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499 3분의 오묘함 신동숙의 글밭(293) 3분의 오묘함 그림:, 황간역의 강병규 화가 추운 겨울엔 언 손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다정한 벗이 된다. 잠을 깨우며 몸을 움직이기에는 커피가 도움이 되지만, 피를 맑게 하며 정신을 깨우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잎차만한 게 없다. 가끔 선원이나 사찰, 고즈넉한 성당이나 수행처를 방문할 때면, 혹시나 그곳 둘레 어딘가에 차나무가 있는지 먼저 살피는 버릇이 있다. 반가운 차나무를 발견할 때면, 그 옛날 눈 밝은 어느 누군가가 차씨나 차묘목을 가져다가 심었는지 궁금하고, 얼굴도 모르는 그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인다. 차나무의 어린 잎을 발효한 홍차를 우릴 때면, 찬바람이 부는 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군불을 지피는 풍경이 그려진다. 단풍나무 시럽이 가미된 '메이플 테피 홍차'.. 2020. 12. 22. 우리 마을 속옷 가게 신동숙의 글밭(292) 우리 마을 속옷 가게 아이들이 태어나서부터 걸음마를 떼기 전까지는 내복으로 사계절을 살았다. 조금 자라선 내복이 실내 활동복이 되기도 하다가, 어느날 문득 잠옷을 입히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찾아간 곳이 큰 도로 건너 우리 마을 속옷 가게다. 손쉬운 인터넷 쇼핑의 저렴한 유혹을 물리치고, 직접 가게로 발걸음한 이유는 직접 눈으로 보고, 옷의 촉감도 느껴 보고, 한 치수 큰 걸로 해서 잠옷이 주는 전체적인 감성과 아이들의 마음을 서로 짝을 지어주듯 직접 이어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서이다. 자라나는 몸이라고해도 적어도 한두 해 동안은 집 안에서 동고동락해야 하는 옷이 잠옷이 아니던가. 딸아이는 하절기와 동절기 계절에 따라서 잠옷을 바꾸어가며 늘상 입다보니, 나중엔 물이 빠지고 천이 해지.. 2020. 12. 21. 공생의 탁밧(탁발) 신동숙의 글밭(291) 공생의 탁밧(탁발) 그림: 루앙프라방의 , 황간역의 강병규 화가 루앙프라방의 새벽 시장을 여는 탁밧 행렬찰밥, 찐밥, 과자, 사탕을 조금씩 덜어내는 손길들 가진 손이 더 낮은 자리에 앉아서 무심히 지나는 승려들의 빈 그릇에 올리는 공양 승려들의 빈 그릇이 가득 채워지는행렬의 맨 끝에는 가난한 아이들이 모여 있다 혼자 먹을 만큼만 남기고 비우는 발우고여서 썩을 틈 없는 일용할 양식 아무리 가난해도 구걸하는 자 없고 아무리 부유해도 베푸는 자 없는 나눔과 공생의 땅에서착한 이들이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라오스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교회 그러고 보니 나눔과 공생의 탁밧을한국의 사찰과 교회당에서도 본 적이 있다 아침밥을 굶던 참선방에서 내 무릎 앞에 떡을 놓아 주시던 보살님.. 2020. 12. 14. 첫눈으로 하얗게 지우신다 신동숙의 글밭(290) 첫 눈으로 하얗게 지우신다 첫 눈으로세상을 하얗게 지우신다 집을 지우고자동차를 지우고길을 지우고 나무를 지우고 먼 산을 지우고사람을 지우신다 첫 눈 속에서두 눈을 감으며하얀빛으로 욕망의 집을 지우고떠돌던 길을 지우고한 점 나를 지운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보이는 건 하얀빛 오늘 내린 첫 눈으로 세상을 하얗게 지우시고아침햇살로 다시 쓰신다 2020. 12. 13. 법원이 있는 마을 신동숙의 글밭(289) 법원이 있는 마을 - 검찰 개혁이 자리 바꿈만이 아니길 -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인 부산의 대신동을 두고 어른들은 교육 마을이라고 불렀다. 구덕산 자락 아래로 초·중·고 여러 학교들과 대학교가 있고, 미술·입시 학원들이 밀집해 있던 마을, 소문으로만 듣던 술주정꾼이나 깡패들이 잘 보이지 않던 건전한 동네로 추억한다. 산복도로가 가로지르던 빽빽한 산비탈 마을에는 6·25 피난민 시절에 지어진 판잣집도 간혹 보였으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큰 도로를 중심으로 번번한 평지에는 돌담이 높아 내부가 보이지 않는 양옥 저택들이 잘 자른 두부처럼 반듯하게 줄지어 들어선 동네, 인적이 드문 넓다란 골목길을 지나가는 바가지 머리의 꼬마한테도 반갑게 손을 내밀어 흔들어 주는 건 언제나 하늘 아래 푸른.. 2020. 