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없는 사랑

신동숙의 글밭(259)


멈출 수 없는 사랑




물이 흐르는 것은

멈출 수 없기에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

무슨 수로 막을까


매 순간 흐르고 흘러서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물처럼


멈출 수도 없는 

끊을 수도 없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멈출 수 없는 사랑


햇살이 좋은날엔 

무지개로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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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7)


변소


언젠가 아내의 친구가 단강에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와서 지내다 아내에게 화장실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더니 고개를 흔들며 “여기 아닌데” 하며 그냥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배를 잡고 웃었지만 허름한 공간 안 땅바닥에 돌멩이 두 개만 달랑 놓여 있었으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친구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네를 가도 익숙해졌지만 저도 단강에 처음 왔을 땐 변소 때문에 당황했었습니다. 들어가 보니 한쪽 구석에 돌멩이 두 개만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다 틀리지 않게 일을 보긴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수세식에 익숙해진 터에 돌멩이에 올라앉아 맨땅 위에 일을 본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편해야 할 그 자리가 불편한 자리가 되고 말았고, 다시 편한 자리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단강의 변소는 대개가 그러합니다. 무엇보다 모양이 허술합니다. 구멍이 숭숭 뚫려 밖이 보이기도 하고, 휘휘 바람이 자유롭게 통하는 헛간 같은 곳입니다.


구조도 간단합니다. 웬만큼 넓적한 돌멩이 두 개만 있으면 되고, 그 뒤에 재나 겨를 쌓아두면 됩니다. 삽이나 넓적한 나무를 귀퉁이에 세워두면 더 이상은 필요한 게 없습니다.


큰일을 보고 나면 뒤에 있는 재나 겨를 변 위에 뿌리고 다시 뒤편으로 밀어내면 됩니다. 그렇게 쌓인 것들은 나중 좋은 거름이 됩니다.


맨땅 위 김이 허옇게 오르는 것을 막대기로 치우는 데는 비위가 약해서는 안 됩니다. 침을 꿀떡 삼키고는 후딱 처치를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스운 일입니다. 결국 자기가 먹은 것 자기가 싸는 것인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낸 몸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모양이 그렇고 냄새가 그렇지 그 모든 게 선입견만 버리면 더러울 게 하나 없는 것입니다. 먹고 싸고, 싼 것을 다시 먹거리를 위해 거름으로 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인 것입니다. 


요즘 동네에 변소개량 작업이 벌어졌습니다. 시커먼 플라스틱 통을 땅에 묻고 번듯한 변소를 짓는 것입니다. 듣기로는 나라에서 반 보조가 있어 반만 부담하면 된다 합니다.


그게 필요한 일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아쉬움이 없는 게 아닙니다. 편리를 내세워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이 적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눈 똥, 제가 확인해 모았다가 제 먹거리 위해 쓰는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이젠 쉬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원시적이고 미개하다 할진 몰라도 그간 몸에 익은 탓인지 뭔가 아쉬움도 남습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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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네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26)


은희네 소


은희네 소가 은희네로 온 지는 10년이 넘었습니다. 정확히 그 연수를 아는 이는 없지만 대강 짐작으로 헤아리는 연수가 십년을 넘습니다. 이젠 등도 굽고 걸음걸이도 느려져 늙은 티가 한눈에 납니다.

은희네 소는 은희네 큰 재산입니다. 시골에서 소야 누구 네라도 큰 재산이지만 은희네는 더욱 그러합니다. 


팔십 연줄에 들어선 허리가 굽을 대로 굽어 고꾸라질 듯 허리가 땅에 닿을 할머니, 은희네 할머니가 온 집안 살림을 꾸려갑니다. 아직 젊은 나이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지만 그들조차도 이런 일 저런 일 크고 작은 일에까지 할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중3인 은희야 제 할 일  제가 한다 해도 이제 초등학교 3학년과 2학년인 은옥이와 은진이 뒷바라지는 역시 할머니 몫입니다.



이런 저런 농사일 꾸려 나가려면 적지 않은 품이 들고, 품의 대부분은 다시 품으로 갚아야 하는데 품 갚을 손이 집안에 없습니다. 그럴 때면 소가 나섭니다. 사람 대신 소를 보내도 소로 사람 품 수를 쳐주는 까닭입니다.


