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1158 길 잃은 남철 씨 불쌍한 남철 씨.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추석 지나 친척 네를 따라 서울로 일하러 간 박남철 청년이, 서울로 간지 하루도 못 되어 집을 나가 이제껏 소식이 없다. 농사일 그것도 지게일 밖에 모르는 남철 씨, 그의 순박한 모자람을 감쌀 건 주위의 이해와 사랑뿐인데, 서울 그 복잡하고 검은 손길 많은 거리에서 길을 잃었다면 그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지. - 1989년 2021. 9. 23. 불이문(不二門) 지난 여름 강원도 고성군 대대리를 친구와 함께 찾은 적이 있다. 대대리에서 목회하고 있는 친구를 보기 위해서였다. 강원도 고성군이면 아버지 고향인 북쪽의 통천군과 접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룻밤 다녀오는 짧은 일정인지라 무얼 할까 하다가 다음날 아침 건봉사를 찾았다. 남한의 최북단에 있는 사찰로서 개방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소개를 들었다. 기기묘묘한 금강산 풍경 속 웅장한 사찰을 그리며 갔는데,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금강산 자락이라고는 하지만 여느 산과 다름이 없었고, 산꼭대기에 올라서면 멀리 아버지 고향 한 자락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었던 기대는 무리한 기대였다. 원래는 우리나라 4대 사찰 중 하나요, 금강산 내 사찰 중에선 규모가 제일 큰 본사였다는데 6.25 때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대웅전만.. 2021. 9. 22. 가난한 큰 사랑이여 4박 5일, 잠깐 군에서 휴가 나온 아들을 위해 지 집사님은 여주 장에 다녀왔다. 마늘 여덟 접을 가지고 나가 팔아 돌아가는 아들 여비를 전했다. 부모 사랑이여, 주어도 주어도 모자란, 가난한 큰 사랑이여 - 1989년 2021. 9. 21. 같이 한 숙제 “전도사님, 전도사님 속담 좀 가르쳐 줘요.”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학교에서 속담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줬단다. 방과 후 아이들은 늘 교회에 들러 숙제를 하곤 한다. 책장에서 「俗談大成」이란 책을 찾아 전해줬다. 잠시 후 아이들은 다시 달려왔다. “국어사전 좀 빌려줘요.” 낱말 조사는 스무 가지씩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아이는 3학년 전과 책이 없느냐며 묻는다. 교회 ‘샛별문고’ 책장을 찾아 봤지만 국어사전이 없다. 원래 없었는지 누가 빌려갔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할 수 없이 「새 우리말 큰사전」 두 권을 뽑아들고 교회로 갔다. 아이들과 둘러 앉아 숙제를 같이 했다. 잘 모르는 낱말을 찾아 아이들은 밑줄을 긋고, 두꺼운 사전을 뒤져 뜻을 찾았다. 어느새 스무 개, 어렵게만 생각했던 숙제를 생각보단.. 2021. 9. 20. 갈수록 그리운 건 《갈수록 그리운 건 샘물이지 싶습니다.》 오전 내내 뚝딱거려 작업을 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연장과 나무궤짝, 그리고 주변의 각목조각들을 주워 모아 놓고 톱으로 쓸고 망치로 박고 지난번 쓰다 남은 페인트를 칠하고, 제법 분주하게 돌아쳐서야 서툰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교회 수도를 팔 때 교회 입구 쪽으로 수돗가를 만들었다. 길가 쪽인지라 마을 분들 일하러 지나가다 혹 목마르면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땀이라도 시원하게 씻으시라 일부러 위치를 그곳으로 잡았다. 대개가 원래 의도대로 쓰이지만 때때로 엉뚱하게 쓰이기도 한다. 몇 안 되는 동네 꼬마 놀이터(소꿉장난하며 쌀을 씻는 곳이다) 되기 일쑤고, 좀 큰 녀석들은 물싸움을 하기도 하고, 아예 호스로 물을 끌어 농약을 주기도 하고, 동네에 큰일 있을 땐 큰일.. 2021. 9. 19. 하늘 뜻 “대통령도 밥 묵고 사는 기여. 아무리 돈 많아도 돈 먹고는 못 사는 기여.” 도로에 벼를 널고 계신 동네 할아버지. 추곡 수매가에 대한 부총리의 대답을 어젯밤 뉴스를 통해 봤다시며 “지덜이 우리가 농사 안지면 뭘 먹구 살려구.” 하며 화를 내신다. 뭐가 어떻게 남는 건지 쌀 남으니 쌀 막걸리 만들고, 논밭이나 줄이자고 하는 나라님들 고견을 두고, 한 촌로(村老)의 말씀이 무섭다. 그 말씀 속에 스민 하늘 뜻이 두렵다. - 1989년 2021. 9. 18. 형에게 兄, 신집사님 댁에 보일러를 놓았습니다. ‘눈구뎅이 빠지며 나무 가쟁이 꺾을’ 또 한 번의 ‘서러운 겨울’을 앞두고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兄의 믿음의 힘이 컸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 드린 것이라 당연하다 겸손하게 말하지만 어찌 그 당연함이 쉽기만 하겠습니까. 보일러를 놓은 방은 작은 한 칸 방입니다. 어린 아들 데리고 둘이 살아가는 좁다란 방입니다. 그 좁은 방에도 서러움은 많고, 한 겨울 주인처럼 찾아드는 추위를 두곤 생각도 많았는데, 이젠 그런 눅눅하고 무거운 마음도 많이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 한 달 일한 품값 받으면 밀린 빚 갚고, 연탄 좀 들여 놓을 수 있고, 남은 시간 또 일하면 겨울 지낼 양식 장만은 가능할 거라시며 신집사님은 모처럼 든든하십니다. 작은 키에 움츠린 어깨, .. 2021. 9. 17. 주님, 오늘 하루도 새벽 4시 20분. 어김없이 자명종이 웁니다. 날랜 벌래 잡듯 울어대는 시계를 끕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습니다. 새벽공기 차가운 마당에 나서면 그제야 잠이 달아납니다. 가을 새벽하늘 별들은 시리도록 맑습니다. 밤새 이슬로 씻은 듯 깨끗합니다. 캄캄한 예배당, 오늘도 아무도 없습니다. 제단 쪽 형광등 2개와 십자가 네온에 불을 켭니다. 새벽종을 치기 전 늘 망설임이 지납니다. 여린 마음 탓입니다. 소리를 낮춰 종을 칩니다. 새벽 어둠속으로, 고단한 잠자리로 종소리는 달려갑니다. 잠시 후 개 짓는 소리, 그리고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들어서는 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짐작이 갑니다. 대개는 둘, 간혹 셋이서 예배를 드립니다. 벼 베는 철, 납덩이 같이 무거.. 2021. 9. 16. 그대 앞에 내 사랑은 그대 앞에 내 사랑은 가난한 사랑은 그대 가슴에 닿기도 전 스러지고 만다 마른 마음에 슬픔을 키우고 오늘도 해는 쉽게 서산을 넘었다 품을 수 없는 표정들이 집 앞 길로 지나고 무심히 서둘러 지나고 어둠속 부를 이름 없었다 웅크린 잠 꼭 그만큼씩 작아지는 생 하늘은 꿈에나 있고 폐비닐로나 널린 이 땅의 꿈을 두고 그대 앞에 내 사랑은 가난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 1989년 2021. 9. 15.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1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