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191 키워주신 땅에게 신동숙의 글밭(284) 키워주신 땅에게 키워주신 땅에게 얼만큼 고맙냐구요? 마지막 잎새까지 떨구어, 다 주고도 모자랄 만큼 고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잎새까지 다 내어주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춥고 시린 마음보다는 저 잎들의 초연함 앞에 이제는 가슴 뭉클한 뜨거움이 올라옵니다. 땅으로 돌아가는 가을잎들이 왜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빛깔의 옷들로 갈아입었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헤아리다 보면, 여전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추운 늦가을 밤에도 가슴이 따스하게 환해져옵니다. 때를 따라서 돌아가는 가을잎의 발걸음을 괜스레 재촉하고 있는 가을비와 가을 바람이 마냥 야속하기보다는, 이제는 길벗이 되었다가 재잘거리며 속을 나누는 도반인지도 모릅니다. 가을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황금빛 햇.. 2020. 11. 24.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신동숙의 글밭(283)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며칠 동안 간간히 가을비가 내리더니,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던 가로수의 노란 은행잎이 이제는 땅 위에 수북합니다. 그 노란 은행잎 융단을 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이 가을바람의 빗자루질 같습니다. 지난 시월의 어느날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참선방에서 철야 참선을 마친 후 일찍 나서던 길에, 잠시 보았던 스님들의 분주한 빗자루질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날 느즈막히 길을 나설 때면, 말끔하게 쓸어놓은 공원 산책길과 훤한 절 마당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가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을 소식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줍기도 하고, 곁에 선 나무 아래로 돌려.. 2020. 11. 23.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신동숙의 글밭(281)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엔 매듭 짓지 못하고, 풀리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작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제게 주어진 이 하루도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게 할 뿐입니다. 유약(柔弱)한 가슴에 어떠한 원망이나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내 살과 뼈를 녹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려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품고서도, 몸을 움직이며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갈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멈추어 바라본 순간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분노를 제 가슴에 품고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고요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엄습하던 온.. 2020. 11. 21. 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신동숙의 글밭(280) 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저는 바라고 원하는 기도 앞에 언제나 떨며, 두렵고 머뭇머뭇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장소, 어느 종교, 어느 누가 드리는, 어떠한 형태의 기도라고 해도 기도에는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제가 드린 기도대로 이루어질까 싶어서 기도 앞에 언제나 머뭇거리며 주저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특정 종교 생활에 꾸준히 성실히 몸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되는 뒷심은, 기도의 힘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주위에 여러 종교인들의 얘기를 통해 종종 듣게 되면서 그러리라 짐작해봅니다. 하지만 그 기도란 우리네 어머니들이 장독 위에 정안수를 떠 놓으시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홀로 두 손으로 빌던 소박한 기도가 예배당에서 드.. 2020. 