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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9

가을잎 구멍 사이로 초저녁 노을빛을 닮아가는 가을잎 겹겹이 구멍 사이로 하늘이 눈부시다 흙으로 돌아가려는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려는 듯 한결 느긋해진 한낮의 바람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발아래 드리운 잎 그림자와 빛 그림자를 번갈아 보다가 어느 것이 허상인 지 어느 것이 실체인 지 사유의 벽을 넘나들다가 겹겹이 내 마음의 벽도 허물어진다 허물어져 뚫린 구멍 사이로 하늘이 들어찬다 2021. 11. 1.
시월의 기와 단장 그 옛날에는 지게로 등짐을 지고 올랐다 한다 나무 사다리를 장대처럼 높다랗게 하늘가로 세워서 붉은 흙을 체에 쳐서 곱게 갠 찱흙 반죽 기왓장 사이 사이 떨어지지 말으라며 단단히 두었던 50년 동안 지붕 위에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다가 도로 땅으로 내려온 흙덩이가 힘이 풀려 바스러진다 이 귀한 흙을 두 손으로 추스려 슬어 모아 로즈마리와 민트를 심기로 한 화단으로 옮겼다 깨어진 기와 조각은 물빠짐이 좋도록 맨 바닥에 깔았다 그림 그리기에 좋겠다는 떡집에서 골라가도록 두었다 기와를 다루는 일은 서둘러서도 아니 되고 중간에 지체 되어서도 아니 되는 느림과 호흡하는 일 일일이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암막새와 수막새 더러는 소나무가 어른 키만큼 자란 기와 지붕도 보았다 기와를 다루는 일은 일 년 중에서도 시월이.. 2021. 10. 26.
목수의 소맷자락 트실트실 튼 소맷자락 엉긴 나무 톱밥이 귀여워서 모른 척하며 슬쩍슬쩍 눈에 담았다 목수의 소맷자락은 찬바람에 코를 훔치지도 못하는 바보 트실트실 반 백 살이 되는 나무 문살 백 분을 떠안기며 돌아서는 저녁답에 톱밥 같은 눈물을 떨군다 아무리 눈가를 닦아내어도 아프지 않은 내 소맷자락이 미안해서 오늘 보았던 그리고 어릴 적 보았던 트실트실 흙과 풀을 매던 굽은 손들이 나무 껍질처럼 아름다워서 경주 남산 노을빛에 기대어 초저녁 설핏 찾아든 곤한 잠결에 마음에 엉긴 톱밥들을 하나 둘 헤아리다가 오늘도 하루가 영원의 강으로 흐른다 2021. 10. 21.
배 하나를 돌려 깎아서 네 식구가 좋게 나누느라 누나 접시에 세 쪽 동생 접시에 다섯 쪽 아빠 접시에 세 쪽 엄마는 입에 한 쪽 저녁 준비를 하느라 잠시 고개를 돌렸다 돌아 보니 아빠 접시에 두 쪽 누나 접시에 두 쪽 이상하다 누가 먹었지 했더니 저는 안 먹었어요 아들이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시치미를 뚝 땐 얼굴빛으로 증거 있어요? CCTV 있어요? 엄마가 가만히 보면서 CCTV는 니 가슴에 있잖아 가슴에 손을 얹으면 CCTV가 켜지니까 지금 바로 작동시켜봐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고 있고 자기가 자기를 알고 있는데 그랬더니 순순히 제가 먹었어요 바른말을 합니다 2021. 10. 14.
하늘은 애쓰지 아니하며 놀이터에서 흙구슬을 빚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흙구슬이 부서져 울상이 되던 날 물기가 너무 없어도 아니되고 너무 많아도 아니되는 흙반죽을 떠올리며 새벽마다 이슬을 빚으시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면 이슬은 터져서 볼 수 없었겠지요 하늘은 애쓰지 아니하며 이 땅을 빚으시는지 물로 이 땅을 쓰다듬으시듯 바람으로 숨을 불어넣으시듯 오늘도 그렇게 새벽 이슬을 빚으시는 손길을 해처럼 떠올리며 저도 따라서 제게 주신 이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애쓰지 아니하기로 한 마음을 먹으며 이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 밤새 어두웠을 제 마음을 향하여 둥글게 2021. 10. 8.
