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한희철의 얘기마을(208)


흙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드문 눈이 실컷 왔고 한동안 차가 끊겼다.

묘한 갇힘

저녁때였다. 

누군가 찾는 소리에 나가보니 한 청년이 서 있다. 모르는 이였다. 신발이 다 젖어 있었다.


전날 밤기차를 타고 달랑 주소 하나만 가진 채 먼 길을 왔다. 경남 남해. 눈 때문에라도 까마득한 거리로 느껴졌다. 거기다가 헤매기까지 했다니.


여자 혼자서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길을, 큰 무모함.

그가 ‘흙’ 얘길 했다. ‘흙’이 그리웠던 것일까.

흙, 흙에 대한 그리움이라니!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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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야 한다

한희철의 얘기마을(207)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 설 곳은 그곳, 여기가 아니다.


이 또한 그리운 자리

편한 얼굴들, 반짝이는 눈망울

드문드문 빛나는 불빛들을 뒤로 밀며

어둠속 달려가는 이 밤기차처럼

말없이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잠시 과한 꿈을 꾼 듯

밑바닥 괴는 아쉬움일랑 툭툭 털고서

미련과 기대

제자리로 돌리고

떠나온 자리, 

다시 그리로 돌아가

더욱 그곳에 서야 한다.


잊을 걸 잊어

사랑할 거 더욱 사랑해야 한다. 


-서울에 있는 교회 청년부 신앙강좌를 다녀오며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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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한희철의 얘기마을(207)


지금 나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내 꿈은 무엇이었으며

그 꿈은 어떻게 되었는가.


나는 얼마나 작아지고 있는가.

그 작아짐에 얼마나 익숙해지고 있는가.

그런 작아짐을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가.


이곳에서의 나는 누구인가.

이 땅에서의 구원은 무엇인가.


어둠속에 묻는 물음.

어둠속에 묻는 물음.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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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 - 겨울나무

신동숙의 글밭(313)


냉이 - 겨울나무




겨울을 푸르게 견뎌낸 냉이가

뿌리에 단맛을 머금었습니다


흙의 은혜를 저버리는 듯

잔뿌리에 흙을 털어내는 손이


늙은 잎을 거두지 못하고

시든 잎을 개려내는 손이


못내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땅에 납작 엎드려 절하는 냉이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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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한희철의 얘기마을(206)


벌거벗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박유승 作 / 아담과 하와-둘째 만남  


성경 말씀 중 새삼 귀하게 여겨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결혼식 주례를 맡으며 생각하게 된 말씀입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5) 


공동번역성서에는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고 옮겼습니다.


벌거벗었으면서도,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럽지 않았다는, 처음 인간이 누렸던 순전한 기쁨. 아무 것으로 가리지 않아도, 감추거나 변명하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마주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지극한 아름다움.


감추고 숨기고 꾸미고, 그런 것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겐 얼마나 낯선 말인지요. 

벌거벗고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관계들을 꿈꿔 봅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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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국 한 사발

신동숙의 글밭(312)


떡국 한 사발



소고기 조각 구름 걷어내고

계란 지단 구름 걷어내고


흙으로 빚은 조선 막사발로 

투명한 하늘과 바다를 조금만 떠서


두 손 모아 하나 되는 찰라

해를 닮은 흰떡 한 움큼 넣고 팔팔 끓이면


떡국의 가난과 맑음은 얼벗 되어 

다정히 손을 잡고서 놓치 않아


정월달 아침이면 해처럼 떠올라

둥근 입속으로 저문다


새해는 깊고 어둔 가슴에서 떠올라

웃음처럼 나이도 한 살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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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농부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205)


늙은 농부의 기도



나의 몸은 늙고 지쳤습니다.


텅 빈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몇 번 서리 맞은 호박덩이마냥

매운바람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마른 낙엽마냥

어디하나 쓰일 데 없는 천덕꾸러기입니다.


휘휘, 무릎 꼬뱅이로 찬바람 빠져 나가고

마음도 몸 따라 껍질만 남았습니다.


후둑후둑 베껴내는 산다랭이 폐비닐처럼

툭툭 생각은 끊기고 이느니 마른 먼지뿐입니다.


이젠 겨울입니다.

바람은 차고 몸은 무겁습니다.


오늘도 늙고 지친 몸으로 예배당 찾는 건

무지랭이 상관없는 성경 찬송책 옆에 끼고

예배당을 찾는 건

그나마 빈자리 하나라도 채워

불쌍한 젊은 목사양반 허전함 덜려는 마음 궁리도 있거니와

주책없는 몸으로 예배당 찾아

그래도 남은 눈물 드리는 건

거칠고 마른 손 모아 머리를 숙이는 건

아무도 읍기 때문입니다.


