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1)

 

새벽(의) 날개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개역개정),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공동번역), 여기 시편 139편 9절에 나오는 “새벽의 날개”란 무엇인가? 이것은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의 “칸페이 샤하르”의 직역이다. 찬송가 뒤 교독문에 인용되어 있는 본문이므로 예배 때 자주 만나게 된다.

 

일반적인 독자들의 경우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는 것이 아마도 “새벽의 날개”라는 표현일 것이다. 날이 밝을 녘을 일컫는 신간의 한 대목에 새나 곤충이 날 때에는 펴는 신체의 한 부분을 연결시키는 것이 우리말 독자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다.

 

 

시편 139편 8-10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현존을 피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을 공간적 차원을 빌어 묘사할 것이다. 제일 높은 곳 하늘 끝으로 피해도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시며, 제일 낮은 곳 저 땅 밑 스올로 내려가도 거기 계시고, 새벽이 열리고 동이 트는 동쪽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해가 지는 서쪽 바다 끝으로 피해 가도 거기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에 “하늘 꼭대기와 땅 밑, 새벽이 밝아 오는 쪽과 해지는 먼 바다”의 네 요소는 있으나, 진술이 그렇게 명확하게 되어 있지는 않다. 새벽의 “날개”라는 표현은 어쩌면 사람(시인) 이 비록 새벽이 달리는 속도로 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해도 하나님께 잡히고 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문이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본문 비평가들이 몇 가지 해결을 시도해 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미첼 다후드)를 소개한다. 고대역들, 예를 들면 70인역이나 시리아어역을 따라 “~의 날개”라고 되어 있는 히브리어 “칸페이”를 자음 본문을 바꾸지 않고 “크나파이”로 읽어 “나의 날개”라고 해석하고, “새벽”(샤하르) 은 동녘이 밝아오는 장소를 가리키는 문법적 요소로 보아 “새벽이 밝아오는 쪽 곧 동쪽에서”라고 읽으면서 곧바로 이어 나오는 “(서쪽) 바다 끝”과 대조시키는 것이다.

 

즉 “비록 내가 동쪽에서 날개를 치며 날아가 서쪽 바다 끝에 가서 자리를 잡아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바다”는 히브리어에서 서쪽을 가리킨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볼 때 팔레스타인의 서쪽이 지중해 바다인 데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고개를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케드마) 서(얌마 : 바다 쪽) 남(네그마) 북(차폰)을 둘러보아라”라고 했을 때 서쪽은 “바다 쪽”이다. ‘개역개정’ 출애굽기 10장 19절의 “서풍”(공동번역은 “해풍”) 역시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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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0)

 

해킹, 도청하며 “벽에 소변 보는 자”

 

 

좀 지저분한 말이 되어 주저스럽지만, 서서 오줌 누는 이들 때문에 벽들이 애꿎은 수난을 당한다. 벽에다 대고 함부로 소변을 보는 것은 남자하고 개뿐이다. 아직도 서울의 으슥한 골목길 벽은 남자들의 공중 화장실이 되기 십상이다.

 

소변금지를 알리는 구호도 갖가지다. 어떤 곳에는 가위를 그려놓고 위협을 주기도 하고, 어떤 곳에는 “개 이외는 여기에 소변을 보지 마시오”라고 써서 주정뱅이 오줌싸개들을 개로 깎아 내리기도 한다. 그래도 노상방뇨는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또 이런 것은 동서와 고금을 가리지 않는 것 같다.

