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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2

평화의 밥상 신동숙의 글밭(270) 평화의 밥상 따끈한 무청 시래기 된장국 한 그릇, 김밥 반 줄, 유부 초밥 세 개, 깍두기 일곱쪽, 수도승들이 산책길에 주운 알밤 한 줌, 제주도 노란 귤 하나로 따뜻하고 맛있는 풍요로운 이 가을날 점심밥상의 축복을 받습니다. 아침부터 분주히 많은 양의 식사 준비를 하시던 누군가의 마음이 손길이, 먹는 이의 입으로 가슴으로 전해지는 거룩한 식사 시간은 그대로 고요한 감사의 기도 시간이 됩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앞마당엔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상이 보이고, 밥을 먹는 제 곁엔 사찰의 공양게송이 가까운, 이곳에선 하느님과 부처님이 사이좋은 이웃입니다. 하나의 평등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미 깊은 땅속에서 하나에 뿌리를 둔 하나라는 사실을 문득 해처럼 떠올리다 보면 어.. 2020. 11. 6.
조율하는 날 신동숙의 글밭(269) 조율하는 날 밥은 먹었니?가슴 따뜻해지는 말 차 한 잔 하자가슴 설레이는 말 어느 날 문득그러한 초대에 따뜻해지지도 설레이지도 않는 날 내 마음의 결을 고요히 조율하는 날 2020. 11. 5.
투명한 예수 신동숙의 글밭(268) 투명한 예수 공생애를 사시던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제가 유심히 살펴보던 점은 모든 행함 중에 보이는 예수의 마음입니다. 모든 순간의 말과 행적을 놓치지 않으며 제 마음에 비추어 보는 일이 다름 아닌 성경 읽기와 사람 읽기, 마음 읽기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일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일이니까요. 결혼식 축하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후 보이신 예수의 마음에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혈우병을 앓던 여인이 군중 사이를 지나던 예수의 옷자락을 잡고서 병이 나음을 보이시고도, 예수는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할 뿐입니다. 신약의 전문을 낱낱이 살펴보아도 이른바 종교인들이 내세우는, 예수가 행하신 이적과 기적 중에도, 예수는 언제나 자신의 공로와 의를.. 2020. 11. 4.
비가 그친 후 소나무 숲 냄새 신동숙의 글밭(267) 비가 그친 후 소나무 숲 냄새 간밤에 가을비가 순하게 내리는가 싶더니, 명상의 집을 둘러싼 소나무 숲이 한결 순하게 젖어든 아침입니다. 아이들을 등교 시킨 후 뒷설거지를 하고 이부자리와 방 정리까지 마무리를 한 뒤 강론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선 바쁜 아침을 보내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엄마 없는 빈 집으로 제일 먼저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의 눈에 널브러진 방으로 맞이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방바닥의 먼지까지는 닦지 못하더래도, 옷가지며 이불이며 제 자리에 있을 것들은 제 자리에 두고서 집을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그 대신 토마스 머튼의 강론 수업 시간에 오늘 만큼은 기필코 지각하지 않기로, 지난 며칠간 혼자서 속으로 다짐했던 엄마의 열심을 내려놓기로 한 .. 2020. 11. 3.
귀를 순하게 하는 소리 신동숙의 글밭(266) 귀를 순하게 하는 소리 낮동안 울리던 귀를밤이면 순하게 슬어주던 풀벌레 소리 멈추고가을밤은 깊어갑니다 오늘밤엔 창문 틈으로 들려오는가을비 소리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우리의 귀를 순하게 하는 자연의 소리는 늘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멈추어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어느 곳에서든 누구나 들을 수 있는 2020. 11. 2.
"평화에도 머물지 말라" 신동숙의 글밭(265) "평화에도 머물지 말라" 모처럼 제 방 안에 앉아 있으려니,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이 오고 밤이 옵니다. 지난 시월 한 달 동안의 주말 저녁은 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홀로 저녁 하늘과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둠 속으로 잠기곤 하였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원당암 마당 위로 유난히 하얗게 빛나며 금실거리던 시월의 별들을 바라보다가, 또한 저 별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한 마음이 문득 별처럼 떠올라, 가슴이 그대로 고요한 가을밤이 되고 어둠이 되던 순간도 이제는 꿈결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초여름부터 어김없이 들려오던 창밖의 풀벌레 소리가 오늘은 멈추었습니다. 이렇게 고요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기 전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풀벌레들의 침묵입니다. 태화강변을 따라서 아직은 화려한 가을잎.. 2020. 11. 1.
멈출 수 없는 사랑 신동숙의 글밭(259) 멈출 수 없는 사랑 물이 흐르는 것은멈출 수 없기에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무슨 수로 막을까 매 순간 흐르고 흘러서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물처럼 멈출 수도 없는 끊을 수도 없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멈출 수 없는 사랑 햇살이 좋은날엔 무지개로 뜬다 2020. 10. 28.
구멍가게 성당 신동숙의 글밭(258) 구멍가게 성당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답작은 마을의 어둑해진 골목길은 좁은길 구멍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카운터를 지키시던 주인 아주머니가 오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텔레비젼을 바라보시며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색색깔의 과자봉지와 음료들은 아울러중세시대 성당의 화려한 비잔틴 모자이크가 됩니다. 간혹 종지에 촛불을 켜고 앉으셔서 늦은 밤까지학원에서 돌아오는 딸아이의 밤길을 지켜주기도 하시는 염주알인지 묵주알을 돌리시기도 하는 구멍가게아들이 좋아하는 과자가 풍성한 이곳은 기도의 성당 두 손을 모으신 아주머니가홀로 드리는 저녁 미사를 두고간혹 싫어하는 손님도 계신다지만, 앞으로 과자를 사러갈 때면기도의 성당으로 들어가듯 달콤하고 엄숙한 마.. 2020. 10. 27.
알찬 온기 신동숙의 글밭(257) 알찬 온기 혼자 앉은 방어떻게 알았을까 책장을 넘기면서 숨죽여 맑은 콧물을 훌쩍이고 있는 것을 누군가 속사정을 귀띔이라도 해주었을까 있으면 먹고 없으면 저녁밥을 안 먹기로 한 것을 들릴 듯 말 듯 어렵사리 문 두드리는 소리에마스크를 쓴 후 방문을 여니 방이 춥지는 않냐며 내미시는 종이 가방 속에는노랗게 환한 귤이 수북하다 작동이 되는지 모르겠다며놓아주시는 난로에 빨간불이 켜지고방 안에 온기가 감돈다 가을 햇살처럼알찬 온기에 시간을 잊고서 밤 늦도록 과 의 허공 사이를유유자적(悠悠自適) 헤매어도 좋을 것이다 2020.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