그런 주인 집 사정 저도 안다는 듯 은희네 소는 십년이 넘도록 묵묵히 온갖 일을 해왔습니다. 게다가 때마다 송아지를 쑥쑥 잘 낳아주니 그런 든든한 재산이 어디 쉽겠습니까.


어디 하나 의지할 데 없이 막막한 삶을 살아가는 은희 할머니, 어쩜 은희 할머니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것은 소, 말 못하는 소인지도 모릅니다. 당신보다 소 먼저 죽는다면 죽은 소 정성스레 묻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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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성당

신동숙의 글밭(258)


구멍가게 성당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답

작은 마을의 어둑해진 골목길은 좁은길


구멍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카운터를 지키시던 주인 아주머니가 

오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텔레비젼을 바라보시며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색색깔의 과자봉지와 음료들은 아울러

중세시대 성당의 화려한 비잔틴 모자이크가 됩니다.


간혹 종지에 촛불을 켜고 앉으셔서 늦은 밤까지

학원에서 돌아오는 딸아이의 밤길을 지켜주기도 하시는


염주알인지 묵주알을 돌리시기도 하는 구멍가게

아들이 좋아하는 과자가 풍성한 이곳은 기도의 성당


두 손을 모으신 아주머니가

홀로 드리는 저녁 미사를 두고

간혹 싫어하는 손님도 계신다지만, 


앞으로 과자를 사러갈 때면

기도의 성당으로 들어가듯 

달콤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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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들꽃


단강에 와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들꽃의 아름다움입니다. 곳곳에 피어있는 이런저런 들꽃들. 전엔 그렇게 피어있는 들꽃이 당연한 거라 여겼을 뿐 별 생각 없었는데, 요즘 와 바라보는 들꽃은 더 없이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쑥부쟁이, 달맞이꽃, 달개비, 미역취 등 가을 들꽃이 길가 풀섶에, 언덕에 피어 가을을 노래합니다.

때를 따를 줄 아는 어김없는 모습들이 귀하고, 다른 이의 주목 없이도 자신의 모습 잃지 않는 꿋꿋함이 귀합니다. 제 선 자리 어디건 거기 넉넉히 뿌리를 내리고 꽃으로 피어나는 단순함이 또한 귀합니다. 꾸밈없는 수수함은 또 얼마나 정겨운지요.


필시 우리도 들꽃 같아야 할 것, 지나친 욕심과 바람일랑 버리고 때 되면 제자리에서 피어나 들꽃처럼 세상을 수놓을 것, 주어진 시간을 노래할 것, 들꽃을 바라보며 들꽃 같은 삶을 바래봅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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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찬 온기

신동숙의 글밭(257)


알찬 온기




혼자 앉은 방

어떻게 알았을까


책장을 넘기면서 숨죽여 

맑은 콧물을 훌쩍이고 있는 것을


누군가 속사정을 

귀띔이라도 해주었을까


있으면 먹고 없으면 

저녁밥을 안 먹기로 한 것을


들릴 듯 말 듯 

어렵사리 문 두드리는 소리에

마스크를 쓴 후 방문을 여니


방이 춥지는 않냐며 

내미시는 종이 가방 속에는

노랗게 환한 귤이 수북하다


작동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놓아주시는 난로에 빨간불이 켜지고

방 안에 온기가 감돈다


가을 햇살처럼

알찬 온기에


시간을 잊고서 

밤 늦도록


<무지의 구름>과 <신심명(信心銘)>의 허공 사이를

유유자적(悠悠自適) 헤매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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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기자는(3)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10. 25. 07:00

전도서 기자는(3)


인간은 누구나 늙어가고 또 기력이 쇠하여 어쩌지 못하는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한때의 젊은 시절의 힘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그 자랑으로 한 평생을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권좌의 영광에 취해 교만해지고, 자신의 간교한 지혜에 자만하여 구덩이를 파다가 자신이 그 구덩이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전도서의 기자는 책은 아무리 읽어도 끝이 없으며 공부만 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12:12)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널려 있고, 그걸 쫓아다니면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는 것이다. 최고의 지혜자라고 알려진 전도서의 기자는 지식에 의한 명성을 도리어 거부하고 있으며 그것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을 택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이기에 백성에게 자기가 아는 지식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잠언을 찾아내어 연구하고 정리하였다. 전도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으려고 힘썼으며, 참되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말을 찾으면, 그걸 바르게 적어 놓았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찌르는 채찍 같고, 수집된 잠언은 잘 박힌 못과 같다. 이 모든 것은 모두 한 목자가 준 것이다.”(12:9-11)라고 자신의 지혜의 근원을 밝히고 자신이 살면서 애써온 바를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모두 자칫 12절의 말씀에서 밝혔듯이 끝이 없고 곤고한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 한 목자가 자신에게 준 말씀의 결론적 취지에 속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12:13-14)

