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러움!

한희철의 얘기마을(218)


아이스러움!



근 두 달간 놀이방 점심 반찬을 놀이방 엄마들이 준비를 했다. 아내 몫이었던 그 일이 아기 출산으로 엄마들이 돌아가며 맡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 반찬을 준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이 구별되기도 하고, 매번 같은 걸 준비하기도 그렇고,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은 점심 반찬으로 멸치볶음이 준비되었는데 그날 아이들은 멸치를 하나도 못 먹고 남겼다. 멸치를 막 먹으려는 순간 소리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멸치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 것 같아요.”


그 얘길 듣고 보니 반찬 그릇마다 멸치가 눈을 똥글똥글, 더 이상 아이들의 손이 멸치에게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스러움!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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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雪害木) - 겨울나무 (73)

신동숙의 글밭(318)


설해목(雪害木) - 겨울나무 (73)




솔가지 주워서

불을 살리고


밥 지어 드시던

오두막의 수도승


깊은 산 속 

한밤 중에 홀로 깨어


소리없이 내리는 눈송이처럼 

연약하고 아름다운 생명들 


품고 품고 품다가

꺾이신 설해목(雪害木)


나는 법정스님한테서

십자가 예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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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생일

한희철의 얘기마을(217)


농사꾼 생일



“오늘 뭐 해요?”


비가 제법 내리는 아침 병철 씨를 만났다. 아무 일 없으면 낮에 차 한 잔 하러 들르라고 하자 병철 씨가 껄껄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비 오는 날은 농사꾼 생일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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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교회, 교회당을 나오면서

신동숙의 글밭(317)


달콤한 교회, 교회당을 나오면서

- 교회가 맹신앙과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지가 되지 않기를 -



코로나 바이러스와 탐진치 삼독의 전파지가 된 일부 교회와 선교기관들로 인해서, 교회가 더욱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요즘이지만, 한 시절 교회에 몸 담았던 나에게 있어 교회 생활은 참 달콤했다. 


그런 달콤한 교회당을 떠나온 일을 비유하자면, 카필라 왕국을 떠나오던 석가모니의 일에 비할 수 있을까. 5년 동안 뿌리를 내린 교회에서, 마지막 갈등의 순간에, 지나온 과거를 깊이 되돌아보았고, 다가올 미래를 거듭 내다보며 뼛속까지 자녀들의 영혼까지 짐작해보았다. 


이대로 교회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면 두 자녀들은 겉으로는 순조롭게 자랄 것이고, 우리 가정은 평안할 것이었다. 하지만 맹신앙으로 영혼은 잠들 것이고, 마음은 거듭되는 기복의 욕망에 젖어들어 비대해질 것이었다. 성경은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느님을 볼 것임이오.'라고 마태복음 팔복은 말한다. 다른 것보다 내게 두려운 하나는 눈이 가져려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되는 일이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전혜성 박사님의 자서전을 읽었던 때는 큰 아이가 두 살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섬김'이라는 단어는 내게 화두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큰 아이가 7살이 되던 해에 유치원 선택을 앞두고 또 한 번 깊은 인생의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 유치원과 개신교 선교원을 두고 어디를 보낼까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앞으로 삶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는 인생의 중대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때까지도 가슴에서 내려놓은 적 없던 화두인 '섬김'과 '사랑'으로 인해 자연히 선교원으로 기울게 되었다. 큰 딸아이의 유치원 선택을 두고 갈등하던 당시에 라디오 불교 유나 방송에 사연을 올린 어느 지체 장애인을 대하던 비구니 스님의 답변이 내게 브레이크를 밟고서 기독교로 노선을 바꾸게 한 계기가 되었다. 장애 인식에 대해서 모난 불교와는 달리 기독교에선 장애인을 대할 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은총의 몸이라 했다. 그런 둥근 시선이 내 본성이 가리키는 진리에 더 가까웠다.


