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2664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단강에서 귀래로 나가다 보면 지둔이라는 마을이 있다. 용암을 지나 세포 가기 전.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띄게 뾰족하게 서 있는 마을이다. 전에 못 보던 돌탑 하나가 지둔리 신작로 초입에 세워졌다. 마을마다 동네 이름을 돌에 새겨 세워놓는 것이 얼마 전부터 시작됐는데, 다른 마을과는 달리 지둔에는 지둔리라 새긴 돌 위에 커다란 돌을 하나 더 얹어 커다란 글씨를 새겨 놓았다.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까맣게 새겨진 글씨는 오가며 볼 때마다 함성처럼 전해져 온다. 글씨가 돌에서 떨어져 나와 환청처럼 함성으로 들려져 온다. 그러나 그건 희망의 함성이 아니라 절망스런 절규, 눈물과 절망이 모여 검은 글씨로 새겨졌을 뿐이다. 작은 돌 위에 새겨놓은 절박한 절규,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 (1992년) 2021. 2. 24.
어느 날 밤 늦은밤,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본다. 별들의 잔치, 정말 별들은 ‘고함치며 뛰어내리는 싸락눈’ 같이 하늘 가득했다. 맑고 밝게 빛나는 별들의 아우성. 별자리들은 저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옆자리 별들은 그 이야기 귀담아 듣느라 모두들 눈빛이 총총했다. 그들 사이로 은하가 굽이쳐 흘렀다. 넓고 깊은 은빛 강물, 파르스름한 물결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온 은하는 뒷동산 떡갈나무 숲 사이로 사라졌다. 이따금씩 하늘을 긋는 별똥별들의 눈부신 질주, 당신의 기쁨을 위해선 난 스러져도 좋아요.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남은 이들의 기쁨을 바라 찬란한 몸으로 단숨에 불꽃이 되는, 망설임 없는 별똥별들의 순연한 아름다움! 자리에 누워 밤하늘별을 보다 한없이 작아지는, 그러다 어느덧 나 또한 .. 2021. 2. 23.
루이보스 차와 아버지 아버지는 루이보스 차가 좋다고 하셨다. 딸이 드리는 이런 차 저런 차를 다양하게 맛보시더니 그중에 루이보스 차를 드시면 속이 가장 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식사는 되새김질로 마무리를 하셨다. 풀밭에 앉은 황소가 우물우물 풀을 씹어 먹듯이 소눈을 닮은 아버지의 큰 눈망울은 끔벅끔벅 먼 고향 하늘가 어드메 쯤인가를 그리시는 듯 보였다. 그러면 함께 밥을 먹던 엄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던 한소리가 "추잡구로" 아버지의 되새김질에 뒤따르는 엄마의 추임새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소처럼 점잖구로 어릴 적에 소여물을 먹이시던 묵은 얘기를 또다시 처음처럼 풀어놓으셨다. 그러면 어린 내 눈앞으로 누런 황소가 보이고, 우물우물 움직이는 소의 되새김질이 보이고, 순한 소의 눈망울 속으로 푸른 풀밭을 닮은 푸른 하늘이 넓게.. 2021. 2. 23.
창(窓) 단강에서 사는 내게 단강은 하나의 창(窓) 단강을 통해 나는 하늘과 세상을 본다. 맑기를 따뜻하기를 이따금씩 먼지 낀 창을 닦으며 그렇게 빈다. 창을 닦는 것은 하늘을 닦는 것, 세상을 닦는 것 맑고 따뜻해 깊은 하늘 맑게 보기를 넓은 세상 따뜻하게 보기를, 오늘도 나는 나의 창을 닦으며 조용히 빈다. - (1994년) 2021. 2. 22.
고맙습니다 작고 후미진 마을 작은 예배당을 섬기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다들 떠난 곳에 외롭게 남아 씨 뿌리는 사람들 가난하고 지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과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 땅의 아픔 감싸기엔 내 사랑과 믿음 턱없이 모자랍니다. 힘들다가 외롭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를 이곳에서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그중 당신과 가까운 곳, 여기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 (1992년) 2021. 2. 21.
퍼런 날 이웃집 변관수 할아버지는 두고 두고 나를 부끄럽게 합니다. 허리는 다 꼬부라진 노인이 당신의 농사일을 꾸려나가는 걸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어느 샌지 난 숨이 막혀옵니다. 노인 혼자 힘으로는 엄두가 안 나 보이는 일을 할아버지는 묵묵히 합니다. 논일, 밭일, 할아버지의 작고 야윈 몸으로는 감히 상대가 안 될 일감입니다. 씨 뿌리고, 김매고, 돌 치워내고, 비료 주고, 논둑 밭둑 풀을 깎고, 오늘 못하면 내일 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하고, 세월이 내게 숨을 허락하는 한 내 일 내가 해야지, 지칠 것도 질릴 것도 없이 할아버진 언제나 자기걸음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뙤약볕 쏟아지면 그 볕 다 맞고, 어느 것도 논과 밭에서 할아버지를 떼 놓을 것이 없습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켜켜 가슴에 쌓였을 답답함과.. 2021. 2. 20.
사순절 순례 여정을 시작하며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막 1:12-13) 주님이 은총과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사순절 순례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긴 여정이지만 차분하고 꾸준한 발걸음으로 십자가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과 함께 우수 절기가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날이 매우 차갑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추위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얼음 사이로 눈석임물이 흐르고, 나뭇가지에 연록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책상 위 성경 옆에 김영래 시인의 이라는 시집을 가까이 두고.. 2021. 2. 19.
쓰러지는 법 '요즘 나는 눕기보단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고 한 이는 시인 황동규였을 게다. 그는 어떤 경험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짧은 말 한마디로 표현되는 어려운 경험. - (1992년) 2021. 2. 19.
단호한 물러섬 제 새끼들을 돌볼 때 정말 헌신적으로 인상 깊게 돌보던 어미닭의 태도가 어느 날부터인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다급한 목소리로 병아리들을 제 날개 아래 모으고, 먹을 게 있으면 새끼부터 먹게 하던 어미닭이었는데, 웬일인지 병아리들이 가까이 올라치면 매정하게 쪼아 물리치곤 한다. 어쩌면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이야길 들은 집사님이 “뗄 때가 돼서 그래요.” 한다. 병아리가 깨어나 얼마큼 크게 되면 어미닭이 새끼들을 떼려 그리한다는 것이다. 어미닭의 단호한 물러섬.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명한 한 표정이었다. - (1992년) 2021.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