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리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6)


괴리감


전해진 것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라지만, 얼마 전 뉴스에 언급된 교회가 있었다. 교회가 리더십 훈련을 한다며 대변 먹기, 음식물 쓰레기통 들어가기, 공동묘지에서 지내기 등을 강요했다는 내용이었다. 


교회와 관련한 뉴스 중에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뛰어 넘는 기괴한 뉴스가 한둘이 아니어서 이력이 붙을 만도 했지만, 대변 이야기는 이력이 붙을 대로 붙은 이들에게도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일이었지 싶다. 혀를 차는 것을 넘어 경악을 하게 했다.


뉴스 중 관심이 갔던 것은 조금 다른 것에 있었다. 그 교회 교인이 2-3천 명 정도가 되는데, 대부분이 젊은 교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성실하고 우직하게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적지 않은 이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성품도 따뜻하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역사의식도 뚜렷하고, 환경을 걱정하고, 교회와 교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교와 술수를 버리고, 약자를 긍휼히 여기고, 헛된 욕심을 삼가고, 가난함으로 부르심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이 땅 구석구석 외진 곳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규모로 따진다면 주목을 받을 일과는 거리가 멀고,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면 실패 쪽에 훨씬 더 가깝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가는,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 느끼는 감정을 괴리감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괴리’(乖離)는 ‘어그러질 괴’(乖)와 ‘떼놓을 리’(離)가 합해진 말이다. 굳이 그리 어렵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금 내가 느끼는 괴리감이란 훨씬 단순하다. ‘괴로운 거리감’이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리감  (0) 2020.05.27
로봇이 타 준 커피  (0) 2020.05.27
상처와 됫박  (0) 2020.05.26
고소공포증  (0) 2020.05.25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0) 2020.05.24
몸이라는 도구  (0) 2020.05.23
posted by

로봇이 타 준 커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5)


로봇이 타 준 커피


심방 차 해남을 방문하는 일정을 1박2일로 정했다. 길이 멀어 하루에 다녀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싶었다. 마침 동행한 장로님이 회원권을 가지고 있는 숙소가 있어 그곳에 묵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어둘 녘에 도착한 숙소를 보고는 다들 깜짝 놀랐다. 진도라는 외진 곳에 그렇게 큰 숙박시설이 있는 것에 놀랐고, 그 큰 숙소가 꽉 찬 것에 더 놀랐다. 평일이었는데도 그랬으니 말이다. 


권사님이 권한 일출을 보기 위해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났다. 남해의 일출은 동해의 일출과는 사뭇 달랐다. 바다 위가 아니라 섬과 섬 사이에서 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해가 떠오르며 하늘과 바다를 물들였던 붉은 빛은 바라보는 마음까지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해돋이를 보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차 한 잔을 하기로 했다. 이른 시간이었기에 프런트에 들러 차 마실 수 있는 곳을 물었다. 일러주는 옆 건물로 갔더니 커피 향은 나는데도 차를 파는 곳은 보이질 않았다. 지하까지 내려가 물었지만 같은 대답이었다. 1층에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와 둘러보았지만 1층 어디에도 찻집은 없었다.


이게 뭐지, 당황해하고 있을 때 우리 눈에 띈 것이 로봇이었다. 한쪽 구석에 로봇이 서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장식용으로 세워둔 것으로 알던 우리는 혹시나 싶어 로봇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직원들이 말한 곳이 그곳이지 싶었다. 


처음 대하는 상황, 서로가 이런저런 상상력을 발휘하며 모니터를 두드렸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말은 맞았다. 몇 가지를 택한 뒤 선택 자판을 누르니 드디어 로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능숙한 동작으로 커피와 음료를 뽑았다. 뽑은 음료를 쟁반 쪽으로 옮기는 동작까지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주문을 끝났지만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만났다. 음료는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꺼낼 수 있는지가 막막했다. 로봇은 아크릴 투명 벽 안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살펴보니 로봇 앞에 작은 스크린이 있었고, 거기에 번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있었다. 조금 전 차를 주문하며 받은 영수증에 번호가 찍혀 있는 것을 우리가 몰랐던 것이었다. 호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영수증을 다시 꺼내 거기 찍힌 번호를 누르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로봇, 마침내 우리는 원하는 음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로봇에게 음료를 주문하는 일을 마침내 해내다니, 우리는 일종의 뿌듯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발코니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 누군가의 말대로 마치 지중해 어디쯤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일상의 삶 속에서 멀리 떠나와 있다는 것, 드물게 아름다운 경치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거드는 것이 또 한 가지 있었다. 로봇에게 차를 주문해서 마시는 것이 마치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외국에 온 것처럼 느끼게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건 상관없이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리감  (0) 2020.05.27
로봇이 타 준 커피  (0) 2020.05.27
상처와 됫박  (0) 2020.05.26
고소공포증  (0) 2020.05.25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0) 2020.05.24
몸이라는 도구  (0) 2020.05.23
posted by

