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줄 모르는 집난이 같이

  • 백석의 '고방' 읽어보니, 시가 어렵네요. 비유해서 그런지!
    예수님의 비유도 어려웠는데...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31 09:31
  • 덕분에 저도 '고방'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맛이 깊고 향기롭네요.

    고맙습니다.

    한희철 2019.11.01 09:0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2)

 

 갈 줄 모르는 집난이 같이

 

설교를 듣다가 시를 인용하는 대목을 만나면 마음이 즐겁다. 인용하는 시가 말씀과 어울릴 때 말씀은 깊이와 향기를 더하게 된다.


송대선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백석의 시 한 구절을 들었다. 몰랐던 구절이었는데, 주님을 찾았을 때의 즐거움과 평온함을 말하며 인용한 구절이었다.

 

 

 

 

‘집난이’는 ‘시집간 딸’을 의미 했다. 시집간 딸이 친정집을 찾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꿈에 그리던 엄마를 만날 수가 있다. 엄마는 어떻게 엄마 노릇을 했을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이 많다. 보고 싶던 가족들과도 어울릴 수가 있다.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 아무 일을 안 해도 된다.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 모든 자유를 누린다. 고단했고 무거웠던 시간을 쿨쿨 게으른 잠으로 달래기도 한다.

 

그렇듯 친정을 찾은 집난이는 돌아갈 줄을 모른다. 아버지 집을 찾을 때마다 우리 마음 그랬으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너무 좋아 돌아갈 줄을 모르는, 그만한 즐거움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posted by

강고한 성벽의 균열과 고요한 호수의 파문

강고한 성벽의 균열과 고요한 호수의 파문

 

『일그러진 영웅 vs 만들어진 영웅』은 한신대와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현재 LA 향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곽건용 목사가 쓴 사울·다윗 평전이다. 저자는 이미 다윗과 사울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책을 더한 이유가 이 주제에 대한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면서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는 우리말 책을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다윗 편향적인 사무엘서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간 홀대받고 왜곡되었던 사울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성경 최고의 영웅인 다윗의 어두운 뒷모습에도 주목하게 되길 기대한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내려놓기 힘들 정도로 흥미진진한 이 책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성실한 학자인 저자의 역량을 잘 보여주며 대중성과 학문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다는 저자의 소망을 이루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사무엘서가 일방적으로 다윗 편을 드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사무엘이나 야훼의 입을 통해 나오는 판단일 뿐 설화자(narrator) 자신은 가급적 두 사람의 언행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평가가 배제된’ 사무엘서 내러티브와 자세히 설명이 생략된 채 남겨진 개별 내러티브의 구멍/갭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신명기사가(史家)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는 공식적이고 신학적인 ‘평가’의 심층에 감추어진 사울과 다윗의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본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주로 공시적-문학비평 방법론을 통해 설화자가 어떻게 사울이 버림받고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는지 세밀하게 분석하며, 사울과 다윗의 본모습을 찾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사무엘이나 야훼가 내린 ‘공식적인’ 신학적 판단을 뒤집거나 비판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결국 이 책은 설화자의 사울-다윗 평전인 사무엘서를 저자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해, 새롭게 복원해 낸 사울과 다윗의 모습을 담은 ‘평전에 대한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으며, 사사시대에서 군주시대로 이행하는 전환기의 첫 왕이었던 그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를 왕으로 세운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종교적 권위를 독점한 채 사울과 나누려 하지 않았으며, 사사시대의 전통질서를 대표했던 사무엘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울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의 승리로 얻는 백성의 지지뿐이었다. 사울은 초기에 이 일에 어느 정도 성공함으로서 권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다윗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다윗이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으며, 처음부터 강력한 권력의지를 보였던 다윗은 사울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전쟁에 능했다. 점차 주변 사람과 백성들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딸까지 다윗에게로 기울면서, 사울에게는 왕위를 찬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한 공황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계속 실패했고, 결국 사람들과 야훼의 버림을 받은 채 전쟁터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다윗과 달리 철저한 야훼주의자이자 강력한 권력의지의 소유자였던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해 전쟁영웅으로 등극했을 뿐 아니라 신학/이데올로기적으로도 사울을 확실히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 사울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쫓기게 되지만 처절한 생존본능으로 숱한 위기를 극복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구축한 끝에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고려로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려주었으며, 이는 그를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다윗을 편애한 나머지 어떤 죄를 저질러도 묵인해 준 야훼 역시 이러한 영웅 만들기에 일조했다.

