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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생님 -1989년 9월 7일. 목요일. 실내화를 안 가지고 학교에 갔다. 빈 실내화 주머니를 가지고 간 것이다. 맨발로 교실에 있었다. 규덕이 보고 실내화를 가지고 오라고 전화를 했는데도 규덕이는 실내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학교에서 계속 맨발로 지냈다. 집에 와서 물어보니 학교에 가지고 왔는데 잊어버리고 나한테 안 준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꼭 챙겨야지. -그렇게도 정신이 없었니? 6.25땐 아기를 업고 간다는 게 베개를 업고 피난을 간 사람도 있었다더라.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 규애가 연필로 쓴 일기 밑에는 빨간색 글씨의 짧은 글들이 있었다. 물으니 담임선생님께서 써 주시는 것이란다. 반 아이들 일기도 마찬가지란다. 흔희 ‘검’자 도장을 찍어 주는 게 예사인줄 알았는데 그 선생님은 달랐다. 규애의 허.. 2021. 2. 17.
때 지난 빛 ‘별빛을 우러러 보았을 때 그 별은 이미 죽어있을 지도 모른답니다!’ 한겨레신문 한 귀퉁이, 늘 그만한 크기로 같은 책을 고집스레 소개하는 , 짧게 짧게 실리는 글들이 늘 시선을 끌었는데 며칠 전에 만난 글은 위와 같았다. 기쁨이나 슬픔, 그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다른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때론 그것이 때 지난 것일 수도 있다는, 어쩜 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아픈 지적. - (1992년) 2021. 2. 16.
꽃봉오리 “얘들아, 이리와 봐! 기쁜 일이 생겼다!” 마당에서 놀던 소리가 커다란 소리로 놀이방 친구들을 부릅니다. 무슨 일일까, 마루에서 귀를 기울였더니 “이것 봐, 꽃이 피려고 봉오리가 하나 생겼어.” - (1993년) 2021. 2. 15.
사진집 마음이 메마를 때면 꺼내드는 책이 있습니다. 왠지 허전하고 허전한 마음에 물기 마를 때 그냥 편하게 꺼내드는 책이 있습니다. -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가난한 이들을 주로 카메라에 담았던 최민식 - 최민식 사진집 입니다. 슬픔의 표정이, 냉엄한 생의 표정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단색의 표정들이 마른 가슴에 실비를 뿌려주곤 합니다. 슬픔의 한 표정을 본 다는 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지요. 이따금씩 사진집을 꺼내듭니다. - (1992년) 2021. 2. 14.
새가족 창규 한 달 동안의 겨울방학을 마치며 햇살 놀이방엔 식구가 한 사람 늘었습니다. 조귀농에 사는 창규가 새로 온 것입니다. 또래가 없어 늘 혼자 지내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딱하게 여기던 창규 아빠가 햇살놀이방 이야기를 들었다며 교회를 찾았습니다. 흔쾌히 수락을 했고, 그날부터 창규는 아빠의 트럭을 타고 아침마다 놀이방에 오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들어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어떡하나, 창규 성격이 사납다던데 아이들과 싸우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모두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걱정했던 창규의 사나움은 낯선 친구들과도 서슴없이 어울리는 활달함으로 표현됐고, 놀이방 아이들도 새로 온 친구를 이내 친한 친구로 맞아 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선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적지가 않습니다. 밖에서 혼자 노는데 익숙했.. 2021. 2. 13.
요란한 것과 조용한 것 “이따가 밥 잡수러 오세유!” 아침 일찍 교회 마당을 쓸다가 일 나가던 이필로 속장님을 만났더니 오늘 당근 가는 일을 한다며 점심을 함께 먹자고 청합니다. 봄이 온 단강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는 농사일은 당근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단강의 특산물이기도 한 당근 씨를 강가 기름지고 너른 밭에 뿌림으로 한해 농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일을 마치고 강가 밭으로 나갔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이 가깝게 내다보이는 강가 밭,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와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발로 밟아 씨 뿌릴 골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 불과 이삼년 전 일인데, 이제는 트랙터가 골을 만들며 밭을 갈아 일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앞사람이 씨를 뿌리고 나가면 뒷사람이 손으로 흙을 덮어나가야 했는데, .. 2021. 2. 12.
참빗, 참빛 가지런히 꽂힌 책들이 모여 빗살 촘촘한 참빗이 되어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진 생각의 결을 가지런히 빗겨준다 한 권의 책 한 개의 사상 한 개의 종교만 내세우는 건 한 개비의 꼬챙이로 머리 전체를 빗겠다며 날을 세우는 일 나와 너를 동시에 찌르는 일 나와 너를 살리는 이 땅에 모든 생명을 살리는 공기처럼 공평한 참빗의 빗살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 촘촘한 햇살 촘촘한 빗줄기 촘촘한 바람의 숨결 하늘의 그물은 회회(恢恢) 성글어도 어린 양 한 마리도 빠뜨리지 않는 법 오늘을 빗는 빈 마음의 결마다 참빛으로 채우신다 2021. 2. 12.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는 시간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것을 행하라(Ama! et quod vis fac)! 입을 다물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라.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하라. 남을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라.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라. 그대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사랑의 뿌리가 드리우게 하라. 이 뿌리에서는 선 외에 무엇이 나올 수 없거니….”(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주해 7.8)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빕니다. 설 연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권고 때문에 조금은 쓸쓸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명절입니다. 저도 그냥 집에만 머물고 있을 예정입니다. 어느 댁은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줌(zoom)으로 새해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 2021. 2. 11.
정균 형, 그 우직함이라니 영진을 다녀오게 되었다. 강원도 영진에서 목회하고 있는 정균 형이 한번 예배를 같이 드리자고 불렀다. 임원헌신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꼭 찾고 싶었던 곳, 보고 싶었던 형을 그렇게 찾게 되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해송들 사이로 가까이 들려오는 곳, 영진교회는 바다와 잘 어울려 아담하게 세워져 있었다. 저녁예배를 드리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도, 다음날 아침 이웃마을 사천에서 목회하고 있는 진하 형을 만나 같이 이야기 나눌 때도 난 내내 정균 형의 우직함과 묵묵함에 압도를 당하고 말았다. 언젠가 기석 형은 정균 형을 두고 ‘소 같은 사람’이라 했는데, 그 말은 정균 형을 두고선 가장 어울리는 말이었다. 아직도 내 마음에 흔들림과 주저함으로 남아있는 막연함을 형은 흔쾌히 털어낸 채였고, 홀가분하면서도 .. 2021. 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