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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같은 우리가 아랫작실 광철씨 네서 속회예배를 드리기로 한 날, 비가 내렸습니다. 봄비 치곤 차기도 하고 빗발도 굵은 비가 스산한 바람과 함께 진종일을 내렸습니다. 어둠이 내리도록 비는 그치질 않았습니다. 작실마을 교우들이 김천복 할머니네로 모였습니다. 마을 첫째집인 할머니 네서 모여 광철씨 네로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던 중 다들 모여 길을 나섰는데 보니 아무고 손전등을 가져온 이가 없었습니다. 비 내리는 밤이라 한치 앞이 어둠이고 저만치 올려다 보이는 광철 씨네 희미한 불빛까진 온통 어둠에 가렸는데 불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난감해 하고 있을 때 얼른 김천복 할머니가 집으로 들어가더니 양초에 불을 붙여 왔습니다. 촛불을 켜들고 길을 나섭니다. 한걸음씩 촛불로 어둠을 지우며 좁다란 밭둑을 걸어갑.. 2021. 12. 21.
벽돌 네 나 벽돌 일곱 나를 머리에 이고서 계단을 오르는 아지매가 떨군 눈길을 따라서 벽돌 스무 나도 넘게 등짐을 지고서 계단을 오르는 아재의 굽은 등허리를 따라서 빈 몸으로 계단을 오르는 김에 속으로 벽돌 네 나쯤이야 하면서 갓난아기를 안듯이 품에 안고서 오르다가 열 계단쯤 올라서면서 그만 어디든 내려놓고 싶어졌다 애초에 세 나만 챙길 것을 후회하면서 묵직해진 다리로부터 차오르는 뼈아픔이 벽돌로 쌓아올려야 뚫리는 하루치의 하늘과 벽돌이 된 몸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먼지 같은 숨이 벽돌 같은 세상을 맨몸으로 부딪히고서 맞는 밤하늘은 허전해 하나 하나의 벽돌 모두가 나로 쌓였다가 눈물로 허물어지는 외로운 겨울밤을 보내며 2021. 12. 19.
성탄장식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지난 추수감사절 때 작은 종이에 크레용으로 써서 제단에 붙였던 글을 성탄 트리를 장식한 지난주까지 계속 붙여놨었다. 아이들과 같이 성탄장식을 끝내곤 트리에 불을 넣은 후 뒤로 물러나 바라보는데 그 글귀가 새롭게 들어왔다. 추수감사절 때나 맞았지 싶었던 그 글귀가 반짝이는 장식과 어울려 성탄의 의미로도 귀하게 여겨졌다. 후배 덕균의 수고로 여기 저기 별이 뜨고, 동방박사가 지나고,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란 커다랗고 멋있는 글자가 제단 가득하지만, 언젠가 성탄엔 게으름을 통해 만난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를 성탄장식으로 써 봐야지, 게으름을 변명하며 마음에 담아둔다. - 1989년 2021. 12. 19.
작고 하찮을수록 소중한 이야기들 장에 다녀오는 길, 단강으로 들어오는 버스 안에서 듣게 된 이웃마을 한 아주머니의 얘기를 이필로 속장님이 했습니다. 기름 한 종지 더 얻자고 개치(부론)까지 갔다가 결국은 한 종지만 얻게 됐다는 얘기에 우린 한참 웃었습니다. 다시 이어진 얘기에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습니다. 아주머니 옆 자리에서 아주머니 얘길 듣던 한 중년 남자가 그 얘길 듣더니만 “아 그거 참 재미난 얘기네요. 아주머니, 그 얘기 차근차근 다시 한 번 해 보세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얘길 글로 쓰면 좋은 글감 될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웃음이 다시 터졌던 건 그 중년 남자 얘길 하던 속장님이 “우리 목사님 같은 분이 또 있드라구요, 글쎄.” 하고 얘길 마쳤기 때문이었습니다. 헛간에 걸어놓은 못쓰게 된 살림살이들처럼 아무짝에도 .. 2021. 12. 19.