12. 10. 뿌리에서 올라오는 향기 신동숙의 글밭(289) 뿌리에서 올라오는 향기 나무 꼬챙이로 흙을 파며 놀거나 귀한 잡초를 몰라 보고 뿌리채 뽑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게중에 유난히 뽑히지 않는 게 민들레 뿌리입니다. 땅 속으로 깊이 내려가는 하나의 굵다란 뿌리를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뻗친 잔가지들이 잘 다져진 땅 속 흙을 온몸으로 부둥켜 끌어 안고 있는 민들레 뿌리의 그 강인한 생명력과 사투를 벌이다 보면 엉덩방아를 찧기도 합니다.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호미나 삽으로 흙을 더 깊이 파 내려가기도 합니다. 흙을 깊이 팔수록 흙에서 올라오는 깊은 향기가 있습니다. 흙내와 엉킨 뿌리에서 올라오는 깊은 근원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 흙내와 뿌리의 향기 앞에서 무장해제 되지 않을 생명이 있을까요? 한 해 살이 식물의 가장 끝향기가 꽃이라면, .. 2020. 12. 7. 백신 접종 순서, 국가 신뢰도 체온계 신동숙의 글밭(288) 백신 접종 순서, 국가 신뢰도 체온계 코로나 백신 접종 1순위는 누구인가? 어떤 이들이 우선 접종 대상자가 되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영국을 비롯한 각국에서 연구 개발하고 있는 코로나 백신을 두고, 접종 우선 순위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장차 어느 시점부터는, 누구든지 접종 대상자가 될 수도 있기에, 어린 아이들도 이해하기 쉬운 말로 조심스레 생각하려고 합니다. 나를 제외한 의미의 '대상자'라는 말의 맹점을 두고, 나를 포함한 의미의 '모든 사람이 대상자'라는 공평한 저울 위에 올려 놓기를 원합니다. 공평하게 나를 포함해야 할 법 집행자가 나를 제외한 법 집행자가 될 때의 불공평하고 불투명함에서 싹 트는 사회적인 폐단을 우리는 오늘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공평한 시선이란 모.. 2020. 12. 6. 엄마와 목욕, 공정 거래 신동숙의 글밭(287) 엄마와 목욕, 공정 거래 이른 아침 목욕탕에서 나오면 머리카락에 얼음이 꽁꽁 얼었습니다. 언제가부터 목욕탕에 헤어 드라이기가 생긴 것은 훨씬 뒷일입니다. 그 옛날엔 1~2주에 한 번 일요일 새벽이면, 참새처럼 목욕탕에 가는 일이 엄마와 딸의 월례 행사가 되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목욕탕 굴뚝의 하얀 연기가 펄럭이는 깃발처럼, 우람한 나무처럼 새벽 하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졸린 두 눈을 뜨기도, 작은 몸을 일으키기도 제겐 힘에 겨웠던 일요일 새벽,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는 일보다 더 싫었던 건 목욕탕 입구에서 엄마의 거짓말이었습니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았던 저는 여러 해 동안 목욕탕 입구에서 만큼은 일곱 살입니다. 엄마가 제 나이를 한두 살 깎으면 목욕탕 주인은 일이백원을 깎아주.. 2020. 11. 30. 할머니들의 방 신동숙의 글밭(286) 할머니들의 방 어제 밭에서 뽑은 노란 알배추 속 서너 장, 늦가을엔 귀한 상추 두 장, 푸릇한 아삭 오이 고추 한 개, 빨간 대추 방울 토마토 두 알, 주황 귤 한 알이 침대 사이를 오고가는 할머니들의 방은 콩 한 쪽도 서로 나누어 먹는 방입니다. 아침이면 작은 보온 국통에 오늘은 무슨 따끈한 국물을 담아 갈까 하고 궁리를 합니다. 옛날 학창 시절에 부모님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뼈가 잘 붙으려면 사골국이 좋다 하시며 구포장에서 버스를 타고 장을 보아 오시던 아버지 생각도 납니다. 넘어지시기 전날, 아이들이 국물만 먹고 남긴 순대국을 맛있게 드시던 엄마 모습이 힌트를 줍니다. 냉동실에 마저 한 팩 남은 순대국을 따끈하게 데워서 보온 국통에 담습니다. 평소보다 열 배 저속.. 2020. 11. 29. 이전 1 ··· 21 22 23 24 25 26 27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