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191

투명한 예수 신동숙의 글밭(268) 투명한 예수 공생애를 사시던 예수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제가 유심히 살펴보던 점은 모든 행함 중에 보이는 예수의 마음입니다. 모든 순간의 말과 행적을 놓치지 않으며 제 마음에 비추어 보는 일이 다름 아닌 성경 읽기와 사람 읽기, 마음 읽기가 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일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일이니까요. 결혼식 축하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가 되게 하신 후 보이신 예수의 마음에는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십니다. 혈우병을 앓던 여인이 군중 사이를 지나던 예수의 옷자락을 잡고서 병이 나음을 보이시고도, 예수는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고 할 뿐입니다. 신약의 전문을 낱낱이 살펴보아도 이른바 종교인들이 내세우는, 예수가 행하신 이적과 기적 중에도, 예수는 언제나 자신의 공로와 의를.. 2020. 11. 4.
비가 그친 후 소나무 숲 냄새 신동숙의 글밭(267) 비가 그친 후 소나무 숲 냄새 간밤에 가을비가 순하게 내리는가 싶더니, 명상의 집을 둘러싼 소나무 숲이 한결 순하게 젖어든 아침입니다. 아이들을 등교 시킨 후 뒷설거지를 하고 이부자리와 방 정리까지 마무리를 한 뒤 강론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선 바쁜 아침을 보내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엄마 없는 빈 집으로 제일 먼저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 아들의 눈에 널브러진 방으로 맞이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방바닥의 먼지까지는 닦지 못하더래도, 옷가지며 이불이며 제 자리에 있을 것들은 제 자리에 두고서 집을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그 대신 토마스 머튼의 강론 수업 시간에 오늘 만큼은 기필코 지각하지 않기로, 지난 며칠간 혼자서 속으로 다짐했던 엄마의 열심을 내려놓기로 한 .. 2020. 11. 3.
"평화에도 머물지 말라" 신동숙의 글밭(265) "평화에도 머물지 말라" 모처럼 제 방 안에 앉아 있으려니, 오늘도 어김없이 저녁이 오고 밤이 옵니다. 지난 시월 한 달 동안의 주말 저녁은 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홀로 저녁 하늘과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둠 속으로 잠기곤 하였습니다. 가야산 해인사 원당암 마당 위로 유난히 하얗게 빛나며 금실거리던 시월의 별들을 바라보다가, 또한 저 별들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한 마음이 문득 별처럼 떠올라, 가슴이 그대로 고요한 가을밤이 되고 어둠이 되던 순간도 이제는 꿈결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초여름부터 어김없이 들려오던 창밖의 풀벌레 소리가 오늘은 멈추었습니다. 이렇게 고요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기 전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풀벌레들의 침묵입니다. 태화강변을 따라서 아직은 화려한 가을잎.. 2020. 11. 1.
구멍가게 성당 신동숙의 글밭(258) 구멍가게 성당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답작은 마을의 어둑해진 골목길은 좁은길 구멍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린 아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카운터를 지키시던 주인 아주머니가 오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텔레비젼을 바라보시며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색색깔의 과자봉지와 음료들은 아울러중세시대 성당의 화려한 비잔틴 모자이크가 됩니다. 간혹 종지에 촛불을 켜고 앉으셔서 늦은 밤까지학원에서 돌아오는 딸아이의 밤길을 지켜주기도 하시는 염주알인지 묵주알을 돌리시기도 하는 구멍가게아들이 좋아하는 과자가 풍성한 이곳은 기도의 성당 두 손을 모으신 아주머니가홀로 드리는 저녁 미사를 두고간혹 싫어하는 손님도 계신다지만, 앞으로 과자를 사러갈 때면기도의 성당으로 들어가듯 달콤하고 엄숙한 마.. 2020. 10. 27.
화두(話頭), 모르는 길 신동숙의 글밭(256) 화두(話頭), 모르는 길 가을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가을 바람이 날 부르는 것으로 알고 나선 길입니다. 가을 바람에 날리우는 풀씨 한 알 만큼이나 가벼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어디에 닿을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모르는 길을 나섭니다. 애초에 알고자 나선 길이 아니라 머릿 속에 가득한 앎과 안다는 생각 조차도 비우고자 나선 길이기에, 습관적으로 머리가 헤아리려 드는 하나 둘 셋 숫자도 잊고서 엎드립니다. 단지 깨어서 알아차림으로 날숨마다 좌복에 몸을 엎드리다 보면 비워질까. 날숨마다 입 속에서 모른다고 시인하면 지워질까. 하염없이 앉아 있으면 사라질까. 어디까지가 텅 비운 곳인지. 어디쯤이 나를 잊은 곳인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매 순간을 깨어서, 지금 이 순간으로 이 땅으.. 2020. 10. 20.