 

전도서 기자는 세상이 자신의 영광을 칭송하고, 자신 역시 자랑했던 그 모든 것을 이면에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생각, 소행, 사건들을 떠올린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무리 잘 났고 아무리 높고 아무리 강성해도, 그래서 남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칭찬하며 감탄할 지라도 이들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일”, 그것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은밀한 일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결국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 아시고 기억하시며 또한 판단하신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면,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구하려는 영광과 성취, 그리고 부와 명성 이 모든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돌아보라는 것이다. 자신과 세상에는 영광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이고, 자신과 세상에서는 성취와 명성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과 위선이라면 어찌하겠는가라는 질문이다. 자신과 세상 앞에서는 부와 권력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악행이자 죄라면, 그 모든 것은 결국 다 헛되고 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도서는 과연 인생의 덧없음과 헛됨을 일깨우고 말하는 책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도리어 인생이 헛되지 않고 덧없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성찰, 일깨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보니 사는 것이 별 볼일 없고 아무것도 아니더라,가 아니라 진실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따로 있더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길을 가지 말고 지혜로운 길로 가라는 것이다. 세상의 평판과 칭찬, 저주와 비난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서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세상의 유혹과 칭송, 세상의 무시와 외면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보람 있고 뜻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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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이

한희철의 얘기마을(125)


되살이


죽을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다시 살아나 이어가는 삶을 단강에서는 ‘되살이’라 합니다. 


우속장님을 두고선 모두들 되살이를 하는 거라 합니다. 십 수 년 전, 몸이 아파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의사가 아무런 가망이 없다고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습니다.


개울에서 빨래를 하다 ‘병원 하얀 차’가 마을을 지나 속장님 집으로 올라가는 걸 본 허석분 할머니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곧 무슨 소식이 있지 싶어 집에 와 두근두근 기다리는데 밤늦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올라가 봤더니,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쇠꼬챙이처럼 말라 뼈만 남은 몸을 방바닥에 뉘였는데, 상처 부위가 형편이 없어 정말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렇게 몇 달이나 갈까 동네 사람들 모두가 안쓰럽기만 했습니다. 그런 것이 벌써 십 수 년이 지났습니다.


아직도 속장님은 건강하지를 못합니다. 조금만 일을 해도 숨이 차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해야 하는데, 그런데도 모자라는 일손 메꾸느라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사는 것이 기적이라고 속장님 사정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럽니다. 그런 속장님의 삶이야말로 ‘되살이’라는 것입니다.


속장님의 되살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삶 또한 되살이일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허락받은 하루하루, 그게 어디 우리 것이겠습니까. 하루하루를 값없는 은총으로 받아, 우리 모두는 되살이의 삶을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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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비텐베르크, 2020년 10월 서울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10. 24. 10:17

151710월 비텐베르크, 202010월 서울

 

비텐베르크


흑곰호텔의 아침 식사용 식당에서 곰이 으르렁거린다. 벨기에의 관광객 한 그룹이 뷔페 식당으로 들어왔다. 함부르크에서 온 운동복 차림의 부부는 엘베 강변의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서둘렀다. 네덜란드에서 온 한 교회의 교인들은 먼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조언한다. 도시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대부분 마르틴 루터를 보기 위해서다.


비텐베르크의 슐로스키르헤(Schlosskirche)교회는 온통 다가오는 만성절(할로윈데이) 준비에 여념이 없다. 수많은 성인들의 유적이 제단 위에 흩어져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한 조각, 저기에는 피 한 방울 혹은 순교자들의 뼈.