앉아 있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신동숙의 글밭(154)


앉아 있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하루의 생활이 앉아 있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뻐꾸기 소리에 눈을 뜨는 아침에도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로 움직이기보다는 이부자리에 그대로 앉습니다. 말로 드리는 기도보다는 침묵 속에 머무르는 고요한 시간입니다. 


고요한 아침을 그렇게 맞이하기로 하는 것입니다. 앉았는 자리가 먼 동이 트는 산안개가 고요한 어느 산기슭이면 보다 더 좋겠지만, 골방에서도 가슴엔 밝은 하늘이 펼쳐집니다. 밤새 어두웠을 가슴으로 숨을 불어 넣으며 더 내려놓으며 새날 새아침을 맞이합니다.



20년 전쯤에 요가를 배우며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12가지 기본 동작을 아사나라고 하는데, 요가 수행자들의 몸수행의 방편이었던 아사나는, 앉아 있기 위하여 움직이는 조화로운 몸동작인 것입니다. 보다 더 오래 앉아 있기 위하여 보다 더 깊은 수행으로 나아갑니다. 


몸을 앞으로 뒤로, 왼편으로 오른편으로, 앉았다 일어났다 업드리고 누웠다가, 때론 비틀기도 하면서 온몸의 근육을 다양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온몸 구석구석 빈틈 없이 숨을 불어넣기 위함입니다. 막힌 곳 없이 숨을 불어 넣으니 저절로 피 돌기가 잘 되는 것입니다. 건강은 저절로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런 몸으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더 오랜 동안 앉아 있기 위함입니다.


숲의 인디언들은 나무를 보며 서 있는 사람이라고 했고, 사람을 보며 걸어다니는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살아갈 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한 가지의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이 나무처럼 꽃처럼 제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면, 일상을 살아가다가 틈틈이 머물러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지구별 이 땅에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과장된 말도 허황된 말도 아닙니다.


한 가지의 예로 요가 동작 중 다들 힘겨워 하던 동작이 있습니다.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손끝으로 발끝을 잡고, 상체와 하체를 반으로 접는 동작입니다. 예전에 쓰던 일명 폴더 폰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하다 보면 몸은 접히지 않고 등은 산처럼 솟아 오르고 저도 모르게 숨은 턱턱 걸리며 몸도 마음도 턱 걸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대로 멈춤 동작을 지속하는 일은 온몸에 진땀이 나는 일이 됩니다. 내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순간입니다. 이때에도 흐르는 물같은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들숨 날숨의 호흡이 거칠에 지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호흡의 평온함은 그대로 마음의 평온함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순간의 호흡을 편안하게 유지하는 일입니다. 호흡의 숨결은 그대로 몸의 근육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몸이 더 나아가지 않을 때 숨을 들이 쉬고, 몸의 굳은 부분을 알아차리며, 숨을 내쉬면서 그 부분에 힘을 푸는 일입니다. 숨과 몸과 의식, 그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면서 지속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5분 이상 지속할 수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내 몸이 폴더 폰이 되는.


그러기 위해선 내 몸을 바라보는 의식이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합니다. 움직임의 삶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한 순간 깨어 있지 못하고, 의식이 무의식이 되는 순간, 숨은 턱 막히려 하고, 마음 따로 몸 따로 낑낑거리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깨어서 숨을 편안하게 유지하며, 숨을 내쉴 때 조금씩 굳은 부분에 힘을 풀면서 한 동작을 지속하는 일. 몸이 멈추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한 시간입니다. 깨어 있는 것은 바라보는 의식입니다.