이 맘 아는 이 

아무도 읍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부지,

여기엔 아무도 읍습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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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 3:12-13) 

 

환자를 대동하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니 눈이 퐁퐁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는 눈이 시원의 세계로 저를 안내하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열린 흰 세계를 보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그 내용도 가물가물하지만 첫 문장만은 잊을 수 업습니다.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 삶의 무거움을 조금쯤 짐작하며 현실과는 아주 다른 세계를 꿈꾸었던 터라, 이 문장은 그야말로 주술처럼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흰 눈으로 덮인 세상은 분명히 사람을 낭만적으로 만듭니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나오는 한 두 구절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란 이름이 이국적입니다.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던 백석에게는 외롭고 쓸쓸한 자기 마음을 의탁하기에 적절한 이름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시구가 유난히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과 눈이 내리는 것을 인과 관계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요. 마치 황지우 시인이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설렘 가운데 기다리는 이의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고 노래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파트 앞은 눈밭으로 변했고,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아이 둘이 엄마와 함께 나와 썰매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미리 마련해 놓았던 것일까요? 그런데 저만치에서 나무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경비 아저씨였습니다. 아저씨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썰매를 타느라 빙판이 만들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겠지요. ‘에이, 잠깐이라도 눈 감아 주시지.’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내리는 눈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침묵’(Die Große Stille)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무려 168분짜리이니 짧다고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해발 1,300미터의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삶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이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한 봉쇄 수도원입니다. 대사도 별로 없고, 자연의 소리 이외의 인위적인 음악도 일체 배제하고, 자연 조명만으로 제작한 다큐입니다. 수도원의 삶이라는 게 단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노동하고 침묵하는 것이 다입니다. 침묵 속에서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옷을 다림질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참 거룩해 보입니다. 단순한 일상입니다. 한 가지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절뿐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들이 유일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산골에 눈이 내리자 하얀 수도복을 입은 수사들이 열을 지어 언덕을 올랐습니다. 울력이라도 하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언덕 아래로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습니다. 그 근엄하던 수사들의 입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놀이야말로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쉴러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들 속에는 너나없이 아이들이 숨어 있습니다. 역할과 지위와 나이라는 의상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잠시 깨어날 때 우리는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유머가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풀어준다면 웃음은 우울을 해독하는 명약입니다.

 

예수님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은 한결같이 그분의 거룩하신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맑고 고요한 관상의 깊이 속에 머물고 계신 주님을 그린 그림도 있고, 적대자들 앞에서도 한없이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그림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또한 비장합니다. 십자가 처형 장면을 형상화한 그림은 숭고한 아픔으로 우리를 압도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베다니 마을에 살던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평화를 알지 못하는 도성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주님은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눅 19:41). 이 말씀 앞에 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 5:7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인은 주님을 거역하고 역사의 주권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보시며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시2:4)고 말합니다. 이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웃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1980년대 초반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던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던 예수님의 초상이 있습니다. 그 그림 속에서 주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계십니다. 억압과 두려움이 먹장구름처럼 우리를 짓누를 때 주님의 그런 표정은 우리를 적잖이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자부하던 이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별명이 있습니다. ‘마구 먹어대는 자’, ‘포도주를 마시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입니다. 이런 별명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적어도 사람들의 목을 조르듯 답답하게 만드는 분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흔쾌하게 초대에 응하고, 낯선 이들과의 잔치를 즐기셨던 주님은 분명히 젠체하는 태도로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드는 열쇠와도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요? 영혼이 맑은 사람, 깊은 곳에 잇대어 사는 사람은 강박적일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힘들더라도 자꾸 유쾌하게 현실을 대하자고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행복’이라는 시는 역설적 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헤세는 그 바람이 절박할수록 행복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 목표나 목적을 정해놓고 맹렬히 돌진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붙잡으려고 쫓아다닌다면,

너는 아직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거야,

사랑스런 모든 것이 네 것이 된다 해도.

 

잃어버린 것을 네가 안타까워하고

목표를 정해 놓고 초조해한다면,

너는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모든 갈망을 단념하고

목표나 욕망 따위를 더 이상 알지 못할 때,

행복이라는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을 때,

 

비로소 일상의 물결은 더 이상 네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네 영혼은 안식을 찾으리라.”

