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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철 씨의 속 얘기 수요예배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잠시 쉬는데 부엌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가보니 광철 씨였다. 작실 교우들과 돌아가다가 다시 내려온 것이었다. “웬일이에요, 광철 씨?” “지난번 가져다 드린 밤 잡수셨어요?” 밤이며 땅콩이며 호박이며 광철 씨는 늘 그렇게 먹을 게 생기면 전하려 애를 쓴다. 예배시간 이따금씩 제단에 놓이는 들꽃도 광철 씨 손길이다. 그게 광철 씨 믿음이요 사랑이다. 들꽃을 꺾어, 밭뙈기에 호박을 심어, 남의 집 일하곤 한줌 땅콩을 얻어 평소에 못 드리는 헌금 대신 드리는 광철 씨, 가장 가난하고 가장 깨끗한 드림이다. 광철 씨는 밀린 얘기를 했다. 불쌍하다 여길 뿐 아무도 그의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없다. 엄마 돌아가셨을 때 장례 치러주어 고마웠고, 장사날 밥이라도 제대로 드셨.. 2021. 10. 4.
어떤 감사헌금 ‘강아지 분만 감사헌금’ 제단에 놓인 봉투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안속장님이 강아지를 보곤 감사헌금을 드리신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의외(?)의 감사헌금이 올라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함께 푸근한 기쁨을 누리게 한다. 일상 속에 스민 하나님의 사랑, 그게 고마워. - 1989년 2021. 10. 3.
길을 잃으면 땅에서 길을 잃으면 저 위를 바라본다 동방박사들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이 땅에 내려오신 어린 왕을 찾아가던 사막의 밤길처럼 하늘 장막에 써 놓으신 그 뜻을 읽으려 밤낮 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저 하늘이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내 안으로 펼쳐진 이 커다란 하늘이었다 숨줄과 잇닿아 있는 나의 이 마음이다 마음대로 행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다는 그 마음 날 여기까지 이끌어준 모든 새로운 길들을 비춘 마음속 하늘 2021. 10. 3.
속장님에겐 눈물이 기도입니다 새벽 세시 넘어 일어나 세수하면 그나마 눈이 밝습니다. 성경 몇 줄 읽곤 공책을 펼쳐 몇 줄 기도문을 적습니다. 머릿속 뱅뱅 맴돌 뿐 밖으로 내려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는 서툰 기도 몇 마디, 그것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두 방울 물 받듯 적습니다. 그러기를 며칠, 그걸 모아야 한 번의 기도가 됩니다. 흐린 눈, 실수하지 않으려면 몇 번이고 읽어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때마다 흐르는 눈물. 옆에서 자는 남편 놀라 깨기도 하고, 몇 번이고 눈물 거둬 달라 기도까지 했지만 써 놓은 기도 읽기만 해도 흐르는 눈물, 주체 못할 눈물. 실컷 울어 더 없을 것 같으면서도 기도문 꺼내들면 또 다시 목이 잠겨 눈물이 솟습니다. 안갑순 속장님의 기도는 늘 그렇게 준비됩니다. 다음 주 속장님 기도입니다, 알려드리면 한 주일은.. 2021. 10. 2.
무심한 비는 그칠 줄 모릅니다 찬비가 종일 내리던 지난 주일은 윗작실 이한주 씨 생일이었습니다. 이하근 집사의 아버님이신 이한주 씨가 73세 생일을 맞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양말을 포장하여 작실로 올라갔습니다. 집 뒤론 산이 있는, 윗작실 맨 끝집입니다. 방안에 들어섰을 때 마을 아주머니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들고 있었습니다. 상을 따로 차리신다는 걸 애써 말려 같이 앉았습니다. 비만 아니었다면 모두 들에 나갔을 텐데 내리는 비로 일을 쉬고 모처럼 한데 모인 것입니다. 비꽃이 피듯 이야기꽃이 피어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갑니다. 장에 다녀온 얘기하며 비 맞아 썩고 싹이 나고 하는 곡식 얘기하며, 몸 아픈 얘기하며. 그중 치경 씨 얘기엔 모두들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바로 그날, 어릴 적 식구들과 흩어져 소식이 10년 넘게 끊겼던 치경 씨.. 2021. 10. 1.
문향(聞香) 하얀 박꽃이 더디 피고 하얀 차꽃이 피는 시월을 맞이하며 하얀 구름은 더 희게 푸른 하늘은 더 푸르게 무르익어가는 이 가을 하늘이 먼 듯 가까운 얼굴빛으로 다가오는 날 들음으로써 비로소 열리는 하늘문을 그리며 문향(聞香) 차꽃의 향기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올해도 감사히 모든 꽃들이 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음은 꽃들을 둘러싼 없는 듯 있는 하늘이 늘 쉼없는 푸른 숨으로 자신의 향기를 지움으로 가능한 일임을 2021. 10. 1.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 60: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걸어오는 동안 젖은 바짓단이 온 종일 축축합니다.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습니다. 이런 날에 듣는 첼로 소리는 더없이 깊은 울음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어지럽지만 가끔은 그런 분잡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소란스러움이 우리 영혼을 어지럽힙니다. 홍수 통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말이 넘치는 .. 2021. 9. 30.
치화 씨의 가방 치화 씨가 교회 올 때 가지고 다니는 손가방 안에는 성경과 찬송, 그리고 주보뭉치가 있습니다. 빨간 노끈으로 열십자로 묶은 주보뭉치, 한 주 한 주 묶은 것이 제법 굵어졌습니다. 주보를 받으면 어디 버리지 않고 묶었던 노끈을 풀러 다시 뭉치에 챙깁니다. 아직 치화 씨는 한글을 모릅니다. 스물다섯, ‘이제껏’이라는 말이 맞는 말입니다. 집안에 닥친 어려움으로 어릴 적부터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찬송가 정도는 찾을 수가 있습니다. 서툴지만 곡조도 따라합니다. 반의 반 박자 정도 늦은, 그렇게 가사를 찾는 그의 안쓰러운 동참을 하나님은 기쁘게 들으실 겁니다. 주기도문도 서툴지만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글을 모르지만 차곡차곡 주보를 모으는 치와 씨, 치화 씨는 그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모으고 있.. 2021. 9. 30.
하룻강아지 ‘한국전기통신’이라는 사보(89년 3월호)를 보다보니 잘못 쓰고 있는 우리말에 대한 글이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하룻’이라는 말은 ‘하릅’이 맞다는 것이다. ‘하릅’이라는 말은 소나 말, 개 등의 한 살 된 것을 뜻하는 말이다.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되는, 그래서 눈도 뜨지 못한 강아지라면 범이 아니라 세상 아무리 무서운 게 있어도 무서워할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하루보다는 한 살 된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함이, 타당성이 있지 싶다. 점점 외래어로 대치되어가는 순 우리말, 말에도 생명이 있다던데 같이 걱정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열 살까지의 동물의 나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살(하릅), 두 살(이릅), 세 살.. 2021.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