이렇게 한 동작을 5분 이상 지속할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도 그랬고, 1분의 시간도 길게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요가를 예로 드는 이유는 머물러 앉아 있기 위함입니다. 예전에 제 자신이 요가를 배우며, 또 저보다 뒤에 배우려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지금껏 앉아 있는 일에 대한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일상을 살아가다가 깨어서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사람도 나무와 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내내 떠나지 않고 제 곁을 맴도는 생각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이 주변을 바람처럼 서성이고 맴도는 마음의 부름 같습니다.



앉아 있는 일은 비로소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 스스로 깊어지는 일입니다.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산책길이 됩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은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겐 태초의 혼돈과 어둠처럼 다가왔습니다. 그 속에서 한 점 별빛을 많이도 더듬어 찾았습니다. 


지금도 늘 낮과 밤처럼, 도로 위에 터널처럼 지금도 아무렇지도 않게 어둠은 찾아오고 아침 해는 돌고 돌아서 찾아옵니다. 오르내림처럼 들나듦처럼 들숨 날숨처럼. 그렇게 제가 움직이는 것이겠지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한 순간도 잠자는 순간에도 쉼없이 움직이는 제 생각과 마음에 안식을 주기를 원합니다. 앉아 있음은 안식이 됩니다.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태초의 에덴 동산이 되고, 살아서 미리 체험하는 천국이 됩니다. 비로소 머물러 앉아 고요한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며, 오늘 하루도 틈틈이 더 앉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린 나무의 싹이 굵은 나무가 되고, 꽃씨가 꽃이 되는 그 보이지 않는 선명한 길이, 단지 제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기 때문은 아닌지 거꾸로 생각해봅니다. 사람이 푸른 나무가 되고, 아름다운 꽃이 되는 길을, 말없이 알려 주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상처와 됫박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4)


 상처와 됫박


이따금씩 떠오르는 사람 중에 변관수 할아버지가 있다. 나이와 믿음 직업 등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정을 나눌 수 있는 분으로 남아 있다. 변관수 할아버지는 단강교회가 세워진 섬뜰마을에 살았는데, 허리가 ‘ㄱ’자로 꺾인 분이었다. 언젠가 할아버지는 논둑에서 당신 몸의 상처를 보여준 적이 있다. 6.25때 입었다는 허리의 상처가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할아버지가 이번 겨울을 잘 나실까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겨울잠에 들기라도 한 듯 바깥출입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겨울 지나 봄 돌아오면 제일 먼저 지게를 지고 나타나는 분이 변관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몸도 기역자, 그 위로 삐쭉 솟아오른 지게도 기역자, 지게를 진 할아버지의 모습은 묘한 형상을 만들어내곤 했다. 논둑 밭둑에서 달래를 캐는 날엔 꼭 사택에 들러 한 움큼 달래를 건네주던 정 많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집에는 됫박이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 말로는 ‘부엉이가 방귀 뀐’ 소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소나무의 어떤 부분에 병균이 침투하면 그 부분이 크게 부어오르듯이 두툼하게 변한다. 일종의 상처일 터였다. 그 부분을 잘라내어 ‘부엉이 방귀 뀐’ 부분은 동그랗게 파내어 됫박으로 쓰고, 가지 부분은 됫박의 자루로 쓰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벌써 오래 전, 할아버지 집에 있던 검붉은 빛 선명한 부엉이 방귀 뀐 됫박은 어디에 남았을지 모르겠다. 따로 됫박을 쓸 일도 드문 세상, 어쩌면 할아버지와 함께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문득 떠오른 ‘부엉이가 방귀 뀐’ 됫박은 묘한 의미로 다가온다. 어쩌면 상처가 됫박이 된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도,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품의 크기나 깊이도, 어쩌면 그가 입은 상처 혹은 그가 이겨낸 상처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리감  (0) 2020.05.27
로봇이 타 준 커피  (0) 2020.05.27
상처와 됫박  (0) 2020.05.26
고소공포증  (0) 2020.05.25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0) 2020.05.24
몸이라는 도구  (0) 2020.05.23
posted by

