래 야곱과 레아, 그리고 라헬이 이루는 삼각관계에 엑스트라로 끼어든 실바와 빌하는 야곱과 레아, 라헬이 그들의 자리를 정확하게 잡아주지 않아서, 제 자리를 어디에 잡아야 할지 몰라 항상 애매하게 처신해야 했을 것이다. 라반은 야곱과 상호불가침 약속을 하면서, 만일 네가 내 딸들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31:50)고 강하게 경고한다. 라반이 하는 말을 살펴보면, 실바와 빌하는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들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과 같은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6. 허깨비 같은 실바와 빌하.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창세기 31:55). 라반이 입을 맞춘 손자들과 딸들은 누구였을까? 레아와 라헬,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실바와 빌하,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여기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7. 야곱과 레아, 그리고 라헬이 실바와 빌하,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장면으로 가보자. 야곱을 에서를 만나러 가면서, 에서가 그들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해서, 사람들과 가축들을 두 떼로 나눈다. 그래서 한 떼는 당하더라도 다른 한 떼는 피할 수 있게 했다(창세기 32:7). 그런데 막상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자, 야곱은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었다(창세기 33:1-2). 이런 배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맨 앞에 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야곱이 보기에 실바와 빌하,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그리 소중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8. 그리고 야곱이 에서를 만나서 대화를 나눈 다음, 아내들과 자식들로 하여금 에서에게 인사를 하게 하는데, 이 때 순서 역시 여종들과 그의 자식들, 레아와 그의 자식들, 라헬과 요셉 순으로 나가서 인사를 했다(창세기 33:6-7). 하찮은 것들로 시작해서 귀중한 것으로 나아가는 이 냉혹한 배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기자는 실바와 빌하,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9. 그리고 성경기자는 야곱이 낳은 열두 아들들을 전체적으로 열거하면서, 레아의 여섯 아들, 라헬의 두 아들, 그리고 라헬의 여종 빌하의 두 아들, 레아의 여종 실바의 두 아들 순으로 소개한다(창세기 35:23-26). 정말 실바와 빌하는 누구인가? 레아와 라헬의 여종인가 아니면 야곱의 아내인가? 창세기 35장에서는 첩이라고하고, 37장에서는 아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창세기 37:2). 요셉이 꾼 꿈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창세기 37:9)라고 하는데, 여기서 해는 야곱을 가리키고 열 한 별은 요셉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가리킨다면, 달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라헬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레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실바와 빌하는? 요셉은 그들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다.

 

10. 성경기자는 근친상간이 발생한 것을 기록한다.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창세기 35:22). 야곱이 그 이야기를 듣고 즉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나중에 열 두 아들들에게 유언을 하면서 그 사건을 언급한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9:3-4). 하지만 그 이전에 야곱은 레아와 라헬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경쟁을 조절하기 위해 전혀 노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이들을 낳고 이름을 짓는 데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라헬이 지은 베노니라는 이름을 나중에 베냐민으로 바꾼 게 유일하다. 레아와 라헬이 치열하게 출산 경쟁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실바와 빌하,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관심도 없이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둔다. 참으로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무관심과 무책임이 인간관계를 아프고 고통스럽게 만드는데 말이다. 두 자매가 벌이는 치열한 경쟁에 제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엑스트라로 불려와, 끝까지 침묵해야 했던 두 여인, 두 어머니, 실바와 빌하가 눈에 밟힌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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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바와 빌하, 조용히 어머니로만 살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6)

 

실바와 빌하, 조용히 어머니로만 살다(1)

 

 

1. 야곱이 낳은 아들들은 모두 12명이다. 그리고 그들은 르우벤으로 시작해서 베냐민으로 끝나는 한 형제들이다. 그러나 야곱은 이 열두 아들들을 네 여인들, 즉 레아와 라헬, 실바와 빌하에게서 낳았다. 레아와 라헬은 라반의 두 딸, 자매였다. 실바는 라반이 레아에게 준 몸종이다.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창세기 29:24). 그리고 빌하는 라반이 라헬에게 준 몸종이다.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창세기 29:29). 그런 실바와 빌하가 어떻게 야곱의 아이들을 낳게 되었는가?

 

2. 레아와 라헬의 여종이던 실바와 빌하가 야곱과 동침해서 아이들을 낳는 치열한 경쟁에 말려든 사연을 살펴보자. 라헬은 레아가 아들을 연이어 넷을 출산했는데 자신은 임신이 안 되는 것을 보고 야곱에게 억지를 부린다. 그러자 야곱은 라헬에게 성을 낸다. 임신과 출산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창세기 30:2). 그 말을 듣고 라헬은 예전에 사래가 사용한 방법을 활용한다.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창세기 30:3). 이렇게 빌하는 야곱과 동침해서 아이를 낳는다.

 

3. 그러나 라헬이 빌하를 야곱의 아내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야곱도 빌하를 아내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빌하가 낳은 아이가 야곱의 아이인 것은 분명하지만, 빌하의 아이가 아니고 자신의 아이인 것으로 여긴다. 라헬은 사래가 하갈을 대하듯이 그렇게 빌하를 대한 것이다. 야곱과 레아, 그리고 라헬이 보기에 빌하는 여전히 라헬의 여종이었고, 그저 대리모였을 뿐이다. 라헬이 보기에 빌하는 진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진정한 어머니는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4. 그래서 아이를 빌하가 출산했는데, 그 이름을 라헬이 짓는다. 라헬은 빌하가 낳은 아들 이름을 단이라고 지었다.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창세기 30:6-8). 여기서 보듯, 라헬은 갓 태어난 아이들을 축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제 한풀이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

 

5. 두 아들을 임신하고 출산한 것은 빌하인데, 빌하는 자기 자식의 이름을 짓는 데 전혀 관여하지 못한다. 이것은 라헬이 두 아이들을 빌하의 자식들이 아니고, 자기 자식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기자는 빌하가 어떤 심정이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빌하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빌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한다.

