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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도 안 산 한희철의 얘기마을(53) 살아도 안 산 “그냥 살다 죽지 이제 살리긴 뭘 살려, 세금만 더 낼 텐데.” 치화 씨 어머니는 호적이 없습니다. 십여 년 전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치화 씨 어머니도 부산 어디 수용소에 갇히는 등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던 것인데 그러는 사이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 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호적 이야기가 나왔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까짓것 그냥 살다 죽지 뭘 하러 죽은 호적을 살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십년 넘어 만에 아들 치화 씨를 만나 기구한 삶 오늘에 이어오지만 그렇게 살아도 이 세상 안 산 걸로 돼 있는 치화 씨 어머니. 언제 한 번 생이 따뜻이 그를 맞아줘 살 듯 산 적 있었겠냐만, 살아도 안 산,.. 2020. 8. 13.
어떤 부흥사 한희철의 얘기마을(52) 어떤 부흥사 “그 다음날 탁 계약을 했어.” 지방산상집회, 설교하던 강사는 자기가 그랜저 자가용을 사게 된 과정을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감독도 못 타는 그랜저를 이야기가 나온 바로 다음날 교인들이 보기 좋게 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구구절절 헤프다 싶게 아멘 잘하던 성도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잠깐의 침묵이 내겐 컸고 길었다. 계속 이어진 자랑들, 수십 평 빌라에 살고, 한 달 목회비만 수백만 원, 넥타이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몇 백, 어디 나갈 일 있을 땐 교인들이 수표를 전하고... 그의 말대로 그게 하나님의 축복일까? 물신의 노예로밖엔 더도 덜도 아니었다. 앉아 이야기를 듣는 교인 중의 대부분은 농촌교회 교인들. 문득 한 장면이 강사 이야기와 겹쳤다. 개.. 2020. 8. 12.
차 한 잔 신동숙의 글밭(209) 차 한 잔 빈 가슴으로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날 문득차 한 잔 나누고 싶어이런 당신을 만난다면 푸른 가슴에 작은 옹달샘 하나 품고서 때론 세상을 가득 끌어 안은 비구름처럼 눈길이 맑고 그윽한 당신을 만난다면차 한 잔 나누고 싶어 어둔 가슴에 작은 별빛 하나 품고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희미한 너를 빛나게 하는목소리가 맑고 다정한 당신을 만난다면차 한 잔 나누고 싶어 이런 당신을 만난다면하얀 박꽃이 피는 까만 밤 서로가 아무런 말없이 찻잔 속에 앉은 달빛을 본 순간 문득 고개 들어저 하늘에 뜬 달을 우리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나 이런 당신이지금 내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는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노랫말처럼 어느새 고요해진 가슴에 작은 옹달샘 하나 때론 별빛 하나 .. 2020. 8. 12.
사랑이 익기도 전에 신동숙의 글밭(209) 사랑이 익기도 전에 신의 첫사랑으로똘똘 뭉친 씨앗 한 알 그 씨앗 속 천지창조 이전의 암흑과 공허를 두드리는 빗소리 밤새 내린 빗물에 움푹 패인 가슴고인 눈물에 퉁퉁 불기도 전에 기도와 사색의 뿌리를 진리의 땅 속으로 깊이 내리기도 전에 푸릇한 새순이 고개 들어하늘을 우러르기도 전에 진실의 꽃대를 홀로 걸어가는 고독과 침묵의 좁은 길을 걸어 줄기 끝까지 닿기도 전에 노을빛의 그리움으로 무르익기도 전에 살갗을 태우는 여름의 뜨거움을가을날 황홀한 노을빛의 이별을가난한 마음을 노래하는 겨울을충분히 계절 속에 잠기기도 전에 사랑이 익기도 전에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씨앗들 2020. 8. 11.
쥑이는 것두 하나님이요 한희철의 얘기마을(51) 쥑이는 것두 하나님이요 “쥑이는 것두 하나님이요, 살리는 것두 하나님이니......” 지난여름 장마에 봄 작물을 모두 ‘절딴’ 당한 지 집사님은 그렇게 기도했었다. 대신 가을 농사만은 잘 되게 해 달라는, 반은 탄식이었고 반은 눈물인 기도였다. 그 넓은 강가 밭을 바다처럼 삼켜버린 가을 홍수가 무섭게 지나갔다. 밭인지 갯벌인지, 논인지 개울인지 홍수 지난 뒷자리는 구별이 안 됐다. 결국 수마는 지 집사님 기도 위로 지나갔다. 수원 아들네 다니러 가 길이 끊겨 아직 오지도 못한 지 집사님.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 건지. - (1990) 2020. 8. 11.
심심함 한희철의 얘기마을(50) 심심함 “승혜야 넌 커서도 여기서 살고 싶니? 아니면 고모 살고 있는 도시에서 살고 싶니?” 자주 사택에 놀러오는 승혜에게 아내가 물었다. 승혜가 벌써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단강은 싫어요.”“왜?”“심심해서요. 숙제하고 나오면 아무도 없어요.” 심심해서 단강이 싫다는 승혜. 그건 승혜만한 아이뿐만이 아니다. 떠난 많은 사람들, 그들도 심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가버리는 무심한 세월이 싫어서, 두려워서 떠난 것이 아닌가. 잃어버린 살맛에 대한 두려움이 아이들에게까지 번져 있다. 뿌리가 야위어가고 있는 것이다. 심심함으로... - (1990) 2020. 8. 10.
"일단 사람이 살아야합니다" 신동숙의 글밭(208) "일단 사람이 살아야합니다" 제주, 부산, 광주, 대전, 천안, 인천, 서울, 철원, 영동, 하동, 구례 등 전국적으로 잇달아 올라오는 비 피해 소식에 무거운 마음으로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반도 남단에 있는 하동의 화개 장터와 구례의 섬진강이 범람한 모습에 말문이 막힙니다. 목숨을 구하려는 다급한 목소리가 담긴 김순호 구례 군수님의 글을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대로 옮깁니다. 이렇게 지면에서라도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지만, 수해민들에게는 무슨 도움이 될까 싶습니다. "어떤 재산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재산피해가 있어도 인명피해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야말로 초토화입니다. 처참합니다. 구례읍 봉서·봉동·계산·논곡·신월·원방, 문척면 월전·중마, 간전면 간.. 2020. 8. 10.
대견스러운 승혜 한희철의 얘기마을(49) 대견스러운 승혜 승혜는 초등학교 2학년이다.대부분 그 나이라면 아직은 응석을 부리며, 숙제며, 지참물이며, 입는 옷이며, 매사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때다.그러나 승혜는 다르다.빨래며, 설거지며, 청소며, 못하는 게 없다. 늘 바쁜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나가 놀기 좋아하는 오빠와 남동생.승혜는 불평 없이 집안일을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한다.인사도 잘하고 웃기도 잘하는 어린 승혜.승혜가 대견한 건 승혜 엄마만이 아니다. (1989) 2020. 8. 9.
그 얼마나 신동숙의 글밭(208) 그 얼마나 한 송이 꽃봉오리그 얼마나 햇살의 어루만짐그 얼마나 살갑도록 빗방울의 다독임그 얼마나 다정히 바람의 숨결그 얼마나 깊이 겹겹이 둘러싸인 꽃봉오리는고독과 침묵의 사랑방 받은 사랑다 감당치 못해 한 순간 터트린눈물웃음꽃 2020.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