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85 봄(1) 윗작실 하루 두 차례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 옆에 허름한 집이 한 채 있다. 여기저기 헐리고 주저앉은 다 쓰러져가는 토담집이다. 오래된 장작이 아무렇게나 쌓여있고 문풍지 숭숭 뚫린 문은 바람과 친해져 무사통과다. 거기 한 할머니가 산다. 기구한 사연으로 한동안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세상에 근거 없는 삶을 살았다. 집이라기보다는 움막 그래도 겨울 내내 연기는 피어올랐다. 밖으로 반 집안으로 스미는 것 반 겨울잠을 자듯 또 한 번의 겨울을 할머닌 그렇게 났다. 며칠 전 할머니 집 앞마당 마당이래야 주먹만 한 마당에 파랗게 싹들이 돋았다. 마늘이었다. 짧고 좁은 가운데 길을 빼곤 빼곡하게 마늘 싹이 돋았다. 항아리 몇 개 놓인 뒤뜰 둑에 산수유 꽃망울이 터진다. 노랗게 터진다. 봄이다. - (1996년) 2021. 3. 18. 볏가리 어둠이 내리는 저녁 들판에 선 볏가리들이 가만 고개를 숙였다. 시커먼 어둠을 가슴으로 안은 것이 기도하는 수도자 형상이다. 베어진 뒤에도 그들은 묻고 있다. 제대로 익었는가 다 익었는가 - (1995년) 2021. 3. 17.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 넘을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을 넘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자신을 넘어 남들을 위해서. 이들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후 겪는 충격과 고독 그리고 고통의 삶을 끌어안고 그 힘겨운 내면 풍경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아무래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슬며시 외면하는 것이 마음 편한 선택이다. 이들이 그걸 모를까? 폐허가 따로 없다 귀담아 들어주고 알아주는 이야기도 아닌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사별하였다》는 이 정직한 제목은 사실 가혹하면서 도발적이다. 책장을 넘기고 들춰보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 도발성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난데없이 .. 2021. 3. 16. 흐르는 강물처럼 강가에 나갔더니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훤히 트인 강에서 물살을 거슬러 달려오는 바람이 맵고 거세다. 사진/김승범 거센 바람을 맞으며 강물이 거꾸로 밀린다. 어, 어, 어, 어, 뒤로 자빠진다. 그래도 물은 아래로 흐른다. 여전히 강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잠시 표정이 바람에 밀릴 뿐 거센 바람을 기꺼이 달게 받으며 강은 여전히 아래로 흐른다. 결국은 우리도 그렇게 흘러야 할 터 우리에게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속을 속으로, 안으로, 아래로. - (1995년) 2021. 3. 16. 세월 황산개울 다리 건너 충청도 초입 이른바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정월 대보름을 맞아 윷판이 벌어졌다. 노장 대 소장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편은 두 편이다. 썩썩 낫으로 깎아 만든 커다란 윷을 길바닥 아무데나 던지면 된다. 말은 소주병 병뚜껑에 담배꽁초 앞서거니 뒤서거니 흥이 오른다. 윷 한 번 치고는 덩실덩실 춤이 한참이고 저만치 앞선 말 용케 잡고는 서로를 얼싸안고 브루스가 그럴듯하다. 기분 좋아 한 잔 아쉬워서 한 잔 질펀하게 어울릴 때 술 너무 하지 말어 술 먹다가 세월 다 가 지나가던 한 사람 그렇게 끼어들자 그게 뭔 소리 철없는 소리 이게 세월이지 암, 이게 세월이야 윷판은 끝날 줄을 모르고 또 하나의 세월이 그렇게 가고 - (1996년) 2021. 3. 15.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 글을 읽으며 자주 마주해야 했던 ‘사별자’라는 말은 내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뜻이야 이내 헤아릴 수 있었지만 뭔가 체온이 빠져나간 듯한 어감과, 나도 모르게 그 말로부터 거리를 두려하는 마음이 그랬습니다. ‘사별자’와 대조가 되는 ‘비사별자’란 말도 그랬고, ‘비사별자’란 ‘잠정적인 사별자’라는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해와 공감은 되면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원고를 다 읽은 뒤에야 항복하듯 서너 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이별 중에서 가장 아픈 이별이 사별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 일로 겪어야 하는 아픔은 근원적인 아픔이라는 것 등입니다. 분명 처음 해보는 생각은 아닌데도,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얼음장 아래 날카로.. 2021. 3. 14. 맛있는 커피 “이거 으트게 탄 거에유?” 사택에 들른 김천복 할머니께 커피를 타 드렸더니 맛있다며 설탕 몇 숟갈에 커피 몇 숟갈 넣은 거냐고 할머니가 묻습니다. 아무래도 달게 드시는 할머니를 위해 설탕과 크림을 조금 많이 넣었을 뿐입니다. 좀체 드문 일이지만 그래도 혹 있을 손님을 위해 할머니는 집에 커피 믹스를 사다 놓습니다. 이따금 할머니 집에 들르면 얼른 할머니는 주전자에 물을 데워 커피를 끓입니다. 세월도 그만큼은 바뀌어 때때로 적적하고 입이 궁할 때면 할머니는 혼자서도 커피를 마십니다. 부엌에 있는 서로 모양 다른 잔을 두고서 종지나 대접, 아무데나 휘휘 커피를 탑니다. 할머니가 마시는 커피는 그런 커피입니다. 커피 맛에 차이가 나야 얼마나 나겠습니까. 할머니가 묻는 맛있는 커피 맛의 비결은 필시 ‘함께 마.. 2021. 3. 14. 고백 때가 되면 제단에 올라 말씀을 전합니다. 지치고 외로운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 집을 찾으면 배고픈 이들과 상을 나누듯 말씀을 폅니다. 생이 그렇듯 멀고 낯선 말씀들,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이 말씀임을 어렵게 인정합니다. 아픈 이를 만나 이야기 나누고, 눈물 흘리는 이와 함께 무릎을 꿇기도 합니다. 따뜻한 듯, 넉넉한 듯, 분명한 듯 말하지만, 아니지요, 속으로 흔들리고 안으로 무너지는 마음들. 나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멈출 힘도 없습니다. 저 흔들리는 촛불처럼 때마다 흔들리고 녹아듭니다. 무릇 살아있는 건 흔들리는 것. 촛불은 촛농으로 존재하는 것, 이 밤도 당신은 말씀하며 가르치지만 촛농처럼 눈물만 마음을 타고 흘러내릴 뿐입니다. - (1995년) 2021. 3. 13. 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사람들 “주님, 내가 미끄러진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 내 마음이 번거로울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나를 달래 줍니다.”(시 94:18-19)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매화꽃은 벌써 만개했고, 산수유도 한창입니다. 공원에는 노란색 히어리가 조금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히어리의 꽃말은 ‘봄의 노래’라지요? 미처 떨구지 못한 겨울눈 껍질이 마치 모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춘화도 막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선화, 히아신스, 크로커스를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바야흐로 꽃 시절의 시작입니다. 20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루이스 글뤽은 눈풀꽃(snowdrop)이라는 시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은 눈풀꽃의 은밀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략) 나 자신.. 2021. 3. 12. 이전 1 ··· 71 72 73 74 75 76 77 ··· 29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