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6)

 

일인칭을 가리키는 삼인칭

 

 

히브리어에서는 가끔 일인칭을 삼인칭으로 객관화시켜 진술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말의 경우에도 말하는 사람 자신이 자기를 객관화시켜 이 아무개 라든가 필자가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서는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른 동사의 어미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일인칭으로 말하는 이의 삼인칭 표현이 그 성격에 있어서 히브리어만큼 뚜렷하지는 않다.

 

 

 

구약성서(공동번역)에서 예를 들어본다. 출애굽기 201-17절에서 십계명을 선포하는 이는 야훼다. 야훼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 라고 하고 십계명을 받는 대상인 이스라엘을 라고 부른다(20:1~6 ). 예를 들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두지 말찌니라라”(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나 여호와 너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하느님인즉”(20:4-5) 등에서 야훼 자신이 일인칭으로 나온다.

 

그러나 도중에 야훼는 자신을 삼인칭 라고 언급한다. 예를 들면 너는 너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야훼는 그의 이름을(슈모)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20:7), “이는 엿새 동안에 야훼(삼인칭)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삼인칭) 제 칠일에 쉬셨음이라. 그러므로 야훼(삼인칭)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11) 등에서 야훼는 삼인칭으로 나온다.

 

이처럼 출애굽기 207-11절에서 야훼는 삼인칭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일인칭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역성서>는 일찍이 십계명에 나오는 그의 이름나의 이름으로, 삼인칭 야훼는 나 여호와로 고쳐 번역하는 전통을 보여 주었다.

 

<개역성서> 예레미야서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예레미야 30:18),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예레미야 4:2)에 나오는 는 모두 삼인칭을 일인칭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히브리어의 특유의 표현을 그대로 번역할 경우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아 독자들이 혼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그러한 혼동이 일어날 경우라고 판단될 때에는 삼인칭을 일인칭으로 바꾸어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막을 수 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4)

 

짧은 본문, 긴 본문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아뢰었다. ‘오늘 소인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만약 그 허물이 저나 제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위에 인용된 본문운 <공동번역> 사무엘상 14장 41절의 내용이다. 밑줄이 그어진 부분은 <개역개정>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개역개정>의 것은 짧은 본문이고 <공동번역>은 긴 본문이다.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도 밑줄 친 부분의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공동번역>의 밑줄 친 부분은 히브리어 본문의 반영이 아니라 그리스어 칠십인역의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어 칠십인역 성서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그때 사용된 히브리어 본문은 지금 남아 있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보다 약 천 년이나 앞선 본문으로서 원본과 시간상으로 아주 가깝다는 것이 특징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칠십인역 사이에는 단순한 원본과 번역본의 차이 외에도 내용과 편집사의 차이도 현격하다.

 

 

 

여기에 제시된 사무엘상 14장 41절은 본문의 전달 과정에서 생긴 오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히브리어 본문이 전달된 형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베껴 쓰기였다. 베껴 쓸 때는 한 사람이 원본을 큰 소리로 읽어주면 여러 명의 베껴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쓰곤 하였다.

 

때로는 베껴 쓰는 사람이 직접 원본을 보고 베끼기도 하였다. 그런데 불러주거나 베껴 쓰는 과정에서 읽는 이가 착각을 일으켜 같은 본문을 두 번 읽으면 중복오자(重複誤字, dittography)가 생기고, 줄을 놓쳐 어느 부분을 빼놓고 읽으면 탈락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탈락 현상이 생기는 주요 원인들 중 두 가지가 특히 유명하다. 하나는 유사문미(類似文尾)이고 다른 하나는 우사문두(類似文頭)이다. 몇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어느 글 안에 유사한 단어로 시작되는 문장들이 잇거나 혹은 유사한 단어로 끝나는 문장들이 있을 때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사무엘상 14장 41절의 경우는 본래의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낱말이 세 번 나오는데 복사 과정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이스라엘’을 읽은 다음에 그 읽는 이의 눈이 몇 줄을 뛰어 넘어 세 번째 나오는 ‘이스라엘’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는 글자들이 모두 빠져버린 것이다.