 

왕으로 등극한 다윗은 새로 정복한 예루살렘에 궤를 안치할 성전을 지어 전통가치와 혁신가치의 융합을 꾀했으며, 이스라엘에 왕조신학을 도입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그러나 정치적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다윗의 성품과 행동은 점점 ‘모든 이방나라’의 왕처럼 변해갔으며, 이는 밧세바 사건 이후 강간과 살인과 반역의 피바람을 불러들이며 그의 내리막길을 재촉했다. 노년을 맞은 다윗은 나단의 계책에 속아 솔로몬을 후계자로 옹립했고, 정치적 고려로 제거하지 못했던 요압과 시므이를 죽일 것을 솔로몬에게 당부함으로서 마지막까지 어두운 내면을 드러냈다.

 

사울은 사사시대에서 군주시대로 이행하는 격동기에 등장해 자신의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다윗의 존재 때문에 삶 뿐 아니라 후대에 전해진 기억마저 뒤틀려버린 ‘일그러진 영웅’이었으며, 다윗은 사울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후세에 영웅으로 기억되는 데도 성공했지만 실제로는 시대적·신학적 필요에 의해 사실 이상으로 부풀려진 ‘만들어진 영웅’이었다. 저자는 ‘일그러진 영웅’이 일그러진 데는 ‘만들어진 영웅’의 역할이 컸으며, ‘만들어진 영웅’은 ‘일그러진 영웅’ 때문에 우리가 아는 대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영웅’은 살아남아 메시아의 조상이 됐지만, ‘일그러진 영웅’은 만들어진 영웅과의 대결에서 패한 채 잊혀져 갔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일그러진 영웅이 만들어진 영웅과의 대결에서 패한 후 잊히는 역사가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하는지 반문한다.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성서전승 속에서 ‘해방의 동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해석전통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심의 해석학’을 주창한다. 영문학자 임철규 교수는 위대한 문학이란 망각 속에 묻혀 있는 희생자들을 역사 속으로 불러내 다시 기억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장례를 지내주는 애도의 행위라고 말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메시아는 억압받은 자들의 전통을 발굴해 기억하고 애도하는 현재의 자리인 ‘지금시간’에 도래하며, 역사가의 과업은 회상과 애도를 통해 과거를 회복하는 힘과 미래를 유토피아적으로 여는 힘이 함께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영웅’인 다윗의 어두운 뒷모습을 살피고 ‘일그러진 영웅’으로 낙인찍혀 잊혀져 간 사울을 복권하려는 저자의 시도야말로 의심-기억-애도-혁명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적인 해방을 꿈꾸는 실천의 몸짓이 아닐까? 이 책이 압살롬과 아도니아가 실패했던 다윗에 대한 ‘반란’과 사울의 ‘복권’에 완전히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다윗이라는 강고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사울이라는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깨우고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길 기대해 본다.

 

정한욱/우리 안과 원장이며 독서 블러그 ‘서음인(書淫人)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posted by

줄탁동시(啐啄同時)와 곤달걀

  • 저는 곤달걀을 먹은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글을 읽어보니 듣기만 하고 응답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아예 듣지 않으려고 했던 생각이 나네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30 10:05
    • 아예 듣지 않으려고,
      정직한 인정은 또 한의 디딤돌이 되는 법이지요.

      한희철 2019.10.31 07:10 DEL
  • 필리핀 보양식이었던거 같습니다. 봉사갔을때 저도하나 먹어보라고;;

    지은 2019.10.30 12:18
    • 저도 보았습니다.
      동행한 장로님은 조금도 망설임없이 한입에 드시더군요.

      한희철 2019.10.31 07:11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1)

 

줄탁동시(啐啄同時)와 곤달걀

 

‘줄탁동시’라는 말은 줄(啐)과 탁(啄)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가 때가 되면 알 밖으로 나오기 위해 부리로 껍데기 안쪽을 쪼는데 이를 ‘줄’(啐)이라 하며, 어미 닭이 병아리 소리를 듣고 밖에서 알을 쪼아 새끼가 알을 깨는 행위를 도와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동시에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제지간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곤달걀’이 있다. 계란이 병아리로 부화되기 전에 알속에서 곯아버린 것을 말한다. 병아리 모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결국은 알속에서 죽어 버린 계란을 말한다. 가난한 유년시절, 징그럽다는 생각도 없이 곤달걀에 남아 있는 얼마 되지도 않는 살을 맛있게 발라먹던 기억이 내게도 있다. 