고소공포증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3)


고소공포증


새벽기도회 시간에 설교를 하는 수련목회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군에서 제대를 하기 전까지 심한 고소공포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높은데 올라가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식은땀이 나며 큰 두려움을 느꼈는데, 심지어는 텔레비전에서 누가 높은데 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도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기억해낸 어릴 적 기억이 있단다. 삼촌들이 모여 서서 어린 자신을 손에서 손으로 공을 던지듯 던지며 놀았다는 것이다. 어린 조카가 너무나 귀여워서 한 일이었겠지만, 자신이 생각할 때는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고소공포증이 생긴 것 같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순간에 하늘을 나는 무서움을 큰 울음으로 표현했다면 당연히 놀이는 멈췄을 터, 하지만 자신은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고는 아무런 표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삼촌들은 조카도 재미있어 한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던지기를 했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어디 그것이 전도사뿐일까. 누군가에게는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을 일을 누군가는 장난삼아 하는 일이.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봇이 타 준 커피  (0) 2020.05.27
상처와 됫박  (0) 2020.05.26
고소공포증  (0) 2020.05.25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0) 2020.05.24
몸이라는 도구  (0) 2020.05.23
사랑과 두려움  (0) 2020.05.22
posted by

제자리에서 피운 꽃

신동숙의 글밭(153)


제자리에서 피운 꽃





작약, 수레국화, 양귀비, 민들레, 금계국, 개망초, 철쭉, 소나무꽃, 초록 잎사귀, 둘레에는 언제나 넉넉한 하늘


초여름 강변에 피운 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쉼 없이 떠돌아 다니는 생각은 바람이 되고
집 없이 자꾸만 흐르는 마음은 강물이 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저절로 알 때
제자리에서 피운 꽃들에게서 배웁니다.


바람이 꽃이 되고
물이 꽃이 되는 길을


제자리에 머물러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진리의 땅에 사색의 뿌리를 내리는


들숨 날숨에 기대어 마음을 내려놓으며
명상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일상 속에 그려봅니다


상관없는 모든 아픔에까지 빗물 같은 눈물을 흘리다가
햇살 같은 웃음을 욕심 없이 짓다 보면

씨앗처럼 작고 단단한 가슴이 열리어


제가 앉은 자리에서도
제 안에 아무 것도 없던 땅에서도


진실의 꽃 한 송이
저절로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신동숙의 글밭 > 시노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자리에서 피운 꽃  (0) 2020.05.24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0) 2020.05.23
영혼의 종소리  (0) 2020.05.18
누구 이마가 더 넓은가  (0) 2020.05.10
카네이션보다 안개꽃  (0) 2020.05.09
몽당 연필은 수공예품  (0) 2020.05.08
posted by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2)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잠에서 깨었을 때,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소리, 새들이었다. 필시 두 마리 새가 나란히 앉아 밤새 꾼 꿈 이야기를 나누지 싶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새들의 소리가 시끄럽게 여겨지질 않았다.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데도 오히려 정겹게 여겨졌고, 윤기 있는 소리에 듣는 마음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무엇 때문일까? 단지 새소리이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새들이라고 무조건적인 아량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새벽 이른 시간 끊임없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데에는 분명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새소리를 들으며 세수를 할 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잠언의 한 말씀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잠언 27:14)는 구절이었다.


그동안 교회는 축복을 한다는 이유로 새벽에 큰 소리를 냈던 것은 아닐까, 큰 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는 이웃을 향하여 지금 축복을 하는데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반응이냐며 오히려 불쾌하게 여겨왔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축복을 한다고 해도 이른 새벽의 큰 소리는 듣는 이들에게 저주와 다를 것이 없는 데도 말이다.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마땅히 전하는 방법 또한 축복이어야 한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처와 됫박  (0) 2020.05.26
고소공포증  (0) 2020.05.25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0) 2020.05.24
몸이라는 도구  (0) 2020.05.23
사랑과 두려움  (0) 2020.05.22
청개구리의 좌선  (0) 2020.05.21
posted by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신동숙의 글밭(152)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오늘의 가난함은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하루치의 부유함 속에
씨앗처럼 품고 품은
빈 가슴의 가난함이다