 

 

 

 

히브리어에서 사내를 경멸하여 일컬을 때 “벽에다 대고 오줌 누는 놈”이라고 한다. 즉 “서서 오줌 누는 놈”이란 말이다. ‘남자’나 ‘사내’라고 써도 될 곳에 이런 고약한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런 경우는 대개 그 사내들을 저주하는 경우이다. 씨를 말려 버린다거나 멸족시켜 버릴 사내들을 경멸조로 말할 때 이런 표현을 쓰는데, 구약성서에 모두 여섯 번 나온다(삼상 25:22, 34; 왕상 14:10; 16:11; 21:21; 왕하 9:8),

 

“벽에다 오줌 누는 놈”이란 표현은 실제로 벽을 향해 소변을 보았거나 보고 있는 남자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오줌 누는 자” 곧 ‘남자’를 일컫는 것이다. 우리말 성서에 이 표현은 ‘남자’(개역, 개역개정), 혹은 ‘사내 녀석’(공동번역)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히브리어 표현의 문자적 의미는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개역성경의 ‘남자’는 너무 완곡하여 경멸하려는 본래의 뜻을 못 살렸다. 공동번역의 ‘사내 녀석’은 그 뜻을 좀 살려 보려 했지만 히브리어 표현 뒤에 있는 해학적인 맛을 전달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렇다고 직역을 해 놓으면 이것이 정말로 벽에다 대고 소변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되어 버려 남자 일반을 일컫는 본래의 뜻을 전달하지 못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 할 바는 남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못한다는 반어법도 있다는 점이다. 벽에다 대고 소변도 못 보는 놈이 되면, 이건 노골적인 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의 표현을 따지고 보면, 남자를 나타날 때 다른 성품이나 특징이 아니라 성기를 손으로 잡고 소변을 보는 자라는 점에 주목해서 그때나마 겨우 자기가 남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존재, 뭐 이런 식의 경멸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리 치나 저리 메치나 이 표현은 상대에 대한 능멸이 담긴 것임은 틀림없다. 어깨가 떡 벌어진 사내, 좀체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자,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는 녀석, 손해 볼 줄 알면서 기어코 직언을 하는 자, 이런 식의 사내대장부는 아닌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성서에서 이 오줌 싸는 장면을 불알 두 쪽 운운하면 아마 난리가 나도 엄청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 이렇게 불알 두 쪽밖에 사내임을 입증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졌는지. 명색이 사내라면, 남의 안방 문을 벌컥 하고 열고 들여다보는 법이 아니고, 이거 메르스 정보에요, 하면서 거기다가 이상한 장치 달아서 스마트폰을 몽땅 제 것으로 삼고 때로는 공격하지는 않는다. 도대체가 정정당당하지가 않다. 그래서 이들은 말로는 노상방뇨하면 안 되, 잡아간다, 하면서도 남들이 안 보면 저들이 먼저 벽에다가 갈긴다. 누가 센지 어디 보자, 하면서 경쟁하듯이 말이다. 뭔 이야기인지 독자들은 척 하면 척하고 알 것이다. 국정원이라는 데에서 어마어마한 해킹장비를 들여다 놓고, 쥐새끼마냥 밤 말을 듣겠다는 것 아닌가? 그야말로 두 쪽밖에 없는 사내놈들이 하는 짓이렸다.

 

그리고 이들 상전은 음~. 벽에다 대고 소변도 못 보는 상전이라면 무지막지한 욕이 될까? 이때까지 내가 쓴 글 가운데 아마 이게 제일 성서적인 것은 아닐까? 그것도 구약성서에 여섯 번이나 나온 표현을 들고 세상에 나왔으니 말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벽에다 대고 그럴게 할 힘을 자랑할 기력도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내가 아닌 것도 아니며 그래서 남의 스마트폰에다 제 귀를 달아 엿들을 정도는 아니로다.

 

다음에는 국정원 직원 뽑을 때, 두 쪽 말고 다른 것도 있는지 조사해 볼 일이 아닐까? 세상이 험하다보니 성서학자가 별 생각과 궁리를 다 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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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20)

 

박근혜의 콧바람, 왕의 콧김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 곧 “왕”을 달리 “우리의 콧김”(개역개정), “우리의 숨결”(공동번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루아흐 압페누”를 번역한 것이나 아무래도 석연하지 않다. 즉 히브리어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와 우리말 번역으로 이 본문을 읽는 독자의 반응이 일치하지 않을 것 같다.

