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87 직행버스 풍경 귀래를 돌아 원주로 나가는 직행버스. 남은 자릴 하나 두고 노인네 몇 분이 싸우듯 양보한다. 백발에 굽은 허리, 제법 긴 수염에 허전하게 빠진 이. 그만그만한 노인네 몇 분, 서로가 서로에게 측은한지 서로를 잡아당긴다. 일어날 젊은이 없는 직행버스가 빈자리 하날 두고 힘겹게 양아치 고개를 넘는다. - 1991년 2021. 11. 8. 한 폭의 땅 지친 내 마음이 안길 곳을 찾아서 바다로 가는 물안개처럼 흘러서 간다 떠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아서 산으로 가는 산안개처럼 흘러서 간다 그러나 나의 안길 곳은 바다가 보이는 집이 아니오 나의 기댈 곳은 깊은 산골 오두막이 아니오 그리고 나의 안길 곳은 정다운 가족이 아니오 나의 기댈 곳은 믿음직한 벗도 아니오 지친 내가 기대어 안길 곳은 산의 고독과 바다의 침묵을 닮은 고독과 침묵으로 오늘을 맴돌다가 잠시 멈춘 무리를 떠나 홀로 산을 오르시는 예수의 고독처럼 흐르는 카필라 왕궁을 떠나 온세상을 떠돌다가 비로소 앉은 보리수 나무 아래 석가모니의 침묵처럼 흐르는 그 좁은길로 흘러서 하늘문을 여는 이곳 지금 바로 내가 앉은 이 한 폭의 땅 뿐이오 풀잎처럼 두 다리를 포개어 평화의 숨을 고르는 꽃대처럼 허.. 2021. 11. 8. 강아지 두 마리 안갑순 속장님이 몸져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끝정자로 내려갔습니다. 아직껏 가슴이 뛴다는 속장님 얼굴은 많이 수척해 있었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깟 강아지 두 마리에 웬 수선이냐 할진 몰라도 얘길 들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일 년 내내 번 돈을 아껴서 집사님 내외분은 강아지 두 마리를 샀습니다. 쉽게는 구할 수 없는, 사람 주먹보다도 작은 귀한 강아지였습니다. 인형같이 생긴 강아지 두 마리를 방안에 키우며 며칠 동안은 고놈들 귀여운 맛에 하루해가 짧았습니다. 들인 거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아지들은 귀여움 투성이였습니다. 자식 없이 살아가는 노년의 외로움을 그렇게 이겨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고가 나던 날, 마침 겨울 볕이 따뜻하기에 강아지 먹일 우유를 데우는 동안 .. 2021. 11. 6. 엄마 젖 “아무리 추운 날 낳다 해두 송아질 방으로 들이면 안 돼유. 그러믄 죽어유. 동지슷달 추운 밤에 낳대두 그냥 놔둬야지, 불쌍하다 해서 군불 땐 방에 들이믄 외려 죽구 말아유.” 송아지를 낳은 지 며칠 후 속회예배를 드리게 된 윗작실 이식근 성도님은 이렇게 날이 추워 송아지가 괜찮겠냐는 질문에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송아지는 낳아 어미가 털을 핥아 말려 주믄 금방 뛰어 다녀유. 낳자마자 엄마 젖을 먹는데 그걸 초유라구 하지유. 그 초유를 먹으믄 아무리 추운 날이랙두 추운 걸 모른대유. 초유 속에 추운 걸 이기게 해 주는 뭔가가 들어 있대유.” 웃어른께 들었다는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었습니다. 아무리 날이 추워도 엄마 젖을 빨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신기하고도 귀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모두가 모유를.. 2021. 11. 5. 참 고맙습니다, 잘 견뎌주셔서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하박국 3:17-19)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코로나 단계적 완화 조치가 시행된 첫 주입니다. 뭔가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만, 마냥 즐거워할 수만도 없습니다. 여전히 코로나 확진자는 줄어들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저는 코로나19가 몰락을 향해 가는 우리 문명을 향해 하나님이 보내신 멈춤신호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더 큰 세계를 .. 2021. 11. 4. 치악산 화가 치악산 기슭, 혼자 사는 화가를 만났습니다. 싸리 울타리 반쯤은 기운 허름한 집, 그가 살고 있는 집은 그랬습니다. 쌓인 눈 시퍼렇게 빛나는 좁다란 밤길을 휘휘 돌아 막바지처럼 선 집 앞에 섰을 때, 폐가인 듯 어둠뿐인 집은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잠든 것 같았습니다. 한쪽 흙에 사는 이유가 시로 적혀 걸린 문을 열고 집주인이 나왔을 때 집주인 또한 집과 다르지 않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온갖 것의 무장해제, 편안했습니다. 속살 투명한 발가벗은 여자와, 울고 울다 숨이 멎은, 뒤로 젖힌 얼굴엔 허구렁인 듯 입 안 목젖이 가득한 그림을 보며 그게 모두 그의 한 모습임을 헤아립니다. 이미 울음은 가둘 수 없다는 듯 액자도 없이 덜렁 종이로만 걸렸습니다. 겨울밤, 촛불 하나만 켜도 방안의 물이 얼지 않는다.. 2021. 11. 4. 어머니의 가르침 온몸에 땀이 젖어 잠이 깰 때가 있었다. 흉몽을 꿀 때면 언제나 그랬다. 대개가 새벽녘, 그럴 때마다 난 새벽밥을 짓고 있는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새벽기도회를 다녀와 새벽밥을 짓는 엄마는 늘 찬송을 부르셨다. 내 하루는 엄마의 찬송소리로 시작되곤 했다. 엄마에게 가 꿈 얘기를 하면 늘 그러셨다. 기도하고 자라고. 내 유년의 생활을 지나는 굵직한 선 하나는 기도에 대한 엄마의 가르침이었다. 그 굵직한 선은 지금의 나에게까지 닿아있다. 흉몽, 차라리 꿈이었음 싶은 아픈 현실들. 그걸 이길 수 있는 건 기도뿐이다. 기도만이 그걸 받게 해준다. 땀으로 온몸을 적신 내 손을 잡아주며 가르쳐 주신 어머니의 기도. 그 기도는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 1991년 2021. 11. 3. 새들에게 구한 용서 펑펑 싫도록 눈이 옵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가 솜이불 뒤집어 쓴 듯 조용합니다. 옹기종기 모인 짚가리가 심심한 빈들, 새들만 신이 났습니다. 온 세상 조용한데 니들만 신났구나, 빈정거리듯 돌아서다 다시 돌아서 죄 지은 듯 새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새들은 신이 난 게 아니었습니다. 흰 눈 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린 먹을거리, 먹이를 찾아 애가 탔던 겁니다. 늘 그러했을 내 눈, 쉽게 바라보고 쉽게 판단하고 말았을 지금까지의 눈, 화들짝 부끄러워 눈 덮인 빈들, 소란한 새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 1991년 2021. 11. 2. 가을잎 구멍 사이로 초저녁 노을빛을 닮아가는 가을잎 겹겹이 구멍 사이로 하늘이 눈부시다 흙으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려는 듯 한결 느긋해진 한낮의 바람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발아래 드리운 잎 그림자와 빛 그림자를 번갈아 보다가 어느 것이 허상인 지 어느 것이 실체인 지 사유의 벽을 넘나들다가 겹겹이 내 마음의 벽도 허물어진다 허물어져 뚫린 구멍 사이로 하늘이 들어찬다 2021. 11. 1. 이전 1 ··· 32 33 34 35 36 37 38 ··· 29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