 

오경웅의 <시편사색>을 옮기고 해설한 송대선 목사를 청하여 말씀을 듣는 ‘말씀축제’의 시간, 절반쯤을 지날 무렵 광고 시간을 통해 교우들에게 줄탁동시와 곤달걀 이야기를 했다. 주님께서 강사를 통해 열심히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니 우리가 응답을 하자고, 듣기만 하고 응답하지 못하면 우리 믿음은 곤달걀과 다를 것이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곤달걀을 설명하며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하면 곤달걀을 몰랐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지금 우리의 신앙이 곤달걀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은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인지. 

posted by

유용성이 없는 아름다움

  • 이 시대 덜떨어진 몽상가가 있을까요 ? 있겠지요 어디엔가!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29 09:43
  • 어딘가는 있겠지요.
    그래서 세상 아름답고요.

    한희철 2019.10.30 07:24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0)

 

 유용성이 없는 아름다움

 

<최초의 음악가는 아마 남달리 몽상적인 사냥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활을 쏠 때 실수로 손가락으로 활줄을 건드렸다가, 그것에서 나는 신기한 울림에 자못 놀랐을 테지요. 아마도 그날 저녁, 가죽을 씌운 거북 등짝지에 팽팽하게 활줄을 연결해서 퉁겨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현이 선사하는 조화로운 음을 발견한 뒤에는 현에 음색을 선사하는 공명도 발견했겠지요.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은 부족 구성원들은 처음에는 그를 보고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덜떨어진 몽상가로 치부했을 겁니다. “저런 막을 씌운 거북 등짝지로 어떻게 영양을 사냥해?” 하지만 잠시 뒤에 그들은 입을 다물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울림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악기에서 퍼져 나오는 울림과 함께 그 저녁, 그들은 처음으로 유용한 사냥을 넘어서 유용성이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공격하는 동물이 포효하는 소리나 위험에 처한 생명의 두려움에 찬 외침이 아닌, ‘노래’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뇌에서 1억 개의 신경 세포를 지닌 청각 피질이 여느 때처럼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좋은 것이었습니다. 도망칠 이유가 없는 소리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울림에 움직임을 선사했습니다. 도망치거나 공격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들은 것을 ‘춤’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활을 쏘다 실수로 건드린 활줄, 신기한 울림, 거북 등딱지, 조화로운 음, 공명, 덜떨어진 몽상가, 거북 등딱지와 사냥, 유용성이 없는 아름다움, 울림에 선사한 움직임, 춤…, 이보다 맑고 깊은 묵상이 어디 흔할까 싶다. 더딤을 아낌이라 여기며 읽고 있는 책 <바이올린과 순례자>에서 만난 최초의 음악가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공명한다.


음악과 노래와 악기와 춤은 얼마든지 그렇게 시작이 되었겠다 싶다. 그 순간 함께 꽃 피었던 것 중에는 ‘詩’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은 까마득한 원시의 시간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를 가만있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그렇게 시작이 될 것이다. 덜떨어진 몽상가가 만들어내는 유용성이 없는 아름다움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유용성이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의 아름다움!

 

 

posted by

생(生)이라는 바닷가에서도

  •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싸워봐야 모래 위에 발자국이네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28 09:22
  •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겠지요.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한희철 2019.10.28 22:14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8)

 

 생(生)이라는 바닷가에서도

 

부산 해운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층 건물들이었다. 우후죽순이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바닷가 주변에 늘어선 고층 빌딩들은 어깨를 맞대고 서 있었다. 그런 모습은 인간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무지로 다가왔다. 자연의 위력을 너무 쉽게 무시하고 있다 여겨졌다. 바다에서 저처럼 가까운 곳에 저처럼 높고 큰 건물을 지어도 되는 걸까 싶었다. 사람의 예측을 뛰어넘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의 능력과 생각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깨닫게 될 때, 그 때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일까 두렵기까지 했다.

 

지방 목회자 세미나 둘째 날 아침, 아내와 함께 해변을 산책했다. 휴가철이 한참 지나서인지 해변은 한산했다. 맨발로 모래 위를 걷는 사람, 운동 삼아 달리기를 하는 사람, 서로의 손을 잡고 장난을 치는 연인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해운대의 모래는 해마다 강원도 하천에서 사다가 붓는다고 한다. 갈수록 모래가 줄어들기 때문이라는데, 그 또한 고층 빌딩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의 흐름이 달라져서 모래가 쌓이는 대신 쓸려나간다는 것이었다.  


