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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 그 여성의 힘 여성 신학자, 목회자들의 성경 읽기는 무엇이 다를까? 그것은 단지 젠더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그 차이에 담긴 시선, 사회적 경험, 해석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같은 성서 텍스트라도 그 서 있는 자리, 사회적 존재로서 겪게 되는 일상은 다른 관점, 전망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책의 제목을 《새 시대 새 설교》라고 붙인 까닭 또한 그런 의미를 담는다. 오랜 세월 동안 남성 위주의 강단이 쏟아내는 설교, 메시지가 하나의 교리, 교조 내지는 정식처럼 여겨지는 현실은 여성적 관점의 배제, 여성이라는 젠더가 포괄하는 기존질서로부터 변두리화된 존재의 육성을 지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억압된 목소리, 경험, 관점의 복구를 열망하게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복구의 지점에 서 있다. 물론 이로.. 2024. 11. 19.
설교 표절은 스스로 함정을 파는 행위 표절 이후의 문제를 어떻게 감당해 나갈 것인가 설교표절이 미치는 문제에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바는 개신교 정신의 근간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점이다. 개신교의 전통은 '강단의 중심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씀이 예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중심을 어떻게 세워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는 중요한 동력인데, 그 동력을 교회가 공동체 안에서 길러주고 쏟아내고 배우고 얻어내는 과정과 본질에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가? 말씀의 기본이 무너지는 것을 뜻하지 않겠는가? 표절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는 설교의 여러 가지 내용들을 그 .. 2024. 11. 13.
여성 설교의 현주소와 미래 전망 세 명의 여성 설교자가 한 설교를 일별하면서 드러나는 공통된 특징은 이 시대의 부조리에 대한 통렬한 진단이다. 각기 실천신학자, 조직신학자, 성서신학자인 강호숙, 김정숙, 박유미 세 분 박사가 보는 이 세상, 특히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여전히 남성가부장체제 아래 시대의 병통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었고 그 신앙이 편벽되며, 특히 여성의 위상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지극히 결핍된 공간이다. 공공연히 여성 침묵을 강요하면서 목사 등 특정한 교회 내 직분에 대한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그 대표적 징후라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이들의 설교는 그것이 잘못되었고 하나님의 뜻이 전혀 아니며, 예수의 구원 사역에 역행하는 반시대적인 인습이라고 정직하게 고발하며 절규하듯 외친다.  강호숙 박사의 설교는 실천신학자답게 신.. 2024. 10. 31.
말로 꽂는 비수(匕首)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잠언 12:18) 말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인가? 그렇다면 어떤 의사도 다 소통되면 말의 역할은 다 한 것인가? 악한 의사를 소통해도 말은 중립적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 성서는 말의 역할을 의사소통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말은 언제나 생명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하여,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상처를 내는가, 아니면 앓던 병도 낫게 하는 능력인가로 판별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들로 인간의 생명에 상처를 내고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뿐인가? 잘 나아가던 상처도 덧나게 함으로써 병통을 더욱 도지게 하고 만다. 그래서 신앙은 이 말의 훈련을 제일 중요한.. 2024. 10. 30.
프레임에 갇혀 허수아비가 된 사람들 사람은 저마다 세상의 중심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파악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나와 타자들의 거리가 적정선에서 유지될 때는 편안하지만, 그 거리의 규칙이 무너질 때는 불편해 한다.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이 실은 멀리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서운함에 사로잡히고, 멀다고 생각한 이가 암암리에 세워둔 심리적 경계를 넘어 성큼 다가올 때 불쾌감을 느낀다. 사람은 단독자로 태어났지만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함께 그러나 홀로’ 존재인 인간은 그 묘한 균형을 찾지 못해 흔들리고 시시때때로 감정의 부침을 겪는다. 상대방이 나의 기대대로 움직여 줄 때는 평화롭지만 자율적으로 처신할 때 불화가 빚어진다.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이다. 그 금은 .. 2024. 10. 29.
썩은 감자 하나가 섬 감자를 썩힌다 감자와 고구마는 좋은 양식도 되고 맛있는 간식도 된다. 솥단 지에 푹 삶아 식구들과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것은 다른 음식을 통해서는 쉽게 누리기 힘든 멋과 정겨 움을 준다. 감자와 고구마는 비슷한 면이 있다. 모든 씨가 그러하듯 적 은 것을 심어 많은 것을 거둔다. 씨감자 한 조각을 심으면 둥글 둥글 편하게 생긴 감자 여러 개를 거둘 수 있고, 고구마 순 하 나를 심으면 줄줄이 딸려 나오는 고구마를 거두게 되니 괜히 수지맞는 기분이 들어 농사짓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감자와 고구마는 보관을 잘못하면 금방 얼거나 썩고 만다. 물기가 있거나 습기가 많은 곳에 보관하면 썩기가 쉽고, 추운 곳에 보관하면 얼기도 잘 한다.  감자와 고구마를 보관해보면 알지만 한 개가 썩으면 나머지 도 금방 썩.. 2024. 10. 29.
씨알을 품고 품은 꽃 씨알에서 움튼 어린 싹이 하품하는 아침 이내 푸른 숨결로 어루만지는 굳은살 박힌 옹이마다 꽃이 피네 꽃이 피네 씨알에서 태어났지만 씨알을 저버린 적 없는 지고지순한  한마음 자리가  해처럼 떠올라  하루를 밝히고 씨알을 품고 품으며 한 평생 부르는 노래가 꽃으로 피어나듯 안으로부터 피어나는 혁명 자연의 순리를 생각하다가 잠이 들어도 가지마다 잎을 떨구는 이 가을밤에도  그친 적 없는 씨알의 노래를 성실한 바람이 듣는다 맑은 별 하나가 듣는다 한바탕 꽃이었다가  진 자리마다 열매를 맺고 떨군 맨 끝자리에는 언제나 맨 처음 씨알이 무수히 있다 2024. 10. 29.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 했다. 사로잡힘은 주체적으로 조장할 수도 없고 물리칠 수도 없다.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사로잡힘은 마치 교통사고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느닷없고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수에게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본다.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일심으로 달리긴 했다. 돌아보면 갈짓자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가섰다 싶은 순간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은 순간 다가오는 길,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진 그 길이 참 힘겹다. 한국교회가 위기다.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 해도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시적인 위기라면 좋겠는데, 그게.. 2024. 10. 23.
예수는 밀실에 가둬 두고 광장으로 나서는 목사와 교인들 10월 27일, 그것도 종교개혁주일에 “악법을 저지하고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 2백만 명이 모인단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한국교회는 예수가 길거리에 다니면서 세상을 둘러보는 것을 반가워할까? 또는 교회에 와서 목사들의 설교 듣기를 원하기는 할까? 예수께서 교회에 들어오시면, 거 누구요, 당장에 나가시오, 하지는 않을까? 왜 그런가 하면,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아니 이런 강도들의 소굴을 봤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비지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타락시키고 말았구나, 하시면서 크게 역정을 내시지 않겠는가? 도대체가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많은 경우 예수님을.. 2024.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