왜였을까, 뺀 이를 지붕 위에 던지게 했던 건 이가 흔들릴 때마다 두려웠다. 빨리 새 이가 나야 어른이 되는 거라 했지만, 이가 흔들릴 때마다 이 빼는 것에 대한 공포가 먼저 앞섰다. 흔들 만큼 흔들어서 쉬 빠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설프게 흔들리는 이에 실을 걸어 사투 벌이듯 애를 써야 할 때도 없지 않았다. 이를 빼면 열심히 지붕 위에 던졌다. 대부분이 기와지붕이었던 어린 시절, 던진 이는 또르륵 소리를 내며 잘도 굴러 떨어졌다. 그때마다 떨어진 이를 주워 또 다시, 용케 안 떨어질 때까지 지붕 위로 던져 올렸다. 지붕 위에 헌 이를 올려야 새 이가 나온다고 배웠는데, 지붕 위에 뺀 이를 올리지 못하면 새 이가 안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를 뺀 아이를 보면 “앞니 빠진 증강세, 우물가에 가지 말라 붕어새끼 놀랜다!” 하고 놀리기도 했다. 왜 어른.. 2021. 12. 18.
농부의 비장한 다짐 작실 반장 일을 보고 있는 병철 씨가 얼마 전 딸을 낳았습니다. 첫아들 규성이에 이어 둘째로는 딸을 낳았습니다. 아기 낳기 전날까지 하루 종일 고추모를 같이 심었던 부인이 다음날 새벽녘 배가 아프다 하여 차를 불러 원주 시내로 나갔는데, 나가자마자 별 어려움 없이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엄마 따라 새로 난 아기도 건강했습니다. 병원을 다녀오는 병철 씨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둘째 아기를 건강하게 잘 낳은 것도 그렇고 첫째가 아들이라 은근히 둘째로는 딸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낭랑한 아기울음 오랜만에 동네에 퍼지게 되었고 모처럼 흰 기저귀 널리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끝정자로 내려가다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보니 개울둑 저만치 누가 누워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병철 씨였습니다. 못자리를 한 논을 .. 2021. 12. 17.
하늘의 배려 “오늘이 엄마 아빠가 결혼한 날이다.” 결혼한 지 4년째를 맞는 날, 저녁을 먹으며 아내가 소리에게 말했습니다. 4년의 세월을 두고 식구가 둘 는 게 신기합니다. “엄마 아빠 결혼할 때 소리는 어디 있었니?” 다시 묻자 소리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응, 규민이랑 집에서 놀구 있었어.” 생겨나지도 않았을 녀석이 집에서 동생이랑 놀고 있었다니, 그러나 그 얘기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뜻 깊은 얘기였습니다. 소리의 대답이 전혀 엉뚱한 얘기만이 아님을 두고두고 그윽하게 깨닫습니다. 하늘의 배려는 우리들의 만남 먼 이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 1991년 2021. 12. 16.
이야기에 대한 목마름 옆집인 상호형네서 라디오를 만들었단 얘길 듣곤 구경하러 갔었다. 별난 모양의 진공관들이 늘어서 있는, 집에서 꾸민 라디오였다. 거기서 소리가 나는 게 신기했다. 진공관 속 어디엔가 난장이만한 이들이 숨어 노래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린 내게 늘어선 진공관들은 그만한 사람들을 숨기고도 남을 것처럼 보였다. 동네에 처음으로 텔레비전이 놓인 집은 가게집이었다. 물건을 살 때마다 표를 나누어 주어 그 표 몇 장을 가져오는 아이들이게만 텔레비전을 보여줬다. 표를 구한 아이들은 신이나 으스대며 가게로 들어갔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괜스레 가게를 맴돌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재미난 소리에 화가 오르면 안테나가 매달린 쇠기둥을 획 돌려놓곤 내빼곤 했다. 그럴수록 이야기가 있는 할머니 무릎이, 선생님의 자상함이 더욱 그.. 2021. 12. 15.
시들어 간다 시들 시들 시들어 간다 나무 숟가락, 밥그릇, 흙 접시 유리 찻잔을 악기 삼아 흐르는 물결과 물결의 선율에 기대어 평화를 연주하는 내 두 손으로 시들 시들 시들어 간다 평화의 물결이 스민 주름진 손등으로 피부결마다 바람의 숨결 같은 시들 시들 시가 들어간다 잔주름 결결이 황토빛 살결은 햇살 아래 시가 되어 황금 들녘 넘실넘실 2021.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