큰 아이를 선교원에 보내면서도 엄마인 나는 그 뒤로도 라디오 불교방송을 들으며 일 년을 보냈다. 이미 힉창시절부터 도서관에서 읽어오던 책들은 기독교와 불교의 종파를 초월해 있었고, 동서고금의 양서들을 넘나들고 있을 때였기에 내면에 별다른 혼돈과 갈등은 없었다. 누가 물어보면 자녀는 선교원에 보내고, 엄마는 불교방송을 듣는다고 얘기하곤 했었다.


큰 아이가 선교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레나 마리아>와 이어령 선생의 <지성에서 영성으로> 두 권의 책이 계기가 되어서 인생의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작은 아이가 태어날 무렵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개척교회 사모님이 나를 전도하기 위해서 3년을 기도했다던 그 시기에도 그분들의 유혹적인 도움의 손길을 조심스레 거부했었다. 도움을 받으면 교회를 나가야할까봐 매이고 싶지 않았다. 친정과 시댁이 멀어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섬처럼 고립된 집에서 혼자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비록 몸이 상했지만, 내가 손길을  내밀기만 하면 지척에 있었던 교회지만 도움을 받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기도가 고마운 터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두 자녀의 손을 잡고서 제 발로 주일날 교회를 나가게 된 것이다. 교회를 정하기 위해서 작은 개척 교회와 집에서 가까운 대형 교회와 집에서 조금 먼 중형 교회 중에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앙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중형 교회를 선택하게 되고, 5년 간 그곳에 몸담았다. 


처음 교회를 방문한 그때가 빼빼로데이를 앞둔 11월의 주일이었기에 선물로 빼빼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두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진정한 섬김을 배우기 위해서, 이 결심은 이미 20대 가슴에 품은 뜻이기도해서,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자 혼자 가슴에 품었던 씨앗이 맺은 하나의 결실과도 같았다.


예수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섬김을 받으러 교회에 간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배우며 섬기기 위해서 교회에 간 셈이다. 그 섬김이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와 세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랬다. 부끄럽지만 교회의 환영식은 떠들썩했다. 새신자 교육을 받던 4주 동안, 문자 몇 통을 주고받던 어느 집사님의 추천으로 문서사역부로 가게 되었다. 교회에 다닌지 한 달 뒤부터 교회 안에서 꿈꾸던 나의 섬김이 작으나마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교인들을 만나서 '칭찬 원고'를 의뢰하고 글을 받아서 원고 교정을 보고 담당 집사님께 이메일로 넘기는 일이 내가 담당한 일이었다. 그 사명은 내가 교회당을 떠나올 때까지도 계속된 섬김이었다. 그리고 더 커다란 교회로 나아가는 걸음이었다.


함께 문서사역을 담당했던 이 권사님은 지금도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한다. 이 권사님은 서울의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신 후, 울산대 교수인 남편을 따라서 울산으로 내려오신 분이다. 교직에 있다보니 총 열한 분의 목사님을 모셨는데, 학교에서 가까운 교회를 선택하다 보니 지금의 교회로 오시게 되었고, 권사님은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물고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교회당을 떠나온 후로 일 년에 한 차례씩 잊지 않으시고 나를 불러내셔서 밥을 사주신다. 작년엔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하고,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재작년 가을엔 이 권사님을 만나서 통도사 앞 식당에서 사주시는 산채비빔밥을 먹고 무풍한송로를 함께 산책하면서 한희철 목사님의 <어느 날의 기도> 시집을 선물해드렸었다. 


우리 딸아이를 위해서 닭을 잡아주시던 장 집사님은 우리 가정을 위해서 목장의 목자 가정이 되어줄 테니, 교회에 다시 나오라고 하신 게 코로나 펜데믹 전의 말씀이다. 성가대실에 함께 있어도 별다른 대화를 나눈 적 없던 방과후 아동 쉼터 '반올림'의 이집사님은 지금껏 일 년에 한 두 차례 안부 전화를 주시는데, 지난 주 아침에도 전화를 받았다. 내겐 고마운 분들이고, 여전히 교회다.



