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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59

결혼식 버스 한희철 얘기마을(159) 결혼식 버스 단강이 고향인 한 청년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전화를 주기도 하는 가족인데다, 애써 주일을 피해 평일에 하는 결혼식인지라 같이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대절한 관광버스가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잔치가 있는 날에는 의례히 대절하는 버스입니다. 한번 부르는 값이 상당하면서도 버스 대절은 잔치를 위해선 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바쁜 농사철, 게다가 애타게 기다렸던 단비마저 내려 버스엔 전에 없던 빈자리도 생겼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차 안의 스피커에선 신나는 음악이 쏟아지듯 흘러나옵니다. 그 빠르기와 음 높이가 여간이 아닙니다. 이어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합니다. 이 바쁜 철 잔치를 벌여 미안하고.. 2020. 11. 30.
엄마와 목욕, 공정 거래 신동숙의 글밭(287) 엄마와 목욕, 공정 거래 이른 아침 목욕탕에서 나오면 머리카락에 얼음이 꽁꽁 얼었습니다. 언제가부터 목욕탕에 헤어 드라이기가 생긴 것은 훨씬 뒷일입니다. 그 옛날엔 1~2주에 한 번 일요일 새벽이면, 참새처럼 목욕탕에 가는 일이 엄마와 딸의 월례 행사가 되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목욕탕 굴뚝의 하얀 연기가 펄럭이는 깃발처럼, 우람한 나무처럼 새벽 하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졸린 두 눈을 뜨기도, 작은 몸을 일으키기도 제겐 힘에 겨웠던 일요일 새벽,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는 일보다 더 싫었던 건 목욕탕 입구에서 엄마의 거짓말이었습니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았던 저는 여러 해 동안 목욕탕 입구에서 만큼은 일곱 살입니다. 엄마가 제 나이를 한두 살 깎으면 목욕탕 주인은 일이백원을 깎아주.. 2020. 11. 30.
막연함 한희철 얘기마을(158) 막연함 귀래로 나가는 길, 길 옆 논둑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 군데군데 거름 태운 자국이 버짐처럼, 기계충처럼, 헌데처럼 남아있는, 풀 수북이 자라 오른 논 한 귀퉁이, 처박듯 경운기 세워두고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 퍼지는 담배 연기 따라 함께 퍼지는, 왠지 모를 안개 같은 막연함. - (1992년) 2020. 11. 29.
할머니들의 방 신동숙의 글밭(286) 할머니들의 방 어제 밭에서 뽑은 노란 알배추 속 서너 장, 늦가을엔 귀한 상추 두 장, 푸릇한 아삭 오이 고추 한 개, 빨간 대추 방울 토마토 두 알, 주황 귤 한 알이 침대 사이를 오고가는 할머니들의 방은 콩 한 쪽도 서로 나누어 먹는 방입니다. 아침이면 작은 보온 국통에 오늘은 무슨 따끈한 국물을 담아 갈까 하고 궁리를 합니다. 옛날 학창 시절에 부모님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뼈가 잘 붙으려면 사골국이 좋다 하시며 구포장에서 버스를 타고 장을 보아 오시던 아버지 생각도 납니다. 넘어지시기 전날, 아이들이 국물만 먹고 남긴 순대국을 맛있게 드시던 엄마 모습이 힌트를 줍니다. 냉동실에 마저 한 팩 남은 순대국을 따끈하게 데워서 보온 국통에 담습니다. 평소보다 열 배 저속.. 2020. 11. 29.
사라진 참새 한희철 얘기마을(157) 사라진 참새 교회로 들어오는 입구 양쪽으로는 향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향나무는 참새들의 놀이터다. 바로 앞에 있는 방앗간에서 놀던 참새들이 쪼르르 날아와 향나무 속에서 뭐라 뭐라 쉴 새 없이 지껄여대곤 한다. 다투는 건지 사랑고백을 하는 건지. 서재에 앉으면 그런 참새들의 지저귐과 푸릅 푸릅 대는 힘찬 날갯짓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게 된다. 그런 참새들의 모습이 얼마나 정겨운지. 며칠 전엔 뜻밖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땅거미가 깔려드는 저녁 무렵이었다. 예배당 마당에 서 있는데 갑자기 이름을 알 수 없는 검은 새 한 마리가 아주 빠른 속도로 날아와, 훅 향나무 속을 훑으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참새들의 비명소리도 잠깐, 순간적으로 향나무를 빠져 날아간 검은 새의 발톱엔 어느새 .. 2020. 11. 28.
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 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단12:3)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의 새로운 시작인 대림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과 시작이 손을 잡고 시간의 한 사이클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합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셨던 말씀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8:22). 계절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고, 그 시간의 갈피에 깃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소망을.. 2020. 11. 27.
할아버지의 눈물 한희철 얘기마을(156) 할아버지의 눈물 정작 모를 심던 날 할아버지는 잔 수 모르는 낮술을 드시곤 안방에 누워버렸습니다. 훌쩍훌쩍 눈물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달랠 수도 말릴 수도 없었습니다. 모를 심기 훨씬 전부터 할아버지는 공공연히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모심는 날을 일요일로 잡았고, 흔해진 기계모를 마다하고 손모를 택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는 일곱 자식들이 며느리며, 사위며, 손주들을 데리고 한날 모를 내러 내려오기로 했던 것입니다. 두 노인네만 사는 것이 늘 적적하고 심심했는데 모내기를 이유로 온 가족이 모이게 됐으니 그 기쁨이 웬만하고 그 기다림이 여간 했겠습니까. 기계 빌려 쑥쑥 모 잘 내는 이웃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논둑을 고치고 모심기 알맞게 물을 가둬놓고선 느.. 2020. 11. 27.
할아버지의 사랑고백 한희철 얘기마을(155) 할아버지의 사랑고백 약주만 들면 교회에 들르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꼬부랑 할아버지입니다. “내가 슬퍼.” 마음 아픈 일들을 장시간 이야기하기도 하고, 당신 살아온 이야기 하며,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나를 향한 호칭도 전도사님에서부터 목사님, 약주가 과한 날은 조카, 때론 자네가 되기도 합니다. “난 자네가 좋아. 아들 같어.” 평소엔 일마치고 돌아올 무렵 주머니 가득 달래를 캐가지곤 “이런 거 어디 나는지 모를 것 같아 캐 왔다.”시며 건네주곤 하는데, 약주를 하시면 약주 기운에 “난 자네가 좋다.”고 그 어려운 사랑고백 술기운에 기대 하듯 거듭거듭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날 좋아한다는 고백이 누구로부턴들 반갑지 않겠습니까만 한 할.. 2020. 11. 26.
남모르는 걱정 한희철 얘기마을(154) 남모르는 걱정 종하가 산토끼를 또 한 마리 잡았습니다. 올 겨울 벌써 일곱 마리째입니다. 토끼를 잡아들이는 종하를 종하 할머니는 걱정스레 봅니다. 먼저 간 아들 생각이 나기 때문입니다.종하 아버지도 산짐승 잡는 덴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종하 아버지가 마흔도 못 채우고 일찍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아버질 닮아 토끼 잘 잡는다고 동네 사람들은 종하를 신기한 듯 말하지만 할머니, 종하 할머니는 남모르는 걱정을 혼자 합니다. - (1992년) 2020.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