 

“콧김”이라고 하면 그것은 콧구멍에서 나오는 더운 김을 뜻한다. “콧김을 쐬다”라는 말은 어떤 물체를 코 가까이 가져다 대고 거기에 콧구멍에서 나오는 김을 받게 하는 것이다. “콧김이 세다”라는 말은 관계가 가까워서 영향력이 세다는 말이다. “죽은 놈의 콧김만도 못하다”라고 하면 난로나 화로에 불기운이 없어져서 따뜻한 기운이 없음을 이르는 것이다.

 

“숨결”이라고 하면 이것은 숨 쉬는 속도, 숨 쉴 때의 그 높낮이를 이르는 것이다. “숨결이 거칠다”라는 것은 순 쉬는 소리가 고르지 않고 거센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 자체에서도 하나님의 “콧김”이라는 표현은 강한 바람을 묘사할 때 쓰인다.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출애굽기 15:8), 때로는 “꾸지람”과 평행을 이루는 “분노”를 뜻하는 표현과도 관련되어 쓰인다.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밑이 드러나고”(시편 18:15). 달리 코로 숨을 쉬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나타내기도 한다(이사야 2:22).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에서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공동번역>이 “우리의 숨결”이라고 한 것은 <개역개정>이 “우리의 콧김”이라고 한 것보다는 낫지만, 이 문맥에서 그 표현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둘 다 충분하지 않다. “콧김”이나 “숨결”보다는 “생명(력)”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 전달이 더 정확하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은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이다. 예레미야애가 4장 20절의 “콧김”이나 “숨결”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기 2:7)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생명(력)”이다. 욥기에서 욥이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욥기 27:3)고 말했을 때, 여기 “하나님의 기운”이 바로 “하나님의 루아흐”이다. 그 “루아흐”가 그의 “코”에 있다는 것은 바로 “생명”이 아직 그에게 붙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엔 콧바람도 있다. 루아흐가 바람, 숨결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니 콧김은 콧바람이 되기도 한다. “콧바람 좀 쐬려고”, 또는 “콧바람 싱싱” 하는 표현들은 모두 신선한 바람을 호흡하면서 육신과 영혼의 호흡을 새롭게 하자는 의미이니 성서의 쓰임과 사뭇 유사한 느낌마저 준다.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 질문을 던져보자. 콧대가 높으면 거기서 나오는 콧김, 숨결, 콧바람은 셀까?, 아닐까? “흥”하고 코웃음 치며 내는 콧김도 있다. 콧대가 높은 사람이 그러면 주변이 사뭇 싸아~ 하고 긴장될 것이다. 제 콧대가 높다고 내는 콧김, 콧바람도 셀 줄로 아는 착각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 나오는 김, 숨결, 바람에는 무엇이 담겨 있지 못할까? 단언컨데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생명력”이 없다. 더군다나 권력자가 그런 콧김, 콧바람을 내면 저주나 죽음이나 비난의 기운만 그득하다. 이를테면 메르스보다 더 한 세균덩어리를 공기에 퍼뜨리는 행위가 된다.

 

대통령 박근혜가 코에 잔뜩 힘을 주고 콧바람을 장풍처럼 낸 모양이다. 국민이 선출한 의원을 제 수하 거느리듯 이리 치고 저리 치다가 제 말 듣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화를 돋궈 그런 모양인데, 바람은 센지 모르나 거기에는 역시 생명력이 없다. 정치적 수명도 덩달아 줄어드는 건 아닐까? 이왕 내려면, 제대로 내시지. 하나님의 루아흐가 없는 왕의 콧김, 콧바람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부매랑이 되는 비운의 숨소리라는 것은, 성서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일깨운 진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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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8)

 

짐승을 가리킨 것이 성서 영감설로 오해돼

 

 