풍성한 밥상 앞에서
밥알처럼 곱씹는
굶주린 배들의 가난함이다


행복의 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는
목마른 입들의 가난함이다


오늘 먹고 마신
부유함이 품은 가난함
있음이 품은 없음


모두가 잠 든 후
홀로 앉아서
없음을 알처럼 품는다


없음을 품고 품으며
침묵의 숨을 불어 넣으면


빈 가슴이
속속들이 차올라


없는 가슴을 채우는 건
있음의 부유함도 풍성함도 행복도 아니다 


없음을 채우는 건
없는 듯 있는 하늘뿐이다

'신동숙의 글밭 > 시노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자리에서 피운 꽃  (0) 2020.05.24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0) 2020.05.23
영혼의 종소리  (0) 2020.05.18
누구 이마가 더 넓은가  (0) 2020.05.10
카네이션보다 안개꽃  (0) 2020.05.09
몽당 연필은 수공예품  (0) 2020.05.08
posted by

몸이라는 도구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1)


몸이라는 도구 


인우재 방에 깔린 비닐장판을 걷어내고 종이장판을 깔았다. 처음엔 흙 위의 멍석이 전부였다. 멍석이란 짚으로 만든 것, 생각하면 단순했다. 널찍한 돌로 된 구들장을 깔았으니 돌 위의 흙, 흙 위의 풀이 방바닥의 전부인 셈이었다. 방에 누울 때마다 자연 위에 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았지만 인우재를 찾는 이들이 불편해 했다. 엉덩이가 배기는 것보다는 벌레와 친하지 못한 이들의 불편이 참으로 컸다. 어떤 이는 경기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결국은 멍석을 걷어내고 종이를 붙였다. 쌀을 담던 부대의 종이를 붙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 먼 친척 되는 분이 요양차 1년여 머무는 동안 비닐장판을 깐 것이었다.


비닐장판은 물걸레질을 할 수 있어 편하긴 하지만, 인우재와는 안 어울렸다. 무엇보다도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을 덥혀야 하는 구조에선 더욱 그랬다. 뜨거운 방바닥에 비닐장판, 마음부터 편하지가 않았다.



주일 저녁 아내와 함께 인우재를 찾아 다음날 새벽부터 일하기를 시작했다. 방의 짐부터 옮겨야 했다. 이부자리를 옮기고, 책꽂이를 비우기 위해 책을 옮긴 뒤 책장을 밖으로 냈다. 비닐장판을 벗겨내니 벽지 아래쪽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일일이 잘라내고 잘라낸 곳에 초배지를 바른 뒤 벽지를 발랐다. 방바닥에도 초배지를 발랐다. 방에 불을 때고 초배지가 마르기를 기다려 그 위에 장판지를 붙였다. 두툼한 장판지를 붙이기 위해서는 먼저 장판지를 물로 적셔두는 것이 필요했다.


간단할 것 같았지만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사이사이 쉬는 시간엔 불쑥 자라 오른 마당의 풀을 베기도 했다. 오후가 되어 일을 마칠 즈음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야 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자유롭지 못했다.  


돌아오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잠시 마루에 앉아 쉬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60년 넘게 쓰는 연장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10년 쓰는 연장도 찾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몸이라는 연장을 60여 년 써왔으니, 고단할 때도 된 셈이었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몸, 그런데도 60년을 넘게 쓰고 있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고단함을 통해 깨닫는 고마움이 새삼스럽고 새로웠다. 아프다고 고단하다고 불평만 할 일이 아니었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소공포증  (0) 2020.05.25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0) 2020.05.24
몸이라는 도구  (0) 2020.05.23
사랑과 두려움  (0) 2020.05.22
청개구리의 좌선  (0) 2020.05.21
망각보다 무서운 기억의 편집  (1) 2020.05.20
posted by

사랑과 두려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0)


사랑과 두려움




사막 교부들의 금언을 읽다가 만난, 압바 이시도루스의 말이다.


“제자들은 진정 자기 스승인 사부들을 사랑하고, 자기 지도자인 그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사랑 때문에 두려움을 잃어서도 안 되고,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어둡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의 말이 공감되는 것은 더 이상 두려움도 사랑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 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조심스러운 걸음새를 갈수록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