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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장식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지난 추수감사절 때 작은 종이에 크레용으로 써서 제단에 붙였던 글을 성탄 트리를 장식한 지난주까지 계속 붙여놨었다. 아이들과 같이 성탄장식을 끝내곤 트리에 불을 넣은 후 뒤로 물러나 바라보는데 그 글귀가 새롭게 들어왔다. 추수감사절 때나 맞았지 싶었던 그 글귀가 반짝이는 장식과 어울려 성탄의 의미로도 귀하게 여겨졌다. 후배 덕균의 수고로 여기 저기 별이 뜨고, 동방박사가 지나고,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란 커다랗고 멋있는 글자가 제단 가득하지만, 언젠가 성탄엔 게으름을 통해 만난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를 성탄장식으로 써 봐야지, 게으름을 변명하며 마음에 담아둔다. - 1989년 2021. 12. 19.
작고 하찮을수록 소중한 이야기들 장에 다녀오는 길, 단강으로 들어오는 버스 안에서 듣게 된 이웃마을 한 아주머니의 얘기를 이필로 속장님이 했습니다. 기름 한 종지 더 얻자고 개치(부론)까지 갔다가 결국은 한 종지만 얻게 됐다는 얘기에 우린 한참 웃었습니다. 다시 이어진 얘기에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습니다. 아주머니 옆 자리에서 아주머니 얘길 듣던 한 중년 남자가 그 얘길 듣더니만 “아 그거 참 재미난 얘기네요. 아주머니, 그 얘기 차근차근 다시 한 번 해 보세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얘길 글로 쓰면 좋은 글감 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웃음이 다시 터졌던 건 그 중년 남자 얘길 하던 속장님이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이 또 있드라구요, 글쎄.” 하고 얘길 마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헛간에 걸어놓은 못쓰게 된 살림살이들처럼 아무짝에도 .. 2021. 12. 19.
왜였을까, 뺀 이를 지붕 위에 던지게 했던 건 이가 흔들릴 때마다 두려웠다. 빨리 새 이가 나야 어른이 되는 거라 했지만, 이가 흔들릴 때마다 이 빼는 것에 대한 공포가 먼저 앞섰다. 흔들 만큼 흔들어서 쉬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설프게 흔들리는 이에 실을 걸어 사투 벌이듯 애를 써야 할 때도 없지 않았다. 이를 빼면 열심히 지붕 위에 던졌다. 대부분이 기와지붕이었던 어린 시절, 던진 이는 또르륵 소리를 내며 잘도 굴러 떨어졌다. 그때마다 떨어진 이를 주워 또 다시, 용케 안 떨어질 때까지 지붕 위로 던져 올렸다. 지붕 위에 헌 이를 올려야 새 이가 나온다고 배웠는데, 지붕 위에 뺀 이를 올리지 못하면 새 이가 안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를 뺀 아이를 보면 “앞니 빠진 증강세, 우물가에 가지 말라 붕어새끼 놀랜다!” 하고 놀리기도 했다. 왜 어른.. 2021. 12. 18.
농부의 비장한 다짐 작실 반장 일을 보고 있는 병철 씨가 얼마 전 딸을 낳았습니다. 첫아들 규성이에 이어 둘째로는 딸을 낳았습니다. 아기 낳기 전날까지 하루 종일 고추모를 같이 심었던 부인이 다음날 새벽녘 배가 아프다 하여 차를 불러 원주 시내로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별 어려움 없이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엄마 따라 새로 난 아기도 건강했습니다. 병원을 다녀오는 병철 씨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둘째 아기를 건강하게 잘 낳은 것도 그렇고 첫째가 아들이라 은근히 둘째로는 딸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낭랑한 아기울음 오랜만에 동네에 퍼지게 되었고 모처럼 흰 기저귀 널리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끝정자로 내려가다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보니 개울둑 저만치 누가 누워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병철 씨였습니다. 못자리를 한 논을 .. 2021. 12. 17.
하늘의 배려 “오늘이 엄마 아빠가 결혼한 날이다.” 결혼한 지 4년째를 맞는 날, 저녁을 먹으며 아내가 소리에게 말했습니다. 4년의 세월을 두고 식구가 둘 는 게 신기합니다. “엄마 아빠 결혼할 때 소리는 어디 있었니?” 다시 묻자 소리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응, 규민이랑 집에서 놀구 있었어.” 생겨나지도 않았을 녀석이 집에서 동생이랑 놀고 있었다니, 그러나 그 얘기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뜻 깊은 얘기였습니다. 소리의 대답이 전혀 엉뚱한 얘기만이 아님을 두고두고 그윽하게 깨닫습니다. 하늘의 배려는 우리들의 만남 먼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 1991년 2021. 12. 16.
이야기에 대한 목마름 옆집인 상호형네서 라디오를 만들었단 얘길 듣곤 구경하러 갔었다. 별난 모양의 진공관들이 늘어서 있는, 집에서 꾸민 라디오였다. 거기서 소리가 나는 게 신기했다. 진공관 속 어디엔가 난장이만한 이들이 숨어 노래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린 내게 늘어선 진공관들은 그만한 사람들을 숨기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다. 동네에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놓인 집은 가게집이었다. 물건을 살 때마다 표를 나누어 주어 그 표 몇 장을 가져오는 아이들이게만 텔레비전을 보여줬다. 표를 구한 아이들은 신이나 으스대며 가게로 들어갔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괜스레 가게를 맴돌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재미난 소리에 화가 오르면 안테나가 매달린 쇠기둥을 획 돌려놓곤 내빼곤 했다. 그럴수록 이야기가 있는 할머니 무릎이, 선생님의 자상함이 더욱 그.. 2021. 12. 15.
시들어 간다 시들 시들 시들어 간다 나무 숟가락, 밥그릇, 흙 접시 유리 찻잔을 악기 삼아 흐르는 물결과 물결의 선율에 기대어 평화를 연주하는 내 두 손으로 시들 시들 시들어 간다 평화의 물결이 스민 주름진 손등으로 피부결마다 바람의 숨결 같은 시들 시들 시가 들어간다 잔주름 결결이 황토빛 살결은 햇살 아래 시가 되어 황금 들녘 넘실넘실 2021. 12. 13.
<그리워서, 괜히>를 읽으면서_ 두고 온 그리운 모든 것들 저녁 늦게 책 한 권이 배달되었다. 포장을 열어 보니, 에서 출판된, 최창남 작가의 유년 회고록 다. 책을 읽기 전에, 표지의 책 제목의 생김새가 범상(凡常)치 않아, 표지에 잠시 머문다. 표지 날개를 펼쳐보니, 임종수 화백의 캘리그라피다. 글이라기보다는 한 컷 그림이다 이 책은 저자 최창남 작가가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 태어나서부터 초등학교 2학년 시절까지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살아온 시대가 저자와 부분적으로 겹치는 이들은 최창남의 유년 회고록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만이 아닌, 독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작가가 대신해서 말해 주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우리 세대의 우리의 자서전 격인 사회적 전기를 읽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 2021. 12. 10.
나눔이 꽃 사과 한 알 사이좋게 모두 다 함께 나누고픈 한마음 선한 마음밭에 씨알처럼 품고서 반으로 나누면 푸른 싹이 트고 네 쪽으로 나누면 네잎꽃이 피고 여덟 쪽으로 나누면 여덟 꽃잎 코스모스 눈물나는 양파도 나눔이 꽃 그대로 접시에 담으면 밥상 가득 환하게 하얀 꽃잎들이 사이좋게 피었습니다 2021.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