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숙의 글밭490

엄마의 집, 종량제 봉투 신동숙의 글밭(285) 엄마의 집, 종량제 봉투 앞으로 2주 동안 엄마의 집은 빈 집입니다.냄비에 남은 찌게를 버릴까 하다가 냉장고로 보냅니다. 수저 한 벌, 밥그릇 하나, 작은 반찬 접시아침 밥그릇이 담긴 설거지통을 비웁니다. 엄마가 여러 날 동안 우겨 담으셨을 종량제 봉투에화장실 쓰레기통 휴지까지 마저 눌러 담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해를 지내오면서도엄마의 아파트 종량제 봉투 버리는 데를 모릅니다. 문을 나서며 처음 마주친 아주머니께 여쭈니"앞쪽에 버려도 되고, 뒷쪽에 버려도 되는데,이왕이면 가까운 뒷쪽에 가세요." 하십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하며 뒷쪽으로 가니태우는 쓰레기통, 안 태우는 쓰레기통이 나란히 두 개 태우는 쓰레기통 손잡이를 위로 당기니 열리지 않아서 아파트는 쓰레기통도 비밀번호를 .. 2020. 11. 25.
키워주신 땅에게 신동숙의 글밭(284) 키워주신 땅에게 키워주신 땅에게 얼만큼 고맙냐구요? 마지막 잎새까지 떨구어, 다 주고도 모자랄 만큼 고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잎새까지 다 내어주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춥고 시린 마음보다는 저 잎들의 초연함 앞에 이제는 가슴 뭉클한 뜨거움이 올라옵니다. 땅으로 돌아가는 가을잎들이 왜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빛깔의 옷들로 갈아입었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헤아리다 보면, 여전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추운 늦가을 밤에도 가슴이 따스하게 환해져옵니다. 때를 따라서 돌아가는 가을잎의 발걸음을 괜스레 재촉하고 있는 가을비와 가을 바람이 마냥 야속하기보다는, 이제는 길벗이 되었다가 재잘거리며 속을 나누는 도반인지도 모릅니다. 가을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황금빛 햇.. 2020. 11. 24.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신동숙의 글밭(283)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며칠 동안 간간히 가을비가 내리더니,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던 가로수의 노란 은행잎이 이제는 땅 위에 수북합니다. 그 노란 은행잎 융단을 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이 가을바람의 빗자루질 같습니다. 지난 시월의 어느날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참선방에서 철야 참선을 마친 후 일찍 나서던 길에, 잠시 보았던 스님들의 분주한 빗자루질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날 느즈막히 길을 나설 때면, 말끔하게 쓸어놓은 공원 산책길과 훤한 절 마당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가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을 소식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줍기도 하고, 곁에 선 나무 아래로 돌려.. 2020. 11. 23.
충만한 하늘 신동숙의 글밭(282) 충만한 하늘 빈 하늘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기에아침마다 이렇게 환하게 밝아오는지 태양이 비추는 우주 공간은언제나 어둠인 채로 아침이 오지 않습니다. 들숨으로 들으킨 하늘이뼈와 피와 살이 되는 신비로움 몸이 하늘에 공명하여울리면 노래가 되고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서몸짓은 춤이 되기도 합니다. 비로소 잎들을 다 털어낸 빈 가지를 하늘이 고이 품에 안고서 이 겨울을 지나며 겨울 바람이 웅웅 자장가를 불러주는 겨울밤은촛불 하나만 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긴긴밤 황금빛 햇살을 걸쳐 입은 빈 가지마다새 움을 틔우는 이 충만한 하늘의 사랑을 2020. 11. 22.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신동숙의 글밭(281)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엔 매듭 짓지 못하고, 풀리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작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제게 주어진 이 하루도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게 할 뿐입니다. 유약(柔弱)한 가슴에 어떠한 원망이나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내 살과 뼈를 녹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려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품고서도, 몸을 움직이며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갈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멈추어 바라본 순간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분노를 제 가슴에 품고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고요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엄습하던 온.. 2020. 11. 21.
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신동숙의 글밭(280) 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저는 바라고 원하는 기도 앞에 언제나 떨며, 두렵고 머뭇머뭇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장소, 어느 종교, 어느 누가 드리는, 어떠한 형태의 기도라고 해도 기도에는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제가 드린 기도대로 이루어질까 싶어서 기도 앞에 언제나 머뭇거리며 주저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특정 종교 생활에 꾸준히 성실히 몸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되는 뒷심은, 기도의 힘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주위에 여러 종교인들의 얘기를 통해 종종 듣게 되면서 그러리라 짐작해봅니다. 하지만 그 기도란 우리네 어머니들이 장독 위에 정안수를 떠 놓으시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홀로 두 손으로 빌던 소박한 기도가 예배당에서 드.. 2020. 11. 20.
하늘 그릇 신동숙의 글밭(279) 하늘 그릇 그릇에 담긴 물을 비우자마자얼른 들어차는 하늘처럼 나를 채우려는 이 공허감과 무력감은얼른 들어차려는 하늘의 숨인가요? 나를 비우고 덜어낸 모자람과 패인 상처와 어둔 골짜기마다 하늘로 채우기를 원합니다.나의 몸은 하늘 그릇입니다. 더 가지려는 한 마음이 나의 모자람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시고 남을 헐뜯으려는 한 마음이 나의 패인 상처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시고 높이 오르려는 한 마음이 나의 어둔 골짜기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를 채우려는 이 없음이없는 듯 계시는 하느님인 줄 스스로 알게 하소서. 나의 몸은 하늘을 담는 하늘 그릇입니다. 2020. 11. 19.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샘물 신동숙의 글밭(278)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샘물 글을 다 쓴 후자꾸만 손이 갑니다열 번도 가고 백 번도 가는 일 바르게 고치고 또 고치고부드럽게 다듬고 또 다듬으며 글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쉼 없는 일 문득 이 세상에서 일필휘지가 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사색으로 흐릅니다 한 순간 떨군 눈물 한 방울한 순간 터트린 웃음 한 다발풍류 장단에 춤추는 민살풀이 우리들 모든 가슴마다이미 공평하게 있는 샘물이 샘솟아 올라 순간이 영원이 되는 일 본래 마음이 휘 불면일필휘지(一筆揮之)아니할 도리가 없답니다 2020. 11. 18.
구멍 난 양말 묵상 신동숙의 글밭(277) 구멍 난 양말 묵상 -라오스의 꽃 파는 소녀, 강병규 화가- 몸에 작은 구멍 하나 뚫렸다 하여멀쩡한 벗님을 어떻게 버리나요 내 거친 두 발 감싸 안아주느라맥없이 늘어진 온몸이 미안해서 어디까지나 나의 게으름 탓에 제때 자르지 못한 내 발톱에 찔려 아픈 님을 작은 틈으로 비집고서 세계 구경 나온 발가락은 웃음도 되고 서러움도 되었지요 실과 바늘로 한 땀 한 땀꿰어주시던 어진 손길은 묵주알처럼 공굴리는묵상의 기도손입니다 2020. 1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