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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48

자작나무숲 신동숙의 글밭(296) 자작나무숲 사진: 강원도 인제 자작나무숲, 김동진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길 은총의 길 땅에서 올라가는 하얀 길 평화의 길 2020. 12. 26.
마지막 5분 한희철의 얘기마을(184) 마지막 5분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 몇몇 친구들은 학교 도서실에 남았다가 늦은 밤 돌아오곤 했다. 학교 진입로는 꽤 긴 편이었는데 길을 따라 켜진 가로등 불빛이 참 좋았다.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했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하루는 친구가 내게 물었다. 죽기 5분 전에 회개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거냐고. 수원 유신고등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예배를 드렸는데, 아마 그날 설교의 내용이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난 친구의 질문 앞에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대답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귀찮고 신경 쓰이게 하나님을 믿느니 그냥 맘대로 살다가 죽기 5분 전에 살아온 모든 죄를 회개하고 싶다고, 그래도 되지 않겠냐고.. 2020. 12. 26.
스스로 법복을 벗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신동숙의 글밭(295) 스스로 법복을 벗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오늘 성탄절 전야는 가장 어둔 밤이다.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어 뜬눈으로 지새운다. 하지만 밤이 깊을 수록 별은 유난히 밝게 빛난다는 하나의 진리를 붙든다. 까맣도록 타들어간 내 어둔 가슴을 헤집어 그 별 하나를 품는다. 별을 스치듯 부는 바람에 그제서야 거친 숨결을 고른다. 지난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겪어오고 있는 일들을 하나 둘 돌아보면, 수학 여행 때 단체로 뭣모르고 롤러코스터와 바이킹에 올라탔을 때처럼, 숨을 멎게 하는 듯 늘어나는 아픈 이들의 증가수와 평범하던 일상의 중력을 거스르는 과도한 포물선과 휘몰아치는 기세를 벗어나고 싶어도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팬더믹과 어쩌면 그보다 .. 2020. 12. 25.
성탄인사 한희철의 얘기마을(183) 성탄인사 성탄절 새벽, 겨울비를 맞아 몸이 젖은 채로 새벽송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나갈 때 끄고 나간 것 같은데 웬일일까 문을 여니 그냥 빈 방에 스탠드가 켜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스탠드엔 웬 풍선 하나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노란색의 둥그런 풍선이었습니다. 풍선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축 성탄성탄을 축하합니다.늘 사랑합니다. -산타 익숙한 글씨.작은 산골마을에서 맞는, 눈보다 비가 내린 성탄절. 풍선 하나에 적힌 한없이 가난한, 한 없이 넉넉한 성탄 인사.그리고 사랑법. - (1992년) 2020. 12. 25.
지게 그늘 한희철의 얘기마을(182) 지게 그늘 달리는 오토바이를 핑계 삼아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아닙니다. 분명 보았지요. 유유히 강물 흘러가는 강가 담배 밭. 지난해 물난리로 형편없이 망가진 밭을 그래도 땀으로 일궈 천엽따기까지 끝난 담배 밭, 대공들만 남아 선 담배 밭 한 가운데 두 분은 계셨지요. 불볕더위 속 담배 대공 뽑다가 세워놓은 지게 그늘 아래 앉아 두 분은 점심을 들고 계셨지요. 이글이글 해가 녹고 가만히 있어도 비 오듯 땀줄기가 온 몸을 흐르는 더위. 밭 한가운데 지게를 세우고 지게 그늘 속 두 분이 마주 앉아 점심을 들 때 난 차마 두 분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게 그늘, 그 좁다란 그늘을 서로 양보하며 밥을 뜨는 당신들을 그냥 쉽게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못 본 척 그냥 지나쳤지만 마.. 2020. 12. 24.
몸이 불편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는가? 신동숙의 글밭(294) 몸이 불편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는가? 이 글은 한 사람을 생각하며 적는다. 10년 전 가을 그때에 일을 떠올리는 마음이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뒷좌석에 두 자녀를 태우고, 남편이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라디오 불교 방송, 고상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정목 스님의 유나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 그때 라디오로 사연이 하나 올라왔다. 스님은 그 사연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연인 즉, 자신은 젊은 청년이라고 소개를 하며, 하반신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하고 있으며, 평소 불교 유나방송의 애청자라고 한다. 그러다가 발심이 생겨 출가를 해 부처님 법을 따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출가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 또한 20대 초반에 출가의 뜻을 세.. 2020. 12. 23.
밥 탄내 한희철의 얘기마을(181) 밥 탄내 김천복 할머니가 밭에서 참깨를 베다보니 어디선가 밥 탄내가 나더랍니다. 누구 네가 밥을 태우나, 일을 계속 하는데 그래도 탄내가 계속 났습니다.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웬걸, 냄새는 다름 아닌 당신 코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코에서 탄내가 나도록 일한다’는, 어릴 적 처음 들었을 땐 뭘 그럴까 못 믿었던 노인들의 말을 할머니는 당신이 노인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1992년) 2020. 12. 23.
3분의 오묘함 신동숙의 글밭(293) 3분의 오묘함 그림:, 황간역의 강병규 화가 추운 겨울엔 언 손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 잔이 다정한 벗이 된다. 잠을 깨우며 몸을 움직이기에는 커피가 도움이 되지만, 피를 맑게 하며 정신을 깨우는 데는 예나 지금이나 잎차만한 게 없다. 가끔 선원이나 사찰, 고즈넉한 성당이나 수행처를 방문할 때면, 혹시나 그곳 둘레 어딘가에 차나무가 있는지 먼저 살피는 버릇이 있다. 반가운 차나무를 발견할 때면, 그 옛날 눈 밝은 어느 누군가가 차씨나 차묘목을 가져다가 심었는지 궁금하고, 얼굴도 모르는 그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인다. 차나무의 어린 잎을 발효한 홍차를 우릴 때면, 찬바람이 부는 날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군불을 지피는 풍경이 그려진다. 단풍나무 시럽이 가미된 '메이플 테피 홍차'.. 2020. 12. 22.
죽은 소 한희철의 얘기마을(180) 죽은 소 미영이네 소가 며칠 전 죽었습니다. 소 끌러 저녁에 가 보니 소가 언덕 아래로 굴러 네 다리를 하늘로 쳐들고 죽어 있었습니다. 배가 빵빵한 채였습니다. 소는 반드시 오른쪽으로 눕는데 잘못 왼쪽으로 쓰러지면 혼자 힘으로 못 일어나고 그러다 보면 10분도 못돼 숨이 멎는다고 합니다. 죽기 며칠 전 새끼 송아지를 낳은 어미 소가 거짓말처럼 죽어 자빠졌으니 미영이네가 겪은 황당함이란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죽은 소는 송아지 값도 안 되는 헐값에 고기로 팔렸고, 젖먹이 송아지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그래도 우유를 잘 먹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참 슬프고 속상한 얘기를 안 그런 척 합니다. - (1992년) 2020.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