루터는 요새화된 탑의 고요한 골방에서 통찰을 얻는다. 인간은 업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 사상은 개신교회에 해방의 복음이 되었다. 신생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 마르틴 루터가 그의 95개조 명제를 성안의 교회 북문에 쇠망치로 못을 박아 걸었을 때, 순례자들과 쿠어작센 군주의 수도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확증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수 없다.”

연보궤에 동전이 쨍그랑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처럼 당시 가톨릭 교회가 자행하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교황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95개 항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95개조는 활발한 면죄부 거래와 천박한 경건에 대항한 개혁의 깃발이었다.


‘95개조 반박문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루터의 행동에 대해 교황은 처음에 술 취한 독일인의 주정정도로 치부했으나 사태가 확산되자 강경 대응하기로 결정한다.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에게 내린 파문 교서는 루터를 비하하는 인신공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어나소서, 오 주여! 당신의 소송사건을 심판하소서. 멧돼지 한 마리가 당신의 포도원에 침입하였나이다.” 파문 교서를 받은 저돌적인 멧돼지 루터는 보기 좋게 이를 불태워버렸다.

 

2020년 10, 서울


서울 광화문 광장이 난리도 아니었다. 성조기의 물결과 함께 기도 소리와 찬송, 그리고 목사들의 외침은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을 치고 있었고 남자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종교집회인지 아니면 정치집회인지 또는 외국의 명절이나 국경일을 위한 모임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성조기와 십자가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여자들의 울음 섞인 기도와 남자들의 분에 찬 아우성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연단에 오른 한 목사는 강한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완전히 빨갱이 천지가 되고 있어요.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청와대에는 빨갱이가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뿐인 줄 압니까? 언론, 방송, 말할 것도 없이 죄다 빨갱이가 접수했어요. 이러다가 이 나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나라 정부, 문재인이가 다 말아먹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이 나라가 직면한 위험을 알려야 합니다. 절망에 빠진 이 나라가 교회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보세요, 오늘 이렇게 많이 모일 줄이야. 아마도 저 빨갱이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도처에서 우렁차게 쏟아져 나왔다. 그 아멘 소리가 매우 위협적이라고 예수는 느꼈다. 아멘 소리에 핏발이 서 있었다. 전투를 준비하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들이 적으로 삼는 이들은 누구인가? 십자군 전쟁을 하려는 이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예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 저 성조기가 십자군 깃발인가 싶었다. 연단의 목사는 계속 자신의 말을 자기도취적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교회가 이런 때에 침묵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구국의 대열에 나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저 바알을 따르는 자들이 이 나라를 사탄에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 정보에 훤하게 밝은,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말씀해주시기를, 김정은이 보내고 훈련시킨 자들이 지금 이 어지러운 때를 이용하여 김정은이가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고 난 목사는 그러니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려는 자들은 모두 빨갱이에다가 김정은이 부대라고 힘주어 말한 후, 지리한 기도를 시작했다. 예수는 하도 지겨워져서 자리를 떠나려 하다가 어느 나이 든 목사가 뒤이어 연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하였다. 저이는 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나, 예수는 새로이 등단한 노년의 목사를 주시했다매우 묵직하고 다소 쉰 음성이었다.


, 이 나라가 참으로 통탄할 지경에 처해 있어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깊이 회개하고 믿음대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아직 뭐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늙은 목사의 음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보세요, 이 성조기의 아름다움을! 보세요, 이 성조기의 물결을!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이 지상에서 최고로 축복하신 나라 아닙니까? 누가 그 나라를 당해냅니까? 저 이라크의 후세인 꼴 좀 보세요.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그만 지금은 저렇게 초라한 몰골이 되지 않았습니까? 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그대로 증명한 사태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도구가 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미국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는 이 대목에서 기가 막혔다. 본질은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서 계신가 하는 것인데 말이다. 자신들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서 이처럼 온갖 폭력을 휘두른다는 말인가목사의 말은 이어졌다.


“6·25 때 우리가 누구 덕분에 살아났습니까? 저 남쪽 한 뼘 남은 땅 말고 다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는데 미국이 천사처럼 나타나서 우리가 이렇게 오늘날 그런대로 살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 철모르는 자들이 날뛰면서 반미 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그러니까 미국이 미군 빼간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제 바지가랑이 붙잡아도 기분이 영 잡쳐서 그냥 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안보 불안, 누구 짓입니까? 바로 저 빨갱이들 때문이 아닙니까?”