2016년 교회당을 떠나올 때의 답답한 심정을 가슴에 담아둘 수 없어서, 2017년 4월에 시작한 페이스북, 내게 온 첫 친구 신청은 같은 교회에 다닌 박 집사님이다. 교회 안에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처음엔 친구 신청한 분이 누군지 몰라서 프로필과 포스팅을 살펴보니, 교회를 떠나오기 직전 주보에 실을 원고를 문자로 의뢰했던 분이었다. 박사 학위를 받으신 후 울산대 교수로 가시게 된 사연을 전교인들과 함께 나눌 신앙 간증이 주보 원고 청탁의 내용이었다. 


그렇게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우리 가정이 삶과 마음을 나눈 교회의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내겐 교회에 내린 뿌리였다. 삶의 중심에 두었던 뿌리를 뽑아내는 일은 또 한 번의 죽음과도 같았다. 석가모니가 카필라 왕국을 떠나올 때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지 어땠을지 지금도 가끔 헤아려본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자본주의의 물질과 문명 사회를 벗어나서 스스로 20대에 산과 인도로 향하던 떠남이 내겐 먼저 있었다. 그것은 이 생에서의 성공과 풍요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나그네 길이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려서도 마음에 성공과 풍요를 꿈꾸어본 적이 없다. 굶기를 밥 먹듯이 보낸 유년기였지만, 하늘을 보면서 자랄 수 있었고 나에겐 늘 마음이 문제였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 후 목장을 선택할 때에도 또래 자녀를 둔 가정이 아닌 선교원 원장이신 권사님이 계신 목장을 선택했다. 그곳이라면 섬김을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섬김'이 나에겐 화두였기에, 목장 생활에서 받을 수 있는 섬김과 혜택은 애초에 접어두었다. 우리 가정은 목장 식구들과 따로 나들이를 간 적이 없다. 그전에 목장 생활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다들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 고지식한 엄마로 인해서 자녀들에겐 목장의 추억이 없다. 목장 모임은 나 혼자서 낮시간에 선교원에 잠깐 들러서 가졌던 짧은 기도와 식사 모임이 전부였기에.


어려서부터도 재미보다는 의미를 찾아온 삶이다 보니, 목장 생활에서 오는 재미와 안락은 관심 밖이었다. 주일 학교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까지 사역을 담당하시고, 주중엔 선교원의 원장님이기도한 권사님은 늘 바쁘셨고 나는 그분의 뒷모습에서 섬김을 배웠다. 함께 점심을 먹을 가정도 안정적이진 못해서 주일 예배가 끝나고 목장별 점심식사 시간엔 혼자 밥을 먹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나에겐 외로울 틈이 없었다. 외로움은 나에겐 이미 익숙한 옷이었고, 내 곁엔 언제나 책이라는 좋은 길벗이 있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 지금도 내겐 고마운 선물이 된다. 


주중엔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씀 공부' 과정을 빠짐없이 반복해서 참여했었다. 그리고 5년 간 매 주 있는 목장 모임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비교적 단순한 삶을 살아오던 내겐 따로 정리할 생활이나 버릴 습관이랄 것도 없어서, 내 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었고, 그외 자녀의 학교와 가정과 집안 일들은 자연히 교회 일정을 중심으로 순조롭게 조정이 되었던 것이다. 신년 다이어리에는 예배와 기도 모임과 목장 모임과 말씀 공부 날을 일 년 단위로 먼저 표기해두고 교회를 중심으로 나머지 삶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살았다.


새신자였지만, 일 년이 지난 무렵부터 십일조를 하기로  결심했다. 교회는 매 달 절기마다 행사는 왜 그렇게 많은지 감사 헌금 봉투와 절기마다 특정 헌금 봉투와 주일 헌금, 작정 헌금, 선교 헌금, 십일조 봉투까지 보태면 주일 아침마다 최소 서너 개의 봉투를 들고 예배당이 있는 3층까지 천사처럼 오르곤 했었다. 그래도 기쁘기만 했다. 주일이면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또래들과 함께 춤추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기도를 배우는 삶이 그대로 행복한 섬김의 삶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기에 교회 건물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기만 했다. 


