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9 시절인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6) 시절인연 인우재에 있는 화장실은 자연에 가깝다. 통을 땅에 묻어 사용하는, 재래식이다. 통이 차면 차가 와서 통을 비워야 하는, 이른바 푸세식이다. 화장실은 통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벽은 더욱 그렇다. 목제를 켜고 남은 죽대기로 벽을 둘렀다. 숭숭 바람이 통하고 햇빛도 통한다. 아랫집을 짓기 전까지만 해도 화장실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는 호사를 누렸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인우재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죽대기 사이로 바깥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 바로 옆에는 여물통이 있다. 쇠죽을 담아두던 낡은 통을 그곳에 두고 이것저것 눈에 띄는 대로 담아두었다. 동네 집을 헐며 나온 기와, 인우재를 오르내리며 만난 사기그릇 조각들, 버리기에는 아깝.. 2020. 5. 8. 참았던 숨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6) 참았던 숨 꽃을 보는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러다가 미안했다. 잔뜩 쌓인 마른 가지들 틈을 헤치고 붉은 철쭉이 피어 있었다. 지난해 나무를 정리하며 베어낸 가지들을 한쪽에 쌓아둔 것이었는데, 그 자리에 철쭉이 있는 줄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켜켜 쌓인 마른가지들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철쭉은 해맑게 피어 환히 웃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마른 가지들을 옮기고 주변에 피어난 풀들을 뽑아주자 온전한 철쭉이 드러났다. 철쭉이 마침내 후, 하며 그동안 참았던 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그런 철쭉을 보며 생각한다. 거둬내야 할 마음속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내 걷는 길이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비로소 숨을 쉬는 저 철쭉을 만.. 2020. 5. 7. 소리까지 찍는 사진기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5) 소리까지 찍는 사진기 인우재에서 하루를 보낸 후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실을 찾았다. 무릎을 꿇고 앉아 밤기도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더니 공기는 상쾌하고 달은 밝다. 사방 개구리 울음소리, 개구리 울음소리가 합창의 베이스라면 당연 솔리스트는 소쩍새다. 청아하고 맑다. 마당에 서서 밤의 정경에 취한다. 이 순간을 남길 수는 없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찾아 사진을 찍는다. 기도실 창문과 달은 찍었는데, 개구리 울음소리와 소쩍새 노랫소리는 담을 길이 없다. 소리까지 찍는 사진기는 없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 지난다. 2020. 5. 6. 공공장소 흡연 범칙금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4) 공공장소 흡연 범칙금 이야기는 마음속에 시간 속에 묻혀 있던 많은 기억들을 불러낸다. 운전 중 교통경찰에게 걸리면 면허증 뒤에 오천 원을 함께 건네던, 그러면 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되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였다. 막상 이야기가 시작되자 별별 경험담들이 이어졌다. 같은 시절을 보냈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어 나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단강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원주에서 단강으로 들어오는 길 중의 하나는 양안치 고개를 넘는 것이었다. 지금은 터널이 뚫리고 길이 시원하게 뻗었지만, 당시만 해도 구불구불 뱀 지나간 자리 같았다. 막 고개를 넘어서서 내리막길을 탔을 때 내 차를 가로막은 것이 느릿느.. 2020. 5. 5. 어려운 숙제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3) 어려운 숙제 동그랗게 몽우리 진 작약 꽃봉오리에 붉은 빛이 감돈다. 사방의 나뭇잎과 풀이 그러하듯 작약의 이파리도 초록색, 줄기도 초록색, 꽃받침조각도 초록색인데, 벙긋 부푼 꽃봉오리에 비치는 것은 붉은빛이다. 작약은 온통 초록의 바다 어디에서 저 빛깔을 만나 불러낸 것일까. 어디에서 저 빛깔을 찾아 꽁꽁 제 안에 품고 있는 것일까. 작약은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어려운 숙제를 준다. 세상 누구도 모를 뜨거운 마음일랑 어디에서 찾아 어떻게 품는 것인지를 물으니 말이다. 2020. 5. 4.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2)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인우재 기도실을 청소하던 중, 기도용 의자에 눈이 갔다. 무릎을 꿇고 앉을 때 엉덩이 아래에 괴면 몸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작은 의자 표면이 먼지로 지저분했다. 의자를 닦기 위해 우물가를 찾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먼지를 닦다가 의자 아랫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 의자의 아랫부분 곳곳이 흙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찌 의자 아랫부분이 흙으로 채워져 있을 수가 있을까, 위에서 흙이 떨어졌다면 의자 위에 남아 있을 터, 의자 밑 부분을 채우고 있는 흙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금방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흙을 빼내려다 보니 흙 속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작은 애벌레였다. 칸마다 서너 마리씩의 애벌레가 흙.. 2020. 5. 3. 달과 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1) 달과 별 토담집 인우재에서 보내는 밤은 특별하다. 사방이 고요한데,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고 이름 모를 짐승의 소리도 들린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막 부엌에서 나오는 순간, 서쪽 하늘에 걸린 불빛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번진 밤하늘에 누군가 작은 등을 밝힌 듯한데, 초승달과 별이었다. 가만 서서 달과 별을 바라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큰딸 소리가 아주 어렸을 적이었다. 둘이서 서울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원주행 버스를 탔을 때는 땅거미가 깔리며 어둠이 내릴 때였다. 창가 쪽에 앉아 어둔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리가 내게 물었다. “아빠. 해는 환한데 있으니까 혼자 있어도 괜찮지만, 달은 캄캄한 데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봐 별.. 2020. 4. 30. 기도실 문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70) 기도실 문살 세월이 지나면 곰삭는 것 중에는 문살도 있다. 인우재 기도실 문살이 그랬다. 아랫말 무너진 돌담의 돌을 흙과 쌓아올린 기도실에는 동쪽과 서쪽에 작은 창이 두 개 있다. 동네 어느 집인가를 헐며 나온 것을 기도실 창으로 삼았다. 햇살이 비치면 고스란히 문살이 드러나는데, 예쁜 문양으로 서로 대칭을 이루던 것이 노인네 이 빠지듯 곳곳이 빠지기 시작했다. 문살은 헐거워지고 창호지는 삭아서 결국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떨어진 문살을 보면 장인의 솜씨를 느끼게 된다. 무슨 연장을 사용한 것인지 작은 나무토막 양쪽 끝을 날카롭게 벼려 자기보다 큰 문살들과 어울리도록 만들었다. 큰 문살들이 휘는 곳에는 ‘V’자 형태로 움푹 파인 부분이 있어 서로가 자기 자리에 꼭 .. 2020. 4. 30. 입장 차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69) 입장 차이 오래 전 리더스 다이제스트 유머 코너에서 읽은 글이 있다. 갈아 끼울 40와트짜리 전구를 사러 상점에 들러 점원에게 말했다. 벌써 몇 달 사이에 전구를 세 개나 갈았다고, 전구에 이상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자 점원이 불쾌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천만에요. 그 전구가 우리 가게에서 가장 잘 팔리는 물건입니다!” 부디 세상과 교회가 나누는 대화가 이런 것이 아니기를! 2020. 4. 30. 이전 1 2 3 4 5 6 7 8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