성서를 번역하다 보면 원문의 대명사를 번역문에서는 실명사로 바꾸어야만 할 때가 더러 있다. 의미전달을 빨리 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때로는 엉뚱한 오해를 막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예전에 대한성서공회 번역자 모임이 있었을 때의 일이다. 번역위원 중의 한 분이 아침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개역’ 성서의 이사야 34장 16절을 명상할 본문으로 내놓았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 분의 말에 따르면, 단순한 독자들이 이 본문을 성서영감설과 관련시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여호와의 책’은 성서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것들’은 성서 안의 말씀들을,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는 하나님 말씀의 완전성을.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는 ‘성서는 성서로 푼다’는 성서해석의 원리를 제공하는 것이고,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는 성서의 말씀은 모두 여호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란 것이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는 성서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본문 본래의 뜻과는 너무나도 먼 것이기 때문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의 책’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 ‘이것들’이란 이사야 34장 7절 이하에서 언급된 당아, 고슴도치, 부엉이, 까마귀, 시랑, 타조, 이리, 수염소, 올빼미, 솔개 등을 가리킨다.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다 그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다.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암수가 다 짝이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모든 짐승들에게 짝이 있도록 명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는 하나님의 영이 그 짐승들을 다 불러 모았다는 것이다.

 

16절 처음에 나오는 대명사 ‘이것들’을 ‘위에서 말한 짐승들’이란 실명사로 번역하기만 했어도 이런 엉뚱한 오해는 없었을 것이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서’가 이런 오해를 제거해 주는 번역을 하였다.

 

 

“야훼의 기록을 찾아내서 읽어 보아라. 이런 모든 짐승들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리라”(공동번역).

 

주님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아라. 이 짐승들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겠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짐승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입을 열어 그렇게 되라고 명하셨고 주님의 영이 친히 그 짐승들을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새번역).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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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7)

 

아름다운 여인의 보기 좋은 이(치아)

 

 

아가서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찬양할 때마다 그 여인의 신체 부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그가 눈여겨 관찰하는 여인의 신체 부위는 머리, 머리채, , , , 입술, 잇몸, , , , 젖가슴, 허리, 배꼽, 그곳, , 키 등이다.

 

그는 여인을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에서도 보고 품에 안고서도 본다. 목을 중심으로 하여 목 위가 11곳이고, 목을 포함하여 목 아래가 6곳이다.

 

그 남자가 사랑하는 그 여인의 아름다움을 본 곳은 얼굴 쪽에 집중되어 있고, 얼굴에서도 입 주변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비록 목 아래 부위에 대한 언급이 얼굴만큼은 세분화 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표현의 대담성이 놀랍다. 여인의 신체 각 부위의 아름다움은 은유와 직유를 함께 써 가면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치아)에 대한 묘사가 <개역성경>이든 <공동번역>의 것이든 우리에게는 명확하지 않다.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암양 같구나.”(아가서 4:2)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다. 여인의 이(치아)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목욕하고 나오는 털 깎인 암양이란 은유를 쓰고 있다. 이것은 분명 백옥같이 흰 이와 가지런하고 고르게 생긴 치열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일 터인데, 목욕하고 나온 털깎인 암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이런 은유는 이해할 수가 없다.

 

여기에 비하면 <공동번역>이는 털을 깎으려고 목욕시킨 양떼 같아라가 더 그럴듯하다. 털을 깎기 전에 목욕을 시켰으니 얼마나 깨끗해졌는가? 깨끗하게 씻겨 진 양털처럼 흰 이다. 팔레스티나에서는 털을 깎기 전에 양들을 목욕시키지 털을 깎은 다음에는 목욕을 시키지 않는다고 하는 주석가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여기서 <개역성경>은 오역을 보이는 반면 <공동번역>은 바른 번역을 보인다.

