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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세상 한희철의 얘기마을(130) 썩은 세상 “도둑놈을 잡아들일 놈들까지 썩었으니 퍽 썩었지? 다 썩었어.” 단강으로 들어오는 직행버스, 옆자리에 앉은 마을 노인이 장탄식을 한다. 높은 자리의 나리들은 부패로 썩고, 버려진 듯 살아가는 후미진 농부의 마음은 짓물러 썩고, 이래저래 썩은 세상, 다 썩은 세상.푸른 싹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 - (1992년) 2020. 10. 31.
끌개 한희철의 얘기마을(129) 끌개 벌써 며칠 째인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소를 끌고선 아스팔트 위를 왔다 갔다 합니다. 소 등엔 멍에가 얹혔고, 멍에엔 커다란 돌멩이를 올린 나무 막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끌개’를 끌며 소가 일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등 뒤에 늘어진 끌개의 무게를 견디며 소는 묵묵히 걸어갑니다. 일소가 되기 위해선 배워야 할 게 많아 일철 앞두고 소가 일을 열심히 배우는 것입니다. 일소가 되기 위해 등 뒤의 무게를 견디며 천천히 걷는 연습을 하는 소, 며칠 동안 끌개를 끌며 일 배우는 소를 보는 마음이 숙연합니다. 내게 주어진 임의 밭을 갈기 위해 끌어야 할 끌개가 내게도 있습니다. 쉽지 않은 무게를 견디며 많은 시간 끌개를 끌어야 합니다. 이 밭에서 저 밭으로 소가 함.. 2020. 10. 30.
쓰라림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꿀 때 쓰라림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꿀 때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고전12:26-27) 평강의 주님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별고 없으셨는지요? 시간 여행자인 인간은 언제나 앎과 모름 사이, 빛과 어둠 사이, 기쁨과 슬픔 사이, 확신과 회의 사이에 걸린 외줄을 타고 삽니다. 어지간히 익숙해지긴 했어도 균형을 잡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도 맑고 선선한 웃음을 지으며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초미세먼지가 ‘나쁨’ 단계에 이르렀다는 뉴스 보도를 보았습니다. 대기의 정체(停滯) 때문이.. 2020. 10. 29.
텅 빈 들판 한희철의 얘기마을(128) 텅 빈 들판 들판이 텅 비었다.볏가리와 짚가리 듬성듬성 선 들판모처럼 소들이 한가하다어미 소와 송아지가 진득이 편한 시간 보내기도 드문 일,커서 할 일 일러라도 주는 듯어미 소와 송아지가 종일 정겹다.송아지와 어미 소가 대신하는 이 땅의 평화. - (1992년) 2020. 10. 29.
멈출 수 없는 사랑 신동숙의 글밭(259) 멈출 수 없는 사랑 물이 흐르는 것은멈출 수 없기에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무슨 수로 막을까 매 순간 흐르고 흘러서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물처럼 멈출 수도 없는 끊을 수도 없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멈출 수 없는 사랑 햇살이 좋은날엔 무지개로 뜬다 2020. 10. 28.
변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7) 변소 언젠가 아내의 친구가 단강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와서 지내다 아내에게 화장실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더니 고개를 흔들며 “여기 아닌데” 하며 그냥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배를 잡고 웃었지만 허름한 공간 안 땅바닥에 돌멩이 두 개만 달랑 놓여 있었으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친구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네를 가도 익숙해졌지만 저도 단강에 처음 왔을 땐 변소 때문에 당황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한쪽 구석에 돌멩이 두 개만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다 틀리지 않게 일을 보긴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수세식에 익숙해진 터에 돌멩이에 올라앉아 맨땅 위에 일을 본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편해.. 2020. 10. 28.
은희네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6) 은희네 소 은희네 소가 은희네로 온 지는 10년이 넘었습니다. 정확히 그 연수를 아는 이는 없지만 대강 짐작으로 헤아리는 연수가 십년을 넘습니다. 이젠 등도 굽고 걸음걸이도 느려져 늙은 티가 한눈에 납니다.은희네 소는 은희네 큰 재산입니다. 시골에서 소야 누구 네라도 큰 재산이지만 은희네는 더욱 그러합니다. 팔십 연줄에 들어선 허리가 굽을 대로 굽어 고꾸라질 듯 허리가 땅에 닿을 할머니, 은희네 할머니가 온 집안 살림을 꾸려갑니다. 아직 젊은 나이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지만 그들조차도 이런 일 저런 일 크고 작은 일에까지 할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중3인 은희야 제 할 일 제가 한다 해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인 은옥이와 은진이 뒷바라지는 역시 할머니 몫입니다. 이런.. 2020. 10. 27.
구멍가게 성당 신동숙의 글밭(258) 구멍가게 성당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답작은 마을의 어둑해진 골목길은 좁은길 구멍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카운터를 지키시던 주인 아주머니가 오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텔레비젼을 바라보시며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색색깔의 과자봉지와 음료들은 아울러중세시대 성당의 화려한 비잔틴 모자이크가 됩니다. 간혹 종지에 촛불을 켜고 앉으셔서 늦은 밤까지학원에서 돌아오는 딸아이의 밤길을 지켜주기도 하시는 염주알인지 묵주알을 돌리시기도 하는 구멍가게아들이 좋아하는 과자가 풍성한 이곳은 기도의 성당 두 손을 모으신 아주머니가홀로 드리는 저녁 미사를 두고간혹 싫어하는 손님도 계신다지만, 앞으로 과자를 사러갈 때면기도의 성당으로 들어가듯 달콤하고 엄숙한 마.. 2020. 10. 27.
들꽃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들꽃 단강에 와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들꽃의 아름다움입니다. 곳곳에 피어있는 이런저런 들꽃들. 전엔 그렇게 피어있는 들꽃이 당연한 거라 여겼을 뿐 별 생각 없었는데, 요즘 와 바라보는 들꽃은 더 없이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쑥부쟁이, 달맞이꽃, 달개비, 미역취 등 가을 들꽃이 길가 풀섶에, 언덕에 피어 가을을 노래합니다.때를 따를 줄 아는 어김없는 모습들이 귀하고, 다른 이의 주목 없이도 자신의 모습 잃지 않는 꿋꿋함이 귀합니다. 제 선 자리 어디건 거기 넉넉히 뿌리를 내리고 꽃으로 피어나는 단순함이 또한 귀합니다. 꾸밈없는 수수함은 또 얼마나 정겨운지요. 필시 우리도 들꽃 같아야 할 것, 지나친 욕심과 바람일랑 버리고 때 되면 제자리에서 피어나 들꽃처럼 세상을 수놓.. 2020.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