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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얘들 나와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나와라!” “야, 야, 얘들 나와라! 여자는 필요 없고 남자 나와라!” 거의 매일 저녁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았다. 그 일은 언제나 숙제를 먼저 마친 아이들 몫이었다. 그 소리가 울려 퍼지면 기다렸다는 듯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 제법 마당이 넓은 나무로 된 전봇대 아래, 우리가 늘 모이는 곳은 이내 아이들로 북적댔다. 그렇게 모인 우리는 만세잡기, 술래잡기, 다방구 등 신나는 놀이를 했다. 매일 해도 정말로 신이 나는 놀이들이었다. 그 놀이는 어둠이 한참 깔려서야 끝이 나곤 했다. 상호야, 웅근아, 호진아, 병세야, 저녁 먹으라 불러대는 엄마들 목소리가 또 한 차례 동네를 울리고 나서야 아쉽게 놀이가 끝나곤 했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그 소리들이 남아있다. 매일 저녁 동네를 돌며 애들 나오라.. 2021. 11. 14.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들 1원이면 주먹만 한 눈깔사탕이 두 개였다. 박하향 진한 하얀 사탕을 입이 불거지도록 입안에 넣으면 행복했다. 그러나 그 1원짜리 구리 동전 한 개가 아쉬웠다. 학교로 가는 길목엔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번 발길질에 솔 씨들은 춤을 추며 제법 날렸다. 점 찍힌 듯 박혀있는 까만 솔 씨들을 잘도 빼먹었다. 노란가루로 날리기 전, 한참 물오른 송화도 마찬가지였다. 쉽지 않은 그 맛을 즐겼다. 찔레순도 흔했고, 제법 높다란 학교 옆 벼랑을 따라서는 산딸기도 탐스럽게 매달리곤 했다. 초봄 잔설이 남아있는 산에 올라선 마른 칡 순을 찾아 칡뿌리를 캤다. 이 사이에 씹히는, 동글게 느껴지는 알칡의 맛을 입이 시커멓도록 맛보았다. 집 뒤뜰 언덕배기엔 돼지감자가 있었다. 가죽 벗겨내듯 언 땅을 들어내면 올망졸망한 .. 2021. 11. 12.
사라진 우물, 사라진 샘에 대한 이 큰 아쉬움이라니! 어릴 적, 동네엔 우물이 있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깊이가 제법 깊은 우물이었다. 우리는 우물 속에 얼굴을 비춰보기도 했고, ‘와!’ 소리를 질러 메아리로 돌아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두레박에 물을 채운 뒤 누가 손을 적게 쓰고 물을 끌어올리나 시합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들은 쌀이며 나물을 가져 나와 씻었고, 간단한 빨래도 했다. 우물은 좋은 냉장고도 되어 오이나 토마토를 우물 속에 집어넣기도 했다. 그런 뒤 꺼내 먹으면 시원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둥둥 떠 있는 오이와 토마토를 두레박에 담는 데는 나름대로의 기술이 필요했다. 한여름에는 윗옷을 벗고 등물하기도 좋았다. 이따금씩은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우물물을 푸기도 했다. 커다란 통에 줄을 매달아 물을 푸고, 거의 바닥이 들어날 쯤이면.. 2021. 11. 11.
생의 소중한 자리 “커피를 타고 있을 때만큼 편안한 시간은 없다”고 태자아저씨가 그랬습니다. 음악이 좋아서, 그보단 사람이 좋아서 경력도 붙을 만큼 붙은 좋은 직장 하루아침 그만두고 찻집을 차린 아저씨. ‘나잇살이나 먹어 커피나 타고 있다’고 흉볼지 모르지만, 그래도 당신은 그때가 제일 편하고 좋은 시간이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많은 걸 느끼고 많은 걸 배웁니다. 지난 늦가을, 새벽부터 쏟아진 장대비를 우산도 없이 맞으며 광철 씨는 이른 아침 일을 나갔습니다. 김장 무 뽑으러 간다고 전날 해 놓은 약속 때문에 조귀농, 그 먼 길을 찬비 맞으며 나선 것입니다. 그만한 비엔 일을 미룰 만 하고, 안 나가도 비 때문이려니 할 텐데 광철 씬 길을 나섰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하나처럼 비쩍 마른 몸 이끌고 비척걸음을 옮겼습니.. 2021. 11. 10.