 

6. 이것은 레아의 시녀 실바도 마찬가지였다. 레아는 아들 넷을 내리 낳고 출산이 멈추었는데, 라헬이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 두 아들을 낳으면서 자신을 추격해오자 불안했던지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서 역시 두 아들을 낳게 한다. 실바도 제 자식을 낳으면서 자식 이름을 짓는 일에 전혀 관여하지 못한다. 실바가 낳은 두 아들 이름을 모두 레아가 짓는다.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창세기 30:11-13). 성경기자는 실바가 어떤 심정이었는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빌하와 마찬가지로 실바에게도 말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는다. 빌하처럼 실바도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한다.

 

 


<Sons Of Bilhah & Zilpah>

 

7. 야곱과 두 아내 레아와 라헬. 그들이 얼마나 자식 경쟁에 골몰했는지는 레아의 첫째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자귀나무)를 가져다 어머니에게 주는 것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르우벤이 들에 나가서 양을 치며 여러 가지 약초들을 캐서 집으로 가져왔을 텐데, 성경기자는 다른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유독 합환채에만 주목한다. 르우벤이 그것을 집으로 가져와서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다는 것은 출산 경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8. 그 이후로도 레아와 라헬 사이의 출산 경쟁은 계속 되었는데, 라헬은 레아에게서 합환채(자귀나무)를 얻어서 임신하려고 애를 쓰고, 레아는 귀한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고 대신 야곱과 동침하는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해서 레아는 다시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데, 아이들 출산에 레아가 부여하는 의미가 매우 특이하다.

 

9.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창세기 30:18-20).

 

10. 우리는 레아가 다섯째 아들을 낳고 하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한다. “레아는 ‘나의 몸종을 나의 남편에게 준 값을 하나님이 갚아 주셨구나’ 하면서 그 아이 이름을 잇사갈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실바가 낳은 두 아들을 레아는 제 아들들로 여겼지만, 자신이 잇사갈과 스불론을 낳으면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식을 낳지 못해서 입양을 한 사람이 그 아이를 제가 낳은 아이처럼 애지중지하다가, 막상 자기 자식을 낳으면, 입양한 아이를 남의 아이 취급하는 것과 같다. 아니, 레아는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그저 남편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바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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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 악착같이 살아도 남는 건 아픔뿐이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5)

 

라헬, 악착같이 살아도 남는 건 아픔뿐이다(2)

 

 

1. 어머니 라헬. 레아와 라헬 두 자매에게 “어머니”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진정한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레아와 라헬을 통해서 배운다. 야곱은 결혼하기 위해 라반을 찾아갔고 거기서 매력적인 라헬을 만났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졌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 동안 라반을 섬겼다. 야곱에게 7년은 “라헬을 위하여”(창세기 29:20,25) 기다리고 인내하는 삶이었다. 그건 순수한 사랑의 힘이면서 동시에 야곱이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난 욕망의 편집증상이었다고 생각한다.

 

2. 어느 결에 7년 세월이 지나고, 드디어 야곱과 라헬이 결혼할 날이 되었다. 그런데 라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황당케 한 일이 일어났다. 야곱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신부를 보니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던 것이다. 야곱은 당황했을 것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레아는 정말 민망했을 것이다. 레아는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야곱의 눈빛을 영원히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억울한 사람은 라헬이었을 것이다. 결혼식 날 라반이 라헬을 어떻게 처신하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아버지 명령이라고 해도 성격적으로 라헬이 순순히 따랐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라반은 라헬을 감금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3. 축복받아야 할 결혼식이 사기극으로 밝혀지면서, 야곱은 즉시 라반을 찾아가 따진다.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까”(창세기 29:25). 이런 소동을 보면서 레아는 정말 수치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이고, 라헬은 통쾌했을 것이다.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를 다 알고 지혜롭게 계획을 세워둔 라반은 침착하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일주일 뒤에 라헬을 야곱에게 시집보낸다.

 

 

 

<"Jacob Encountering Rachel with her Father's Herds" by Joseph von Führich>

 

 

4. 나는 라헬이 “아름다운 여장부”, 즉 잠언 31장에 나오는 대단한 여자(히브리어로 “에쉐트 하일”)에 가장 적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서 아쉽고 안타깝다. 라헬이 비록 동생이긴 하지만, 자격지심으로 힘들어 할 것이 명확한 언니 레아를 배려하고, 두 자매와 야곱과의 관계도 적절하게 조절함으로써 가정을 우애롭고 평화롭게 꾸려가기에 충분한 인품과 능력을 갖추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라헬은 제 혼자만을 위하는 극히 이기적인 수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레아가 라헬에게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창세기 30:15)고 말할 정도로, 그리고 야반도주할 때 친정집 수호신 신상인 드라빔을 훔쳐서 가져갈 정도로 제 욕심만 챙기고, 드라빔을 찾으려 애쓰는 아버지를 속일 만큼 뻔뻔했다. 라헬은 그저 욕심 많고 시기심 많고 얼굴에 철판 깐 갈고리 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5. 결혼한 뒤 레아는 아들 넷을 내리 낳는데, 라헬은 임신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라헬은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라헬은 가정에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세기 30:1). 라헬은 자신이 임신하지 못하는 것 자체, 즉 어머니가 되지 못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레아와의 경쟁에서 진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만약 레아가 자식을 출산하지 못했다면 별 문제는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6. 자신이 어머니가 되는 것에 대해 라헬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기보다 훨씬 못한 레아도 아들을 순풍순풍 낳는데, 양을 칠 정도로 건강한 자신은 그렇지 못하는 게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라헬 성격상 무엇이든 레아에게 지는 것은 견디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제 성질에 겨워 거품 물고 쓰러질 지경이었을 것이다.

 

7. 라헬은 자신의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서 아들을 낳게 하는데, 빌하는 단과 납달리를 낳았다. ‘단’은  “억울함을 푸심”, ‘납달리’는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니 라헬이 시기와 질투로 인해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레아와 라헬, 두 자매가 살벌하게 경쟁하면서 낳은 자식들에게 지어주는 이름들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직 레아와 라헬 두 자매 사이의 치열한 경쟁, 그로 인한 가슴앓이와 맺힌 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저주, 그 끝없는 시지푸스적 고통과 삽시간의 희열을 반영할 뿐이다.