 

산책을 하던 중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았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사람들의 발자국과 새들의 발자국이 섞여 있었다. 신발 자국도 있고, 맨발 자국도 있고, 한 마리인지 여러 마리인지 새들의 발자국도 찍혀 있었다.

 

 

 

 

누가 먼저 발자국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의 발자국과 새들의 발자국이 동시에 찍힐 리는 없기 때문이다. 일정한 차이를 두고 같은 자리를 지나간 흔적이 같은 자리에 남았을 것이었다.


모래 위에 찍힌 서로 다른 발자국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먼저 발자국을 남겼다고 그가 그 땅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발자국을 찍었다고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바다 물결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모든 발자국은 지워질 것이다. 어느 누구의 발자국이 따로 남지 않을 것이다.
 
어찌 그것이 바닷가 모래뿐이겠는가.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아 어느 날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홀연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이야 내 것과 네 것을 구분하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얼굴을 붉히기도 하지만,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소용없어지고 말 것이다. 해운대 해변 모래 위에 찍힌 저 서로 다른 발자국들처럼, 생(生)이라는 바닷가에서도 말이다.

posted by

더 이상 담배 사오지 마세요, 목사님

  • 와우! 담임목사실을 어떻게 흡연실로 만들 수 있으신거죠?
    이런 분도 계시는 군요. 세상에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26 10:19
  • 그러게요,
    쉽지 않은 결정이지요.
    사랑 아니면 불가능한!

    한희철 2019.10.28 07:16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7)

 

 더 이상 담배 사오지 마세요, 목사님

 

지방 교역자 세미나에 참석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새로 부임을 했으니 이런 기회에 지방 목회자들과 사귈 겸 동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장로님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부산에서 2박3일 일정으로 열렸는데, 나름 진지한 모임이었다.


오가는 길이 멀기는 했지만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하여 우리나라를 위해 피 흘린 세계 젊은이들의 희생을 돌아보는 등 유익한 시간도 많았다. 17살 소년을 비롯해 대부분이 22~23살, 젊다기보다는 어린 나이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땅에서 전사를 했다는 사실이 숙연함으로 다가왔다. 저녁 식사 이후에 이어진 세미나 시간은 매우 진지하게 진행이 되었다. 강사들의 태도도 그랬고, 임하는 지방 교역자들의 태도도 마찬가지여서 밤이 깊어서야 끝나고는 했다.

 

둘째 날 밤, 뜻밖의 만남을 가졌다. 부산에서 <기쁨의 집>을 운영하는 김현호 집사님께 안부 문자를 남겼더니 세미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숙소로 찾아왔다. 제법 비가 오는 밤이었다. 부산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김 목사님과 동행을 하여 인사를 나눴다. 송정 해수욕장 앞에 있는 찻집을 찾았는데, ‘좋은 날 풍경’ 박보영 집사님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하지 못한 만남, 그만큼 반가움이 컸다.

 

 

 

 

밤이 늦도록 김 목사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용조 목사님과 많은 일을 같이 할 만큼 신망이 두터웠던 목사님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 색깔이 분명한 목회를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묻어둔 채 잊고 있었던 무엇인가를 김현호 집사님과 박보영 집사님을 통해서 다시 찾게 되었노라 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신뢰, 그렇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런 따뜻한 마음을 의미했는데,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며 술친구를 모두 끊은 장로님께 술친구들을 찾아갈 것을 권했고, 석 달을 술집에서 기다린 끝에 마침내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일주일에 한 번 술집에서 그들을 만나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목사님도 그들과 같이 어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그런 시간을 이어갔단다.


어느 날 그들을 만난 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고 한다. 육교 위를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다리가 휘청거리더라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취기를 느낀 날이었다고 한다. 목사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마침내 그들과 같아졌구나, 가슴이 그렇게 뜨거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그날 만난 김 목사님은 더없이 은혜로운 목사님이었다. 얼굴도 그렇고 말투도 그랬다. 몇 몇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는데,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대부분은 선교사를 지망했다고 한다.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이었다. 그런 목사님이 믿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그들의 자리로 내려간 것이었다.

