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506 나도 하늘처럼 밤하늘 불을 끄실 때 내 방에 불을 켠다 새벽하늘 불을 켜실 때 내 방에 불을 끈다 어둔 밤이면 전깃불에 눈이 멀고 환한 낮이면 보이는 세상에 눈이 멀고 언제쯤이면 나도 하늘처럼 밤이면 탐욕의 불을 끄고서 어둠 한 점 지운 별처럼 두 눈이 반짝일까 새벽이면 마음에 등불을 켜고서 하늘 한 점 뚫은 해처럼 두 눈이 밝아질까 2021. 3. 25. 물 인심 물 한 잔 드릴까요? 하고 얼른 물으면 바빠요! 하며 냉큼 달아나신다 택배 기사님도 배달 기사님도 집배원 아저씨도 물 한 모금 삼킬 틈없는 나무 꼬챙이 같이 삐쩍 마른 뒷모습에 넉넉한 물 인심이 가슴 우물에 먹먹히 고인다 2021. 3. 1. 무의 새 무한한 날갯짓으로 몸무게를 지우며 무심한 마음으로 하늘을 안으며 새가 난다 하늘품에 든다 2021. 2. 25. 로즈마리와 길상사 한겨울을 지나오며 언뜻언뜻 감돌던 봄기운이 이제는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요즘입니다. 길을 걸으며 발아래 땅을 살펴보노라면 아직은 시들고 마른 풀들이 많지만 그 사이에서도 유독 푸릇한 잎 중에 하나가 로즈마리입니다. 언뜻 보아 잎 모양새가 소나무를 닮은 로즈마리는 개구쟁이 까치집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손으로 스치듯 살살살 흔들어서 그 향을 맡으면 솔향에 레몬향이 섞인듯 환하게 피어나는 상큼한 향에 금새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로즈마리를 생각하면 스무살 중반에 신사동 가로수길과 돈암동 두 곳의 요가 학원에서 작은 강사로 수련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고시원 방이 삭막해서 퇴근길에 숙소로 데리고 온 벗이 바로 작은 로즈마리 묘목입니다. 언제나 로즈마리와의 인사법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 2021. 2. 24. 루이보스 차와 아버지 아버지는 루이보스 차가 좋다고 하셨다. 딸이 드리는 이런 차 저런 차를 다양하게 맛보시더니 그중에 루이보스 차를 드시면 속이 가장 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식사는 되새김질로 마무리를 하셨다. 풀밭에 앉은 황소가 우물우물 풀을 씹어 먹듯이 소눈을 닮은 아버지의 큰 눈망울은 끔벅끔벅 먼 고향 하늘가 어드메 쯤인가를 그리시는 듯 보였다. 그러면 함께 밥을 먹던 엄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던 한소리가 "추잡구로" 아버지의 되새김질에 뒤따르는 엄마의 추임새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소처럼 점잖구로 어릴 적에 소여물을 먹이시던 묵은 얘기를 또다시 처음처럼 풀어놓으셨다. 그러면 어린 내 눈앞으로 누런 황소가 보이고, 우물우물 움직이는 소의 되새김질이 보이고, 순한 소의 눈망울 속으로 푸른 풀밭을 닮은 푸른 하늘이 넓게.. 2021. 2. 23. 참빗, 참빛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모여 빗살 촘촘한 참빗이 되어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생각의 결을 가지런히 빗겨준다 한 권의 책 한 개의 사상 한 개의 종교만 내세우는 건 한 개비의 꼬챙이로 머리 전체를 빗겠다며 날을 세우는 일 나와 너를 동시에 찌르는 일 나와 너를 살리는 이 땅에 모든 생명을 살리는 공기처럼 공평한 참빗의 빗살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 촘촘한 햇살 촘촘한 빗줄기 촘촘한 바람의 숨결 하늘의 그물은 회회(恢恢) 성글어도 어린 양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는 법 오늘을 빗는 빈 마음의 결마다 참빛으로 채우신다 2021. 2. 12. 이쑤시개 세 개 네 살 때부터 다섯 살까지 엄마 손에 붙들려 어린이집 대신 다도원에 다닌 딸아이 엄마는 개량 한복 입고 고무신 신고 앵통 들고 차 수업 받으러 가는 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 밀집 모자 쓰고 호미랑 삽이랑 딸아이랑 차밭에서 살며 놀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신기한 잡초도 신나게 뽑고 어린 찻잎도 신명나게 따느라 찻잎 삼매경에 빠져 살던 엄마 첫날 다실에 보물처럼 가득 쌓인 예쁜 다구들과 노리개들을 보면서 호기심 대장 개구쟁이 딸아이에게 딱 한 마디 했지요 "여기 있는 건 하나도 만지면 안된다" 2년 동안 단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기적이 딸아이한테서 일어난 건 신기하고도 고마운 일 그러던 어느날 평소에 다식꽂이로 한 번 쓰고 버리던 이쑤시개 노랑 분홍 파랑 리본이 달린 예쁜 이쑤시개 어느날 우리집에서 .. 2021. 2. 6. 말동무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이 아름다운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돈과 건물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와 성공을 위한 일이 우선이라면 얼마나 힘 빠지고 재미없는 걸음 걸음인가 돈이 있든지 없든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인기가 별로 없어도 성공이라 부를만한 것 딱히 없어도 말이 통하는 동무 하나만 별처럼 있다면 말이 통하는 말동무 하나를 만나고 싶어서 아무 책이나 읽으면 아무 동무나 만나게 될까 봐 겁나 밥은 굶어도 책은 아무 책이나 읽지 말자 어려서부터 굳은 마음 먹었지 말문이 막히고 숨통이 막히는 오늘 같은 날에도 말동무 삼아서 글을 읽는다 먹먹함 한 줌 고이면 가슴 웅덩이 물길 터주려 차 한 모금 홀짝 홀짝 삼킨다 2021. 2. 5. 눈물샘 가끔 누군가를 만나 소화되지 않는 말이 있지 목에서 걸리고 가슴에 맺히는 말 한 마디 저녁답 쪼그리고 앉아 군불로 태워버릴 부뚜막 아궁이도 내겐 없는데 한겨울밤 문틈으로 바람 따라 보내버릴 엉성한 문풍지도 내겐 없는데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숨통이라도 트려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다가 몸을 지으실 때 가장 연약한 틈 눈물샘으로 흐른다 가슴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말없이 울어준다 2021. 2. 3.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 5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