찬물에 담그면 찬물에 담그면 한결 순해집니다. 말린 찻잎이든 줄기 끝에서 막 딴 식물의 열매든 찬물에 담그면 그 색과 맛이 순하게 우러납니다. 그러면서도 식물이 지닌 본래의 성품인 그 향은 더욱 살아나는 자연의 뜻을 헤아려 보는 저녁답입니다. 언젠가부터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하여 애써 물을 끓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찬물에 담근 찻잎은 시간 맞춰 건질 필요 없이 찬물에 담근 후 그저 시간을 잊고서 얼마든지 기다림과 느림의 여유를 누릴 수가 있으니 마음도 따라서 물처럼 유유자적 흐르고 찬물에 담근 녹찻잎을 그대로 대여섯 시간을 둔 후에도 그 맛이 별로 쓰지 않고 향이 좋아 거듭 찾게 되는 맛입니다. 선조 대대로 우리가 살아오고 있는 이 땅의 한국은 산이 많고 물이 좋아 한반도 이 땅에선 예로부터 산골이든 마을이든 물.. 2021. 10. 5.
길을 잃으면 땅에서 길을 잃으면 저 위를 바라본다 동방박사들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이 땅에 내려오신 어린 왕을 찾아가던 사막의 밤길처럼 하늘 장막에 써 놓으신 그 뜻을 읽으려 밤낮 없이 바라본다 그러나 저 하늘이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내 안으로 펼쳐진 이 커다란 하늘이었다 숨줄과 잇닿아 있는 나의 이 마음이다 마음대로 행해도 법에 어긋남이 없다는 그 마음 날 여기까지 이끌어준 모든 새로운 길들을 비춘 마음속 하늘 2021. 10. 3.
문향(聞香) 하얀 박꽃이 더디 피고 하얀 차꽃이 피는 시월을 맞이하며 하얀 구름은 더 희게 푸른 하늘은 더 푸르게 무르익어가는 이 가을 하늘이 먼 듯 가까운 얼굴빛으로 다가오는 날 들음으로써 비로소 열리는 하늘문을 그리며 문향(聞香) 차꽃의 향기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올해도 감사히 모든 꽃들이 제 향기를 내뿜을 수 있음은 꽃들을 둘러싼 없는 듯 있는 하늘이 늘 쉼없는 푸른 숨으로 자신의 향기를 지움으로 가능한 일임을 2021. 10. 1.
푸른 명태찜 한가위 명절 마지막 날 늦잠 자던 고1 딸아이를 살살 깨워서 수운 최제우님의 유허비가 있다 하는 울산 원유곡 여시바윗골로 오르기로 한 날 번개처럼 서로의 점심 때를 맞추어 짬을 내주시고 밥도 사주신다는 고래 박사님과 정김영숙 언니 내외 끓는 뜨거운 돌솥밥과 붉은 명태찜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간직했던 소중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언니와의 첫만남에서 서로가 짠 것도 아닌데 둘 다 윤동주와 김용택 시인의 시집을 똑같이 챙겨온 이야기 그것으로 열여덟 살 차이가 나는 우리는 단번에 첫만남에서부터 바로 자매가 된 이야기 동경대전에 나오는 최수운님의 한시를 풀이해서 해설서를 적으신 고래 박사님의 노트 이야기 청수 한 그릇 가운데 떠놓고 모두가 둘러앉아 예배를 드린다는 천도교의 예배와 우주의 맑은 기운을 담은 차 한.. 2021. 9. 28.