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64 늙은 농부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58) 늙은 농부의 기도 나의 몸은 늙고 지쳤습니다. 텅 빈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서너 번 서리 맞은 호박덩이 마냥어디 하나 쓰일 데 없는 천덕꾸러기입니다. 후둑후둑 벗겨내는 산 다랑이 폐비닐처럼 툭툭 생각은 끊기고 이느니 마른 먼지뿐입니다. 이제 겨울입니다. 바람은 차고 몸은 무겁습니다. 오늘도 늙고 지친 몸으로 예배당을 찾는 건까막눈 상관없는 성경책 옆구리에 끼고 예배당을 찾는 건그나마 빈자리 하나라도 채워 젊은 목사양반 허전함을 덜려는 마음 궁리도 있거니와볼품없는 몸으로 예배당을 찾는 건거친 두 손 모아 남은 눈물 드리는 건 아무도 읍기 때문입니다. 내 맘 아는 이 내 맘 아뢸 이아무도 읍습니다. 하나님 아부지. 여기엔 아무도 읍습니다. - (1992년) 2020. 8. 18. 결 신동숙의 글밭(213) 결 광목으로 만든 천가방, 일명 에코백 안에는 푸른 사과 한 알, 책 한 권,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 잉크펜 한 자루, 주황색연필 한 자루, 쪼개진 지우개 한 조각이 든 검정색 작은 가죽 필통과 칡차를 우린 물병 하나가 있습니다. 쉼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살짝 조여진 마음의 결을 고르는 일이란, 자연의 리듬을 따라서 자연을 닮은 본래의 마음으로 거슬러 조율을 하기 위하여, 여러 날 고대하던 숲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숨을 봅니다. 호흡은 평소보다 조금은 느리고 긴 호흡입니다. 호흡이 느리면 자연히 발걸음도 느릿느릿 열심을 내지도 않고 목적도 없는 그야말로 느슨한 걸음입니다. 그 느슨함이 여유와 비움으로 이어지면서 숲의 들숨은 저절로 깊어집니다. 가다가 서고 머뭇머뭇.. 2020. 8. 17. 은하수와 이밥 한희철의 얘기마을(57) 은하수와 이밥 서너 뼘 하늘이 높아졌습니다. 밤엔 별들도 덩달아 높게 뜨고, 이슬 받아 세수한 것인지 높아진 별들이 맑기만 합니다. 초저녁 잠시뿐 초승달 일찍 기우는 요즘, 하늘엔 온통 별들의 아우성입니다. 은빛 물결 이루며 강물 흐르듯 밤하늘 한 복판으로 은하수가 흐릅니다. 제각각 떨어져 있는 별들이 다른 별에게로 갈 땐 그 길을 걸어가지 싶습니다. 옛 어른들은 은하수를 보며 그랬답니다. 가만히 누워 은하수가 입에 닿아야 이밥(쌀밥) 먹을 수 있는 거라고. 교우들을 통해 들은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은하수를 보며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즉 햅쌀을 먹을 ‘때’에 대한 가르침일 수도 있고, 은하수 흐드러질 만큼 맑은 날씨, 그래야 한낮엔 뜨거운 볕에 벼가 익어갈 .. 2020. 8. 17. 영원의 의미 한희철의 얘기마을(56) 영원의 의미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면 날 마주하는 두 개의 문자가 있습니다.알파(Α) 와 오메가(Ω), 처음과 나중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늘 그 사이에 앉게 됩니다.처음과 나중 그 사이의 어느 한 점.내 삶의 시간이란 결국 그뿐이며 그것이 내겐 영원입니다. - (1990년) 2020. 8. 16. 볼펜 한 자루의 대한독립 신동숙의 글밭(212) 볼펜 한 자루의 대한독립 외국에 있는 벗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는 일에는 이왕이면 한국산을 고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먼 타향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고국에서 온 것이라면 더 소중하고, 때론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선물 하나가 마중물이 되어서, 마치 고향의 산과 들을 본 듯 그만큼 반가울 수도 있는 일이다.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달과 별처럼 작고 단순한 물건이 그리운 제 나라의 얼굴이 되고 체온이 될 수도 있기에,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찾기로 했다. 북쪽 나라에 부치던 윤동주의 귀여운 조개껍질처럼,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에서 물소리 바닷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이다. 