 

8. 합환채(자귀나무)까지 먹으면서 어머니가 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쓴 라헬도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라헬은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하면서(창세기 30:23),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의미로 아들 이름을 ‘요셉’(‘더함’)이라고 짓는다(창세기 30:24). 레아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라헬은 욕망의 화신에 다를 바 아니다.

 

9. 하지만 세상 일 모를 일이다. 창세기 35장은 세 사람의 죽음을 들려준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 라헬, 그리고 이삭. 참 우울한 장이다. 야곱 가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다음,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벧엘에서 에브랏으로 가는 도중에, 라헬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난다. 그때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라헬은 숨을 거두기 전에 아들 이름을 베노니, ‘내 고통의 아들’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출산의 고통도 의미하지만, 심리적인 아픔도 의미한다. 라헬은 어머니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핏덩이를 낳아두고 세상을 떠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누가 이 아이를 돌봐줄 것인가? 어미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꼬?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라헬은 차마 감을 수 없는 눈을 감았을 것이다. 이 순간, 라헬은 진정한 어머니였(을 것으로 기대한)다.

 

10.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베냐민의 삶도 참 불우한 삶이다. 라헬이 세상을 떠나면서 제 아들에게 지어준 이름이 ‘베노니’(내 고통의 아들)이다. 이 슬픈 이름을 나중에 야곱이 베냐민으로 개명한다. 그런데 라헬이 말하는 “내 고통의 아들”이 어찌 베냐민 만이었겠는가? 어리기는 요셉도 베냐민이나 마찬가지였을 텐데 말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아픔. 두 형제는 어머니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과 베냐민, 그들의 삶은 이렇게 어머니 상실로 시작한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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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헬, 악착같이 살아도 남는 건 아픔뿐이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4)

 

라헬, 악착같이 살아도 남는 건 아픔뿐이다(1)

 

 

1. 라헬이라는 한 여자. 그는 어떻게 이야기에 등장하는가? 에서와 야곱이 벌이는 허망하면서도 살벌한 장자권 다툼은 의외로 결혼 문제, 즉 어떤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느냐는 문제로 이어진다.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까닭은 그를 죽이려는 에서로부터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리브가와 이삭은 야곱이 하란으로 가는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리브가는 이삭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창세기 27:46).

 

2. 에서가 헷 여인들과 결혼한 것에 대해서 성경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창세기 26:34). 이삭과 리브가가 에서의 아내들, 헷 여인들을 왜 싫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단순하게 인종적인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리브가는 이 문제를 다시 꺼내서 이삭을 충동질한다.

 

3. 결혼은 야곱이 집을 떠나서 하란에 있는 라반에게로 가는 명분이었다. 이삭도 야곱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창세기 28:1-2). 이렇게 하면서 이삭과 리브가는 에서를 비난하고 배제한다.

 

 

 


<"Jacob Encountering Rachel with her Father's Herds" by Joseph von Führich>

 

 

4. 이삭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셔서 야곱이 생육하고 번성해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라고 축복한다(창세기 28:3-4). 그 후에 야곱은 집을 떠난다. 야곱은 결혼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난다. 지금부터 야곱은 오직 결혼상대에게만 주목한다. 이삭 때에는 아브라함의 종이 밧단아람까지 가서 리브가를 데려왔는데, 야곱은 자신이 직접 그곳으로 가는 것이다.

 

5. 에서는 장자권 쟁탈전 이후에, 야곱이 친족과 결혼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그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지켜보았다. 에서는 부모가 가나안 사람의 딸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에서는 그 사실을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에서는 당장에 가서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했다.(창세기28:9). 그렇다고 부모의 맘이 금방 풀릴 리 없지만, 에서는 부모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어쨌든 나름대로 애쓰는 중이다.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로부터 야곱의 목숨을 구하려고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지만, 오히려 야곱이 길을 가는 동안 에서가 추격해서 야곱을 살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이제 장자권 쟁탈과는 아무 관계없이, 형제가 결혼 하는 것으로 서로 경쟁한다는 것이다.

 

6. 가족을 떠난 야곱은 동방 사람의 땅에 도착해서 목자들이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우물가에 있다가, 하란에서 온 목자들에게 라반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창세기 29:6). 성경기자는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양들을 치는 목동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라헬이 양을 치느냐는 것이다. 야곱이 우물가에 있던 목동들에게 내 형제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분명 남자들이었을 것이고, 대다수 목동들이 남자들이었을 텐데 말이다. 라반에게 아들이 없는 게 아니다. 라반에게는 아들들이 있었다(창세기 31:1). 아들이 하나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라헬이 양을 치는가?

 

7. 그렇게 대화를 하는 동안, 라헬이 아버지의 양들을 데리고 우물로 왔다. 야곱은 이렇게 라헬을 만난다. 그리고 야곱은 라헬이 데려온 양들에게 물을 먹인다. 그런 다음 라헬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라헬은 이 소식을 라반에게 알린다.

 

8. 야곱은 라반을 만나서 라반의 집에 거하는데, 한 달이 지난 후에,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어떻게 할지 말하라고 한다. 성경기자는 라반이 하는 말과 야곱이 하는 대답 사이에 레아와 라헬을 소개하는데,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창세기 29:17)라고 묘사한다. 새번역은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고 번역한다. 라헬은 양치는 목동이었기 때문에 체력이 남자들 못지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라헬은 국가대표 선수에 미스코리아를 겸한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야곱은 두 자매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까? 야곱이 레아가 아닌 라헬을 선택했다고 해서 야곱을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경기자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9. 누구나 예상한 대로, 성경기자는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했다고 말한다. 라반과 야곱은 노동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경기자는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세기 29:20)고 진술한다. 7년은 야곱이 라반에게 제안한 햇수이다. 야곱은 라헬을 보는 순간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 정도는 봉사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장자권을 얻기 위해 어머니 리브가의 주도 아래 꼼수를 부렸던 야곱은 이제는 라헬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야곱은 장자권 쟁탈 때와는 달리, 7년을 며칠 같이 여길 정도로 성실하게 일을 했다. 사랑의 힘이 참 크다.