그런 생활을 3년을 넘게 해오던 내게 목사님은 '집사'라는 안수를 주셨다. 그리고 그날 바로 고 집사님은 내 손을 잡더니 성가대실로 향했다. 40여 명의 성가대원 중 총무 집사님이 나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시더니, 바로 그날 오후에 처음으로 교회에 성가대 밴드 모임방이 만들어졌다. 그곳에 간간히 글을 올리는 일이 내겐 소소한 즐거움이었고, 교인들과도 작은 소통의 창이 되었다. 나에게 교회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얘기하라면 성가대 생활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가대원을 하면서 종교 생활에 더욱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받은 사랑과 기쁨으로 넘치던 사랑방이었다.


주일 아침이면 싫다는 아이들을 깨워 일찍 챙겨서 성가대실에 모여 주일 예배 1시간 전에 찬양 연습 후 헌금 봉투 서너 개를 챙겨서 3층 예배실로 향했다. 성가복이 내겐 천사의 날개옷 같았다. 구두를 신고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은 경쾌했고 우아했고 마치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착각에 스스로 빠지기도 했었다. 우리 가정에게 있어 교회는 위험하고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노아의 방주가 되어있었고, 이생에서 누리는 천국이자 구원의 직행 열차였다. 


삼복 더위 복날 딸아이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닭을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엄마에게 주문 통닭이 아닌 엄마가 해주는 삼계탕이 먹고 싶다는 말을 했고, 어떻게 그 얘기를 어깨 너머로 들으신 장 집사님은 밀양 시골집에서 손수 키우신 닭을 잡아서 가마솥에 넣기도 하셨는데, 성가대 전체 모임 외에도 우리 가정과 또 한 가정을 따로 초대해서 바베큐 파티를 해주시던 고마운 마음들, 어린이날 체육대회, 가을 야유회, 전교인 삼겹살 파티, 성가대 연말 음악회를 위해서 카페를 통째로 빌려 음대 교수인 바이올리스트를 초대해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려준 집사님 등등 교회 생활은 풍요로웠고 생활은 기름졌고 달콤한 나날이 쉼없이 돌고돌아서 일 년이 가고 또 일 년이 금새 흘렀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안정적이고 윤택한 생활을 해오던 나와 우리 가정의 종교 생활은 그렇게 순조로웠고 행복했다. 교회 행사 때면 반복되는 불신자 가족 초대의 자리를 통해서, 자판기 커피를 함께 마시며 얘기를 나눌 친구를 한 명 사귀게 된 남편까지도 마음을 돌이켜 온가족이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자녀들까지 각자의 주일 학교 자리에서 또래 친구들과 행복한 교회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 그랬던 천국이자 행복의 왕국과도 같았던 교회당을 떠나온 것이다. 어쩌면 더 넓은 교회, 세상으로 나아가는 열린 걸음이다.


행복에 잠든 나를 흔들어 놓은 건, 뿌리를 내린 달콤한 교회와 교인들이 아니었다. 신약을 읽으면서 만난 예수였다. 내 양심 깊은 곳으로부터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때론 바늘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처럼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이 있었다. 신약 성서의 예수에 비추어 내 양심의 거울은 더 닦여졌는지, '이게 아닌데, 신앙 생활과 섬김의 삶이 이게 다가 아닌데'하는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게 신약 성서를 눈 앞에 펼쳐서 읽던 경험은 밝은 태양빛 아래 선 것처럼 눈이 부셔서 거듭 눈을 감아야 했으며, 가슴이 깨어나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 예수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온전한 진리의 몸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해의 바탕에는 그동안 읽어온 불교 서적과 동서고금의 인문서적과 수행서와 경전이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신약 성서는 내 가슴으로 곧바로 못이 박히듯 파고들었고, 하늘에 박힌 별처럼 지금도 못이 빠지지 않고서 나와 함께 살아서 생명의 숨을 쉬고 있다.


예수는 외식하는 자 교만하며 풍요로운 엘리트 바리새인을 두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으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가까이 하며,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에게 대접한 것이 나에게 대접한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분명 세상과 단절된 노아의 방주 같은, 내가 다닌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설교하는 기복 신앙이 되는 자녀의 성공과 가정의 부유함과 물질의 풍요와 안정된 삶과 교회의 부흥과 성공, 그것은 예수가 보여주는 마음과 내면의 세계와는 분명히 노선이 달랐다. 예수는 그렇게 나를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었다. 