한동안 찾았으나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고르는 일이 순조롭지 못한 이유를 곰곰이 .. 2020. 8. 15. 해가 서산을 넘으면 한희철의 얘기마을(55) 해가 서산을 넘으면 해가 서산을 넘으면 이내 땅거미가 깔립니다. 기우는 하루해가 갈수록 짧습니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면 예배당 십자가에 불을 밝힙니다. 털털거리는 경운기에 하루의 피곤을 싣고 어둠 밟고 돌아오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따뜻한 기운으로 그들을 맞고 싶기 때문입니다. 떠나가고 없는 식구들 웃음처럼, 따뜻한 불빛처럼, 땀 밴 하루의 수고를 맞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매일 저녁, 해가 서산을 넘으면 깔려드는 땅거미를 따라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불을 밝힙니다. - (1990년) 2020. 8. 15. 물빛 눈매 한희철의 얘기마을(54) 물빛 눈매 5살 때 만주로 떠났다 52년 만에 고국을 찾은 분을 만났다. 약간의 어투뿐 조금의 어색함이나 이질감도 안 느껴지는 의사소통, 떨어져 있는 이들이 더욱 소중히 지켜온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놀라웠다. 헤어질 때 7살이었던, 지금 영월에 살고 있는 형님 만날 기대에 그분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강산이 변해도 수없이 변했을 50년 세월. 그래도 그분은 52년 전, 5살이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동굴 있는 곳에 가서 제(제사)를 드리던 일과, 강냉이 밭 산짐승 쫓느라 밤마다 형하고 빈 깡통 두들기던 일, 두 가지가 아직도 생각난다고 했다. 50년 넘게 이국땅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며 외롭고 힘들 때마다 빛바랜 사진 꺼내들 듯 되살리곤 했을 어릴 적 기억 두 가지... 2020. 8. 14. 8월에 순한 가을 풀벌레 소리 신동숙의 글밭(211) 8월에 순한 가을 풀벌레 소리 장마와 폭우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삼복 더위의 징검돌로 이어지던 8월의 한 여름 빛깔이 흐지부지해지고 있다. 이미 입추(入秋)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귀를 쨍쨍 울리던 한낮의 매미 소리가 여름 하늘을 쨍 울리지도 못하고 벌써 순하기만 하다. 저 혼자서 무더운 여름 한낮에 독창을 하던 매미 소리였지만, 가슴을 뚫고 들어오던 소리와는 달리 한결 순해지고 초가을의 풀벌레 소리와 섞이어 합창이 되었다. 여름과 가을이 나란히 부르는 8월의 노래다. 여느 때와는 달리 들려오는 소리도 바람의 냄새도 다른 초가을 같은 8월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삶의 모든 터전을 쓸고 간 물난리에 망연자실해 있을 이웃들의 마음이 멀리서도 무겁게 전해진다. 잠깐 쨍하고 나타난 여름.. 2020. 8. 14. 찻물의 양 신동숙의 글밭(210) 찻물의 양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분명 언제부턴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터입니다. 어쩌면 선조들의 무의식에 각인이 되어 있어서 입에 쓰지 않으면 몸에 유익함이 부족할 것이라는 믿음까지 일으키게 하는 선입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차를 자주 마시다 보니 가끔 저에게 찻물의 양을 물어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계량된 물의 양대로 맞추어야 하는지, 말하자면 이왕에 우려서 마시는 차 한 잔에서 최상의 효과까지 기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해 드립니다. 목 넘김이 편안한 정도로 물의 양을 조절하시고, 우려내는 시간도 조정하시면 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계량은 참고만 하시고, 찻물의 기준은 내 몸이 되어야 .. 2020. 8. 13. 이전 1 ··· 108 109 110 111 112 113 114 ··· 29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