 

쌍태를 낳은 암양이란 또 무엇인가? 우리말에도 쌍태 낳은 호랑이 하루살이 하나 먹은 셈이라고 하여, 양은 큰 데 먹은 것이 적다는 뜻을 나타내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쌍태라는 말을 보기는 했지만, 희고 고른 여인의 이를 보면서 쌍태를 낳은 암양이 쌍둥이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것을 연상하다니 아무래도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공동번역>새끼 없는 놈 하나 없이 모두 쌍둥이를 거느렸구나역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 여인의 이가 털 깎으려고 목욕하고 나온 양떼가 희고 흠 없는 것처럼, 위 아래 빠진 이 하나 없이 다 고르게 짝이 맞는다는 뜻을 살릴 수 있는 은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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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6)

 

일인칭을 가리키는 삼인칭

 

 

히브리어에서는 가끔 일인칭을 삼인칭으로 객관화시켜 진술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말의 경우에도 말하는 사람 자신이 자기를 객관화시켜 이 아무개 라든가 필자가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서는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른 동사의 어미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일인칭으로 말하는 이의 삼인칭 표현이 그 성격에 있어서 히브리어만큼 뚜렷하지는 않다.

 

 

 

구약성서(공동번역)에서 예를 들어본다. 출애굽기 201-17절에서 십계명을 선포하는 이는 야훼다. 야훼 자신이 자신을 가리켜 라고 하고 십계명을 받는 대상인 이스라엘을 라고 부른다(20:1~6 ). 예를 들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두지 말찌니라라”(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나 여호와 너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하느님인즉”(20:4-5) 등에서 야훼 자신이 일인칭으로 나온다.

 

그러나 도중에 야훼는 자신을 삼인칭 라고 언급한다. 예를 들면 너는 너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야훼는 그의 이름을(슈모)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20:7), “이는 엿새 동안에 야훼(삼인칭)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삼인칭) 제 칠일에 쉬셨음이라. 그러므로 야훼(삼인칭)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20:11) 등에서 야훼는 삼인칭으로 나온다.

 

이처럼 출애굽기 207-11절에서 야훼는 삼인칭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일인칭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역성서>는 일찍이 십계명에 나오는 그의 이름나의 이름으로, 삼인칭 야훼는 나 여호와로 고쳐 번역하는 전통을 보여 주었다.

 

<개역성서> 예레미야서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예레미야 30:18),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예레미야 4:2)에 나오는 는 모두 삼인칭을 일인칭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히브리어의 특유의 표현을 그대로 번역할 경우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아 독자들이 혼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 그러한 혼동이 일어날 경우라고 판단될 때에는 삼인칭을 일인칭으로 바꾸어 번역함으로써 혼동을 막을 수 있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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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4)

 

짧은 본문, 긴 본문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아뢰었다. ‘오늘 소인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만약 그 허물이 저나 제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위에 인용된 본문운 <공동번역> 사무엘상 14장 41절의 내용이다. 밑줄이 그어진 부분은 <개역개정>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개역개정>의 것은 짧은 본문이고 <공동번역>은 긴 본문이다.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도 밑줄 친 부분의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공동번역>의 밑줄 친 부분은 히브리어 본문의 반영이 아니라 그리스어 칠십인역의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어 칠십인역 성서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그때 사용된 히브리어 본문은 지금 남아 있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보다 약 천 년이나 앞선 본문으로서 원본과 시간상으로 아주 가깝다는 것이 특징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칠십인역 사이에는 단순한 원본과 번역본의 차이 외에도 내용과 편집사의 차이도 현격하다.

 

 

 

여기에 제시된 사무엘상 14장 41절은 본문의 전달 과정에서 생긴 오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히브리어 본문이 전달된 형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베껴 쓰기였다. 베껴 쓸 때는 한 사람이 원본을 큰 소리로 읽어주면 여러 명의 베껴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쓰곤 하였다.

 

때로는 베껴 쓰는 사람이 직접 원본을 보고 베끼기도 하였다. 그런데 불러주거나 베껴 쓰는 과정에서 읽는 이가 착각을 일으켜 같은 본문을 두 번 읽으면 중복오자(重複誤字, dittography)가 생기고, 줄을 놓쳐 어느 부분을 빼놓고 읽으면 탈락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탈락 현상이 생기는 주요 원인들 중 두 가지가 특히 유명하다. 하나는 유사문미(類似文尾)이고 다른 하나는 우사문두(類似文頭)이다. 몇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어느 글 안에 유사한 단어로 시작되는 문장들이 잇거나 혹은 유사한 단어로 끝나는 문장들이 있을 때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사무엘상 14장 41절의 경우는 본래의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낱말이 세 번 나오는데 복사 과정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이스라엘’을 읽은 다음에 그 읽는 이의 눈이 몇 줄을 뛰어 넘어 세 번째 나오는 ‘이스라엘’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는 글자들이 모두 빠져버린 것이다.

