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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60

앞으로 걷는 게 게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바닷가 갯벌에 사는 흔한 게 중의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그가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도 생각지 않은 것을 혼자 생각하면 이상하다고 하더군요. ‘우린 왜 옆으로 걸을까. 앞으로 걸을 순 없는 걸까?’ 그는 앞으로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옆으로 아니라 앞으로야.’ 맘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을 했습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여 마신 후 조심스레 발을 뻗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떨렸습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참고 다른 한 발을 마저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눈을 떴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발은 옆으로 가 있었습니다. 처음이니까 그렇겠지 하며 다시 한 번 해 보았습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생각뿐 발은 옆으로 갔습니다. 몇 번을 더 .. 2021. 7. 13.
새총까무리 아프기 잘하는 박종석 성도가 또 감기에 걸렸다. 해수병이라 말하는, 늘 바튼 기침을 하는 터에 감기가 걸렸으니 연신 된 기침이다. ‘크렁크렁’ 속에서부터 나오는 숨소리가 더욱 거칠다. 지난번처럼 또 혼자 누워 계셨다. 좁다란 방안 가득 산수유를 말리며 아랫목에 좁다랗게 누워 계셨다. 기도하고 마주 잡은 꺼칠한 손, 놀랍게도 그분의 엄지손톱은 V자 모양으로 움푹 패여 있었다. 산수유 씨 빼느라 손톱이 닳은 것이다. 새총 까무리, 깊게 패인 손톱을 보며 떠오른 건 어릴 적 새총까무리였다. 아기 기저귀 할 때 쓰던 노란 고무줄을 양쪽으로 묶어 만든 새총. 힘껏 고무줄을 잡아 당겨도 나무가 휘거나 부러지지 않아야 되는 Y자 모양의 튼튼한 나뭇가지를 우리는 새총 까무리라 불렀다. 새총 감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 2021. 7. 12.
거룩한 모습 그 분은 늘 그곳에 있었습니다. 원주 A도로와 B도로 사이 중앙시장 골목, 해가 한 중간에 떠올라야 잠시 햇빛이 건물사이로 비집듯 비취는 곳입니다. 몇 가지 과일을 상자에 담아 펼쳐 놓고 장사를 하는, 주름이 많은 아주머니입니다. 가끔 나는 그곳을 지나게 되는데 골목을 지날 때마다 멈칫 발걸음을 멈추곤 합니다. 아주머니는 과일을 팔고 있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다른 모습입니다. 조그만 좌판 위 그분은 정갈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책을 읽곤 했습니다. 낡은 성경책입니다. 표면의 붉은색이 허옇게 변해버린, 아주 낡은 성경책이었습니다. 읽던 곳 바람이 덮지 못하도록 성경 귀퉁이엔 빨래집개를 꽂아 두었습니다. 허름한 옷차림에 오가는 사람들 마다하지 않고 틈틈이 성경을 읽는 그분의 모습은 내겐 성스러움입니다... 2021. 7. 11.
버스 개통 작실까지 들어오는 버스가 드디어 개통됐다. 선거 때마다 들어온다 했다가 선거 끝나면 조용했던, 그때마다 길을 닦았던 온 마을사람들의 수고가 헛수고가 됐던 버스가 지난 6월10일 개통을 한 것이다. 이번에 한 번 더 속아보자 하며 개통식을 준비했던 작실 주민들에겐 정말 버스가 들어오고, 테이프를 끊고, 고사를 지내고 하는 것이 여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듯싶었다. 작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그래도 그게 어딘가. 신작로에서 윗작실까진 걸어서 30분 내지 40분 거리, 누구보다도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버스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몇몇 기관장들의 축사를 듣고, 박수를 치고, 떡과 돼지머리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고, 돌아가며 절을 하고, 버스에 술을 붓고, 푸짐히 .. 2021. 7. 9.