 

10. 그렇게 칠년이 지났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다. 야곱은 라반에게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한다. 야곱이 말하는 내 아내는 분명 라헬이었다. 그러나 라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라반은 레아를 신방에 들여보냈다. 다음날 아침에야 야곱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서 라반과 다시 계약을 해야 했다. 레아와 결혼한 지 일주일 후에 라반은 라헬을 야곱에게 아내로 준다(창세기 29:27-28). 그리고 7년을 라반을 위해 일했는데,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창세기 29:30). 야곱이 14년 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가는 야곱이 라반에게 하는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31:38-40). 야곱은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을 봉사했다(창세기 31:41)고 하는데, 실제론 라헬만을 위해서 14년을 헌신했다. 역시 사랑은 위대하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은 여인 라헬. 분명 행복한 여인이다. 그런데 라헬은 그 14년 동안 진정 행복했을까?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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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 오로지 남편 사랑 얻기 위해 아이들을 낳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3)

 

레아, 오로지 남편 사랑 얻기 위해 아이들을 낳다(2)

 

 

1. 어머니 레아. 레아는 과연 어머니였는가? 물론 레아가 자식들을 출산했기 때문에 레아는 분명 어머니다. 그러나 레아가 진정한 어머니였는가는 의문이다. 레아는 라반의 두 딸 가운데 언니이다. 성경기자는 레아를 “시력이 약하”다고 소개한다(창세기 29:17). 새번역은 “눈매가 부드럽”다고 번역한다. 두 가지 번역이 다 적합하지만, 바로 이어서 나오는 라헬에 대한 소개에 비해서 볼 때, 레아의 외모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건 사실인 모양이다. 남자들이 시선을 줄 만한 미모나 성적 매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2. 야곱은 라헬을 먼저 만났고, 라헬을 사랑했다. 성경기자는 야곱이 라헬을 위해서 14년을 며칠처럼 일했다고 한다. 그 14년 동안 야곱은 레아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야곱은 오직 라헬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라반은 결혼식 날 저녁에 라헬이 아닌 레아를 신방에 들여보냈다. 야곱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다음날 아침에야 자초지종을 알고 라반에게 따진다. 그러자 라반은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창세기 29:26)고 야곱에게 말한다.

 

3. 라반이 계획적으로 야곱을 묶어두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하는 변명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제나 자매 가운데 동생이 먼저 결혼을 하는 경우, 형이나 언니가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졌던 것을 보면, 야곱이 레아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레아 입장에서는 자신이 라헬보다 일주일 먼저 야곱과 결혼했는데, 자신보다 늦게 결혼한 라헬이 야곱을 독차지하려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4. 어쨌든 먼저 결혼한 레아가 먼저 아들을 낳았다. 이것을 성경기자는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다고 풀이한다(창세기 29:31). 야곱이 레아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도 아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잡하게 얽힌 삼각관계에 개입하셔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 주려하신다. 레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창세기 29:32). “나의 괴로움”이라는 말에서 그동안 레아가 겪었을 가슴앓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레아를 조금이라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아들 이름을 야곱이 아닌 레아가 지어주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래도 레아는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끈을 잡은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5. 야곱은 대놓고 레아를 무시했던 모양이다. 레아는 정말 한이 맺혔을 것이다. 그는 아이를 낳음으로써 어머니가 되는 것보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을 더 원했다. 첫째 아이 르우벤(“보라 아들이다”)을 낳고도 남편이 그를 사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다시 둘째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이름을 시므온(“들으심”)이라고 짓는데,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을 주셨도다”(창세기 29:33)고 고백한다. 그러니 레아는 르우벤을 낳고 난 다음에 얼마나 하나님께 한탄하는 기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 한탄을 주님이 들으시고 다시 아들을 낳게 하셨다는 것이다. 레아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버텼다. 생각보다 강인한 여자이다.

 

 


"Dante's Vision of Rachel and Leah" by Dante Gabriel Rossetti 

 

6. 레아는 셋째 아이를 낳고 그 이름을 레위(“연합함”)라고 짓는데,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창세기 29:34)라고 말한다. 이때는 어느 정도 상황이 호전되는 기미가 나타났던 모양이다. 야곱이 조금씩 레아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레아는 그렇게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무심하던 예전과 달리, 야곱이 레아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고, 레아는 아들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레아는 네 아이를 연속으로 낳는다. 넷째 아이는 유다(“찬송”)이다. 레아는 아이를 출산한 다음,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세기 29:35)라고 고백한다. 남편 때문에 맘고생이 심했던 레아는 하나님만 붙들고 믿음으로 모진 괴로움을 이겨왔다. 드디어 주님께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다. 레아는 정말 강인한 여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레아가 진정한 어머니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인정받는 것에 더 마음을 썼다는 것이다. 어머니 되는 것, 즉 자식을 낳는 것을 남편에게 인정받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마음 아프면서 또한 마음에 걸린다.

 

8. 레아가 아들 넷을 내리 낳으면서 야곱이 레아에게 차츰 마음을 주자, 라헬은 그것을 못견뎌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소름끼치는 아들 낳기 경쟁을 시작한다. 라헬이 자신의 시녀 빌하를 야곱에게 주어서 두 아이를 낳게 하자, 레아도 자신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서 두 아이를 낳게 한다. 이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들이 온전하게 성장했겠는가?