성조기가 한껏 흔들리고 있었다.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감격한 표정으로 성조기를 하늘 높이 들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러분, 우리의 이 믿음을 또한 누가 전해주었습니까? 바로 미국 아닙니까? 그 미국을 대적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저 빨갱이 무리들이 원하는 것은 미국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입니까? 뻔하잖아요? 김정일이가 인민군을 앞세워 남침하는 것 아닙니까? 불바다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미군 나가게 하고 그 틈에 서울을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거죠. 이거 우리 그대로 눈뜨고 당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아니오하고 합창했다. 갑자기 분기탱천하는 모습들이었다. 차마 입에 담지 말아야 말을 쏟아내고 있는 목사의 말은 가관이었다. 



“000이가 죽으니깐요, 국민들의 얼굴 색깔이 달라졌어요. (아멘) 국민들이 훤해졌어요, 훤해졌어요. (아멘) 앞으로 몇 명만 더 죽으면 아마, 하하하. 주여, 000 절대로 자살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감방만 갔다가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하하. 000 너 눈에 만만하게 보이냐? 교회가? 그러면 너도 000 같이 돼버려.”


목사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하는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저 사탄의 무리들에게 불 심판을 내리소서. 미국을 축복하여주시고 청와대에 들어가 있는 주사파들을 몰아내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소리에 지축이 울리는 듯하였다.


예수는 너무나 슬펐다.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이 부끄러웠고, 게다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주장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통탄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예수는 10월 마지막 주가 종교개혁주일인 것을 떠올렸다. 그의 시야에는 저 500년 전 독일의 한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개혁의 신호탄은 쏘아 올려졌으나 이 나라의 교회는 개혁의 포장만 하고 있을 뿐 내용은 수구 보수였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이 땅에 오면 과연 무엇이라고 할까? 예수는 심히 착잡했다.

 

15171031일 비텐베르크


예수의 마음은 50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15171031. 독일 비텐베르크에는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를 대상으로 하여 당시 가톨릭 교회를 정면으로 치고 나오는 중대한 선언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저 유명한 ‘95조항이다. 당시 로마 교회는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그곳은 이미 신앙의 성지가 아니라 장사하는 자들의 집단이 되어가고 있었고 권력투쟁에 몰두한 자들의 서식처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1510년 로마를 여행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깊은 실망과 회의를 느꼈다. 그의 머리와 가슴에는, 아 이것은 아닌데 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자라면서 그는 점차 로마 교회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자가 되어갔는데, 애초에 그는 로마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나 그러한 믿음은 그의 이상론에 불과했음을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그는 교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으로 가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파문이라는 직격탄을 맞지만 루터는 더 이상 교황과 가톨릭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나서서 개혁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성서로 돌아가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라는 것이었다. 교회가 하나님을 내세워 권력의 성채로 변질된 것에 대한 격렬한 투쟁이었다. 예수의 상념이 여기까지 미치면서 그는 당시 루터의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는 글을 하나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루터는 더 이상 로마가 아닌 당시 황제 카를 5세에게 자신의 입장과 주장하는 바를 알리고, 그의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이해시키는 동시에 그의 동의를 구하려 하였다. 물론 여기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뻔했던 선제후 현인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초청과 취소를 거듭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 카를 5세는 루터를 1521417일 보름스 의회에 초청한다. 그곳에서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수 있는 발언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독일인이었던 루터는 당시 제국헌법에 있던 독일인은 그 직위를 막론하고 독일 밖에서 심문을 받을 수 없다는 조항에 따라 로마가 아닌 독일, 그것도 보름스에서 재판 아닌 재판을 받았다.


416일 도착한 루터는 다음날인 417일 제국의회 앞에 선다. 그곳에서 루터는 가톨릭 황제들의 대를 이은,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부르군드, 스페인 그리고 나폴리의 주인이던 황제 카알 5세 앞에 섰다. 그에 비하면 루터는 자신의 믿음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보잘것없는 한 수도사였던 것이다.


루터는 17일과 18일 황제와 선제후 그리고 다른 여러 제후들 앞에서, 그리고 23-24일의 의회 위원회의 청문회에서, 세 번에 걸쳐 심문을 받고 변호를 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심문하는 심문자(Johann Eck von Trier)와 그곳에 참석한 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고 단호하게 알리게 된다.