 

지금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 선교사로 지내고 있고, 목사님의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는 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는 일이라고 했다. 외국 오지에서 사역하는 이들을 방문할 때마다 선교사와 그곳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위하여 정성껏 밥을 지어 식사를 대접한다고 한다. 그런 만남을 통해 누리는 위로가 너무나 커서 많은 선교사들이 목사님의 방문을 간절히 기다린다고 했다.

 

선교지를 방문하고 귀국을 할 때 목사님이 따로 챙기는 물품 중에는 담배도 있었다.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에는 흡연자들을 위해 흡연 구역을 만들어 두었다고 했다. 다른 교우들 눈치 보지 말고 피우라고 담임목사실을 흡연실로 만들어 재떨이까지 가져다 놓았다는 말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목사님은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그곳의 담배를 사다가 선물 삼아 나눠주었는데, 어느 날 그들이 목사님께 말했단다.


“더 이상은 담배 사오지 마세요, 우리 담배 끊기로 했어요.”


그러더니 정말로 담배를 끊었다는 것이다. 목사가 자신들을 위하여 담배를 사오는 것이 그들이 볼 때에도 어울리지 않았던 것 아닐까 싶다. 목사님은 예의 따뜻한 웃음으로 말했다. “맘껏 피라고 목사가 담배를 사다주니까 오히려 담배를 끊더군요.”

 

이야기는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지방 목회자들의 얼굴을 익히고 이야기를 나누는 유익함도 컸지만 이번 여행은 김 목사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주님의 마음으로 목회의 길을 가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지 싶다.

posted by

개똥과 시(詩)

  • 과연 시가 이길까요? 궁금해집니다.
    승리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25 09:40
  • 저도 궁금하답니다.
    시가 이기기를 기대하고 있고요.

    한희철 2019.10.26 08:54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6)

 

 

개똥과 시(詩)

 

정릉교회 예배당 마당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다. 나무와 꽃이 있고, 파고라 아래 벤치도 있어 휴식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벤치 중에는 맞은편으로 북한산이 마주 보이는 곳도 있으니, 잠시 쉬어가기에는 적절한 자리가 된다.


올해에는 조경위원회를 맡은 권사님이 정성으로 꽃과 나무를 가꿔 전에 못 보던 귀한 꽃과 나무를 보는 즐거움이 더해졌다. 파고라 위로 자라는 포도나무와 등나무가 자리를 잡으면 멋진 그늘이 드리워질 것이다.

 

 

 

 

 

그런데 정원을 가꾸다 보니 생각하지 못한 문제도 만나게 된다. 권사님이 심은 좋은 꽃들이 누군가의 손을 타서 없어지는 일들이 일어난다. 예배당 마당에 심은 꽃을 캐가다니, 꽃을 사랑해서 그런다고 하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애완견 문제다. 애완견이 예배당 마당에 오는 것이 무엇 문제가 되겠는가만, 누군가 애완견을 데리고 예배당 마당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똥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가는 일들이 있다. 예배당 정원에 싼 똥은 그대로 두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따로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인지 치우지 않고 그냥 갈 때가 있다. 좋은 마음으로 정원으로 들어서다가 똥을 밟은 이들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들을 막기 위해 형식적으로 CCTV를 달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설마 교회에서 날 어쩌려고, 그런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개똥을 치워주세요”라는 직설적인 표현 대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에 어울리는 마음은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라는 글을 써서 붙여 놓았지만, 개똥은 여전했다.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하기로 했다. 시를 붙여두기로 했다. 작은 액자 속에 시를 써서 파고라 기둥에 하나씩 붙여 두었다. CCTV도 소용없고,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던 터에 시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에는 시로 말을 걸어보기로 한다. 부디 시가 개똥을 이기기를!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生)이라는 바닷가에서도  (2) 2019.10.28
더 이상 담배 사오지 마세요, 목사님  (2) 2019.10.25
개똥과 시(詩)  (2) 2019.10.25
얼마를 감하시든  (4) 2019.10.22
순이 날다  (4) 2019.10.22
왜 빈자리를 보니?  (2) 2019.10.20
posted by

얼마를 감하시든

  • 목.. 말씀 중간에 10~20분 단위로 물만 홀짝여서 목으로 흘러 보내주어도 아주 조금은 나으실 텐데요. 그러면 말씀 듣는 분들이 좀 그러시련가요. 젖은 목이 되도록. 우리 목에 가장 안 좋은 건 마른 목 상태라는. 침샘을 주신 하나님의 뜻까지 헤아려보는 시간입니다. 바이러스가 잘 들러붙는 것도 마른 목이라고 들었습니다.