 

9. 레아는 임신하지 못해서 애가 타는 라헬에게 합환채(자귀나무)를 주고, 야곱과 동침할 권리를 얻어서 야곱에게 당당하게 요구한다. 성경기자는 이 야릇한 장면을 꽤 상세하게 서술하는데, 레아와 라헬 사이에 야곱 쟁탈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레아와 라헬이 출산을 신앙적인 차원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 경쟁은 전쟁처럼 치열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임신을 간구했고, 하나님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다(창세기 30:17). 레아는 다섯째 아이를 잇사갈(“값”)이라고 하는데,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창세기 30:18)고 고백한다. 그리고 여섯째 아이를 낳고 스불론(“거함”)이라고 이름을 지으면서,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창세기 30:20)고 말한다. 레아는 여섯 째 아들을 낳기까지 아주 정교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야곱의 마음을 자신에게 향하게 했다.

 

10. 그러나 야곱이 생각하는 아내들 서열은 바뀌지 않았다. 에서가 군사 400명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그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었다(창세기 33:1-2). 레아가 무진 애써서 남편의 사랑을 상당히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라헬을 향한 야곱의 사랑은 여전했다. 레아는 만족했을까? 나는 아쉽다.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남편의 사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억척스럽게 아이 낳은 일에 몰두한 여자들은 있었지만, 진정한 어머니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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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 오로지 남편 사랑 얻기 위해 아이들을 낳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2)

 

레아, 오로지 남편 사랑 얻기 위해 아이들을 낳다(1)

 

 

1. 레아라는 한 여자. 이 여인의 일생은 야곱을 만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성경기자는 레아와 라헬을 이렇게 소개한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창세기 29:16). 우리는 레아와 라헬이 야곱을 만나기 전에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야곱이 그곳에 나타나면서 두 자매는 평생을 질투하고 경쟁(해야)하는 피 말리는 라이벌 관계로 변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가족들과도 등지고 결국 야반도주하는 지경에 이른다. 야곱은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천부적 마이너스의 손임에 분명하다.

 

 


<"Dante's Vision of Rachel and Leah – Dante Gabriel Rossetti, 1899">

 

2. 야곱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하는 것, 즉 야곱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죽는 순간에도 잊지 못할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루스, 즉 벧엘 사건이었다. 벧엘은 야곱을 언제나 원형질로 복귀하게 하는 황금 연못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벧엘 사건으로 회귀했다.

 

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세기 28:13-14). 이 구절은 하나님은 언제나 계약을 맺으시고 그 계약을 결코 파기하지 않으시는 “헤세드의 하나님”이심을 명확하게 보여주신다. 야곱이 스스로 자초한 험악한 세월을 감당하면서 끊임없이 되새긴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4.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의지했을 뿐, 자신은 헤세드가 전혀 없는 삶을 살았다. 야곱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공한 사람이다. “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창세기 30:43). 야곱이 이렇게 성공한 것은 남보다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정작 야곱이 부유해지는 과정을 보면, 이야기가 황당하다.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창세기 30:37-42).

 

5.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야곱의 행위이다. 야곱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면, 그 행위가 정당한 지혜에 의한 것임을 밝혀야 하는데, 본문을 꼼꼼하게 읽을수록 그건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천성적으로 야곱의 재산축적을 부러워하면서, 그런 지혜를 주님이 주셨다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게 과연 하나님이 알려주신 방식인지가 분명치 않다. 인용한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이 직접 지시한 사실을 본문에서 찾을 수가 없고, 다만 야곱이 나중에 하는 말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날 뿐이다(창세기 31:7-13).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복을 독차지하려 한 선천적 사기꾼 야곱이 하는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꾀를 통해서 야곱이 차지할 몫을 보전해주셨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7. 그 다음에 부딪히는 문제는 유전학적인 문제이다. 야곱이 시각적인 방식으로 유전적 변형을 일으켰다는 것인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독자들로부터 신뢰를 잃는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는 증식방법보다 야곱이 양 개체수를 늘렸다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설혹 그런 원시적 방법으로 유전적인 변형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해서 권력과 재산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신앙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이지도 않다. 이 이야기가 알려주는 것은 야곱이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서 골몰했으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무자비했다는 사실이다.

 

8.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야곱이 평생 사랑한 것은 황금으로 상징되는 부이다.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마이더스의 손. 그것은 사랑하는 딸까지 황금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이더스는 그것을 슬퍼했지만, 야곱은 사랑하는 게 오직 황금이었기에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려 하면서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마이더스의 손이 아니고 완벽한 마이너스의 손이어서,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레아와 라헬. 이 두 여인의 삶도 그렇다. 야곱은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힘겹게 했는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9. 그런데 이 어설픈 마이더스 야곱은 애굽에 내려가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그리고 임종 직전에는 축복의 손이 된다. 야곱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열두 아들들을 불러다 놓고 그들에게 각각 축복한 다음, 이렇게 유언한다.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창 49:29-31).

 

10.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참 절절한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처럼, 야곱과 레아가 짝을 이루는 것을 보여준다. 야곱이 레아를 진정한 아내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아들 요셉이 당시 애굽의 총리대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굳이 막벨라 굴에 묻히기를 소망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이다. 그는 하나님이 현재 애굽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 즉 자신의 후손들을 언젠가는 반드시 출애굽 시킬 것임을 확신했고, 그래서 자신이 먼저 출애굽해서 조상들 곁에 묻혀 있다가 후손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면 영접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상들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 그리고 더 내밀하게는 레아 곁에 묻히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아와 함께 잠들고 싶다.” 어쩌면 살아생전에 레아에게 했던 모든 못할 짓들을 죽어서라도 용서를 빌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아. 그는 죽어서 이렇게 남편 야곱에게 한 여자로, 진정한 아내로 인정받았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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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 재원(才媛)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니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1)

 

리브가, 재원(才媛)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니다(2)

 

 

1. 어머니 리브가. 리브가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창세기 28:5)이다.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서 길을 떠날 때,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어머니가 “리브가를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축복한다. 리브가는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구절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 하다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세기 22:17).