 

<공동번역>은 히브리어 본문(MT)을 번역한 것이면서도 히브리어 본문의 전달 과정에서 빠진 부분은 칠십인역(LXX)에서 보충해 넣었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3)

 

강포한 남자와 근면한 남자

 

 

강포한 사람과 근면한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한번은 일본어 성서와 우리 말 번역 성서를 비교해 읽는 어느 독자에게서 문의가 왔다. 1981년 판 일본어 성서잠언 1116절에는 강포한 남자가 부를 얻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말 개역성서의 같은 구절은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라고 되어 있어 너무나도 내용이 다르니 해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잠언 1116절은 세계의 성서 번역자들이 늘 고심해 왔던 구절 가운데 하나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원문 히브리어 성서를 따라 읽으면 일본어 성서강포한 남자가 옳다. 영어 번역판이나 중국어 번역판들 중에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옳기려고 하는 번역들도 일본어역처럼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어표준개역(RSV)’난폭한 남자(violent men)”, ‘새국제성서(NIV)’무자비한 남자(ruthless man)”라고 하였고, 중국어의 한 역본은 강포한 남자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하는 쪽에서는 자비스러운 여인은 존경을 받는데 난폭한 남자는 재물밖에는 못 얻는다는 뜻으로 읽어내려 한다.

 

우리 말 개역성서에서 근면한 남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대응 단어 아리침은 본래 좋은 의미가 아니다. ‘아리침은 폭력을 쓰는 남자를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 아리침(강포한 남자)’하루침(근면한 남자)’의 오기로 보는 견해도 많다. 우리 말 개역성서는 바로 이 후자를 따라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고 번역하였다. 왜냐하면 지혜문학에서는 근면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재의 문맥에서도 자비스러운 여인과 근면한 남자가 받는 보상을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참고로, 다른 번역들의 경우를 더 살피면, ‘공동번역성서부지런한 사람은 부자되게 마련이다라고 하여 히브리어 아리침개역성서처럼 하루침으로 고쳐 읽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히브리어 원문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문맥을 고려하여 적절한 의미라고 생각되는 대응 낱말을 선택하여 번역한 예도 우리 말 성서 변역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1925년에 나온 게일 이원모 공역의 신역신구약전서에는 유력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라고 번역 하였다. 유능한 남자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 아리침의 반영은 아니다.

 

1966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나온 예루살렘성서(JB)’진취성 있는 남자가 부자가 된다(men of enterprise grow rich)”라고 번역하였다. 이것 역시 히브리어 아리침의 문자적인 뜻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다만 문맥을 고려하여 문자적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한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2)

 

‘불임’인가 ‘불모’인가

 

 

같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하는 두 가지 번역이 나올 때 일반 독자들은 퍽 의아해 한다. 그러나 같은 히브리어 문장이 그렇게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 느꼈던 그 의아함은 히브리어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로 바뀔 것이다. 열왕기하 2장 19-21절을 <개역개정>과 <공동번역>이 어떻게 달리 번역하고 있는지 비교해 보고 그렇게 달리 번역된 배경을 살펴보자.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19절) …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21절)”

 

“저희 성읍은 매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19절) … 내가 이 물을 정하게 하리라.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같은 히브리어 본문 ‘브하아레츠 므샤칼렛’을 두고 <개역개정>은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은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히브리어 동사 ‘샤칼’의 뜻은 ‘(생명을) 빼앗기다’이다. 이 동사의 ‘피엘’ 분사형 ‘므샤켈렛’은 문법적으로 본다면 주어 ‘하아레츠(땅)’의 보어 구실을 한다. 즉 “그 땅이 불임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땅이 불임’이라는 표현은 완전하지도 않고 의미론상 걸맞지도 않는다.

 

좀더 손질을 한다면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 “땅이 불모지이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이해이다. 둘째, “땅에 사는 임신부들이 유산을 한다.” 이것은 <공동번역>의 이해이다.

 

피엘분사형은 달리 사역의 의미로도 쓰이므로 땅이 사람으로 임신능력이 없게 한다든가, 토양이 식물을 번식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하는 두 가지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칠십인역>이 같은 히브리어 본문을 땅이 사람들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아테크눈타) 하다”라고 번역하였지만, 그런 번역이 나오려면 히브리어 ‘므샤칼렛’이 아닌 ‘므샤클림’이 <칠신인역>의 대본에 있었어야 한다.

 

21절의 ‘죽음’ 역시 <공동번역>이 이해하듯 ‘사람의 죽음’일 수도 있고 <개역개정>이 암시하듯 식물의 죽음일 수도 있다. 둘 다 맞는 번역이므로 번역자는 이런 경우 자체적으로 설정한 번역 원칙에 따라 의미 결정의 단안을 내려야 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1)

 

발을 가리우다

 

 

각 언어마다 완곡어법(婉曲語法)이란 것이 있다. 이 말이 유래된 그리스어 유페미아(euphemia)는 재수 없는 말이나 듣기에 유쾌하지 않은 말을 피하고 대신 길조를 지닌 낱말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완곡어법에서는 모호하거나 우회적이거나 덜 구어체적인 용어를 쓰는 것이 특징이다.