교회와 목사라는 이름이 요즘처럼 욕을 먹는 시대가 종교 개혁을 꿈꾸던 루터의 중세 시대 쯤에나 있었을까? 콘슨탄티누스 황제의 야욕으로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오늘날 개신교회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하니, 괜스레 한 인간이 뿌린 탐진치 삼독의 씨앗이 이만큼 자라서 우리 사회에 이 만큼 끼치는 해악을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내겐 한 생각 일으키는 일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이 언제나 있다. 그래서 기도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온전치 못한 기도가 이루어질까봐. 온전치 못한 기도조차도 이루어질 줄을 알기에.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과 머리가 무겁기만 하다. 그럴 수록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곳곳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음을 본다. 


그 빛은 비록 작을지라도 밤이 깊고 어두울 수록 작은 별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가난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 신부님과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신 법정 스님과 바보 김수환 추기경님과 무리를 떠나 홀로 산으로 오르시던 고독한 예수의 뒷모습이 내겐 어둔 세상 별이 되었고, 오늘도 우러러보면서 걸어가는 별자리가 된다. 김기석 목사님의 선한 연대처럼, 별은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하늘에서 거리두기를 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한 하나의 별자리가 된다.


내가 몸 담았던 교회의 목회자와 경상도 지역의 일부 극우 개신교의 목회자들과 일부 정치인들과 장사치들의 의식은 참 많이도 닮아 있다. 그들을 볼 때면 마치 사고뭉치 어린 아이를 보는 심정과 같다. 내가 몸담았던 담임목사의 설교도 자세히 보면,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주고 가신 성령이 아닌 탐진치 삼독에서 허우적거리는 목회자의 독재체제로 교회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밑에서의 달콤한 안정과 풍요였다. 영혼이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하늘을 가리는 그 달콤함의 구름을 걷어낸 것이다.


내가 달콤한 교회당을 떠나온 일은 어찌 보면 때가 되어 스스로 열매가 익어서 신앙과 구도의 유치원을 졸업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예수의 이름을 간판에 두지만 예수와는 상관없는 교회, 한국 교회는 성공과 부흥을 외치는 기복 종교로써 의식 수준은 여전히 구약의 모세와 다윗과 야곱의 유치한 물질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깨어나고 있는 개신교인들과 몸부림 치고 있는 목회자들이 어느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고 별자리가 되어서, 이 어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빛나는 길이 되어주고 있다.


그저 성공과 부흥과 물질의 부유함과 세상과 자기 자신을 구분 짓는 맹신앙의 거룩함에 도취 되어서 스스로 세상과 둑을 쌓고 침체된 체 영혼과 생명의 심지가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든, 꺼져가고 있는 병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개신교회가 또한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탐진치의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또한 나 자신이기도 하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겉모습을 말함이 아니다. 성도의 마음과 영혼과 내면 세계를 말함이다. 예수가 그토록 가리켰던,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처럼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일로 숨을 쉰다.


그리고 지금도 개신교와 불교와 천주교와 한국의 풍류를 넘나들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길 위의 나그네가 나의 모습이다. 마음이 가리키는 길, 양심이 비추는 길이다. 이제는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이 길은 위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고, 나를 채우려는 배움이 아니라 나를 비우려는 배움이다. 탐진치의 세상과 거꾸로 가려는 몸부림이다. 내 마음으로 온전히 들어온 진리는 오직 예수의 마음 밖엔 없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내려서 등에 짐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닌, 성령의 해처럼 씨알처럼 가슴에 품고 가는 길이다. 


