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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306

크로스오버 더 스카이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지를 하루 지나서 비로소 해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첫날 문득 한낮의 볕이 좋아서 모처럼 따뜻한 볕이 아까워서 칠순을 넘기신 엄마랑 통도사의 무풍한송로를 걸었습니다 뿌리를 내린 한 폭의 땅이 평생 살아갈 집이 되는 소나무가 춤을 추는 듯 줄줄이 선 산책길을 따라서 겨우내 움추렸던 마음이 구불구불 걸어갑니다 사찰 내 서점에서 마주선 백팔 염주알을 보니 딸아이의 공깃돌을 옮겨가며 숫자를 헤아리던 기억에 책 외에 모처럼 갖고 싶은 물건이 생겼습니다 옆에 계신 친정 엄마한테 이십여 년만에 사달라는 말을 꺼내었습니다 엄마는 손수 몇 가지 염주알을 굴려보시더니 이게 제일 좋다 하시는데, 그러면 그렇지 제가 첫눈에 마음이 간 밝은 빛깔의 백팔 염주알입니다 엄마가 한 말씀 하십니다, "평.. 2021. 12. 31.
십자가 나무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이 땅에 오신 십자가 나무 그러나 이 땅에 머리둘 곳 없다 하시던 마음이 가난한 나무 보이지 않는 마음을 비로소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마음으로 살으라 하신 홀로 산을 오르시어 기도하시던 나무 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진리의 몸이 되신 온몸으로 시를 쓰는 마음이 따뜻한 사랑 나무 다시 하늘로 오르시어 우리에게 성령을 주고 가시며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함께 살아가든 홀로 외따로 살지라도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저마다 태양을 닮은 양심이 공평하게 나를 비추어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진리 안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한 그루의 평화 나무로 선 십자가 나무 예수 2021. 12. 26.
팔팔 동지 팥죽 새벽잠 걷어내시고 일어나셔서 몇 날 며칠 마련하셨을 붉은팥, 맵쌀, 찹쌀로 팔팔 끓이신 동지 팥죽 뚜껑 열리지 않도록 팔팔 올림픽 보자기에 꽁꽁 싸매고서 동해 바다가 품은 동짓날 떠오르는 태양처럼 품팔이로 가정 일으키신 바다 같은 품에 안으시고서 새벽 댓바람에 붉게 익은 얼굴 가득 자식 손주들 건강과 평화를 기도하시며 지나온 2021년 한 해도 감사히 다가올 2022년 한 해도 감사히 선물처럼 주시는 오늘을 해처럼 품으시고서 엄마는 새벽바람처럼 징검다리를 건너오셨습니다 2021. 12. 22.
벽돌 네 나 벽돌 일곱 나를 머리에 이고서 계단을 오르는 아지매가 떨군 눈길을 따라서 벽돌 스무 나도 넘게 등짐을 지고서 계단을 오르는 아재의 굽은 등허리를 따라서 빈 몸으로 계단을 오르는 김에 속으로 벽돌 네 나쯤이야 하면서 갓난아기를 안듯이 품에 안고서 오르다가 열 계단쯤 올라서면서 그만 어디든 내려놓고 싶어졌다 애초에 세 나만 챙길 것을 후회하면서 묵직해진 다리로부터 차오르는 뼈아픔이 벽돌로 쌓아올려야 뚫리는 하루치의 하늘과 벽돌이 된 몸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먼지 같은 숨이 벽돌 같은 세상을 맨몸으로 부딪히고서 맞는 밤하늘은 허전해 하나 하나의 벽돌 모두가 나로 쌓였다가 눈물로 허물어지는 외로운 겨울밤을 보내며 2021. 12. 19.
시들어 간다 시들 시들 시들어 간다 나무 숟가락, 밥그릇, 흙 접시 유리 찻잔을 악기 삼아 흐르는 물결과 물결의 선율에 기대어 평화를 연주하는 내 두 손으로 시들 시들 시들어 간다 평화의 물결이 스민 주름진 손등으로 피부결마다 바람의 숨결 같은 시들 시들 시가 들어간다 잔주름 결결이 황토빛 살결은 햇살 아래 시가 되어 황금 들녘 넘실넘실 2021. 12. 13.
나눔이 꽃 사과 한 알 사이좋게 모두 다 함께 나누고픈 한마음 선한 마음밭에 씨알처럼 품고서 반으로 나누면 푸른 싹이 트고 네 쪽으로 나누면 네잎꽃이 피고 여덟 쪽으로 나누면 여덟 꽃잎 코스모스 눈물나는 양파도 나눔이 꽃 그대로 접시에 담으면 밥상 가득 환하게 하얀 꽃잎들이 사이좋게 피었습니다 2021. 12. 10.
새벽 세 시, 박 기사님 새벽 세 시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 전화를 걸면 자다가도 언제나 곧장 달려오는 박 기사님이라고 있단다 그런 사람이 우리 동네에 살고 있단다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우리들 삶의 둘레에 없진 않아서 24시간 대기 중이신 소방관, 경찰, 긴급출동서비스 기사님처럼 고마운 분들이 없진 않으나 하지만 우리 동네에 그런 사람이 살고 있단다 생각을 한 땀 한 땀 이어보아도 그건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새벽 세 시에 이웃을 위해서 잠든 몸을 일으킬 수 있는 마음이 아득히 궁금해진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어디든 함께 하신다는 성경의 하느님 말고는 그런 사람 본 적이 없다 너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지 않고선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지 않고선 잠든 .. 2021. 12. 9.
산골 산 정상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잠시 머물다 내려올 곳이지 거기까지 올라 서서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면 멀리까지 내다보았다면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지 저 발아래 보이는 시인의 마을과 점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자신을 비추어 나도 그들과 같음을 나도 그처럼 멀고 작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때론 누군가에게 나도 별이 될 수 있음을 먼 그리움으로 빛날 수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아무리 그래도 산 정상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그 누구든지 잠시 머물다 내려올 곳이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정상에서는 높이 나는 새들이라도 잠시 머물기만 할 뿐 저녁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면 골짜기 어느 틈엔가 둥지를 틀고 고된 몸을 누이지 산골짜기 계곡을 따라서 물길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 2021. 12. 8.
다시 다시 보면 모두가 다 시詩 빈 하늘에 눈을 씻고서 다시 보면 땅의 모두가 다 하늘 오늘도 다시 아침해를 주시고 고된 하루에 선물처럼 다시 달밤을 주시는 순간마다 다시 숨을 불어넣으시어 주저앉으려는 몸을 다시 일으키시는 태초의 숨이 다시 숨쉬자며 처음 사랑이 다시 사랑하자고 2021. 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