 

2.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는 리브가. 리브가는 마음 설레었겠지만,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빠른 결단을 촉구하자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창세기 24:55)고 한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기에 충분한 여유를 갖자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종이 그럴 겨를이 없다고 해서, 리브가에게 묻자, 리브가는 바로 떠나겠다고 한다(58절). 리브가와 어머니. 많이 다르다. 리브가가 판단력이 좋고 결단이 빠른 것은 분명하지만, 속 깊은 정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리브가는 바로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서 이삭에게로 간다. 그 장면을 성경기자는 이삭이 리브가를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세기 24:67)고 서술한다.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이면서 동시에 어머니 대역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RebeccaAtTheWell Giovanni" by Giovanni Antonio Pellegrini>

 

 

 

4. 이삭과 결혼한 리브가. 이제는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어머니 리브가,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창세기 25:21). 이삭과 리브가는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고, 리브가는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그 기간이 결코 짧지 않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한 게 40세였고, 60세에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으니까, 결혼 후 임신 출산까지 20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5. 그런데 임신했다고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리브가가 임신을 했는데, 쌍둥이들이 뱃속에서 싸운다.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세기 25:22-23). 여기서 보는 대로, 에서와 야곱은 자라면서, 성장해서 다툰 게 아니다. 뱃속에서부터 엄마가 걱정할 정도로 심각하게 다투었다는 것이다. 그냥 일반적인 쌍둥이 사이의 다툼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6. 그래서 리브가는 심각하게 고민을 한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리브가가 고민하는 것은 두 형제가 뱃속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이다.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의외이다. 두 형제가 아예 뱃속에서부터 적대적이 되고, 힘의 알력 관계에서 서로 목숨 건 대결을 하고, 결국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도대체 이게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라는 말인가?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에서와 야곱이 벌이는 심각한 다툼을 허용해서 신적인 다툼으로 만드는 걸까? 이 구절을 통해서 예정과 선택에 대한 교리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하나님이 하신 섭리가 형제간에 벌어지는 목숨 건 다툼이라는 말인가? 그리고 이런 말을 들은 리브가가 하나님께 형제간의 화해를 요청했을 법도 한데, 전혀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이 맘에 걸린다.

 

7. 이런 염려는 출산 이후에 부모가 자식들에게 보여주는, 취향에 따른 편 가르기에서 사실로 드러난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창세기 25:28). 여기에 나오는 “사랑하다”는 히브리어로 “아헤브”이다. “아헤브”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여러 단어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말하는 사랑이 매우 헌신적이지만, 자의적이고 탐욕적이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그런 사랑은 아닌 것이다.

 

8. 리브가는 절세미인이었다. 그런데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랄에 거주할 때, 이삭은 리브가가 미인이기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해서, 리브가를 누이라고 한다. 아브람이 기근으로 인해서 애굽에 내려갈 때 취했던 자세와 같다. 아브람과 사래의 경우와는 달리, 다행히 일이 잘 풀렸는데, 이삭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9. 우리는 리브가가 얼마나 지혜롭고 적극적이었는지를 안다. 그런데 결혼 이후에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리브가는 여전히 상황 판단이 빠르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려고 하자, 야곱을 에서로 분장시켜서 복을 독차지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었고, 이 일로 인해서 이삭 가족은 풍비박산된다. 그리고 맘에 상처를 입은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자, 리브가가 재빠르게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피신케 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혜로 보인다.

 

10. 하지만 리브가는 아들인 에서에 대해 잘 몰랐음이 분명하다. 리브가는 에서가 금방 분을 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곱도 돌아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창세기 27:41-45). 그러나 20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이삭에게 혼인을 빙자한 야곱의 여행에 대해 말할 때, 리브가는 에서를 비난한다(창세기 27:46). 이것은 어머니답지 않은 모습이다. 이 말을 들은 이삭도 처음부터 그랬지만(창세기 26:34-34), 에서의 부인들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창세기 28:8). 어머니 리브가. 정말 최고의 어머니가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실제론 그리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참 아쉽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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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가, 재원(才媛)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니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10)

 

리브가, 재원(才媛)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니다(1)

 

 

1. 리브가라는 한 여자. 성경기자는 리브가를 이렇게 소개한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창세기 24:16). 이것은 당시 여자에 대한 최상의 평가였던 게 분명하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을 이렇게까지 극찬을 하는 경우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리브가가 그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를 지닌 절세미인이었다는 것이다.

 

2. 이삭과 리브가가 결혼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24장에 나오는데, 창세기 24장은 67절이다. 23장이 20절이고 25장이 34절인 것을 고려하면, 분량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구약성경에서 결혼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기록 분량으로 보면, 세기의 결혼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삭과 리브가가 실제로 결혼하는 장면은 본문에 나오지 않는다. 결혼식 자체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리브가가 이삭을 보고 너울을 가지고 얼굴을 가렸다는 것, 그리고 이삭이 리브가를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창세기 24:67)는 구절이 전부이다. 창세기 24장 대부분은 리브가가 어떻게 이삭과 결혼하게 되었는지, 결혼 이전 과정을 상세하게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다. 성경기자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3. 창세기 24장은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절)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을 무렵에도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창세기 17:17)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님이 나타나서 아브라함에게 내년에 사라가 이삭을 출산할 것을 예고했을 때, 성경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세기 18:11-12)라고 서술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나이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이를 잉태케 하고 출산한다. 자식을 낳을 가망이 없을 정도로 늙었다는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다음, 그두라와 결혼해서 여러 자식들을 낳는다(창세기 25:1-4). 아슬아슬 놀라운 생산력이다.

 

4. 리브가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자신의 며느릿감, 즉 이삭의 아내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24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1-9절은 아브라함이 늙은 종에게 맹세까지 시키면서 며느릿감을 고향에서 찾아오게 하는 장면이다. 10-60절은 아브라함이 말한 대로 늙은 종이 메소포타미아 나홀의 성으로 갔고, 거기서 우연히 리브가를 만나 그가 최상의 며느릿감을 확신하고 부모와 본인의 허락을 받는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61-67절은 리브가가 고향을 떠나서 이삭이 있는 곳까지 오는 과정을 서술한다.