11. 20. 제 기도의 응답도 [사랑]입니다 신동숙의 글밭(277) 제 기도의 응답도 [사랑]입니다 "엄마, 울어요?""아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술 카드 사주기로 했어요. 그런데 엄마, 왜 울어요?" 늦은 밤에 책상에서 울다가 아들한테 들키고 말았습니다.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도 눈물보다는 지인 목사님을 모셔서 천국 천도의 예배를 드리고 챙기느라 제겐 눈물을 흘릴 경황이 없었습니다. "아빠, 예수님 손 잡고 가세요."를 삼일장 내내 호흡처럼 주문처럼 기도처럼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곁에서 어쩔줄 몰라하시던 친정 엄마께도 그 한 문장만 가르쳐드렸습니다. 그냥 지금까지도 혼자 있을 때면, 운전을 하다가도 아버지가 생각 나서 울컥할 뿐입니다. 가족들 앞에서 좀체 보인 적이 없던 엄마의 눈물은 아들의 눈에는 놀라움이었을 겁니다. 자정이 다 .. 2020. 11. 16. 찢어진 커튼 바느질 신동숙의 글밭(274) 찢어진 커튼 바느질 거실창 커튼이 찢어지기 시작한 것은 우리집에 탄이가 오면서부터입니다. 탄이는 털이 새까맣고 작고 귀여운 강아지 포메라니안입니다. 이제는 몸집이 다 자랐는데도 원체 작다 보니 탄이는 계속 강아지로만 보입니다. 새로 산 핸드폰 충전기 줄을 세 개나 물어서 끊어 놓고, 유선 케이블 연결선을 세 차례나 끊어 놓아 통신사 기사님을 성가시게 한 적도 많고, 아무리 미운 짓을 거듭해도, 탄이의 까만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미운 마음이 스르르 녹아서 사라지게 되는, 탄이의 얼굴은 이미 현묘지도(玄妙之道)를 지닌 듯도 합니다. 제 어릴 적 기억에, 겨울이 다가오는 이 무렵이면 부모님에겐 월동 준비로 연탄 100장을 장만하시는 일이 큰 숙제였습니다. 키다리 연탄집 아저씨가 연탄을.. 2020. 11. 13. 가을은 레몬 홍차 신동숙의 글밭(273) 가을은 레몬 홍차 차 한 잔이 주는 여유와 여백을 좋아합니다. 가을빛이 짙어갈 수록 도로변에 서 있는 가로수들도 저처럼 여유와 여백을 좋아하는지, 여름내 푸른 잎들로 무성하던 나무들이 이제는 자신의 둘레를 비우고 덜어낸 자리마다 하늘의 여유와 여백으로 채워가고 있는 11월의 가을입니다. 사람에게도 자신이 살아가는 물질적인 삶의 둘레를 비운 만큼 마음의 하늘이 차지하는 공간은 넓어지리라 여겨집니다. 해 뜨기 전부터 시작하여 해가 져도 그칠 줄 모르는 분주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잠시 멈춤이란 얼음땡 놀이에서 구하는 멈춤의 순간 만큼이나 몸과 마음과 숨을 부자유하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숨을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생명들에겐 왠지 부자유스러운 멈춤을 물 흐르듯이 자유로이 흐를 수 .. 2020. 11. 12. 빈방은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신동숙의 글밭(272) 빈방은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빈방은 설레임으로 다가옵니다. 빈방은 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볼 때의 푸른 설레임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텅 비었지만, 바라보는 마음은 비우면 비울 수록 충만해져 오는 이치입니다. 빈방은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즉 순수한 본성을 닮았습니다. 우리의 순수한 본성은 또한 맑은 가을 하늘을 닮아 있는 크고 밝은 하늘의 무진장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빈방을 본 것은 언양 석남사 한 비구님 스님의 방이었습니다. 요즘처럼 단풍이 아름다운 어느 가을날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친구가 구했다는 흑백 필름 사진기로 추억 여행 사진을 담으려 둘이서 버스를 타고서 친구의 이모 스님이 출가한 곳이라는 언양 석남사를 처음으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함께 한 행복한.. 2020. 11. 10. 평화의 밥상 신동숙의 글밭(270) 평화의 밥상 따끈한 무청 시래기 된장국 한 그릇, 김밥 반 줄, 유부 초밥 세 개, 깍두기 일곱쪽, 수도승들이 산책길에 주운 알밤 한 줌, 제주도 노란 귤 하나로 따뜻하고 맛있는 풍요로운 이 가을날 점심밥상의 축복을 받습니다. 아침부터 분주히 많은 양의 식사 준비를 하시던 누군가의 마음이 손길이, 먹는 이의 입으로 가슴으로 전해지는 거룩한 식사 시간은 그대로 고요한 감사의 기도 시간이 됩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앞마당엔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상이 보이고, 밥을 먹는 제 곁엔 사찰의 공양게송이 가까운, 이곳에선 하느님과 부처님이 사이좋은 이웃입니다. 하나의 평등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이미 깊은 땅속에서 하나에 뿌리를 둔 하나라는 사실을 문득 해처럼 떠올리다 보면 어.. 2020. 11. 6. 이전 1 2 3 4 5 6 7 8 ··· 2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