 

구약성서에서 완곡어법이 사용되는 예 가운데 하나가 신체의 부분이나 그것들의 기능을 묘사할 때이다. 예를 들면 발을 가리우다라는 표현이다. 모압 왕 에글론의 경우, “왕의 신하들이 와서 다락문이 잠겼음을 보고 이르되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신다 하고”(<개역개정> 사사기 3:24), 또 사울왕의 경우,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개역성경> 사무엘상 24:3).

 

<공동번역>발을 가리우다라는 표현을 두 곳에서 다 뒤를 보다로 번역하였다. “발을 가리우다는 표현은 용변(用便)을 보는 것을 뜻한다.

 

우리말에서도 이런 경우에는 직접적인 묘사를 피하고 완곡어법을 쓴다. <공동번역>뒤를 보다역시 똥 누다를 점잖게 일컫는 말이다. 이것을 한자어로 변을 보다라고 하거나 토박이말로 뒤를 보다라고 하면 웬만큼 불쾌한 냄새가 가신다는 기대에서일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발() 역시 음부(陰部)나 나체를 가리키는 완곡어법으로 쓰인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돌칼로 자기 아들의 포경을 자르고 그것을 모세의 발에 대었더니사경을 헤매던 모세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이 있다(출애굽기 4:24-26). <개역>은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모세의 발 앞에 던졌다라고 번역하였고 <개역개정>모세의 발에 갖다 대었다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모세의 남경(男莖)”을 일컫는다.

 

이사야서에도 보면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개역개정> 이사야 7:20)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발 털은 발이나 다리에 난 털이 아니라 음부 주위에 난 털을 뜻한다.

 

<공동번역>발 털거웃이라고 표현하였다. “거웃의 사전상의 일차적 의미가 음모(陰毛)”인 것을 보면 거웃을 쓴 <공동번역>은 완곡어법을 피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턱 밑 거웃 수(), 입술 거웃 자(), 뺨 거웃 염() 등의 설명을 보면 거웃 역시 본래는 턱이나 코 밑이나 뺨에 난 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결국 음모를 거웃이라고 한 것도 본래는 완곡어법의 한 표현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0)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이것은 틀림없이 어떤 비유적인 뜻을 지니고 이는 표현인데, 그 뜻을 알아내기가 어려워 전통적인 번역들은 대부분 히브리어 글자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였다. 우리말 <개역><개역개정>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글자대로 정확하게 번역해 놓았는데도 우리말 독자들에게 이것이 아무런 뜻을 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행하게도 때로는 엉뚱한 뜻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구절은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불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리라 하셨도다”(시편 60:8, 개역성서)라는 문맥 안에 들어 있다.

 

가능한 한 뜻을 옮겨보려고 애쓴 <공동번역>에는 같은 본문이 모압은 발을 대야로 삼고 에돔은 신 벗어 둘 신장으로 삼으리라. 블레셋을 쳐부수고 승전가를 부르리라고 되어 있다. <개역>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공동번역>에돔은 신 벗어 둘 신장으로 삼으리라는 사뭇 그 뜻이 다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권리나 의무를 물려주는 일과 관련하여 신을 벗는 관습이 있었다. 예를 들면,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 하나가 아들 없이 죽으면 과부의 시동생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아 죽은 형의 가문을 이러주어야 했다. 그런데 만일 그가 형수를 아내로 맞지 않으면 그 형수는 법원으로 가서 장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 시동생을 불러다가 한 번 더 타일러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형수는 장로들 보는 앞에서 그에게 다가 서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제 형의 가문을 이어 주지 않는 자는 이 꼴이 될 것이다라고 욕을 해 주도록 되어 있었다(신명기 25:5-10). 룻기에도 어떤 사람이 친족행위 수해자로서의 권리나 의무를 포기할 때 신을 벗은 예가 나온다(룻기 4:7-8). 신명기나 룻기에 나오는 두 경우가 똑같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 벗는 것과 소유권 선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에돔에다 신을 벗어 던지는 것은 에돔에 대한 소유권 선포다. 현대 불어, 독어, 영어 번역판들은 다음과 같은 번역을 반영한다.