 

<공동번역>은 히브리어 본문(MT)을 번역한 것이면서도 히브리어 본문의 전달 과정에서 빠진 부분은 칠십인역(LXX)에서 보충해 넣었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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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3)

 

강포한 남자와 근면한 남자

 

 

강포한 사람과 근면한 사람은 엄연히 다르다. 한번은 일본어 성서와 우리 말 번역 성서를 비교해 읽는 어느 독자에게서 문의가 왔다. 1981년 판 일본어 성서잠언 1116절에는 강포한 남자가 부를 얻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말 개역성서의 같은 구절은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라고 되어 있어 너무나도 내용이 다르니 해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잠언 1116절은 세계의 성서 번역자들이 늘 고심해 왔던 구절 가운데 하나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원문 히브리어 성서를 따라 읽으면 일본어 성서강포한 남자가 옳다. 영어 번역판이나 중국어 번역판들 중에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옳기려고 하는 번역들도 일본어역처럼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어표준개역(RSV)’난폭한 남자(violent men)”, ‘새국제성서(NIV)’무자비한 남자(ruthless man)”라고 하였고, 중국어의 한 역본은 강포한 남자로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하는 쪽에서는 자비스러운 여인은 존경을 받는데 난폭한 남자는 재물밖에는 못 얻는다는 뜻으로 읽어내려 한다.

 

우리 말 개역성서에서 근면한 남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대응 단어 아리침은 본래 좋은 의미가 아니다. ‘아리침은 폭력을 쓰는 남자를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 아리침(강포한 남자)’하루침(근면한 남자)’의 오기로 보는 견해도 많다. 우리 말 개역성서는 바로 이 후자를 따라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고 번역하였다. 왜냐하면 지혜문학에서는 근면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현재의 문맥에서도 자비스러운 여인과 근면한 남자가 받는 보상을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참고로, 다른 번역들의 경우를 더 살피면, ‘공동번역성서부지런한 사람은 부자되게 마련이다라고 하여 히브리어 아리침개역성서처럼 하루침으로 고쳐 읽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히브리어 원문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문맥을 고려하여 적절한 의미라고 생각되는 대응 낱말을 선택하여 번역한 예도 우리 말 성서 변역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1925년에 나온 게일 이원모 공역의 신역신구약전서에는 유력한 남자가 재물을 얻는다라고 번역 하였다. 유능한 남자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어 아리침의 반영은 아니다.

 

1966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나온 예루살렘성서(JB)’진취성 있는 남자가 부자가 된다(men of enterprise grow rich)”라고 번역하였다. 이것 역시 히브리어 아리침의 문자적인 뜻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다만 문맥을 고려하여 문자적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한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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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2)

 

‘불임’인가 ‘불모’인가

 

 

같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하는 두 가지 번역이 나올 때 일반 독자들은 퍽 의아해 한다. 그러나 같은 히브리어 문장이 그렇게 서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처음 느꼈던 그 의아함은 히브리어에 대한 폭넓고 깊은 이해로 바뀔 것이다. 열왕기하 2장 19-21절을 <개역개정>과 <공동번역>이 어떻게 달리 번역하고 있는지 비교해 보고 그렇게 달리 번역된 배경을 살펴보자.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19절) …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21절)”

 

“저희 성읍은 매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19절) … 내가 이 물을 정하게 하리라.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같은 히브리어 본문 ‘브하아레츠 므샤칼렛’을 두고 <개역개정>은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은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 없다”라고 번역하였다.