    눈물.. 내 몸에서 울컥 올라오는 눈물의 샘이 되어 주시는 분도 주님이시고요. 눈물을 치유의 선물로 받는 은혜입니다. 저도 종종.
    그렇게 올라오는 눈물이 먼저 나를 녹여서 치유하고, 뭇 생명들에게도 흘러감을 봅니다.

    환절기에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예수님 안에서.

    신동숙 2019.10.23 14:29
    • 말씀을 나눌 때는 가능하면 물을 안 마시려고 한답니다.
      잠깐 사이 끊기는, 그 흐름이 싫어서요.
      물 마시는 버릇을 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한희철 2019.10.24 19:13 DEL
  • 목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24 09:27
    • 귀한 관심,
      고맙습니다.

      한희철 2019.10.24 19:14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5)

 

 얼마를 감하시든

 

괜히 큰 소리를 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몇 며칠 이야기를 하면 목이 가라앉곤 한다. 영월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이기도 한데다가 하루에 세 번 말씀을 전하니 목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새벽부터는 목이 칼칼한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를 않았다. 손에 마이크를 들고 목소리를 조금 낮춰 말씀을 이어갔다. 덕분에 교우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었다. 기도는 물론 목에 좋다는 차를 준비해 주시고는 했다.

 

 

 

 

 

가라앉은 목 상태는 오랜 전 기억 하나를 소환했다. 화천에서 연합집회를 인도할 때였다. 교파를 초월하여 화천에 있는 모든 교회가 모여 말씀을 나누는 자리였다. 집회를 시작할 때부터 목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대번 티를 내고 말았다. 집회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가면 정말로 말이 안 나왔다. 식사기도 또한 강사가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목에서는 거친 쇳소리가 날 뿐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목이 나을 수만 있다면 똥물이라도 마실 심정이었다. 아는 이비인후과 선생님께 긴급 도움을 청했더니, 쉬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고 했다. 겨우겨우 시간을 이어가던 중에 드디어 마지막 시간에 이르렀다. 그동안 목 상태가 더 악화된 것은 물론이었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교우들에게 말했다. 말씀을 전하는 중에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아 설교가 중단이 되면 마이크를 친구 목사에게 넘기겠다고, 친구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고 있을 터이니 친구가 이어갈 것이라고. 진심이었다. 목소리가 안 나와 말을 할 수가 없으면 달리 방법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는 기도를 드리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드렸다.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에 주님께 구합니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삶에서 며칠을 감하시든, 몇 달을 감하시든, 몇 년을 감하시든 괜찮습니다. 대신 오늘만큼은 말씀을 끝까지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드리는데, 나도 모르게 목이 멨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시다. 그날 끝까지 말씀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눈물에 약하신 주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이상 담배 사오지 마세요, 목사님  (2) 2019.10.25
개똥과 시(詩)  (2) 2019.10.25
얼마를 감하시든  (4) 2019.10.22
순이 날다  (4) 2019.10.22
왜 빈자리를 보니?  (2) 2019.10.20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2) 2019.10.20
posted by

순이 날다

  • 개들은 달려야 합니다..^.^ 뛰어 노는 것이 그들의 자유일 것 같습니다. 사람들도 달리는 것만으로도 자유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22 09:25
    • 달리기,
      걷기,
      자유에 이르는 길이겠다 싶습니다.

      한희철 2019.10.24 19:09 DEL
  • 주일 예배 후 사모님께 순이의 새로운 탈출 사건을듣고,

    혜숙: "어머!! 순이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어
    요.. 너무 똑똑 하네요. 순이가 목사님을 닮
    았나봐요"
    사모님: "어머!! 왜 똑똑한건 다 목사님을 닮았다
    고 하세요~~~~~??"
    ㅎㅎㅎ많이 웃었답니다. 울 사모님 못 말려~~~~

    김혜숙 2019.10.22 23:12
    • 순이 덕분에 웃음꽃이 피었네요.