만약에 개신교의 담임목회자가 안정된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불경도 읽는다면, 신약의 예수가 하신 말씀을 더욱 온전히 이해함으로 성도들에게 예수의 마음과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바람과 아쉬움이 늘 있다. 진리의 구도자로써 불타 석가모니는 시대를 앞서 간 모범생이기도 했기에 나는 부처로부터도 하느님의 숨결, 공성의 하늘을 본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나처럼 종교를 넘나드는 이들이 참 많이 있다. 이런 이들에게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을 붙이기 이전에 제발 공부 좀 하시기 바란다. 욕심을 채우려는 물질의 성공과 부흥을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을 비워서 저절로 하늘이 드러나게 하는 마음 공부를 말함이다. 성경과 불경과 동양의 경전이 쉼없이 지금도 살아서 그 길을 가리키는 등불이 되고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지, 목회자가 성경을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위해서 한 구절만 뽑아 읽고서 설교 시간에 팔아먹는 자는 세상에 독을 뿜는 바리새파 같은 독사의 자식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또한 나 자신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맹신앙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숙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만물에 깃든 진리, 내가 찾으며 바라보고 있는 하나는 그런 하느님이다. 신약 성서의 예수가 끊임없이 가리킨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이다.


이렇게 정처 없는 듯 자유롭게 종교를 넘나들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진리의 몸이 되신 예수와 성령이 있고, 구도자의 모범생인 부처의 불성이 있고, 진리와 양심의 성령이 해처럼 때론 샘물처럼 나를 비추고 있다.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집에 있든지 밖에서 누굴 만날 때에도, 자유이신 바람은 언제나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자유의 바람이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에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숨은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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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집만큼만

한희철의 얘기마을(216)


자기 몸집만큼만



농활 나온 대학생들에게 병철 씨가 콩 심는 방법을 가르친다.


“자, 이렇게 호미로 파가지고 콩을 심는데, 한번에 5-6알씩 넣으면 돼. 그러고는 자기 발로 두 개쯤 간격을 두고 또 파서 심으면 되고.”


한 학생이 물었다.


“콩은 얼마나 묻으면 돼요?”

“응, 그냥 살짝 묻으면 돼. 너무 깊게 묻으면 오히려 안 되지. 옛날 어른들이 그랬어. 씨앗 크기만큼만 묻으면 된다고. 깨는 깨만큼 묻으면 되고 옥수수는 옥수수만큼만 묻으면 된다고. 씨앗 크기만큼씩만 묻으면 싹이 다 난다는 거지.”


자기 크기만큼씩만 묻으면 싹이 난다는 씨앗, 모든 살아있는 것이 그리하여 자기 몸집만큼만 흙속에 묻히면 땅에서 사는 걸, 뿌리 내리고 열매 맺는 걸, 더도 덜도 말고 자기 몸집만큼만 흙기운에 잠기면.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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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타작 마당

                             주님의 타작 마당


“하나님의 말씀이 한껏 펼쳐지고 그렇게 풍성하게 전개되는 축복의 만찬에 대한 인간의 가장 깊은 그리고 적절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가장 깊은 감사의 기도가 아닐까요? 감사 그리고 은총을 알아차리는 것 말입니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1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며칠 동안 날이 참 포근했습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 저도 모르게 교회 화단을 기웃거렸습니다. 시퍼렇게 언 채 겨울을 버틴 화초에 약간 생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기분 탓이겠지요. 지난 주일에는 모처럼 방송팀과 목회자들 이외에 10여 분의 교우들이 예배에 참여하셨습니다. 왠지 예배당에 생기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이전에 우리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때는 빈 자리에 마음이 쓰였는데, 이제는 몇 사람이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졌습니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물을 뜨러 지하 친교실에 내려갑니다. 내려갈 때마다 주방 칠판에 적힌 메뉴에 눈길이 갑니다. ‘육개장, 어묵볶음, 김치’. 주방은 지난 해 1월에 마지막으로 공동 식사를 하던 그 시간에 딱 멈춰 있습니다. 쓸쓸합니다.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두런두런 교우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소란스러움이 그립습니다.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 수록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떠오릅니다. 물레바늘에 찔려 공주가 깊은 잠에 빠지자 성 안의 시간도 따라서 멈춰버리고 맙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기 직전에 동작을 멈췄고,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도 일렁이던 그대로 멈춰버렸습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왕자의 입맞춤, 곧 사랑입니다. 우리 주방과 친교실의 시간도 깨어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람이 그리울 때면 여러 사람들이 보내준 편지와 엽서를 꺼내 다시 읽곤 합니다. 철학자인 김용규 선생님이 저를 가리켜 ‘하나님의 꿀벌’이라고 지칭하신 것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봅니다. 단정한 글씨도 있고 흘려 쓴 글씨도 있습니다. 필체는 그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지요? 오래 전 독일의 어느 고성 박물관에 갔다가 종교 개혁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의 글씨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글씨는 단정하기 이를 데 없었고, 루터의 글씨는 호방하고 활달했습니다. 츠빙글리의 글씨도 아름다웠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다시 읽으면서 그 행간 사이에 깃든 발신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그 이후의 상황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저절로 기도의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