 

나는 에돔에 신을 벗어 던졌다. 내게는 에돔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Francais Courant)

 

에돔에 대한 나의 소유권을 선포하려고 나는 에돔에 내 신을 벗어 던졌다.”(Die Gute Nachricht)

 

에돔을 내가 소유 했다는 표시로 에돔에 내 신을 던졌다.”(Good News Bible)

 

에돔에 내신을 던지리라는 말에서 우리는 에돔을 나의 소유로 삼으리라는 하느님의 소유권 선언을 듣는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9)

나를 개 대가리로 아시오?

 

사울 왕실과 다윗 왕실 사이에 오랫동안 싸움이 계속되었다. 다윗 왕실은 갈수록 강해졌고, 사울 왕실은 갈수록 약해졌다.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보셋이 왕이 되긴 했지만 실권은 사울 밑에서 사령관을 지내던 아브넬 장관이 쥐고 있었다. 실권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아브넬 장관은 사울의 후궁이었던 리스바를 범하였다.

이스보셋이 자기 아버지의 후궁을 범한 아브넬을 꾸짖자 아브넬은 몹시 화를 내며 항의한다.

“아브넬은 몹시 화를 냈다. 나를 개대가리로 아시오? 이 날까지 나는 당신의 선친 사울의 왕실과 그 동기간과 동지들에게 충성을 바쳐 당신을 다윗의 손에 넘기지 않고 있는데, 당신은 오늘 하찮은 여자 일로 나를 책잡으시오?”(공동번역, 사무엘하 3;8)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히 여겨 가로되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개역성경).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개역개정).

<공동번역> 성서의 “나를 개대가리로 아시오?”가 <개역성경>에는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로 <개역개정>은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라고 되어 있다. 개역과 개역개정에는 공동번역에 없는 ‘유다의’라는 말이 더 있다. 개역의 이해를 따라 공동번역식대로 번역하자면 “나를 유다의 개대가리로 아시오?”가 될 것이다.

 

 

사무엘하 3장 8절의 본문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개대가리’는 무슨 뜻인가? 둘째, 개역과 개역개정에는 반영되어 있고, 공동번역에는 삭제되어 있는 히브리어 본문의 ‘아세르 리후다’(유다의, 유다에 속한, 유다쪽 편을 드는)는 여기에 어떤 구실을 하는 것인가?

첫째, ‘대강’나 ‘대가리’는 둘 다 ‘머리’의 속칭이다. 여기에 ‘개’라는 접두사가 붙어 ‘개대강이’ 혹은 ‘개대가리’가 되었는데 주석가들은 세 가지 가능한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1) “개만도 못한 놈”의 완곡어법 2) “개의 얼굴을 한 추악한 인간”으로 이 두 경우는 우리말의 ‘개새끼’나 ‘개자식’에 해당하는 욕으로 이해된다. 즉 아브넬은 이스보셋이 자기를 개만도 못한 놈, 혹은 개새끼로 취급하냐고 불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개대가리’는 곧 ‘개’를 가리키는 것이고, 때로 개는 자기비하의 표현으로 쓰인다.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무비보셋을 같은 상에서 접대했을 때 므브보셋은 황송한 생각이 들어 “이 죽은 개만도 못한 소인이 무엇이기에 이렇듯이 살펴주십니까?”(사무엘하 9:8) 하며 감격했던 일이 있다.

둘째, “내가 유다의 개대가리란 말이요?”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하로쉬 켈렙 아노키 아쉘 리후다”는 그 자음본문을 달리 읽으면 “내가 유다 편을 드는 갈렙 족속의 우두머리란 말이오?”이다. ‘아쉘 리후다(유다의)’는 70인역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으므로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본문 역사에서 후대에 첨가된 주석이라고 본다.

이러한 이해를 따른다면 아브넬은 지금 자기가 사울 왕실의 원수로 취급받는 것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한 뜻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는 그대로 다 참고하면서 이 표현이 지닌 묘한 뜻을 함께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8)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漢江)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白頭山) 높았다

선열(先烈)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독자는 서로 다른 견지(見地)에서 본문을 본다. 그가 어디에 서서 그 본문을 보는가에 따라 번역은 축소(縮小)이기도 하고, 확대(擴大)이기도 하고, 굴절(屈折)이기도 하다. 원문과 번역문에 사용된 낱말의 의미 분야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원문의 단어와 대응어의 단어가 의미론에서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역은 어떠해야 한다는 온갖 규정이 언어체험이 각기 다른 다양한 독자의 서로 다른 접근 앞에서는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원문의 뜻이 어떠하다’는 진술 자체가 허구일 수 있다. 번역된 본문은 이미 원문에서 떠나고 있고 새로운 독자를 만나 새 의미를 창조해가고 있다.