 

5. 창세기 24장 1-9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종에게 맹세케 하는데,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창세기 24:2-3)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 종은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다”(창세기 24:9). 성경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의 결혼, 아니,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허벅지, 즉 남자 성기에 손을 대고 맹세하는 관습은 야곱이 요셉에게 자신을 애굽이 아닌,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창세기 47:30)고 당부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그만큼 강력하다.

 

6. 창세기 24장 10-60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10-27절은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28-49절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번 일에 대한 경과보고를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50-60절은 자초지종을 들은 후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가기로 결단하는 장면이다.

 

 


<"RebeccaAtTheWell Giovanni" by Giovanni Antonio Pellegrini>

 

7. 성경 기자는 우리로 하여금 리브가가 어떤 여인인지에 주목하게 한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지시하는 일이 그만큼 중대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맡은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파악하고, 그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맘에 들고 이삭과 잘 어울릴 그런 여자를 어떻게 찾아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종은 몇 가지 기준을 정하고, 거기에 맞는 여자를 택하기로 한다. 아브라함의 종이 우물로 가서 거기 있는 어떤 소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할 때, 그 소녀가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창세기 24:14)고 대답하면, 그 소녀를 하나님이 지정해두신 아브라함의 며느릿감으로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8. 그렇게 생각하고 났더니 바로 리브가가 나타났다.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리브가를 묵묵히 테스트한다. 성경기자가 묘사하는 리브가는 매우 당당하고 적극적이다. 어떤 행동을 하는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행한다. 성경기자는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과 낙타들에게 물을 길어서 마시게 하는 과정을 서술하면서 “급히”라는 단어를 두 번(24:18, 20절) 사용한다. 이런 점에서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이 설정한 기준에 딱 들어맞는 최고 수준의 여인이었다. 성경기자는 이것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10-27절은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에 대한 서술이고, 28-49절은 아브라함의 종이 라반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서 성경기자는 리브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9. 성경 기자는 “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라고 기술함으로써, 리브가의 유모가 리브가와 동행해서 가나안으로 갔음을 알려준다. 나중에 성경기자는 리브가의 유모 이름을 드보라라고 한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창세기 35: 8). 성경기자는 리브가와 함께 가나안땅으로 간 리브가의 유모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래서 성경에 그의 이름도 밝히고 마지막 장면도 기록해놓았다. 참 따스하다.

 

10. 성경 기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라반의 누이였더라”(창세기 25:19)고 다시 약술하는데, 리브가가 절세가인이었고, 현명하며 적극적이고 예의범절에 밝은 최고 재원이었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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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두 딸, 모성 본능으로 살다(2)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9)

롯의 두 딸, 모성 본능으로 살다(2)

 

1. 롯의 두 딸. 그들이 어머니가 되는 과정을 천신만고(千辛萬苦)라고 함이 좋을 듯하다. 그들은 모두 세 차례 위기를 겪는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연합군이 소돔을 쳐서 사람들을 사로잡아갔을 때, 롯과 롯의 아내, 그리고 롯의 두 딸도 끌고 갔다. 그 과정에서 롯의 아내와 두 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들이 전리품의 일종이었다는 점에서 군인들로부터 모진 고초를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아브라함이 신속하게 구출해주어서 그들은 소돔으로 돌아와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롯의 두 딸이 겪은 첫 번째 위기였다.

2. 둘째 위기는 하나님과 함께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 일어난다. 롯은 그들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하고 하룻밤 묵어가게 한다. 그런데 두 천사가 롯의 집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 소돔 남자들이 그 집으로 죄다 몰려들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그들은 아무도 못나가게 집을 에워싸고, 두 천사와 성관계를 해야겠다고 하면서,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롯을 다그친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이다.

3. 그런데 이 위험한 순간에 실제로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은 두 천사가 아니고, 롯의 두 딸이었다. 롯은 두 천사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켜내려는 의지를 보인다. 사람들이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자, 롯은 문 밖으로 나가서 문을 닫고 그 앞에 버티고 서서, 소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창세기 19:7). 롯은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그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아예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4. 그래서 롯은 그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창세기 19:8). 당시 험악한 상황에서 롯이 보여주는 용기는 정말 가상하다. 자신이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데, 자신이 손님으로 자기 집에 들인 두 천사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성을 잃은 폭도 같은 사람들 앞에 섰다는 것은 롯이 얼마나 손님 접대에 자신의 명예를 걸었는지 짐작케 한다.

5. 그런데 롯이 소돔 사람들에게 제안한 것은 결코 관례적인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비상상태에서 취하는 극단적 처방이었을 것이다. 창세기 19장은 사사기 19장과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한 레위 사람과 그의 첩이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보내려 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던 중, 어느 노인이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동네 불량배들이 몰려와서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사사기 19:22)고 노인을 겁박한다. 그러자 그 노인은 롯이 소돔 사람들에게 한 것과 동일한 말을 하면서 그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사사기 19:24).

6. 이런 유사점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소돔에서도 롯 외에 다른 사람들은 두 천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을 것이고, 그들과 다르게 롯은 손님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이라도 기꺼이 희생하려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손님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이 목숨 걸고 반드시 지켜야 할 명예로 보았던 모양이다.

 


<"Gentileschi, Artemisia - Lot and his Daughters - 1635-1638"
by Artemisia Gentileschi>


7.
소돔이 멸망하기 직전에 소알로 피해서 재앙을 면한 롯은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했다(창세기 19:30). 롯은 완전히 세상을 등진 것이다. 롯이 이렇게 한 까닭은 그가 경험한 일들이 극악했기 때문일 것이다. 롯은 아브람과 함께 애굽에 내려가서 사래가 바로의 궁전으로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돌라오멜에게 사로잡혀서 아내와 두 딸이 곤욕을 치루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소돔 남자들이 몰려들어서 무자비한 폭력성을 보이고, 하늘에서 유황과 불이 떨어져 모든 것을 멸하는 엄청난 일도 보았다. 부인은 소금기둥이 되었다. 이런 일들을 겪고서 세상에 미련을 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산 속 굴에서 생활했다.