      한희철 2019.10.24 19:10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4)

 

순이, 날다

 

<오늘 낮예배 시간에 순이가 또 탈출했다!! 생각도 못한 길로. 모든 구멍을 다 막았기에 이제는 끝났다 했더니 오늘 개집 지붕으로 올라가 담을 뛰어 넘어 나왔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이 보고 알려줘서 잡았다. 오후에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없도록 망을 씌우고 집 하나는 가운데 쪽으로 옮겼다!! 빠삐용 순이와 머리싸움 하는 것 같다.>

 

영월 김목사님이 문자를 보냈다. 빠삐용 순이가 또 탈출을 했다는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구멍을 통해 탈출을 감행했던, 순이의 유일한 탈출구를 굵은 철사로 촘촘하게 막아 더는 탈출이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다시 탈출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지 싶은데, 어디로 빠져나간 것일까?

 

 


 

 

이번엔 뻥 뚫린 하늘이었다. 주일날 예배당 마당에서 놀다가 순이가 탈출하는 순간을 목격한 아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빠삐용 순이는 기가 막힌 선택을 했다. 자기 집 위로 올라가 지붕 위에서 울타리를 뛰어 넘었던 것이다. 순이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그런 뒤에 찾아낸 탈출구, 하늘!

 

결국 순이는 다시 갇혔고, 목사님은 개집 위에 망을 씌웠다. 또 하나의 개집은 뛰어도 소용이 없도록 울타리 가운데로 옮겼다. 이야기만 들어도 순이의 깊은 한숨 소리가 전해지는 듯하다.

 

 

 

 

목사님은 빠삐용 순이와 머리싸움을 하는 것 같다고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순이를 응원한다. 자유의 본능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어느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순이가 보여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형, 순이는 아무도 몰래 겨드랑이 아래로 날개를 키울 지도 몰라요. 그리고는 어느 달 밝은 밤, 굳이 애쓸 것도 없이 가뿐하게 사뿐 울타리를 뛰어넘을지도 몰라요. 달빛을 타고 하늘로 올라 동강을 훌쩍 뛰어넘을 지도요. 그러거들랑 찾지 마세요. 한 식구 같았던 순이가 눈에 선하겠지만 빠삐용 순이는 마침내 그토록 꿈꾸던 자유를 찾았으니까요.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똥과 시(詩)  (2) 2019.10.25
얼마를 감하시든  (4) 2019.10.22
순이 날다  (4) 2019.10.22
왜 빈자리를 보니?  (2) 2019.10.20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2) 2019.10.20
행복하신 하나님  (4) 2019.10.18
posted by

왜 빈자리를 보니?

  • 저도 공감이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0.21 09:31
  • 한결같은 걸음, 반갑습니다.

    한희철 2019.10.21 20:10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93)

 

 왜 빈자리를 보니?

 

영월동부교회에서의 집회는 새벽, 낮, 저녁, 하루 세 번 열렸다. 시절이 바뀌어 요즘은 하루 세 번 모이는 집회가 드물어졌지만 기꺼이 동의를 했다. 다음 주 정릉에서 열리는 말씀축제에서도 열 번 말씀을 듣기로 했다. 시편의 바다를 헤엄치는 데는 열 번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루에 세 번을 모이니 강사도 강사지만 교우들로서도 모이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창 가을걷이의 계절이기도 하고, 낮에 일하는 이들도 적지 않고, 이런저런 개인의 일들이 왜 없겠는가?

 

 

 


 

낮 집회가 특히 그랬다. 때마침 지방연합성회와 기간이 겹쳐 더욱 그렇지 싶었다. 빈자리가 마음에 걸렸던지, 사회를 보던 선배 목사님이 몹시 아쉬워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오래 전 단강에서 목회를 할 때의 일이었다.

 

가문 날이 이어지다가 기다리던 비가 온 주일이었다. 많은 교우들이 예배당 대신 밭을 찾았다. 덕분에 주일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엔 빈자리가 많았다. 목회자에게 빈자리는 커다란 웅덩이처럼 다가온다. 눈길이 빠지고 마음이 빠진다. 빈자릴 보며 허전한 마음으로 설교를 시작할 때였다.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얘야, 너는 왜 빈자리를 보니? 나는 바쁜 중에도 예배드리러 나온 내 백성들을 보는데.’

 

필시 그것은 주님의 음성이었으리라. 그 때 들었던 음성 이야기를 했고, 더 이상은 빈자리에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더욱 가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은총을 누릴 수 있었지 싶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얼마를 감하시든  (4) 2019.10.22
순이 날다  (4) 2019.10.22
왜 빈자리를 보니?  (2) 2019.10.20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2) 2019.10.20
행복하신 하나님  (4) 2019.10.18
더 크게 보이는 이  (5) 2019.10.17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