 

 

 

 

히브리어 동사 ‘샤칼’의 뜻은 ‘(생명을) 빼앗기다’이다. 이 동사의 ‘피엘’ 분사형 ‘므샤켈렛’은 문법적으로 본다면 주어 ‘하아레츠(땅)’의 보어 구실을 한다. 즉 “그 땅이 불임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땅이 불임’이라는 표현은 완전하지도 않고 의미론상 걸맞지도 않는다.

 

좀더 손질을 한다면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첫째, “땅이 불모지이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이해이다. 둘째, “땅에 사는 임신부들이 유산을 한다.” 이것은 <공동번역>의 이해이다.

 

피엘분사형은 달리 사역의 의미로도 쓰이므로 땅이 사람으로 임신능력이 없게 한다든가, 토양이 식물을 번식하지 못하게 한다든가 하는 두 가지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칠십인역>이 같은 히브리어 본문을 땅이 사람들로 “아이를 낳지 못하게(아테크눈타) 하다”라고 번역하였지만, 그런 번역이 나오려면 히브리어 ‘므샤칼렛’이 아닌 ‘므샤클림’이 <칠신인역>의 대본에 있었어야 한다.

 

21절의 ‘죽음’ 역시 <공동번역>이 이해하듯 ‘사람의 죽음’일 수도 있고 <개역개정>이 암시하듯 식물의 죽음일 수도 있다. 둘 다 맞는 번역이므로 번역자는 이런 경우 자체적으로 설정한 번역 원칙에 따라 의미 결정의 단안을 내려야 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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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0)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이것은 틀림없이 어떤 비유적인 뜻을 지니고 이는 표현인데, 그 뜻을 알아내기가 어려워 전통적인 번역들은 대부분 히브리어 글자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였다. 우리말 <개역><개역개정>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글자대로 정확하게 번역해 놓았는데도 우리말 독자들에게 이것이 아무런 뜻을 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불행하게도 때로는 엉뚱한 뜻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구절은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불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리라 하셨도다”(시편 60:8, 개역성서)라는 문맥 안에 들어 있다.

 

가능한 한 뜻을 옮겨보려고 애쓴 <공동번역>에는 같은 본문이 모압은 발을 대야로 삼고 에돔은 신 벗어 둘 신장으로 삼으리라. 블레셋을 쳐부수고 승전가를 부르리라고 되어 있다. <개역>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공동번역>에돔은 신 벗어 둘 신장으로 삼으리라는 사뭇 그 뜻이 다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권리나 의무를 물려주는 일과 관련하여 신을 벗는 관습이 있었다. 예를 들면, 여러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 하나가 아들 없이 죽으면 과부의 시동생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아 죽은 형의 가문을 이러주어야 했다. 그런데 만일 그가 형수를 아내로 맞지 않으면 그 형수는 법원으로 가서 장로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 시동생을 불러다가 한 번 더 타일러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형수는 장로들 보는 앞에서 그에게 다가 서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제 형의 가문을 이어 주지 않는 자는 이 꼴이 될 것이다라고 욕을 해 주도록 되어 있었다(신명기 25:5-10). 룻기에도 어떤 사람이 친족행위 수해자로서의 권리나 의무를 포기할 때 신을 벗은 예가 나온다(룻기 4:7-8). 신명기나 룻기에 나오는 두 경우가 똑같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 벗는 것과 소유권 선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에돔에다 신을 벗어 던지는 것은 에돔에 대한 소유권 선포다. 현대 불어, 독어, 영어 번역판들은 다음과 같은 번역을 반영한다.

 

나는 에돔에 신을 벗어 던졌다. 내게는 에돔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Francais Courant)

 

에돔에 대한 나의 소유권을 선포하려고 나는 에돔에 내 신을 벗어 던졌다.”(Die Gute Nachricht)

 

에돔을 내가 소유 했다는 표시로 에돔에 내 신을 던졌다.”(Good News Bible)

 

에돔에 내신을 던지리라는 말에서 우리는 에돔을 나의 소유로 삼으리라는 하느님의 소유권 선언을 듣는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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