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1/0154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한희철의 얘기마을(207)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내 설 곳은 그곳, 여기가 아니다. 이 또한 그리운 자리편한 얼굴들, 반짝이는 눈망울드문드문 빛나는 불빛들을 뒤로 밀며어둠속 달려가는 이 밤기차처럼말없이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잠시 과한 꿈을 꾼 듯밑바닥 괴는 아쉬움일랑 툭툭 털고서미련과 기대제자리로 돌리고떠나온 자리, 다시 그리로 돌아가더욱 그곳에 서야 한다. 잊을 걸 잊어사랑할 거 더욱 사랑해야 한다. -서울에 있는 교회 청년부 신앙강좌를 다녀오며 - (1992년) 2021. 1. 19.
지금 나는 한희철의 얘기마을(207) 지금 나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내 꿈은 무엇이었으며그 꿈은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얼마나 작아지고 있는가.그 작아짐에 얼마나 익숙해지고 있는가.그런 작아짐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가. 이곳에서의 나는 누구인가.이 땅에서의 구원은 무엇인가. 어둠속에 묻는 물음.어둠속에 묻는 물음. - (1992년) 2021. 1. 18.
냉이 - 겨울나무 신동숙의 글밭(313) 냉이 - 겨울나무 겨울을 푸르게 견뎌낸 냉이가뿌리에 단맛을 머금었습니다 흙의 은혜를 저버리는 듯잔뿌리에 흙을 털어내는 손이 늙은 잎을 거두지 못하고시든 잎을 개려내는 손이 못내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땅에 납작 엎드려 절하는 냉이 같습니다 2021. 1. 18.
벌거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한희철의 얘기마을(206) 벌거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박유승 作 / 아담과 하와-둘째 만남 성경 말씀 중 새삼 귀하게 여겨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생각하게 된 말씀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5) 공동번역성서에는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고 옮겼습니다. 벌거벗었으면서도,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럽지 않았다는, 처음 인간이 누렸던 순전한 기쁨. 아무 것으로 가리지 않아도, 감추거나 변명하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마주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지극한 아름다움. 감추고 숨기고 꾸미고, 그런 것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겐 얼마나 낯선 말인지요.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관계들을 꿈꿔 봅니다.. 2021. 1. 17.
떡국 한 사발 신동숙의 글밭(312) 떡국 한 사발 소고기 조각 구름 걷어내고계란 지단 구름 걷어내고 흙으로 빚은 조선 막사발로 투명한 하늘과 바다를 조금만 떠서 두 손 모아 하나 되는 찰라해를 닮은 흰떡 한 움큼 넣고 팔팔 끓이면 떡국의 가난과 맑음은 얼벗 되어 다정히 손을 잡고서 놓치 않아 정월달 아침이면 해처럼 떠올라둥근 입속으로 저문다 새해는 깊고 어둔 가슴에서 떠올라웃음처럼 나이도 한 살 피어오른다 2021. 1. 17.
늙은 농부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205) 늙은 농부의 기도 나의 몸은 늙고 지쳤습니다. 텅 빈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몇 번 서리 맞은 호박덩이마냥매운바람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마른 낙엽마냥어디하나 쓰일 데 없는 천덕꾸러기입니다. 휘휘, 무릎 꼬뱅이로 찬바람 빠져 나가고마음도 몸 따라 껍질만 남았습니다. 후둑후둑 베껴내는 산다랭이 폐비닐처럼툭툭 생각은 끊기고 이느니 마른 먼지뿐입니다. 이젠 겨울입니다.바람은 차고 몸은 무겁습니다. 오늘도 늙고 지친 몸으로 예배당 찾는 건무지랭이 상관없는 성경 찬송책 옆에 끼고예배당을 찾는 건그나마 빈자리 하나라도 채워불쌍한 젊은 목사양반 허전함 덜려는 마음 궁리도 있거니와주책없는 몸으로 예배당 찾아그래도 남은 눈물 드리는 건거칠고 마른 손 모아 머리를 숙이는 건아무도 읍기 때문입니다. 이.. 2021. 1. 16.
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 3:12-13) 환자를 대동하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니 눈이 퐁퐁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는 눈이 시원의 세계로 저를 안내하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열린 흰 세계를 보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그 내용도 가물가물하지만 첫 문장만은 잊을 수 업습니다.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 삶의 무거움을 조금쯤 짐작하며 현실.. 2021. 1. 15.
숨어서 하는 사랑 한희철의 얘기마을(204) 숨어서 하는 사랑 밥을 안 먹어 걱정이던 규성이도 점심시간 제일 밥을 많이 먹는다. “엄마한테 갈 거야!” 한번 울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던 학래도 이른 아침부터 놀이방에 올 거라고 전화를 한다. 새침데기 선아도 친구들과 어울려 소꿉놀이에 정신이 없다. 할머니 젖을 물고 자 버릇 했던 제일 나이 어린 영현이는 아내 등이 낯선지 계속 잠을 못 잤고, 졸지에 엄마를 뺏긴 규민이만 칭얼대며 그 뒤를 쫓아다녔다. 희선이, 학내, 선아, 규민이, 재성이, 미애, 규성이, 영현이 등 모두 8명의 꼬마들이 아침부터 모여 자기들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작은 다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은 나름대로 질서를 세워가고 있다. 미끄럼틀을 타기도 하고, 인형을 갖고 놀기도 하고, 장난감 총을 들고 새.. 2021. 1. 15.
지화자 좋은 날 신동숙의 글밭(311) 지화자 좋은 날 160년 전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월든 숲의 오두막에서 동양의 주역을 읽던 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산골 오두막 머리맡에 둔 몇 권의 책 중에서성 프란체스코를 읽던 날의 법정 스님 지리산 자락의 유가댁 자제인 열 다섯살 성철 스님이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쌀 한 가마를 바꾸던 날 6·25 동족상잔 그 비극의 흙더미 아래에서밤이면 책을 읽던 진실의 스승 리영희 선생님 감옥의 쪽창살로 드는 달빛을 등불 삼아책을 읽고 종이조각에 편지를 쓰던 날의 신영복 선생님 주일 예배 설교단에서 반야심경의 공사상을 인용하는 날의 목사님 초하루 법문이 있는 대웅전에서요한복음 3장 8절을 인용하는 큰스님 천주교 식당 벽에 붙은 공양게송 한 줄 읊으며 창문밖 성모마리아상 한 번 보고밥 한 숟.. 2021. 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