죽은 제비 이속장님이 갖다 준 고추모종을 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에 놀러 온 종순, 은옥이와 함께 교회 뒤에 있는 작은 밭으로 올랐다. 전에 살던 반장님 댁이 담배모종을 위해 뒷산 한쪽을 깎아 만든 비닐하우스가 있던 자리이다. 언덕으로 오르는 곳에 S자 모양의 계단을 만들고선 그 밭에다 토마토, 빨간 호박, 참외, 도라지 등을 조금씩 심었다. 마른날이 계속되면 물도 주고 가끔씩 풀을 뽑기도 한다. 우리끼리 아기 이름을 따서 ‘소리농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밭으로 오르는데 보니 제비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어 있었다. 어디 잘못 벽에 부딪쳤지 싶다. 작은 몸뚱이, 저 작은 몸뚱이에서 그 힘찬 날개 짓이 나오다니. 언제 죽었는지 한쪽 날개를 집어 드니 등짝엔 벌써 개미들이 제법 꼬여있었다. 죽은 제비를 들자 종순.. 2021. 7. 8.
어린왕자의 의자 서재, 책상의 위치를 바꿨다. 날씨는 덥고 무료하기에 책상 위 책꽂이를 한쪽 옆으로 내려놓고 벽 쪽을 마주했던 것을 서쪽 창가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높이가 잘 맞는 건 아니지만 의자에 앉으면 창문을 통해 많은 것이 내다보인다. 교회 앞 허술한 방앗간 지붕, 아이 뒷머리 기계로 민 듯 나무 모두 잘라내고 잣나무를 심은 신작로 건너편 산, 그리고 그 너머 하늘과 맞닿은 강 건너 산, 그러니까 책상 앞에 앉으면 강원도에 앉아 충청북도의 산을 마주하는 셈이다. 의자를 조금 움직여야 하지만 학교 쪽으로 난 길을 통해서는 학교 갔다 돌아오는 아이들을 볼 수도 있다. 해질녘의 노을과 밤늦게까지 지워지지 않는 어둠속 산과 하늘의 경계선, 막 깨어나는 별들. 몹시 슬플 때에는 해 지는 모습 보기를 좋아했다는 어린왕자,.. 2021. 7. 7.
눈물과 비 이따금 당신들의 눈물을 마주하게 됩니다. 서러운 얘기 서럽게 하다 자신도 모르게 주르륵 흐르는 눈물, 혹은 쓰러져 주체할 줄 모르는 눈물, 그렇게 당신들의 눈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난 망연히 마주할 뿐 무어라 말할지를 모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쓰리고 아픈 마음, 괴롭고 힘겨운 시간들, 도대체 와 닿지 않는 생의 위로, 따뜻한 기운, 난 그저 안쓰럽게 당신들의 슬픔을 마주하며 그걸 마음으로 느낄 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 흔한 성경말씀도 그럴 땐 떠오르지 않고, 떠오르는 몇 구절은 당신들의 눈물과 거리가 느껴집니다. 못난 전도사죠. 그러고 돌아서는 길,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서는 길, 마음속엔 비가 내립니다. 늘 비가 내립니다. - 1988년 2021. 7. 6.
흔들리는 생 텅 빈, 흔들리는 직행버스.안내양이 책을 꺼내든다. 보니 세계사 참고서. 흔들리는 글씨, 흔들리는 내용, 흔들리는 생. “안녕히 가세요.” 버스에서 내리려하자 어느새 책을 접고 밝게 인사를 한다. 떠나간 버스에서 한참을 눈을 못 떼다. - 1988년 2021. 7. 5.
새장이 갇힌 한 마리 어린 새는 어떻게 울었는지 옛날을 잃어 버렸다가 비오는 밤, 토하듯 울어대는 제 어미의 슬픈 소리를 듣곤 생각나는 듯 방울방울 빗줄기를 목쉬게 한다. - 1988년 2021.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