마른잎 하나 하늘이 가을비를 내려주시는 날 나무가 가을잎을 내려주시는 날 모두가 내려앉는 저녁답 숲속 오솔길을 호젓이 걸어간다 모두가 내려앉는 이 가을날 내게도 미쳐 떨구지 못한 것이 무언가 상념의 가지끝에 매달려 허공을 간지럽히는 마른잎 하나 바람결에 비틀비틀 춤을 추다가 쉰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날숨으로 내려앉는 걸음과 들숨으로 오르는 걸음이 날숨으로 엎드리는 몸과 들숨으로 다시 일으키는 몸이 하늘의 숨과 땅의 숨이 날숨과 들숨으로 나란히 걸어가는 지상의 천국이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 사이 좋은 길로 이 가을날 마른잎 하나 걸어간다 2021. 11. 9.
직행버스 풍경 귀래를 돌아 원주로 나가는 직행버스. 남은 자릴 하나 두고 노인네 몇 분이 싸우듯 양보한다. 백발에 굽은 허리, 제법 긴 수염에 허전하게 빠진 이. 그만그만한 노인네 몇 분, 서로가 서로에게 측은한지 서로를 잡아당긴다. 일어날 젊은이 없는 직행버스가 빈자리 하날 두고 힘겹게 양아치 고개를 넘는다. - 1991년 2021. 11. 8.
한 폭의 땅 지친 내 마음이 안길 곳을 찾아서 바다로 가는 물안개처럼 흘러서 간다 떠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아서 산으로 가는 산안개처럼 흘러서 간다 그러나 나의 안길 곳은 바다가 보이는 집이 아니오 나의 기댈 곳은 깊은 산골 오두막이 아니오 그리고 나의 안길 곳은 정다운 가족이 아니오 나의 기댈 곳은 믿음직한 벗도 아니오 지친 내가 기대어 안길 곳은 산의 고독과 바다의 침묵을 닮은 고독과 침묵으로 오늘을 맴돌다가 잠시 멈춘 무리를 떠나 홀로 산을 오르시는 예수의 고독처럼 흐르는 카필라 왕궁을 떠나 온세상을 떠돌다가 비로소 앉은 보리수 나무 아래 석가모니의 침묵처럼 흐르는 그 좁은길로 흘러서 하늘문을 여는 이곳 지금 바로 내가 앉은 이 한 폭의 땅 뿐이오 풀잎처럼 두 다리를 포개어 평화의 숨을 고르는 꽃대처럼 허.. 2021. 11. 8.
강아지 두 마리 안갑순 속장님이 몸져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끝정자로 내려갔습니다. 아직껏 가슴이 뛴다는 속장님 얼굴은 많이 수척해 있었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깟 강아지 두 마리에 웬 수선이냐 할진 몰라도 얘길 들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일 년 내내 번 돈을 아껴서 집사님 내외분은 강아지 두 마리를 샀습니다. 쉽게는 구할 수 없는, 사람 주먹보다도 작은 귀한 강아지였습니다. 인형같이 생긴 강아지 두 마리를 방안에 키우며 며칠 동안은 고놈들 귀여운 맛에 하루해가 짧았습니다. 들인 거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아지들은 귀여움 투성이였습니다. 자식 없이 살아가는 노년의 외로움을 그렇게 이겨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고가 나던 날, 마침 겨울 볕이 따뜻하기에 강아지 먹일 우유를 데우는 동안 .. 2021. 11. 6.
엄마 젖 “아무리 추운 날 낳다 해두 송아질 방으로 들이면 안 돼유. 그러믄 죽어유. 동지슷달 추운 밤에 낳대두 그냥 놔둬야지, 불쌍하다 해서 군불 땐 방에 들이믄 외려 죽구 말아유.” 송아지를 낳은 지 며칠 후 속회예배를 드리게 된 윗작실 이식근 성도님은 이렇게 날이 추워 송아지가 괜찮겠냐는 질문에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송아지는 낳아 어미가 털을 핥아 말려 주믄 금방 뛰어 다녀유. 낳자마자 엄마 젖을 먹는데 그걸 초유라구 하지유. 그 초유를 먹으믄 아무리 추운 날이랙두 추운 걸 모른대유. 초유 속에 추운 걸 이기게 해 주는 뭔가가 들어 있대유.” 웃어른께 들었다는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었습니다. 아무리 날이 추워도 엄마 젖을 빨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신기하고도 귀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모두가 모유를.. 2021.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