사과를 깎아 먹는 일과 詩 신동숙의 글밭(255) 사과를 깎아 먹는 일과 詩 사과를 처음으로 스스로 깎아 먹었던 최초의 기억은 일곱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녁 무렵 작고 여린 두 손으로 무거운 사과를 거의 품에 안다시피 받쳐 들고서, 언덕처럼 세운 양무릎을 지지대 삼아, 오른손엔 과도를 들고 살살살 돌려가며 한참을 씨름하던 나의 모습이 생각난다. 한참을 사과와 과일칼과 씨름하며 그리고 엉성하게나마 다 해내기까지 앞에 앉아 숨죽이고 있던 엄마가 환하게 웃으시며 박수를 쳐주었던 기억이다. 그때부터 스스로 사과를 깎아먹는 역사는 시작되었고,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책임감의 문제도 그때로부터 시작이 된다. 이후에 감당해야 하는 일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날카롭고 겁나는 과도를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칼끝이 함께 둘러앉은 누군가에게.. 2020. 10. 14.
목사님, 참선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어요 신동숙의 글밭(254) 목사님, 참선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어요 아침에 눈을 뜨니 가을 하늘이 참 좋아서, 이 아름다운 하늘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한 마음이 산들바람처럼 불어옵니다. 그리고 보이는 하늘 만큼이나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펼쳐지는 내면의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은 한 마음이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이는 가을 아침입니다. 구름처럼 자욱한 욕심을 걷어낸 텅빈 하늘, 무심한 듯한 공空의 얼굴은 어쩌면 사랑뿐인 하나님의 얼굴을 닮았는지도 모른다는 누군가의 얘기가 귀를 간지럽힙니다. 그냥 쪼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푸른 가을 하늘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면서 실실 웃음이 흘러나오는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늘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은 하늘 만큼 땅 만큼입니다. 그처럼 맑갛게 갠 내면의 .. 2020. 10. 13.
동틀 녘 참선방에서 쫓겨나다 신동숙의 글밭(247) 동틀 녘 참선방에서 쫓겨나다 이 세상에서 내가 앉을 자리가 어디인가 하고 찾다 보면, 예수가 이 세상에 머리 둘 곳 없다 하시던 말씀과 살포시 겹쳐집니다. 잠시 앉을 자리야 얼마든지 있지만, 제가 찾는 건 잠시 앉을 자리가 아닌 오래 앉을 자리입니다. 오래 앉을 자리로 치자면 제 집도 오래 앉을 곳이 못 됩니다. 집안 살림이란 것이 있어서, 때가 되면 끼니를 챙겨야 할 자녀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고, 세탁 바구니엔 빨랫감이 쌓이고, 설거지거리가 쌓이고, 먼지가 쌓이고, 일상을 꾸려가야 하는 살림살이 속에서 과연 홀로 앉았는 일이란 널뛰기와 같습니다. 차 한 잔을 우려내는 3분의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았는 일도 일상 속 가족들에겐 게으름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3분이.. 2020. 10. 6.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 청도 운문사 신동숙의 글밭(242)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 청도 운문사 가을 하늘이 좋은 토요일 정오인데, 가족들이 저마다 다 일이 있다고들 합니다. 은근히 기대하던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모처럼 혼자서 길을 나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훌쩍 혼자서 집을 나서기 전에 "같이 갈래요?"하고 자녀들과 친정 엄마에게까지도 전화를 걸어서 일일이 다 물어보았기에,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홀가분하기만 합니다. 가뜩이나 온라인 등교로 두 자녀와 매일 집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혼자만의 시간이 그립기까지 했던 차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고 차로 달려서 한 시간 이내에 있으면서 조용히 책도 읽고, 숲길 산책도 하고, 침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면 좋은 것입니다. 분도 명상의 집, 통도사, 석남.. 2020.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