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붙잡힘 한희철의 얘기마을(88) 붙잡힘 체념을 다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뿐인지도 모른다고, 농촌목회의 의미를 묻던 한 선배에게 대답을 했다. 불쑥 내뱉은 말을 다시 수긍하게 되는 건 쌓인 생각 때문이었을까.답답하구, 괴롭구, 끝내 송구스러워지는 삶,이렇게 가는 젊음의 한 시절.무엇일까, 이 붙잡힘이란. - (1991년) 2020. 9. 19. 혼자만의 저녁 한희철의 얘기마을(87) 혼자만의 저녁 동네서 가장 먼 집 출장소를 지나 외따로 떨어진끝정자 맨 끝집, 완태네 집저녁녘 완태가 나와 우두커니 턱 괴고 앉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 꿈을 그리는 것일까.모두 떠나간 형들을 생각할까. 언제 보아도 꾸벅 인사 잘하는 6학년 완태.흐르는 강물 따라 땅거미 밀려드는완태가 맞는 혼자만의 저녁. - (1991년) 2020. 9. 17. 제풀에 쓰러지는 한희철의 얘기마을(86) 제풀에 쓰러지는 아침 잠결에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밤새 내린 비, 뜨끔했다.설마 예배당, 아니면 놀이방, 그것도 아니면 화장실, 놀라 달려 나갔을 때 무너져 내린 것은 교회 앞 김 집사님네 담배건조실이었다. 지난번 여름 장마에 한쪽 벽이 헐리고 몇 군데 굵은 금이 갔던 담배창고가 드디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제법 높다란 높이, 길 쪽으로 쓰러져도 집 쪽으로 쓰러져도 걱정이었는데 사방에서 힘을 모아 주저앉힌 듯 마당 쪽으로 무너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문 벽을 쳐서 헛간 한쪽이 주저앉았을 뿐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서 동네 남자들이 모여 주저앉은 헛간을 일으켜 세웠다. 몇 곳 버팀목을 괴고 못질을 했다. 담배 창고로 끌어간, 흙더미 속에 묻힌 .. 2020. 9. 16. 할머니의 첫 열매 한희철의 얘기마을(85) 할머니의 첫 열매 주일낮예배를 드릴 때 제단 위에 덩그마니 수박 한 덩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수박농사를 지은 분이 없을 텐데 웬일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농사를 지어 추수하면 교우들은 첫 열매를 제단에 드립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예배 후 알아보니 허석분 할머니가 가져오신 것이었습니다. 텃밭에다 몇 포기 심었더니 뒤늦게야 몇 개 달렸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택에 모여 수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할머니 걱정과는 달리 속도 빨갰고 맛도 여간 단 게 아니었습니다. 노인네가 작실서부터 수박을 가져오느라 얼마나 혼났겠냐며 교우들도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고맙게 새겼습니다. 씨는 내가 심었지만 키우기는 하나님이 키우셨다며 첫 열매를 구별하여 드리는 할머니의 정성.. 2020. 9. 15. 나누는 마음 한희철의 얘기마을(84) 나누는 마음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받았다.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이라고 인사 받을 때마다 대답했지만 계속되는 인사엔 남이 받아야 할 인사를 내가 대신 받는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했다. 물난리 소식을 들었다며 수원에 있는 벧엘교회(변종경 목사)와 원주중앙교회(함영환 목사)에서 성금을 전해 주었다. 지하 셋방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신혼부부가 드린 결혼반지가 포함된 정성어린 손길이었다. 어떻게 써야 전해 준 뜻을 살릴 수 있는 것인지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다가 라면을 사기로 했다. 크건 작건 수해 안 본 집이 없는 터에 많이 당한 집만 고르는 건 아무래도 형평성을 잃기 쉬울 것 같았다. 먹거리가 아쉬운 집에 겨울 양식으로 전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일은 나중에 다시 관심을 갖.. 2020. 9. 14. 목사라는 말의 무게 한희철의 얘기마을(83) 목사라는 말의 무게 목사라는 말의 무게는 얼마큼일까?때때로 스스로에겐 너럭바위 얹힌 듯 무거우면서도,때때로 사람들의 회자 속 깃털 하나만도 못한 가벼움이라니. - (1991년) 2020. 9. 13. 상처 한희철의 얘기마을(82) 상처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힘든 일이지 싶어 저녁 어스름, 강가로 나갔다.모질게 할퀸 상처처럼 형편없이 망가진 널따란 강가 밭, 기름진 검은 흙은 어디로 가고 속뼈처럼 자갈들이 드러났다. 조금 위쪽에 있는 밭엔 모래가 두껍게 덮였다.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아물 길 보이지 않는 깊은 상처들.한참을 강가 밭에 섰다가 주르르 두 눈이 젖고 만다. 무심하고 막막한 세월.웬 인기척에 뒤돌아서니 저만치 동네 노인 한분이 뒷짐을 진 채 망가진 밭을 서성인다.슬그머니 자릴 피한다.눈물도 만남도 죄스러워서. - (1991년) 2020. 9. 12. 글 쓰는 손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한희철의 얘기마을(81) 글 쓰는 손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짜증날 정도로 무더운 날, 아예 마당에 나가 풀을 뽑았다. 집안에 앉아 축축 처지느니 ‘그래, 네가 더울 테면 어디 한번 더워 봐라’ 그러는 게 낫겠다 싶었다. 풀 돋기 시작한 봄 이후 교회 주위로 몇 번은 뽑았지만 여전히 풀들은 돋아났다. 비 한번 오고나면 쑥 자라 오르곤 하는 풀들, 풀의 생명력이란 여간 끈질긴 것이 아니다. 뒤따라 나온 소리와 같이 한나절을 풀을 뽑았다. 흠뻑 젖은 온 몸의 땀이 차라리 유쾌했다. 밤 늦은 시간 책상에 앉아 주보 원고를 쓴다. 어깨도 쑤시고, 잘려 나간 새끼손톱하며 돌멩이가 깊숙이 배겼다 빠져버린 손가락 끝의 쓰라림 하며, 맨손으로 잡아 뽑느라 힘 꽤나 썼던 손마디가 쉽게 펴지질 않는 불편함 하며, 글을 쓰기가.. 2020. 9. 11. 기도하며 일하시라고 한희철의 얘기마을(80) 기도하며 일하시라고 아무래도 우리 뒤에 올 목회자는 마음이 모질어야겠다고, 막 전화를 끝낸 내게 아내가 말합니다. 그 뜻을 모르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교우들은 예배시간을 앞두고 전화를 합니다. 전화의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일을 나가게 되어 예배를 드리러 갈 수 없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송구스러움과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같은 대답을 합니다. 기도하며 일하시라고, 그것 또한 예배라는 대답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무슨 일 있어도 예배 먼저 드리고 하라고, 엄격하질 못합니다. 어쩌면 교우들 눈에 나는 편한 목사일지도 모릅니다. 원칙보다는 형편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듯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 또한 쉬운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슴 깊이 묻어둔, 끝내 양보할.. 2020. 9. 10. 이전 1 ··· 44 45 46 47 48 49 50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