엊그제가 3.1절이었다. 1919년 3월 1일이었으니까, 꼭 96년 전이다. 만세 이후 광복(1945)까지는 26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정부를 수립하기(1948)까지는 3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정인보 작사, 박태현 작곡의 삼일절노래를 불러본다. 한가운데 줄에이 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라는 가사가 있다.

노래를 불렀더니 “이 날” “의(義)” “생명(生命)” “교훈(敎訓)”이란 말들이 본문에서 바깥으로 툭 튀어 나온다. “태극기”도 툭 튀어 나와 내 눈 앞에 활자들이 움직인다. 나는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시편 118편 24절 “이 날은”(제 하욤)이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 This is the day, this is the day

that the Lord has made, that the Lord has made

We will rejoice, we will rejoice,

and be glad in it, and be glad in it.♩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크”다. 히브리어 “미쉬파트”, “체다카”, “체데크”,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 등이 “의”로 번역되는 말이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불문가지다.

“생명(生命)”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하임”이나 그리스어 “조에”가 성경에서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설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용어인가!

“교훈(敎訓)”은 히브리어 “토라”가 지닌 기본족인 의미다. 태극기가 “여호와 닛시”(여호와는 나의 깃발) 되어 펄럭인다. 나는 어느 새 “주님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주님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우실 것이다”(출애굽기 17:16)를 외치고 있다.

본문상호연결(intertextuality)은 번역에서도 발생한다. 성경의 본문과 우리의 본문이 한 독자의 언어 체험에 따라 서로 만나 해석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두 언어의 만남, 그리고 번역이 한 본문의 의미를 풍요롭게 하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7)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데 왜 잔이 넘칠까?

 

독자적인 몇 개의 낱말들이 서로 모여 구(句 phrase)나 절(節 clause)을 형성할 때 각 개별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결합된 낱말들이 만들어내는 전혀 새로운 뜻을 우리는 숙어(熟語) 혹은 관용구(慣用句)라고 한다. 이러한 특수 표현의 형성은 언어마다 다르다. 같은 언어라고 하더라도 시대마다 다를 수도 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뜻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관용적 표현이 축자(逐字) 번역이 될 때에는 그 의미를 옮기지는 못한다. 한 언어의 관용적 표현에 대한 의미론적 연구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사고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특유의 표현들은 번역된 성서 중에서 직역의 경향을 보이는 KJV나 《개역》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다/붓다

to anoint one’s head with oil

dishanta bashemen roshi

이것은 시편 23편 5절에 나오는 히브리어 표현 dishanta bashemen roshi의 축자 번역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기도 하고 오해를 유발하는 표현이기도 한다. 어렵다는 것은 “기름을 머리에 바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발을 보호하거나 모발 전체의 모양을 일정한 형태로 유지하려 할 때, 혹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다듬으려고 할 때 동백기름을 바르거나 포마드나, 헤어크림, 헤어로션, 헤어스프레이 등을 사용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식탁에 시인을 초청하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신다는 것은 우리의 정발 문화와는 다른 것 같다. 또 머리에 기름을 발랐는데 왜 그것과는 무관한 잔이 넘친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표현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床)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개역》 시 23:5).

이 표현이 오해하기 쉬운 표현이란 말은 무엇인가? 성경을 오래 읽어오거나 공부해 온 이들은 어디선가 이미 “머리에 기름 붓는다”는 표현을 들어서 알고 있다. 제사장이 정결 예식에 참예한 이에게 머리에 기름을 붓고(natan) 그를 위해 속죄한다.(예레미야 14:18, 29).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yatsaq) 그를 이스라엘 지도자로 삼는다(사무엘상 10:1). 예언자가 한 장군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yatsaq) 그를 왕으로 선포한다(열왕기하 9;3). 그리스말로 ‘그리스도’라고 하고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하는 이 칭호의 본래의 뜻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도 많다. ‘마샤크’(mashakh)라는 동사에서 ‘메시아’(Messiah)란 말이 나온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칭호는 왕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다니엘 9:25, 26). 그래서 시편 23편 5절을 다윗이 왕이 될 때의 기쁨을 말한 것으로 오해한다는 말이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기름을 바르다”는 말은 ‘메시아’와 관련된 ‘마샤크’(mashakh)가 아니라 ‘다샨’(dashan)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동사다.