-헤르만 헤세, ‘행복’, <인생의 노래> 중에서

 

대충대충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하며 조바심치거나 안달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고문하지 말고 묵묵히 일상을 충실히 살아낼 때 사람은 비로소 영혼의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원에 잇댄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나님의 값진 선물임을 자각하면서 한껏 기뻐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의무라는 단어가 조금 무겁지요? 그렇다면 영적 지혜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웃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이 많음을 잘 압니다.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수록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시130:1-2) ‘깊은 물’ 속에 빠져들 듯 암담한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해도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잠시 쓰린 시간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희망의 날이 움터 올 것입니다. 희미한 빛, 미미한 희망이라 해도 꼭 붙드십시오. 그 작은 빛과 희망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스며드는 통로이니 말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명랑함을 감염시킬 수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1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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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서 하는 사랑

한희철의 얘기마을(204)


숨어서 하는 사랑



밥을 안 먹어 걱정이던 규성이도 점심시간 제일 밥을 많이 먹는다. “엄마한테 갈 거야!” 한번 울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던 학래도 이른 아침부터 놀이방에 올 거라고 전화를 한다.


새침데기 선아도 친구들과 어울려 소꿉놀이에 정신이 없다. 할머니 젖을 물고 자 버릇 했던 제일 나이 어린 영현이는 아내 등이 낯선지 계속 잠을 못 잤고, 졸지에 엄마를 뺏긴 규민이만 칭얼대며 그 뒤를 쫓아다녔다.


희선이, 학내, 선아, 규민이, 재성이, 미애, 규성이, 영현이 등 모두 8명의 꼬마들이 아침부터 모여 자기들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작은 다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은 나름대로 질서를 세워가고 있다. 


미끄럼틀을 타기도 하고, 인형을 갖고 놀기도 하고, 장난감 총을 들고 새 잡는 흉내를 내기도 한다. 지나가는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노는 아이들 모습을 신기하고 귀엽게 바라보고, 종숙이 엄마는 애기 하나 더 낳아야겠다고 농만이 아닌 농을 한다.


간식 챙기랴, 쉬 시키랴, 밑 닦아주랴, 점심 차리랴, 아내 혼자 정신이 없다. 마땅한 봉사자가 없으니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일과 시간에 매여야 하는 불편과 힘겨움을 알면서도 필요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로 하는 시작, 대견하고 미안하고 고맙다.


집안 청소와 점심 설거지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식판을 닦는 일은 군에서 해보고 얼마만인지.


문득 결혼을 앞두고 샀던 복사기 생각이 났다. 결혼예물을 하는 대신에 우린 복사기를 한대 샀다. 시골로 갈 목회라면 아예 진득하게 처박혀 있자는 뜻에서였다. 복사기는 동네 부고 몇 번 복사하곤 고장이 나 지금은 고철로 처박혀 있지만.


그렇다. 이렇게 시작하는 놀이방은 또 하나의 ‘숨어서 하는 사랑’이다. 그분을 향한 사랑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다. 숨어서 하는 사랑이 내내 기쁨의 샘으로 솟아나길!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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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화자 좋은 날

신동숙의 글밭(311)


지화자 좋은 날




160년 전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월든 숲의 오두막에서 

동양의 주역을 읽던 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산골 오두막 머리맡에 둔 몇 권의 책 중에서

성 프란체스코를 읽던 날의 법정 스님


지리산 자락의 유가댁 자제인 열 다섯살 성철 스님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쌀 한 가마를 바꾸던 날


6·25 동족상잔 그 비극의 흙더미 아래에서

밤이면 책을 읽던 진실의 스승 리영희 선생님


감옥의 쪽창살로 드는 달빛을 등불 삼아

책을 읽고 종이조각에 편지를 쓰던 날의 신영복 선생님


주일 예배 설교단에서 

반야심경의 공사상을 인용하는 날의 목사님


초하루 법문이 있는 대웅전에서

요한복음 3장 8절을 인용하는 큰스님


천주교 식당 벽에 붙은 공양게송 한 줄 읊으며 

창문밖 성모마리아상 한 번 보고

밥 한 숟가락 먹던 날


거실에서 운동 삼아 백십배 절을 하다가

강아지 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더운 여름 갈증이 나는 날

쪼갠 수박 속이 잘 읽었을 때


추운 겨울날 노을빛 귤껍질을 벗기다가 

누군가 속에 껴입힌 하얀 털옷을 본 순간


아침마다 어김없이 해가 뜨고

저녁마다 달이 차고 기울고 사라지고 또다시

올려다본 별이 사람의 눈망울처럼 총총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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