417일 첫 날의 심문에서, 에크는 루터가 쓴 책들을 모아놓고 루터에게 그것들이 모두 루터 자신의 책인지를 묻는다. 루터는 그것을 인정한다. 두 번째로 그것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지를 물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당시의 황제 앞에서 무모할 정도로 당당하게 황제에게 생각 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을 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앞에서 한 수도사가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다행히 카를 5세는 그에게 하루의 여유를 주었다. 그뿐 아니라 다음 날 계속된 심문에서 루터는 자신의 변호를 먼저는 독일어로 다음에는 라틴어로 행하였는데, 황제인 카를 5세가 독일어를 하지 못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는 황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루터에게는 세속의 황제보다도 더 두려운 분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심문은 그대로 기록되어져서 인쇄물로 나왔는데, 첫 인쇄물에 루터의 마지막 말,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이라는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루터는 로마의 거대한 교회 앞에서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일개 수도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 장대한 권세와 맞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이것 하나였다.


그리하여 마르틴 루터는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그에게 의지처가 있었다면 오직 하나, 하나님뿐이었고, 그로써 그는 현실의 교회 권력을 변화시키는 개혁의 놀라운 힘을 뿜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명제>


그 마르틴 루터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예수는 루터가 보게 될 것은 그가 로마에서 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는 거대한 성채가 된 교회, 그리고 현세의 축복을 모두 독점하려는 탐욕, 거기에 덧붙여 성서가 아닌 자신들의 주장을 신앙으로, 교리로 만들고 있는 신성모독의 죄를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주일에 무엇을 기념하게 될까? 다만 루터의 이름을 따라 개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일 뿐이지 않을까? 더욱이 이들이 주장하는 북한에게 나라를 통채로 넘긴다는 가짜 뉴스와 빨갱이 운운, 미국에 대한 찬양과 숭배에 가까운 옹호란 결국 그들의 숨겨진 탐욕과 기득권을 지켜내려는 것 아닌가? ,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내세워 자신들의 속셈을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는 두려웠다. 그 심판의 결과가 실로 무섭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 옛날,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던 말을 떠올리면서 지금 그 초라한 나사렛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무장한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라는 탄식소리를 듣는다. 개혁의 걸림돌로 교회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수구적 기득권의 대변자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오늘 한국교회는 어떤 자리에 있는가? 예수는 역사의 과거 유산을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와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 개혁 과제를 안고 있는 교회가 어느새 기득권 세력의 일부가 되어 서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저자거리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오래 전 갈릴리를 주유하면서 일깨웠던 사랑과 정의, 그리고 예언자적 사명은 이들 교회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 이들은 실로 깨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들의 권력과 탐욕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강대국에 대한 자신들의 굴종을 교리로 치장하여 뭇신도들을 속이는 것은 무엇으로 심판되어야 하는가?


예수는 10월의 가을 하늘을 보면서, 교회는 저렇게 맑아야 하는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둠이 깊지만, 그것은 결국 새벽이 곧 올 것이라는 징조가 아니겠는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개혁, 그것을 위한 성령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지도 모르게 불어올 것이다, 예수는 그렇게 마음에서 외쳐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밤이 이슥해진 골목길을 지나 산등성이의 작은 교회당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 교회의 문 앞에는 “교회가 미안합니다라는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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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연장이 되어

의의 연장이 되어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롬6:13)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기쁘게 즐겁게 한 주를 지내고 계신지요?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나날입니다만 뜻하지 않은 황사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네요.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잊은 채 지냈는데, 우리가 처한 현실의 엄중함을 다시 자각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시드럭부드럭 꽃들이 스러지고 있지만 개망초 쑥부쟁이 바늘꽃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장하고 예쁩니다. 말은 통하지 않으니 따뜻한 눈빛을 보내 그 명랑한 버팀을 응원합니다.