8. 문제는 두 딸이었다. 그들은 소돔에 약혼한 사람들이 있었다. 롯이 그들에게 함께 피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들은 롯이 하는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전혀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롯이 지체했던 것으로 보인다. 깊은 산 속 굴에서 롯은 완전히 원시인처럼 생활했을 것이다. 두 딸들도 전혀 미래가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창세기 19:31). 그들에게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다.

9. 두 딸이 걱정하는 일은 대가 끊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이 의논을 한다. 아버지 롯과 동침해서 임신하고 출산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32-35절은 동일한 문학적 패턴을 두 차례 반복한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은 “후손을 이어가자”(32, 34절)이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33, 35절)는 말을 굳이 반복한다. 그 까닭은 그 일이 상호간의 성관계가 아니라는 것, 즉, 근친상간(近親相姦)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임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성교가 목적이 아니고, 자녀 출산, 즉 어머니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행위였기에 근친상간의 기준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10. 메시야 계보에 속한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사실도 극악한 상황 가운데서 벌어진 이 특별하고 기괴한 임신출산 사건, 즉 롯의 두 딸이 어머니가 되는 이 기막힌 일을 윤리적인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게 하는 한 요인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큰 딸은 모압(모압족 조상)을 낳았고, 작은 딸은 벤암미(암몬족 조상)를 낳았다. 롯의 두 딸. 정말 어머니 되기 힘들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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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의 두 딸, 모성 본능으로 살다(1)

이종록의 모정천리(母情天理)(8)

롯의 두 딸, 모성 본능으로 살다(1)

 

1. 롯의 두 딸.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그들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가? 혹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아닌가? 하마터면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낳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뻔한 여인들. 예기치 못한 비극적 상황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모성 본능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되는 것. 그것만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죽기 직전에 수많은 솔방울을 맺는 소나무처럼, 그들은 그렇게 강력한 모성 본능으로 비극적인 상황을 버텨냈다.

2. 아무도 일이 그렇게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이 아니었다. 룻은 데라가 이끄는 가나안 이주 희망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창세기 11:31).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람들이 정확하게 몇 명인지 알 수 없지만, 중심인물들은 네 명, 즉, 데라, 아브람, 사래, 그리고 롯이었다. 성경기자가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를 언급하면서 데라의 아내, 그리고 롯의 아내를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갈대아 우르를 떠나올 무렵, 데라는 아내와 사별했을 것으로 보이고, 롯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그들이 무슨 이유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 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성경기자는 그들이 원래 가려던 곳이 하란이 아닌 가나안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데라는 하란에 머물고 거기서 세상을 떠났을까? 아마도 그는 하란에서 아내 될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새롭게 가정을 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았다면 데라는 분명 가나안까지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아브람은 부친을 하란에 두고 다시 길을 떠난다. 이때는 하나님이 그에게 떠날 것을 명령하셨고 그 명령에 따라서 떠난다. 그때 롯도 삼촌 아브람을 따라서 하란을 떠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세기 12:4-5). 이 구절은 롯이 자발적으로 아브람과 함께 가나안으로 갔으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에 그도 동참하려 했었음을 보여준다. 베드로전서 기자가 인정하듯(베드로전서 2:6-8), 롯은 생각보다 신앙적이다.

 

 

5. 롯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로도 계속 아브람과 동행한다. 아브람이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성경본문에는 롯이 그와 함께 애굽에 내려갔다는 말이 없지만, 성경기자는 아브람이 애굽을 떠나서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올 때 롯도 함께 했다고 밝힌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창세기 13:1). 그러니 아브람과 사래가 굶주림을 모면하기 위해 양식을 찾아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 롯도 그들과 함께 내려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온 이후, 이렇게 항상 함께 했다.

6. 그런데 가나안으로 다시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브람이 롯에게 심각하게 말하는데, 그때 사정을 성경 기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창세기 13:6). 성경 기자는 그 다음 구절들에서도 아브람과 롯이 더 이상 같은 장소에서 함께 거주하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으며, 그래서 떨어져 거주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아브람과 롯이 분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7. 그리고 아브람은 롯에게 거할 장소를 선택하게 하는데, 롯은 동쪽에 있는 요단 지역을 선택한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세기 13:10). 롯이 아브람에게 선택권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앞으로 멸망당할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다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성경적으로 그를 비난할 근거는 없다. 그들이 어느 지역을 선택하든, 여건은 비슷했을 것이고, 그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람이나 롯이나 그 땅을 차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그저 그곳 원주민들 곁에서 이방인으로 거주할 따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8. 분가 후에 롯은 자신이 선택한 요단 지역으로 가서 여기저기 살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소돔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서 엘람과 그 동맹국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약탈했는데, 그때 그들이 롯과 부녀자들, 친척들을 강제로 데려가고 그들의 재산도 약탈했다(창세기 14:1-12). (“부녀자”들이라는 말은 롯이 소돔에 거주하면서 결혼을 하고, 딸들을 낳았음을 암시한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람이 병사들을 데려가서 사람들과 재산을 되찾아왔다(창세기 14:13-16). 이 일은 롯에게, 특히 롯의 아내와 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고,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을 것이다.

9. 아브라함이 99세 되던 해에 두 가지 소식(이삭 출생,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 조사)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지극 정성으로 맞이한 사람은 바로 롯이었다. 롯이 그들을 환영하는 모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두 천사를 영접한 것과 동일하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과 롯은 정말 닮았다. 롯은 손님 대접하는 법을 아브라함에게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10.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두 천사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자리에 눕기 전에 소돔 남자들이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롯의 집으로 몰려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롯이 아무리 그들을 달래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롯의 집에 온 두 천사들과 성관계를 맺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도대체 무엇에 홀려서 그처럼 폭력적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롯이 그들을 애써 달랬지만, 그들은 오히려 롯을 해하려고 그에게 달려들어서 문을 부수려 했다. 그들의 막강한 폭력을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다. 두 천사가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잠시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더 큰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즉, 성이 유황불로 타서 멸망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단의 비상상황에서 가장 목숨이 위태로웠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롯의 두 딸이었다.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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