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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망초대

by 한종호 2020. 10. 5.

한희철의 얘기마을(104)


망초대



지집사가 또 울먹이며 기도를 했다. 며칠인지 모르고 장마가 지고 또 빗속 주일을 맞아 예배드릴 때, 지집사 기도는 눈물이 반이었고 반은 탄식이었다.


“하나님 모든 게 절단 나고 말았습니다. 무 당근은 썩어가고, 밭의 깨는 짓물러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불어난 물에 강가 밭이 잠기기도 했고, 그칠 줄 모르는 비, 기껏 자라 팔 때가 된 당근이 뿌리부터 썩기 시작해 팔 길이 막막해진 것이다.


제법 많은 당근 밭을 없는 선금 주고 미리 사들인 부론의 오빠가 몸져누운 데다가, 송아지 날 때가 지났는데도 아무 기미가 없어 알아보니 새끼를 가질 수 없는 소라는 우울한 판정을 받은 것이 곡식 절단 난 것과 맞물려 지집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참을 더 탄식하던 기도는 올해는 그랬지만 내년엔 잘되게 해달라는 기원으로 끝났다.


보름 이상 샘골로 일 나가 있던 광철 씨가 오랜만에 돌아와 자리를 같이 했다. 빗속, 그래도 무슨 일을 부탁 받았는지 빈 지게를 교회 마당에 세워둔 채 젖은 몸으로 앞자리에 앉았다. 광철 씨는 언제나 지게를 벗을 수 있는 건지. 남의 짐 아닌 자기 짐을 질 수 있는 건지.


아픈 다리를 한쪽으로 뻗고 앉은 기봉 씨가 고개를 숙이고 풍금 앞에 앉았다. 자꾸 눈이 그리로 갔다. 부인이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긴 지 두 주일이 넘는다. 슬픈 사람이 슬픈 삶을 살다 슬픈 사람끼리 우연처럼 만나 슬픔을 나누다가 또 훌쩍 떠나고 말았다. 요즘 기봉 씨는 부론이며 원주며 멀리 여주까지 부인 찾는 일에 농사는 뒷전이다. 익숙한 모습 고개 속인 모습이 예전 같지가 않다.


비어 있을 때도 많은 제단 화분에 흰 망초대가 가득하다. 길가 풀섶 어디나 흔하디흔한 꽃, 땅이 묵거나 집이 묵으면 묵은 곳 표시라도 해 두려는 듯 제일 먼저 자라 오르는 망초대.


경림이와 은희는 무슨 맘으로 저 꽃을 꺾어 바쳤을까? 싫도록 내리는 빗속, 제단에 놓인 망초대와 같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예배를 드렸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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