많이 힘들고 답답하시지요? 그래도 잘 견디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인터콥 상주 모임이 코로나 감염의 숙주 역할을 했다는 소식이 조금 잠잠해질 무렵 우리는 또 다른 단체인 IM선교회가 운영하는 IEM국제학교에서 발생한 집단 발병 소식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비인가 종교시설에서 대규모 감염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들로 인해 기독교가 컬트 집단처럼 여겨지고 있는 현실이 참 괴롭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 교회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행 2:46)는 말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호감을 사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은 당하지 말아야지요. 몰상식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코로나19는 가파른 성장을 자랑하던 개신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하여 움츠러들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눅 3:17) 지금이 어쩌면 가름의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도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고전 3:11-13). 지금은 검증의 시간입니다. 우리 스스로 참된 믿음 위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개신교의 현실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소설가 헤더 모리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서 같은 민족의 팔에 문신 새기는 일을 했던 랄레 소콜로프와 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하여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박아람 옮김, 북로드)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 나오는 한 에피소드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용소는 육체적인 학대가 일쑤 자행되는 곳이지만 동시에 수용자들에게 인간적 모멸감을 안겨주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인간적 존엄을 박탈당한 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곤 합니다. 질병, 영양실조, 추위, 모멸감, 고통을 견디다 못해 어떤 이들은 철조망으로 달려가다가 감시탑에서 쏜 총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지옥 같은 그곳에서도 사랑이 꽃 피어납니다. 랄레와 기타도 그렇게 연인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그들이 인간임을 일깨워주는 아주 소중한 감정이었습니다. 자유롭지 않았기에 그들은 간수들을 매수하여 살짝살짝 만났습니다. 어느 날 랄레는 기타의 친구인 실카가 오랫동안 보이질 않는다며 기타에게 혹시 소식을 알고 있냐고 묻습니다. 망설이던 기타는 실카가 독일군 간부의 노리개가 되었다고 실토합니다. 그 말은 들은 랄레는 실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며 그 말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기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서 발끈하며 말합니다.

“무슨 소리야, 영웅이라니? 실카는 영웅이 아니야..”
기타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냥 살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래서 영웅이라는 거야. 자기도 영웅이야. 실카와 자기가 살아 남는 쪽을 택한 건 나치놈들에 대한 저항이야. 삶을 붙들고 있는 건 저항 행위라고. 영웅적인 행동이야.”(p.202)

살아 남기를 택하는 것이 바로 나치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이들은 이 말 속에 담긴 그 지극한 아픔과 결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굴욕을 감내하며 살아남으려 한 것은 가련한 생의 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벌어진 참상에 대한 증언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던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니체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굳세게 만들 것이다.” 그는 자기들이 겪은 경험은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빼앗아 갈 수 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의 경험뿐이 아니었다.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위대한 사색,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모든 고통이 어떤 것이든간에 과거 속으로 흘러간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거로 흘러가 버린 모든 것을 실존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과거에 겪었던 일은 일종의 실존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확실한 실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충선 역, 청아출판사, p.139. 일부 수정)

과거로 흘러가버린 모든 것을 실존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것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허비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아름다운 삶의 계기로 삼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든 실패와 고통과 시련이 곧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더 넓고 깊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벌써 1월 한 달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새해 첫 시간에 품었던 꿈들이 이미 퇴색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은커녕 하루하루 버티기도 벅찬 이들도 있습니다. 안개처럼 스멀스멀 우리 삶을 파고드는 우울과 허무에 갇히지 말고,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처럼 당당하게 삶과 마주하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끝까지 번져 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위로부터 오는 희망이 우리 속에 유입되리라 믿습니다.

