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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정은 한희철의 얘기마을(43)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정은 버스를 타러 신작로로 나가는데 길가 논에서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일을 하고 있었다. 반백이었던 머리가 잠깐 사이 온통 하얗게 셌고, 굽은 허리는 완전히 기역자로 꺾였다. 할아버지는 쇠스랑대로 논에 거름을 헤쳐 깔고 있었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는 “올해도 농사하세요?” 하고 여쭸다. 나이도 나이고, 굽은 허리도 그렇고, 이젠 아무리 간단한 농사라도 할아버지껜 벅찬 일이 되었다. 잠시 일손을 멈춘 할아버지가 대답을 했다. “올해까지만 짓고 내년에는 그만 둘 꺼유.” 할아버지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안다. 할아버진 지난해에도 그러께도 같은 대답을 했다. 아마 내년에도 같은 대답을 하실 게다. 올해까지만 짓고 내년엔 그만 두겠다고. 언젠가 취중에 ‘.. 2020. 8. 1.
도시락과 반찬통 한희철의 얘기마을(42) 도시락과 반찬통 도시락에 대해 물은 건 떠난 민숙이 때문이었다. 그나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학교를 졸업한 민숙이가 도시락을 챙겨줬을 터였지만 민숙이 마저 동네 언니 따라 인천 어느 공장에 취직하러 떠났으니 도시락은 어찌 되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일 오후 광철 씨네 심방을 갔다가 봉철이를 만난 것이었다. “안 싸가요.” 봉철이의 대단은 간단했다. “왜?”“그냥, 싸 가기 싫어요.”“그럼 점심시간엔 뭘 하니?”“혼자 놀아요. 혼자 놀다 아이들 다 먹고 나오면 같이 놀아요.”“도시락은 없니?”“도시락은 있는데 반찬통이 없어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반찬통이 없다니. 정말 없는 게 어디 반찬통일까. 재작년 엄마 병으로 하늘나라 가시고, 올 봄 누나 공장으로 떠나고, 술.. 2020. 7. 31.
먼지 한 톨 신동숙의 글밭(203) 먼지 한 톨 먼지 한 톨로 와서먼지 한 톨로 살다가먼지 한 톨로 돌아가기를 내 몸 무거운 체로하늘 높이 오르려다가땅을 짓밟아 생명들 다치게 하는 일은마음 무거운 일 들풀 만큼 낮아지고 풀꽃 만큼 작아지고밤하늘 홀로 빛나는 별 만큼 가난해져서 내 마음 가벼운먼지 한 톨로 살아가기를 높아지려 하지 않기를무거웁지 않기를부유하지 않기를 그리하여자유롭기를 2020. 7. 31.
허울 좋은 사랑 한희철의 얘기마을(40) 허울 좋은 사랑 “선한 목자는 양을 사랑하지.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그 양을 찾는단다.”어린이 예배 시간, 아내가 선한 목자와 양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했다 한다. 말똥말똥 이야기를 듣던 주환이가 불쑥 묻기를 “그치만 나중에 잡아먹잖아요?” 했단다. 어린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그 이야기를 했고, 뜻밖의 이야기에 낄낄 웃었지만 솔직히 속은 불편했다. 아이들의 단순한 시선에 걸린 분명한 현실 비판. 허울 좋은 사랑의 거짓 명분도 있지. 암, 있고말고! - (1990) 2020. 7. 30.
"엄마, 내가 끝까지 지켜볼꺼야" 신동숙의 글밭(202) "엄마, 내가 끝까지 지켜볼꺼야" 오후에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지는가 싶더니 전화가 걸려옵니다. 합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아들입니다. 지난 겨울 방학부터 코로나19로 반년을 집에서 거의 은둔 생활을 해 오던 아들이, 그립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시작한 건 초여름인 6월 중순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학교와 함께 푹 쉬었던 학원들과 학습에도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즘 들어 매일 아침이면 거울 앞에서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마지막에 마스크를 쓰고서 등교 준비를 하는 아들의 낯선 모습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이유는 비가 세차게 내리니, 집에 있는 복싱 가방을 가지고 중간 지점인 학교 앞으로 와 달라는 얘기입니다. 집에 들렀다가.. 2020. 7. 30.
마음속의 말 신동숙의 글밭(201) 마음속의 말 믿으라 말씀하시는마음속의 말은 내가 먼저 너를 믿는다 사랑하라 말씀하시는마음속의 말은 내가 먼저너를 사랑한다 먼저 믿지 않고선먼저 사랑하지 않고선 결코 건넬 수 없는 마음속의 말 말씀보다 먼저 있는 마음 2020. 7. 29.
우리 집에 왜 왔니? 한희철의 얘기마을(39) 우리 집에 왜 왔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가 뒤로 돌아 게시판에 머리를 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욀 때 모두들 열심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술래 쪽으로 나아갔다. 느리기도 하고 갑자기 빨라지기도 하는 술래의 술수에 그만 중심을 잃어버리고 잡혀 나가기도 한다. 그러기를 열댓 번, 술래 앞까지 무사히 나간 이가 술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고 있는 동안, 그동안 잡아들인 사람들의 손을 내리쳐 끊으면 모두가 “와!”하며 집으로 도망을 친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꽃을 따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무슨 꽃을 따겠니, 따겠니, 따겠니?” 두 패로 나뉘어 기다랗게 손을 잡곤 파도 밀려갔다 밀려오듯, 춤추듯 어울린다. 따지듯 점점 .. 2020. 7. 29.
자격심사 한희철의 얘기마을(38) 자격심사 -교회 세워진 지 몇 년 됐죠?-3년 됐습니다.-지금 몇 명 모입니까?-20여명 모입니다.-첨엔 몇 명 모였나요?-20여명 모였습니다. 피식 웃었다. 자격 심사, 둘러앉은 심사위원들이 3년 동안 그대로인 수치를 두고 웃었다.나도 웃으며 그랬다. -작년 한 해 동안 세 분이 이사 가고, 세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모두들 다시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그러면서-됐습니다. 나가세요.그렇게 자격심사가 끝났다. - (1990) 2020. 7. 28.
기도의 씨앗, 심기 전에 먼저 신동숙의 글밭(200) 기도의 씨앗, 심기 전에 먼저 장맛비가 쏟아지는 저녁답, 잠시 차를 세운다는 게 과일 가게 앞입니다. 환하게 실내등이 켜진 과일 가게 안을 둘러봅니다. 반쯤 익은 바나나가 비닐 포장에 투명하게 쌓여 있고, 붉은 사과는 계절을 초월해 있고, 일찍 나온 포도 송이에 잠시 망설여지고, 토마토는 저도 과일이라 합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과일이 노랗게 잘 익은 황도 복숭아입니다. 황도 복숭아를 좋아하는 아들의 얼굴이 동그랗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요즘은 떠오르는 얼굴이 그 옛날 맑은 밤하늘에 별처럼 별자리처럼 많아서 행복합니다. 과일에는 씨앗이 있듯이 불교, 천주교, 기독교 등 모든 종교에는 종교 교리 속에 씨앗 같은 영성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리와 기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나의 .. 2020. 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