며칠 전 우리교회 청년의 사진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 인도의 갠지스 강이 보고 싶어 문득 찾아간 바라나시에 40일간 머물며 찍은 사진과 자기 마음의 풍경을 그린 글로 구성된 전시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에 익숙하지만 이 둘은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그의 시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풍경 속에 깃든 삶의 본질을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진을 둘러보다가 작가에게 어느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드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가리킨 사진은 온갖 오물이 떠밀려오는 얕은 강물에 쪼그리고 앉은 상태로 조야한 낚시 바늘을 강에 던져둔 채 집중하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재를 실은 강물을 더럽다, 불쾌하다 여기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그 광경을 통해 젊은 작가는 성스러움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해질녘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며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살피고 있는데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습니다. 모니터에는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의 이름이 떠있었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권사님의 음성은 맑고 또렷했습니다. “목사님, 많이 망설이다 전화를 올렸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00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목사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괴질 때문에 만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음성이라도 듣고 싶었어요.” 피차 안부를 주고받으며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함께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고마움으로, 안쓰러움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쇠락의 징조가 드러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헬렌 니어링이 엮은 <인생의 황혼에서>라는 책을 찾아 읽다가 한 문장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남아 있는 힘이 줄어들수록 내게 그것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나는 한쪽 귀를 잃었지만, 지금처럼 감미로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눈이 너무 나빠져서 젊은 시절 자연이 보여주었던 그 빛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순수한 기쁨으로 자연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내 수족은 이내 지치겠지만, 무한한 창조의 섭리가 드러나는 이 활짝 열린 공간에서 내 수족을 움직일 수 있는 특권을 지금 이 순간처럼 소중하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매일 꼬박꼬박 먹는 이 소박한 음식을 이렇듯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비록 삐걱거리고 흔들리기는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움막집에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헬렌 니어링 엮음, <인생의 황혼에서>, 전병재·박정희 옮김, 민음사, 2002, p.30-31/윌리엄 엘러리 채닝이 ‘루시 에이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40)

연세 드신 분들의 마음이 이 글 그대로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생을 한껏 기뻐하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핍에만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잘 누릴 줄 아는 것이 생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잘 익어 땅에 떨어지는 열매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홀가분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 여정 마치는 그날이 새로운 여정의 출발임을 압니다. 무명의 시인은 땅의 길이 끝나는 순간 하늘의 길이 열린다고 노래했습니다.

지난 주부터 교회당 수용 인원의 1/3이 모여 예배드리는 일이 허용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번 주일부터 대면예배와 영상 예배를 병행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교우들을 만날 생각에 설렙니다. 한 동안 사람들이 전혀 머물지 않았던 지하 친교실 공간도 깨끗하게 쓸고 닦았습니다. 아직 식사를 나눌 수는 없지만 행여 교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시면 그곳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송실을 담당하는 교우들도 예배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1,2부 예배 리허설을 했습니다. 초봄부터 시작된 팬데믹 상황이 늦가을에 이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힘겨운 시간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춘추春秋‘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한 줄 쓴 다음/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병술년 봄을 보냈다”. 산수유 꽃 피는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지만 시인은 ‘꽃망울을 터뜨린다’라는 표현을 연상했던 것일까요? 그렇기에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문장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조사 하나를 바꾸는 순간 문장의 뉘앙스가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고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습니다. 물난리가 지나가고, 열대야로 밤을 지새던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시인은 마침내 한 줄을 시에 더 보탰습니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라고 적고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를 적기까지 세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이렇게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춘추’라는 시 제목이 참 적실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시간도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시간을 우리는 그리움으로 채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지냈냐고 안부를 물으며,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밀린 이야기를 다 나누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차분하게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사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 일반이라기보다는 ‘기독교신앙’ 전반이기에 상투적으로 쓰는 이 말이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조의 신학 논문’을 비텐베르그 성교회 문에 게시한 날을 사람들은 종교개혁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개혁 정신은 낡은 것, 변질된 것, 권력으로 변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예수 정신이라는 알짬이 사라진 교회와 제도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만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안타깝게도 지금의 교회는 스스로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각 교단들이 보이는 행태는 개혁 정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이들이 희망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희망은 품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먼저 위로부터의 은총이 주어져야 합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조롱, 냉소와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무너지는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은 기우뚱한 벽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을 밀어넣는 이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달음에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더디다 하여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칠 뿐입니다. 잔뜩 찌푸린 날입니다.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가끔은 어둠에 잠기지만 본래는 청정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주위에 명랑의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 한껏 누리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10월 2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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