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685 십자가 언젠가 친구 차를 타고 그 거리를 지나본 적이 있습니다. 청량리의 뒷골목, 말로만 듣던 그 거리를 말입니다. 영동고속도로는 밀릴 대로 밀려 있었고 개미 걸음으로 서울에 도착한 것이 늦을 대로 늦은 시간, 친구 집이 청량리서 멀지 많은 곳이긴 했지만 친구는 일부러 그쪽 길을 택했습니다. 뭘 모르는 촌놈에게 세상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던 것이었겠죠. 사진/김승범 난 정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형형색색의 불빛과 반라의 여인들, 정말 그곳은 딴세상이었습니다. 구경 많이 하라는 듯 친구는 차를 천천히 몰았습니다. 저들은 누구고 이 세계는 무언가, 짧은 시간이지만 생각이 마구 엉겼습니다. 골목 끝을 막 빠져나올 때였습니다. 뜻밖의 모습에 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한 번 더 돌자!” 짙은 화장에 가슴이 훤히 드러난 .. 2021. 3. 12. 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염통 밑에 쉬 스는 줄은 모른다 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염통 밑에 쉬 스는 줄은 모른다 손톱 밑에 가시 드는 거야 대번 안다. 눈에 금방 띄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프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부위보다도 손톱 밑에 박히는 가시는 아프기도 하고 빼내기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손톱 밑의 가시’란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그마한 것 때문에 겪게 되는 적잖은 곤란이나 고통을 의미한다. 염통이라 함은 심장을 말하는 것일 터, 그런데 ‘쉬 스는’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낯설다. ‘쉬가 슬다’라는 말은 ‘파리가 알을 까다’라는 말이다. 심장에 파리가 알을 까다니, 그런 심각한 상 황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그런데 사람이 묘하다.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것은 알아도 심장에 파리가 알을 까는 것은 모르니 말이다. 눈에 보이는 작은 문제는 알면서도 정말로.. 2021. 3. 11. 웃음을 주소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보고 웃는 웃음보다 더 행복한 모습은 흔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웃음, 서로의 눈 속으로 까마득히 파묻히는 연인들의 웃음, 뒤따라오는 할머니를 지긋이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웃음,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웃음 속엔 근심과 걱정이 없습니다. 어둠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사진/김승범 주님, 우리는 웃음을 잃어버린 땅에 살고 있습니다. 아기의 기저귀가 사라진지 오래며, 동네 처녀총각의 사랑과 설렘이 사라진지 오래며, 노인들의 여유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웃음을 회복시키소서. 웃음 없는 주님의 나라는 감히 생각할 수 없으니 주님, 부디 이 땅에 웃음을 회복시키소서. - (1996년) 2021. 3. 11. 단상 쉽게 구한 것이 우리를 망친다. 쉽게 얻은 것이 우리를 무너뜨린다. - (1995년) 2021. 3. 10. 아침 참새 이른 아침. 노란꽃 환하게 피어난 개나리 가지위에 참새가 날아와 앉는다. 가느다란 가지가 휘청 휜다. 그래도 참새는 용케 가지 위에 앉아 출렁거림을 즐긴다. 가벼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따로 있다. - (1995년) 2021. 3. 9. 삶이라는 신비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하면 아물어 가고 있던 상처를 후벼파거나, 슬픔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편지를 올리는 것은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슬픔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삶은 다양한 만남의 점철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태도와 지향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계’라는 단어는 ‘빗장’이라는 뜻의 ‘관關’과 ‘잇다’라는 뜻의 ‘계係’가 결합된 것입니다. 누군가.. 2021. 3. 8. 호박꽃 호박꽃이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거름더미 담벼락 논둑 빈터 어디다 심어도 여기가 내 땅 뿌리를 내리고 쑥쑥 순을 뻗어 꽃을 피울 뿐이다. 조심스러울 것도 없는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부르고, 누가 어떻게 먹어도 탈이 없을 미끈한 호박을 맺을 뿐, 왜 내가 여기 있냐고, 하필 이름이 호박꽃이 뭐냐고, 호박은 자기를 불평하는 법이 없다. 호박꽃! - (1995년) 2021. 3. 8. 할아버지의 아침 이른 아침, 변관수 할아버지가 당신의 논둑길을 걸어갑니다. 꼬부랑 할아버지가 꼬부랑 논둑길을 꼬꾸라질 듯 걸어갑니다. 뒷짐 지고 걸어가며 벼들을 살핍니다. 간밤에 잘 잤는지. 밤새 얼마나 컸는지, 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피가 솟아나진 않았는지 이른 아침 길을 나서 한 바퀴 논을 돕니다. 그게 할아버지의 하루 시작입니다. 할아버지는 논을 순례하듯 하루를 시작합니다. 곡식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 (1995년) 2021. 3. 7. 싱그러움 오랜만에 비가 내린다. 목말랐던 땅이, 나무와 풀이 마음껏 비를 맞는다. 온 몸을 다 적시는 들판 모습이 아름답다.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 적실 때, 그때 나는 냄새처럼 더 좋은 냄새가 어디 있겠냐 했던 옛말을 실감한다. "타-닥. 타-닥. 타다닥" 잎담배 모 덮은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더없이 시원하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뿌리에 닿을 비, 문득 마음 밑바닥이 물기로 젖어드는 싱그러움. - (1995년) 2021. 3. 6. 이전 1 ··· 72 73 74 75 76 77 78 ··· 29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