 

“아무개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다/붓다”(to anoint one’s head with oil)라는 표현은 현대의 여러 번역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개를 극진한 손님으로 맞이한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표현이다. 그래서 《표준새번역》 과 《새번역》 은 문제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표현을 그대로 두고 직역과 의역 두 가지를 동시에 본문 안에 넣는 이런 이중번역(二重飜譯)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어도 이미 잘 알려진 본문의 경우에는 번역 과도기에서 잠시 허용될 수 있다.

영어 번역 역사에서도 초창기에는 축자적 번역을 하다가 독자의 이해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새로운 번역들은 의미 번역을 택한다.

Thou preparest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ine enemies: thou anointest my head with oil my cup runneth over.(KJV Ps 23:5)

영어 번역에 있어서도 이렇게 축자적으로 이루어진 번역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거나 본문과는 전혀 무관한 엉뚱한 뜻으로 읽도록 오해를 유발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어 현대어 번역은 문제가 되는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You prepare a banquet for me, where all my enemies can see me; you welcome me as an honored guest and fill my cup to the brim.(TEV Ps 23:5)

누가복음 7장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본다. 예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받아 가셨을 때, 시몬이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드리지 않아, 예수께서 그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누가복음 7:46)라고 하시면서. 시몬을 나무라신 적이 있다. 이때의 영어 번역은(NIV) “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oil” 이다. 이것도 히브리어의 축자적 번역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손님을 맞이할 때 물을 주어서 맨발로, 혹은 샌들을 신고 다닌 발을 씻고서 집안에 들어오게 하거나 환영의 표시로 머리에 귀한 기름을 발라주거나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 누가복음 7장 46절에서도 “너는 나를 환영하지도 아니하였으되…/ You dis not welcome me.”(누가복음 7:46)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어 표현 “아무개의 머리에 기름을 붓다/바르다”라는 말은 “아무개를 극진한 손님으로 맞아들인다”는 뜻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6)  

무죄(無罪)한 피를 우리에게 돌린다는 것은

 

요나 114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까닭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개역요나 1:14).

영어 King James Version(1611) 역시 이렇게 우리말 개역과 같은 방식으로 번역하였다.

“Wherefore they cried unto the LORD, and said, We beseech thee, O LORD, we beseech thee, let us not perish for this man’s life, and lay not upon us innocent blood: for thou, O LORD, hast done as it pleased thee.”(KJV Jon 1:14)

바다에서 큰 풍랑(風浪)을 만난 선원들이 풍랑의 원인이 된, 도망가는 예언자 요나를 수장(水葬)시키는 형벌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를 바다에 던지면서, 하나님께 무죄(無罪)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lay not upon us innocent blood), 더 축자적으로 번역하여, “깨끗한 피를 우리에게 주지 마십시오라고 비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수혈(輸血)을 받을 때 건강한 피, 깨끗한 피를 받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요나서의 본문에서는 그런 환경이 아니다. 배가 풍랑을 만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도망치고 있는 요나 때문이라고 생각한 선원들은 지금 자신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 범인을 법에 따라 처형하는 것이지,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 아님을, 따라서 사형을 집행하는 자신들이 살인을 범하는 것으로 여김을 받아 죽게 되는 보복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지금 아뢰고 있는 것이다.

 

영어 번역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1973, 1978, 1984) 이러한 히브리어 특수 표현의 의미를 살리는 번역을 시도하였다. 요나를 처형하는 것이 무죄한 자를 무고히 처형하는 살인죄가 아님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번역한다.

Then they cried to the Lord, “O Lord, please do not let us die for taking this man’s life. Do not hold us accountable for killing an innocent man, for you, O Lord, have done as you pleased.”(NIV Jon 1:14)

우리말 공동번역새번역도 이런 의미를 그 번역에 반영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부르며 아뢰었다. “주님, 빕니다. 우리가 이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뜻하시는 대로 하시는 분이시니,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새번역요나 1:14).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은 야훼께 부르짖었다. “야훼님, 이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고 우리를 멸하지는 마십시오. 우리에게 살인죄를 지우지 마십시오. 야훼께서 다 뜻이 있으시어 하시는 일 아니십니까?”(공동번역 요나 1:14)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