모처럼 새 교우들과 줌zoom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렇게라도 우리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교회, 속회, 각 부서, 동호회에서 저를 청해 주시면 기꺼이, 감사하게 그 대화 속에 끼어들겠습니다. 저뿐 아니라 목회실 식구들 모두 그런 초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도 비대면 예배를 원칙으로 하려 합니다. 그래도 사정상 꼭 현장 예배에 동참하고자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전화로 알려주십시오. 스태프들을 제외하면 서른 분 정도가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날이 차가워진다고 합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조심조심 이 세월을 견디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2021년 1월 28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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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별

한희철의 얘기마을(215)


달과 별




“해는 환해서 혼자 있어도 괜찮지만, 달은 캄캄한데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봐 별이랑 같이 있는 거야?”


어둠과 함께 별 총총 돋는 저녁, 어린 딸과 버스를 함께 탔습니다. 훤하게 내걸린 달,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리가 별들과 어울린 달 얘기를 합니다. 그런 말이 예뻐, 마음이 예뻐, 눈이 예뻐 마음껏 인정을 합니다.


“그래 그럴 거야.”


밀려오는 졸음 이기지 못하고 이내 품에서 잠드는 어린 딸. 캄캄한데 달 혼자면 무서울까봐 별이 같이 있는 거라면, 품에 안겨 잠든 너야 말로 내겐 별이지, 험한 세상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어야지, 왠지 모를 간절함으로 잠든 딸의 등을 다독입니다.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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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신동숙의 글밭(316)


새소리




아침에 새소리를 들었다

몇 년만에 듣는 반가운 기척


창문을 시스템 창호로 바꾼 후

새소리 알람시계는 끄고 살았는데


좀 전에 비가 오는가 싶어서

부엌 쪽창을 조금 열어두었더니


겨우 그 한 뼘 틈새로

집 안으로 들어온 새소리가


갈빗대 빗장 틈새로

밤새 닫힌 가슴 쪽문을 연다


새벽 하늘을 깨우며

새날을 알리는 첫소리


새아침을 울리는

새소리는 늘 새 소리


새는 날마다 새로운 길

새 하늘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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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한희철의 얘기마을(214)


주인공



우리가 흔히 범하는 잘못 중의 하나는 주인공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어떤 일로 몇 사람이 모였다 하자.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모이는 자리엔 누군가 주인공이 있기 마련이다.


생일을 맞았다든지, 이사를 했다든지, 아프다든지, 기쁜 일 혹은 슬픈 일이 있다든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가 그 자리의 주인공인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잊고 엉뚱한 얘기들만 늘어놓는 경우가 있다. 엉뚱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엉뚱한 주제가 당연히 나눠야 할 대화를 가로채기도 한다. 


그리고 돌아설 땐 허전하다. 그 허전함은 돌아서는 사람 뿐 아니라 그날의 주인공인 사람에게는 더욱 클 것이다.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일, 어색함 없이 누군가의 삶을 주목하는 것은 그만큼 아쉬운 일이 되고 말았다.


내 삶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간다면, 그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인공임을, 나를 나 되게 하시는 분이 내 삶의 주인공임을 잊어버리고 엉뚱한 것에 사로잡혀 한 평생을 보낸다면 돌아서는 길, 얼마나 허전할까.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삶, 그게 삶의 또 하나의 지혜지 싶다.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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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한희철의 얘기마을(213)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쌓인 우편물을 정리하다 보니 길호가 쓴 메모지 한 장이 있다. 단강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마침 빈 집을 다녀가게 된 수원종로교회 청년들 몇이 남긴 메모였다.


사택이랄 것도 없이 더없이 허름했던 흙벽돌 집. 작은 골방 앞에 써 붙여 둔 짧은 글 하나가 있었다.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그 당시 나를 지탱해 주던 글이었다. 그 글을 눈여겨 본 녀석은 다시 한 번 그 글을 적은 뒤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도 한 수 배우고 갑니다.”


잊었던 기억. 묻혀뒀던 글,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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